2018/03 서아프리카, 감비아, 반줄(Banjul)
기니 북쪽 고원 지대에서 발원하는 감비아강은 세네갈 남동부를 지나, 감비아를 동에서 서로 관통하여 대서양으로 흘러들어 간다. 감비아(The Gambia)라는 나라 이름도 이 강 이름에서 따왔다. 부를 때는 다들 그냥 편하게 감비아(Gambia)라고 부르지만, 공식적으로는 이름에 ‘The'를 반드시 포함시켜 써야 하는데 그 이유가 재밌다.
감비아강은 원래 만딩카어로 '캄브라(Kambra)’혹은 ‘캄바아(Kambaa)'라고 불렸었다. 15세기 중엽에 감비아에 도착한 포르투갈 사람들이 강의 이름을 포르투갈어로 표기하는 과정에서 정관사 ’A‘가 붙어 ’A Gâmbia‘가 되었고, 이후 감비아강과 그 주변지역을 함께 일컫는 지명으로 굳어졌다. 나중에 서아프리카에 온 영국인들이 이것을 그대로 영어로 번역해 쓴 것이 ’The Gambia'다.
감비아가 영국의 오랜 식민지배로부터 독립을 준비하던 1964년, 당시 총리가 감비아보다 네 달 먼저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북로디지아(Northern Rhodesia)의 새 이름 잠비아 공화국(Republic of Zambia)과의 혼란을 줄이고자 ‘The'가 붙은 기존 지명을 공식 국명에 그대로 쓰기로 결정했다. 이것이 감비아의 공식 국명 ’감비아 공화국(Republic of The Gambia)‘에 'The’가 들어가게 된 사연이다.
감비아강이 대서양으로 흘러들어 가는 하구 남안 끝자락, 지도에서 보면 삐죽 튀어나와 보이는 곳이 감비아의 수도 반줄(Banjul)이다. 지도를 얼핏 보면 육지로 보이지만, 늪지와 강으로 둘러싸인 작은 섬으로 이곳의 강폭은 약 4 킬로미터 정도인데 평균 강폭이 10 킬로미터 가까이 되는 감비아 하구에서 가장 좁은 곳이다. 19세기 초, 영국의 군대가 이런 지리적 특성을 활용하여 감비아강의 통행을 관리하기 위한 군사기지를 세우고 영국 전쟁-식민지 장관의 이름을 따 배서스트(Bathurst)라고 불렀다. 배서스트는 감비아 독립 이전까지 영국 제국주의의 식민 지배와 대서양 노예무역의 근거지로 활용되었고 1965년 감비아의 독립과 함께 반줄로 이름이 바뀌었다.
애초에 군사기지 겸 해상교역을 위해 고립된 섬에 세워진 도시라 수도라기에는 굉장히 작은 편인데, 그 면적이 여의도보다 조금 더 넓은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세레쿤다와 반줄 사이에는 늪지대가 넓게 펼쳐져 있어 그 경계가 명확하지만 거리가 가까워 오가는데 차로 30분 정도 밖에 걸리지 않는다. 그래서 두 지역을 크게 묶어 수도권으로 부른다.
아침에 일어나서 별생각 없이 그냥 반줄에 다녀오기로 했다. 겔리겔리를 타러 반줄로 들어가는 유일한 대로인 세레쿤다-반줄 고속도로로 나갔더니 아침부터 사람들이 많았다. 대부분 반줄로 통근, 통학하는 사람들이었다. 길가에 길게 늘어선 겔리겔리와 노란색 택시 옆에서 차장과 기사들이 경쟁적으로 호객을 해가며 차에 손님을 채우고 있었다. 뚜렷한 목적도 없이 무작정 차에 올랐다. 10여분쯤 달렸을까, 옆자리에 앉은 건장한 남자가 내게 말을 붙여왔다.
"안녕? 넌 어느 나라 사람이야? 반줄엔 무슨 일이야?"
"나는 한국에서 왔어. 여행 중이야. 너는?"
"그렇구나. 나는 반줄 출신인데 파병을 나갔다가 몇 년 만에 집에 돌아가는 중이야."
"파병? 어디에 있었는데?"
"응 평화유지군으로 남수단에 있었어."
"뭐? 남수단?! 장난 아니네."
"응. 굉장히 터프한 시간이었지."
잠시 그의 파병 얘기를 듣느라 창밖의 바다를 보는 것도 잊어버렸다. 금방 차가 반줄 시내로 들어서더니 겔리겔리와 택시들이 모이는 널찍한 정류장에 도착했다. 포장이 되어 있지 않아 차가 다닐 때마다 바퀴 뒤로 붉은 흙먼지가 풀풀 날렸다. 파병군인이 먼저 인사를 했다.
"만나서 반가웠어. 내 집은 이쪽 방향이야. 넌 어디로 가? 길 알아?"
"난 일단 알버트 시장에 가 볼 생각인데 저쪽 길로 가는 거 맞아?"
사실 아침에 지도로 시장의 위치를 미리 확인해두기도 했고, 낯선 곳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일은 좀처럼 없지만, 가끔 거리낌 없이 도움을 주려 하는 사람을 만나면 부러 모르는 척 길을 묻곤 한다. 내 버릇이다.
"시장은 저쪽 큰길로 나가서 오른쪽으로 가다가 첫 번째 모퉁이에서 왼쪽으로 꺾어서 가면 금방이야."
"Abaraka!(고마워!)" 톰봉 아저씨에게 배운 만딩카어를 타이밍 좋게 처음으로 써먹어봤다.
로얄 알버트 시장은 반줄항 옆에 붙어있는 시장이다. 비록 그 규모는 세레쿤다 중앙 시장에 비할 바가 못 되지만, 오래된 시장이라 가만히 거리를 들여다보면 사소하지만 옛 흔적들이 슬그머니 눈에 들어오는 맛이 있었다. 시장 바깥에서부터, 길가에 말린 생선이며 과일, 슬리퍼, 대야, 살충제, 채소 씨앗까지 온갖 잡다한 것들을 다 파는 노점상들이 줄줄이 늘어서있었다.
딱히 뭘 사러 가지 않더라도 시장을 어슬렁거리는 일은 언제나 좋다. 기괴한 모습의 생선부터 맛이 도저히 상상되지 않는 과일, 도대체 어디에 쓰는 것인지, 이걸 뭐 하러 만들었는지 알 수 없는 수수께끼 같은 물건들까지 난생처음 보는 것들을 구경하는 것도 물론 재밌지만 무엇보다 시장 그 자체가 자아내는 정취랄까? 또는 생활감이라고 부를 수 있을 법한 그런 것을 슬쩍 느껴볼 수 있는 것이 제일 좋다. 그래서 나는 어느 나라, 어느 동네를 가더라도 시장은 꼭 들러 보는 편이다.
시장의 모습과 분위기는 저마다 완전 딴판이지만, 각자의 생활이 모여 온갖 일상들이 맞부딪히고 뒤섞이는 곳이라는 점은 똑같다. 그래서 어느 시장에 가더라도 그곳만의 정서와 특유의 생활감이 느껴짐과 동시에, 한편으로는 모두 어딘가 조금씩 닮아있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시장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며 걷다 보니 좁은 골목 양쪽으로 젊은 남자들이 재봉틀에 알록달록한 옷감들을 밀어 넣으며 분주히 바느질을 하고 있는 곳이 나왔다. 여기저기 잘려나간 천조각에서 먼지가 날렸다. 서아프리카에서는 직접 천을 사서 옷을 지어 입는 일이 흔한 모양인지 어느 시장에 가더라도 이렇게 재봉사들이 모여서 일하는 구역을 쉽게 찾을 수 있다. 대부분 젊은 남자들이 재봉틀을 다루는데 작업 속도가 굉장히 빨랐다. 능숙한 손놀림에 정신이 팔려 보고 있으면 금방 뚝딱하고 옷의 한 부분이 완성되어 있었다.
바닷가를 앞에 둔 한 골목에서 허름한 구멍가게를 발견했다. 가게 앞에 마주 보고 놓인 벤치에는 아저씨들이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간단히 먹을 것도 만들어 파는 모양이어서 가게 주인에게 으깬 감자와 마요네즈가 들어간 타파라파 샌드위치를 사서 사람들 틈에 끼어 앉았다. 아무렇지 않게 자기들 옆에 앉아 우적우적 빵을 먹고 있는 낯선 동양인이 신기했는지 아저씨들이 장난스럽게 말을 붙여왔다. 농담을 섞어가며 너스레를 떨어 받아쳤더니 다들 웃음을 터뜨렸다. 아저씨들과 수다를 떨어가며 샌드위치를 다 먹고 났더니, 맞은편에 앉아있던 아저씨가 화로 위에 놓인 찻주전자를 들어 작은 유리잔에 차를 따른 다음, 잔에 담긴 차를 다시 다른 빈 유리잔으로 번갈아 붓기를 여러 번 반복해, 아타야 차(Ataya Tea)를 만들어 내게도 한 잔 주었다.
찻잔을 건네받다가 문득 서울 종로에 있는 카페 '반쥴'(〈응답하라 1988〉에서 정봉이와 미옥이 만난, 그 ‘반쥴’ 맞다.)이 생각나서 서울 중심가에 이름이 ‘반쥴’인 40년도 더 된 유명한 카페가 있다고 했더니 다들 궁금해해서 핸드폰을 꺼내 인터넷으로 사진을 검색해서 보여주었다. 사진 중에 카페 내부에 진열된 여러 종류의 아프리카 조각상들을 찍은 것도 있었는데 한 아저씨가 그중 몇 개를 두고 ‘저건 감비아에서 만든 게 틀림없다’며 반가워했다. 사람들이 어쩌다 서울 한복판에 감비아의 수도 이름을 딴 카페가 생겼는지 물었다. “저도 몇 번 가보기만 했지 자세히는 모르는데 아마 주인이 감비아 여행에서 좋은 인상을 받았거나 그냥 감비아를 좋아하는 게 아닐까요?”라고 했더니 한 사람이 "여기 이 가게도 이름을 '서울'로 바꾸면 되겠네."라고 툭 내뱉었다. 그러자 가판대 너머에서 내내 우리 얘기를 흥미롭게 듣고 있던 가게 주인이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하하! 딱히 이름도 없던 가겐데 그것도 나쁘지 않겠어."
가게에 손님이 새로 올 때마다 이곳의 단골?(혹은 죽돌이)인 듯한 아저씨들이 손님에게 멀리 한국에서 재미난 녀석이 찾아왔다고 말하며 나를 가리키고는 내가 직접 나설 것도 없이 주절주절 내 얘기며 카페 ‘반쥴’ 얘기를 손님에게 신이 난 목소리로 늘어놓았다. 그렇게 차를 몇 잔 더 얻어 마셔가며 아저씨들과 노닥거리다가 햇볕이 한 풀 꺾이기 시작할 무렵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모래사장이 펼쳐진 반줄의 바닷가 풍경은 조금 어정쩡했다. ‘우와!'하고 감탄이 나올 만큼 경관이 빼어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뭐야 시시하네.' 하고 바로 발을 돌리기도 뭐한 그런 느낌이랄까. 대서양을 향해 뻗은 해변을 따라 모래사장 위를 한참 걸었다. 그러다 반줄의 바깥 경계에 다다랐는지 건물 하나 보이지 않고 모래사장 옆으로 나무들과 덤불만 무성했다. 조금 더 멀리까지 가보려고 했는데 해변에 있던 한 식당에서 점원이 달려 나오더니 더 가면 질 나쁜 녀석들이 있으니 외국인 혼자 다니다가는 강도를 당하기 십상이라며 돌아가는 것이 좋겠다고 해서 다시 알버트 시장 쪽으로 돌아왔다.
지금은 물이 좀 빠지는 때인지 시장 안을 거치지 않고 그대로 바닷가를 따라 걸어서 항구 쪽으로 갈 수 있었다. 시장 건물들 뒤편과 맞닿은 바닷가에는 작은 배를 대기 위해 타이어들이 쌓여있었다. 만조에는 여기까지 물이 차오르는 모양이다. 멀리 난생처음 보는 형태의 커다란 배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생뚱맞게 저렇게 큰 배가 왜 여기 있지?' 하고 보니 측면에 그려진 붉은색 터키 국기가 눈에 들어왔다. 톰봉 아저씨가 말씀하셨던 발전선이었다. 아직 공사가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닌 듯, 발전선 앞 바닷가에 세워진 커다란 송전탑 위에서 사람들이 작업을 하고 있었다. 잠깐 '저 발전선을 대가로 터키는 감비아에서 무슨 이득을 보고 있을까?' 하는 불순한 생각.
반줄항에 가까워지니 보트들이 강을 오가며 분주히 사람과 짐을 나르는 모습이 보였다. 반줄에서 강 건너편 바라(Barra)를 오가는 카 페리가 있기는 하지만 고작 두 대 뿐이라 수송량을 감당할 수 없는 모양이다. 감비아강은 강폭도 넓고 수심이 깊어 다리를 건설하기가 쉽지 않아, 상류를 제외하고는 아직 차가 다닐 수 있는 제대로 된 다리가 없다. 그래서 감비아 북부와 남부를 오가는 사람들과 차량, 화물의 대부분이 열악한 수상 수송에 의존하고 있다.
나무로 만든 보트들이 부두도 없는 모래사장에 최대한 가까이 와서 멈춰 서면, 건장한 청년들이 달려 나와 물에 들어가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들의 옷이 물에 젖지 않게 어깨 위로 목말을 태워 모래사장까지 옮겨주고, 짐도 머리 위로 번쩍 들어 올려 날라주고는 몇 푼 안 되는 돈을 흥정해서 받고 있었다.
(2019년 1월 22일, 세레쿤다에서 약 170 킬로미터 떨어진 감비아강 중류에 ‘세네감비아 다리’가 개통되었다. 이 다리를 통해 감비아의 북부와 남부는 물론, 더 넓게는 세네갈 북부와 남부를 차로 손쉽게 오갈 수 있게 되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qx5IXhVoLuA)
모래사장 한 편에 즐비한 야자수 그늘 아래로 고깃배들이 모여 있었다. 세네갈처럼 이곳의 배도 나무로 만든 배에 화려하게 색을 칠했다. 칠이 벗겨지거나 색이 바랜 부분이 많긴 하지만 자세히 보면 어지간히 공들여서 그려 넣은 게 아니다. 하얀 바탕 위로 빨강, 파랑, 노랑, 초록 원색들의 단조로운 조합이라 다 거기서 거기인 것 같지만 제각기 다 다른 문양과 상징들이 그려져 있다. 배를 하나씩 하나씩 들여다보며 지나가는데 쉬고 있던 어린 어부들이 나를 불러 세운다. 영어로 대답했는데 알아듣지 못하는 기색이어서 물어보니 자기들은 세네갈 사람이란다. 내가 되지도 않는 프랑스어로 간신히 '나 여행', '한국, 북한 말고 남한', '세네갈 다카르, 까사망스 좋았어.' 정도의 말을 전하는 모습이 재밌었는지 자기들끼리 깔깔 웃었다. 한 녀석이 내 휴대폰을 보고 사진을 찍어달라며 멋대로 포즈를 잡았다. 걔 중 한 명은 부끄러운지 손을 저으며 후다닥 그물 뒤로 숨어 고개만 내밀었고, 그 와중에 이를 구경하고 있던 다른 한 명이 자기도 찍어달라며 잽싸게 달려들었다. 찍은 사진을 보여주자 사진에 찍히지 않은 사람들까지 몰려들어 구경을 했다. 다들 만족스러운지 자기들끼리 사진을 가리키며 뭐라 뭐라 떠들며 왁자지껄 웃고 떠들었다.
시장으로 돌아와 한 공구점 앞에서 사진을 찍고 있는데 가게 안에서 한 꼬마가 고개를 쏙 내밀고는 쭈뼛쭈뼛 말을 건넸다.
"당신은 어느 나라 사람이에요?"
"나는 한국에서 왔어."
"아 그래요. 알겠어요. 고마워요."
하고는 다시 쏙 들어가 버렸다. 속으로 '뭐야 싱겁기는'하고 등을 돌려 다시 사진을 찍고 있는데 공구점 주인이 뒤에서 인사를 했다.
"안녕? 얘는 내 아들인데 외국인한테 말을 거는 건 처음이라 부끄러웠나 봐. 우리 지금 점심 먹으려던 참인데 이 녀석이 너한테 점심 같이 먹자고 묻고 싶어 했거든. 점심 먹었어? 같이 먹을래?"
"미안한데 조금 전에 샌드위치를 먹어서요. 맛있게 드세요."
무미건조하기 짝이 없는 영어로 말을 뱉고 나서야, 가게 주인 뒤에서 빼꼼히 얼굴을 내밀어 나를 보고 있던 아이의 실망한 얼굴이 보였다. 돌아서서 '낯선 사람한테는 일단 밥을 먹이는 게 이곳의 일상적인 환대인가?'하고 의아함과 낯섦을 느끼면서도 어쩐지 그 정서가 예쁘다고 생각했다.
그날 내내 그 아이의 시무룩한 표정이 불쑥불쑥 떠올라서 마음에 걸렸다. 그냥 한 숟갈이라도 같이 먹고, 이야기나 좀 나눌 걸 그랬다. ‘아님 차라리 영어라도 능숙해서, 좀 더 상냥하게 거절할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하고 공연히 스스로를 자책했다.
반줄 시내를 이리저리 싸돌아다니다 세레쿤다로 돌아가기 전에 '아치 22'에 가보기로 했다. '아치 22'는 반줄 시내로 들어오는 입구에 세워진 건축물인데 야햐 자메가 1994년 7월 22일에 감행한 쿠데타를 기념하기 위해 1996년에 세워졌다. 20년 넘게 지속된 감비아 독재의 상징과도 같은 건물이다. 길었던 독재의 마침표를 찍은 지금은 어떻게 쓰이고 있을지 궁금했다. 가는 길에 우연히 누군가가 'Yaya Jammeh Must Go' '#GAMBIA HAS DECIDED'라고 스프레이 페인트로 휘갈겨 벽에 쓴 문구를 보았다. #GAMBIA HAS DECIDED는 야햐 자메의 대선불복에 저항하는 온라인 시위 단체 이름이자 독재에 대항하는 사람들의 구호로 쓰였었다.
직접 마주한 '아치 22'는 높이가 겨우 40미터나 될까 말까 했다. 고층 빌딩들이 즐비한 서울의 풍경이 익숙한 나에게는 처음에는 그 크기가 코웃음이 나올 정도로 가소롭게 보였지만 일단 꼭대기에 올라 반줄 시내를 내려다보니 어느 방향에서도 이것보다 높은 건물이 단 하나도 보이질 않았다. '과연 그렇군.'
사진을 몇 장 찍고 전시를 둘러보았다. 내부의 전시는 독립 이전의 식민지 시절과 노예무역에 대해서만 간단히 전시되어 있고 나머지는 대대적으로 리뉴얼 중인 모양인지 안내문이 붙어있었다. 대신 대선 이후의 야햐 자메 퇴진운동과 극적인 정권교체의 과정이 담긴 사진들이 벽에 걸려 있었다. 그런데 사진 속, 새 대통령의 취임을 반색하며 기뻐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내 눈에는 어딘지 모르게 희망이 조금 과해 보이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니다. 저 사람들이 그 오랜 절실함으로 일궈낸 저 순간을, 그때 터져 나온 환희를 내가 어떻게 감히 말할 수 있을까. 독재를 겪어본 적도 없는 내가 고작 사진 몇 장으로 섣부르게 판단할 일이 아니다. 정부와 권력을 가진 자들의 억압과 폭력, 부패가 만연한 서아프리카에서 감비아의 정권교체는 어쨌든 그것이 일어났다는 사실만으로 이미 충분히 값지고 유의미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만간 톰봉 아저씨와 더 이야기를 나눠봐야겠다.
세레쿤다로 돌아오니 이미 어둑어둑했다. 허기가 져서 '숙소 주변에는 식당도 없는데 반줄에서 저녁도 적당히 먹고 올 걸 그랬나?'라고 생각하며 숙소가 있는 골목으로 들어서는데 모퉁이에 있는 구멍가게 앞 화로에 놓인 커다란 솥단지가 보였다. 슬쩍 보니 솥 안에는 스파게티 면이 잔뜩 삶아지고 있었다. 주인으로 보이는 아저씨에게 물었다.
"이거 스파게티 요리해서 파시는 거죠?"
"응. 그런데 8시쯤 오면 안 될까? 불이 약해서 면이 다 익으려면 시간이 걸리거든."
시계를 보니 7시 40분. 아직 20분 남았다. '그래도 갓 삶은 스파게티라면 기다릴 가치가 있겠지' 하는 생각으로 호텔에 갔다가 다시 오기로 했다. 보통 싸구려 식당이나 구멍가게에선 아침에 스파게티 면을 잔뜩 삶아두고 내내 퉁퉁 불어 터진 걸 파는데 시간까지 정해두고 면을 삶는다니 호기심이 동했다.
8시에 가게를 다시 찾았다. 주인아저씨가 스파게티 면을 솥에서 건져 플라스틱 소쿠리에 옮겨 담고 있었다. 스파게티 한 접시를 주문하고 어둡고 퀴퀴한 가게 구석에 놓인 테이블 앞에 앉았다. 가스불 위에 팬을 올리고 파스타를 만드는 아저씨와 얘기를 나누는데 이곳 사람들과 영어 억양이 달라서 물어보니 아저씨는 기니에서 왔다고 했다. 감비아에 온지는 이제 5년 정도 되었단다.
"기니면 코나크리(Conakry)에서 오셨어요?"
"어릴 때 가족들이 코나크리로 옮겨가서 거기 오래 살았지만 태어난 곳은 거기서 먼 시골이야."
"기니도 프랑스어가 공용어죠? 다른 언어는 또 뭐를 쓰나요?"
"기니에선 풀라어를 많이 쓰지. 나도 풀라니족 사람이야."
나는 감비아에서 말리로 간 다음 말리에서 어느 나라로 국경을 넘어야할지 고민이 많았는데 이렇게 뜻밖의 장소에서 기니 사람을 앞질러 만나 버리자 조금 들떠서 아저씨에게 기니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우바카 아저씨는 내 질문에 조곤조곤 답을 해주며 부지런히 손을 움직이더니 이내 파스타 접시를 가져다주었다. 아까 삶아둔 스파게티 면에 통조림 토마토소스와 통조림 고기 그리고 양파를 몇 조각을 썰어 넣고 볶은 다음에 계란을 하나 부쳐서 위에 얹었다. 소박한 재료와 단순한 조리법이지만 충분히 맛있었다. 당분간 끼니는 여기서 해결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저씨와 이야기를 나누며 파스타를 먹는 동안 몇몇 아이들이 심부름을 오거나 군것질 거리를 사러 가게에 드나들었다. 아이들은 친숙하게 가게에 뛰어 들어와 돈을 팔랑거리며 필요한 물건을 외치다가 구석에 앉아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흠칫 놀라 입을 다물었다. 만족스럽게 배를 채운 나는 평소에 잘 마시지도 않는 콜라까지 한 병 사 마시며 아저씨에게 물었다.
"진짜 맛있었어요! 아침에는 가게 언제 열어요? 타파라파 샌드위치도 파시죠?"
"시간을 정해두고 여는 건 아니지만 아침 일찍 일어나자마자 열어. 샌드위치도 팔고."
"알겠어요! 내일 아침에 올게요."
나는 다음 날 아침은 물론이고 세레쿤다를 떠날 때까지 끼니의 대부분을 우바카 아저씨의 가게에서 해결했다. 언젠가부터 여행에 조금 느슨하고 심심한 일상을 만들어 넣을 수 있는 공간과 장소를 찾아 그곳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은 나에게 굉장히 중요한 일이 되었다. 어딘가로 여행을 가면 모름지기 어디랑 어디는 꼭 가 봐야 하고, 어느 식당의 무슨 요리, 그 옆에 어느 카페의 무슨 디저트는 꼭 먹어봐야 한다는 이야기, 그렇게 순회하듯 일회적인 경험들만으로 얄팍한 하루하루를 채워 가는 건 이제 지긋지긋하고 피곤하다.
아침에 아저씨한테서 으깬 감자나 오믈렛이 들어간 샌드위치를 받아 들고 길을 나섰다가, 해가 저물 즈음이 되면 녹초가 된 꼴로 나타나 매일 먹는 똑같은 파스타가 담긴 접시를 앞에 두고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오늘은 어제보다 고기가 한 조각 덜 들어간 것 같다는 시답잖은 농담을 하며 저녁을 먹는 날들이 며칠간 반복되었다. 이 골목 주변에 사는 아이들은 가게 안이나 길에서 나와 마주쳐도 더 이상 놀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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