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4 서아프리카, 감비아, 산양(Sanyang)
반줄에 다녀온 이후 며칠 동안은 세레쿤다 주변 바닷가 마을들을 쏘다니며 시간을 보냈다. 세레쿤다 시내를 어기적어기적 건성으로 돌아다니다 바카우(Bakau), 파자라(Fajara), 비질로(Bijilo)까지 가는 겔리겔리가 나타나 호객을 하면 냉큼 잡아타고 바다로 향했다.
북적대는 세레쿤다를 벗어나 고작 이삼십 분 정도만 찻길을 달리면 한적한 바닷가 동네가 나타났다. 차가 마을 어귀 즈음에 다다라서 사람들이 많이 내린다 싶으면 나도 눈치껏 따라 내렸다. 그러고는 두리번두리번 동네를 한 바퀴 휘이 둘러보고는 해변으로 가는 길을 찾았다.
마을에서 바닷가 쪽으로 걷다 보면 거리에 점점 사람이 줄어들면서 그 모습도 바뀌어갔다. 난데없이 커다란 간판과 널찍한 주차공간을 자랑하는 근사한 식당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하더니 높은 담장으로 둘러싸인 호텔들이 나타났다. 분명히 차에서 내렸을 땐 수수한 어촌마을이었는데 이제는 대서양 휴양지 한복판에 있었다. 더 이상 사람들이 사는 곳이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이곳으로는 겔리겔리도 들어오지 않았다. 오토바이 택시기사들 한 무리가 노점상 앞에서 수다를 떨며 익살맞은 목소리로 지나가는 외국인들을 부르며 호객하고 있었다.
제대로 가고 있는 게 맞는지 의심에 찬 걸음을 옮겨 건물 사이로 난 좁은 골목과 울창한 덤불숲 오솔길을 뚫고 나가면 거짓말처럼 대서양이 나타났다. 무심하게 넘실대는 바다를 배경으로 길게 뻗은 모래사장 옆에는 고급 리조트들이 줄줄이 들어서 있었다. 리조트의 사유지가 되어버린 해변에는 먼 나라에서 온 휴양객들이 파라솔 아래 선베드에 누워 맥주를 마셔가며 책을 읽거나 낮잠을 자며 여유롭게 휴가를 보내고 있었다. 나는 해변 양끝을 바닷바람에 떠다니듯 이리저리 걸어 다녔다. 역시 생활감이 없는 휴양지의 풍경은 그것이 얼마나 아름답건 간에 내게는 별로 소용이 없다. 나는 그저 겉돌기만 할 뿐이었다. 헛헛하고 시큰둥한 기분. 이따금 경비원들이 내가 리조트의 투숙객인지 확인하기 위해 내 기준으로는 지나치게 친절한 표정과 말투로 인사를 하며 말을 붙여왔다.
동네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변을 차지한 비싼 식당과 고급 리조트들, 비행기를 타고 날아와 쨍한 단맛의 휴가를 보내고 다시 비행기를 타고 돌아가는 사람들의 세계... 그 영역...
나는 선명하다 못해 시리고 따끔한 이런 대비가 매번 어렵다.
사실 어디서나 볼 수 있었다. 프라하에서도, 이스탄불에서도, 스톡홀름에서도, 파리에서도, 서울에서도... 그러나 그곳의 경계면은 모호하고 구멍이 숭숭 뚫려있었다. 그것이 비록 치사한 위장과 연막이고 같잖은 잔재주를 부린 것일지라도. 그러나 이곳에서 체감하는 것은 단순한 대비가 아닌 뻔뻔함조차 남아 있지 않은 엄격한 구획과 확고한 단절이었다.
누군가 내게 아프리카 여행은 이런 압도적인 격차와 대비 그리고 단절과 매일 마주하게 되는 일이라는 것을 미리 알려주었더라면 그렇게 생각 없이 ‘일단 가보자!’라고 가볍게 결정하지는 않았으리라고 생각한다.
며칠간의 해변 나들이에서 적잖이 낙심한 나는 톰봉 아저씨가 알려주셨던 산양(Sanyang)에 가보기로 했다. '감비아에서 바다는 이것으로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겔리겔리를 타고 산양으로 갔다. 산양 마을 한복판에 내려 지도를 확인하니 바닷가까지는 3 킬로미터 정도 되는 듯했다. 딱히 교통수단이랄 게 없는 모양이라 가게에서 물을 한 병 사들고 한적한 시골길을 걷기 시작했다. 30도가 조금 넘는,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의 정오였다. 그늘도 없는 흙길을 따라 한참 걷다 보니 땀이 줄줄 흘렀다. 길에서 사람들의 눈치를 보이 하니 나를 신기하게 여기는 것 같다. 확실히 이쪽은 외국인이 찾아오는 일이 드문 모양이다.
멀리서 트럭 하나가 흙먼지를 풀풀 날리며 달려와 나를 지나쳐 갔다. 울퉁불퉁한 길 탓에 차가 덜컹거릴 때마다 옆으로 물이 줄줄 흐르는 걸 보니 생선 트럭인 것 같았다. 수산물 집하장이 있는 모양이다. 여태 다녔던 바닷가와는 조금 다른 풍경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해변까지 불과 백여 미터도 남지 않았을 즈음 옆에 차가 한 대 서더니 나한테 태워주겠다고 했다. 어이가 없었다.
"뭐야? 저 모래언덕만 넘으면 바로 바다 아니야? 걸어가는 거랑 아무 차이 없잖아?"
내 말을 듣고 뒷좌석에 앉아있던 여자 중 한 명이 차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미소를 보이며 내게 말했다.
"그건 그런데 우리 조카가 너랑 얘기해보고 싶다고 해서 말이야."
차 안을 살펴보니 조수석에 앉아 있던 열서너 살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가 나를 살피다가 눈이 마주치자 창피한 듯 고개를 돌렸다.
"니들이 태워준다고 한 거니까 나중에 돈 달라고 하기 없기다!" 농담처럼 능청스럽게 말했지만 속으로는 경계심을 풀지 않고 차 뒷좌석에 올라탔다.
차에 올라탄 지 30초도 안 걸려서 해변에 도착했다. 이 사람들도 차를 얻어 타고 왔는지 운전기사는 우리를 내려주고는 바로 차를 돌려 마을로 돌아갔다. 나랑 비슷한 나이대로 보이는 자매와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보이는 아기 그리고 아까부터 쭈뼛쭈뼛 내 눈치를 살피는 여자아이와 함께 바닷가로 나갔다. 해변에 작은 노상 카페가 있어서 맥주를 마시려다가 관두고 콜라를 하나 사 마셨다. 자매 중 한 명이 카페 주인과 잠시 얘기를 나누더니 나무 파라솔에 가서 자리를 잡고는 나를 불렀다. 월요일이라 손님이 없어서 공짜로 파라솔을 쓸 수 있게 된 모양이었다. 자매는 자기들끼리 한참 수다를 떨더니 점심을 사 와야겠다며 자리를 떴다. 혼자 남아 아기를 돌보고 있는 아이에게 먼저 말을 붙였다.
"근데 너는 이름이 뭐야?"
수줍음이 많아 보이는 여자아이는 자기 이름이 음바시라고 했다. 같이 온 자매는 고모들이고 아기는 사촌동생이란다.
"월요일에 고모들이랑 바닷가에 놀러 오는 게 흔한 일은 아닐 거 같은데?"
"나는 엄마랑 세네갈에 살아요. 아빠가 감비아 사람이라 아빠랑 친척들을 만나러 감비아에 와있는 거예요."
음바시는 가족들에 대해서 무언가 더 말을 하려는 듯 조금 서툰 영어로 더듬더듬 말을 고르다가 이내 관두고 사촌동생을 안은 채 고개를 돌려 말없이 바다를 바라보았다. 사연이 있는 것 같아 나도 더 물어보지 않았다. 아기가 버둥거려 마침내 누나의 품을 빠져나와 위태위태하게 균형을 잡고 일어서서 햇볕에 반짝이는 파도를 향해 뒤뚱뒤뚱 걸음을 옮겼다. 흔들흔들 아슬아슬 걷다가 자빠지고 다시 일어서기를 반복하며 까르르 웃는 아기의 웃음소리와 파도소리가 고맙게도 나와 음바시 사이의 어색한 침묵을 메워주었다.
지도에서 세네갈과 감비아의 국경을 찾아보면 마치 팩맨처럼 보이는 세네갈이 감비아를 집어삼키고 있는 것 같은 모습이다. 감비아 강을 따라 구불구불 이어지는 이 이상한 국경은 다른 많은 아프리카 나라들의 국경들과 마찬가지로 과거 유럽 제국들의 탐욕스런 식민지 경쟁이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서아프리카에서 18세기 내내 이어진 프랑스와 영국의 식민지 경쟁이 끝나고 프랑스에 밀린 영국이 간신히 감비아 강 유역의 작은 지역을 차지하면서 지금의 국경이 만들어졌다. 세네갈과 감비아는 그 이후로 백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전혀 다른 언어와 문화의 영향권 아래에 놓인 채 각기 다른 길을 걷게 된다.
원래 민족적, 역사적 배경이 크게 다르지 않았던 두 나라는 세네갈군이 감비아에서 발생한 쿠데타를 진압한 것을 계기로 1982년에 '세네감비아 연합'을 출범시키지만 프랑스어와 영어로 나뉜 공용어 문제와 각각 프랑스와 영국이 뒤를 봐주고 있는 두 나라의 기득권층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7년 만에 해체되었다. 그 뒤로 지금까지 두 나라는 다행히도 별다른 마찰 없이 그럭저럭 지내고 있지만 여전히 두 나라 사람들 사이에는 은근한 거리감이 느껴진다. 어쩌면 음바시와 그녀의 가족들도 이 오래된 이야기의 어느 한 부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음바시가 아기의 양팔을 조심스레 잡고 걸음마를 돕고 있는 걸 보고 있었다.
음바시의 고모들이 양념된 생선과 카사바, 쌀밥이 담긴 커다란 양은 대접을 가져와서 같이 먹자고 해서 같이 점심을 먹었다. 점심을 먹고 고모들은 파라솔 아래서 아기와 함께 쉬고 나는 음바시와 둘이 해변을 걸었다.
눈앞에 어부들이 배를 모래사장으로 밀어 올리고, 사람들이 바다에 떠있는 배까지 파도를 헤치고 걸어가 머리에 이고 있는 대야에 생선을 가득 담아 나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세네갈 카폰틴에서 본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풍경이지만 이쪽이 내 기억에 남아 있는 사진 속의 모습과 훨씬 비슷했다. 어릴 때 내가 책에서 보았던 감비아 사진이 딱 이런 풍경이었다고 얘기했더니 음바시는 신기하다는 듯 나를 보더니 나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오기 시작했다. 한참 동안 질문을 쏟아내고 내 대답을 열심히 듣기를 반복하던 음바시가 슬그머니 자기 얘기를 꺼냈다.
"나는 나중에 약사가 되고 싶어요."
"공부 잘하나 봐? 그러고 보니 세네갈 학교에서는 프랑스어만 쓰잖아? 그런데 영어도 이렇게 잘하는 걸 보니 정말 그런 모양인데? “
음바시는 수줍은 목소리로 그렇다고 했다. 쑥스럽게 대답하는 모습이 영락없는 열네 살이었다.
"엄마가 일을 열심히 하는데도 항상 돈이 부족하다고 해요. 그래서 나는 열심히 공부해서 약사가 될 거예요."
나는 아이들과 이런 대화를 나눌 때면 딱히 도움이 될 만한 말을 하지 못한다. 모든 일이 무작정 다 잘될 거라는 빈말을 뻔뻔하게 하는 것에는 도무지 요령이 없고, 현실은 절대 녹록지 않으며 앞으로 적지 않은 수의 고난을 겪을 것이고, 일이 어떻게 풀리느냐에 따라 그 고난의 의미와 무게도 달라질 것이라는 말 따위로 겁을 주고 싶지도 않다. 그냥 잠자코 음바시가 하는 말을 들으며 간신히 맞장구를 치는 정도의 대답만 할 수 있었다. 이럴 때면 내가 어느새 '비겁한 어른'이 된 것 같기도, 혹은 '여전히 제대로 아는 게 하나도 없는 철부지'인 것 같다.
우리는 모래사장을 따라 만의 끝까지 한참을 걸어갔다가 다시 카페로 돌아왔다. 나는 혼자 해변 반대쪽으로 가보기로 했다. 이쪽 모래사장이 훨씬 길어 보여서 다녀오는데 한참 걸릴 것 같아 미리 작별인사를 했다. 섭섭해하는 음바시에게 부러 연락처를 물었지만 페이스북도 이메일 주소도 없다며 세네갈 전화번호 하나를 나에게 알려주었다. 나는 수첩을 꺼내 한 페이지를 찢어 내 이메일 주소를 적어 음바시에게 주었다. 이 글을 쓰는 지금까지 음바시에게서 메일이 온 적도 내가 번거롭게 국제전화를 걸어 안부를 물은 일도 없다.
우연한 마주침의 끝자락에 다다라서야 허둥지둥 서로의 연락처를 주고받는 것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내가 당신에게 연락을 하는 일도 당신으로부터 연락이 오는 일도 실은 일어나지 않을 일이란 것을 예감하면서도 그렇게 친절하고 상냥하기 그지없게 서로의 전화번호 하나하나 메일 주소 한 글자 한 글자를 또박또박 적고 소리 내어 읽으며 우리들은 도대체 무엇을 바라는 것일까? 어떤 호기심, 혹은 어떤 사소한 의무감에 혹시나 우리가 연락하는 날이 오더라도, 각자의 삶의 궤도는 사실 겉도는 것조차 불가능할 만큼 이렇게나 멀었다는 거리감을 실감할 뿐일 텐데...
음바시와 나눈 이야기를 곱씹으며 해변을 걷는 것도 잠시, 해변에 테이블을 가져다 놓고 왁자지껄 술을 마시고 있던 대여섯 명의 패거리가 멀찌감치서 목소리를 높여 나를 불렀다. 화려한 선글라스와 목과 손목에 주렁주렁 달린 악세사리, 엉덩이에 간신히 걸쳐 입은 찢어진 스키니진과 프린팅 티셔츠를 차려입은 그들에게서 레게 느낌이 물씬 풍겨왔다.
"헤이 브로! 어디가? 여기서부터는 더 가봤자 뭐 없어. 우리랑 같이 술 한 잔 할래?"
뭐가 있거나 말거나 나는 일단 더 가보고 싶고, 혼자 걷고 싶은 기분이라 적당히 얼버무리고 계속 걸었다. 정말 뭐가 없었다. 모래사장과 바다 그 안쪽으로는 평탄한 땅 위로 우거진 수풀과 늪지의 연속일 뿐이었다. 멍하니 인적 없는 바닷가를 1시간 정도 걸었다.
꼬맹이였던 내가 어느 날 책에서 이곳의 사진을 본 순간부터 지금 이곳에 실제로 도달하는데 걸린 시간과 삶의 구불구불한 이로라는 것을 옅게 생각해본다. 정체불명.
돌아오면서 다시 아까 패거리들과 마주쳤다. 내가 돌아오고 있는 걸 멀리서부터 일찌감치 알아보고 아예 플라스틱 의자를 하나 더 가져다가 자리를 만들어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마치 오래 알고 지낸 친구들을 우연히 동네 편의점에서 만난 것처럼 넉살 좋게, 그러나 속으로는 낯선 녀석들에 대한 경계심을 바짝 곤두세운 채로 자리에 앉았다. 앉자마자 옆자리에 앉아 있던 녀석이 "뭐 마실래?"라고 묻더니 테이블 아래 상자를 뒤적거렸다. 상자 안에 가득 들어있는 Jul Brew 맥주, 보드카와 에너지 드링크가 섞인 18도짜리 Vody 캔, 투명한 플라스틱 플라스크에 담긴 본 적 없는 라벨의 증류주 몇 병과 상자 주변에는 이미 마시고 난 빈 캔들이 나뒹굴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술도 얼큰하게 마셨겠다, 흥이 오른 김에 심심해서 그냥 나를 부른 건가? 술이나 얻어 마시고 얘기나 하다 가면 되겠군.' 하는 생각으로 맥주를 마시겠다고 했다. 그가 맥주를 꺼내다가 인상을 찌푸렸다. 다들 내내 독한 Vody만 마시고 맥주는 손도 안 댔는지 미지근해져 버린 모양이었다. 맥주병을 꺼내서 함께 앉아있던 패거리 중 한 명에게 시원한 걸로 바꿔오라고 했다. 아무래도 이 녀석이 이 패거리에서 리더? 격인 모양이었다.
"젠장! 일부러 상자에 넣어놨는데도 맥주가 다 미지근해져 버렸네. 조금만 기다려 타이거가 금방 시원한 걸로 가져올 거야. 아무튼 난 스티븐이야 스티븐 킹! 그냥 스티브라고 불러."
"그거 엄청 유명한 호러 작가 이름인 거 알아?"
"물론 알지. 이게 내 본명은 아냐. 그냥 내가 그렇게 지었어. 짓고 나서 나중에야 그게 유명한 작가 이름인 줄 알았어."
"그럼 맥주 가지러 간 타이거도 별명?"
"응. 다들 우리끼리만 부르는 별명이 있어."
스티브가 자기 패거리들을 한 명, 한 명 소개하며 본명과 별명을 알려줬지만 소개를 받을 때부터 뒤죽박죽으로 헷갈렸던지라 지금은 기억이 나질 않는다. 타이거가 가져다준 맥주병은 기대 이상으로 차가웠다. 병을 쥔 손이 시려웠다.
아직은 햇볕이 빽빽한 감비아의 오후, 대서양을 눈앞에 둔 바닷가에서 나는 맥주를 얻어 마셔가며 어린 술꾼들의 질문에 피상적인 대답을 익숙하게 늘어놓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바다에서 수영을 하던 나머지 사람들이 돌아와서 사람이 더 늘었다. 녀석들이 이번엔 지나가던 수영복 차림의 백인 아저씨를 한 명 끌고 왔다. 남유럽 특유의 톤이 묻어나는 영어 억양에서 같은 이방인인 나만 느낄 수 있을 정도의 미세하고 날 선 경계심이 느껴졌다. 카탈루냐 사람이라는 그는 겉으로는 밝은 표정으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면서도 패거리의 합석제의만큼은 한사코 거절하고는 이내 돌아갔다. 아저씨가 가버리자 괜히 속으로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내 기색을 읽기라도 했는지 아니면 카탈루냐 아저씨가 그냥 시시하게 돌아가 버려서인지 스티브가 불쑥 말을 꺼냈다.
"참 어려운 일이지. 사람을 믿는다는 거. 특히나 낯선 곳에서는 더더욱... 나는 너처럼 멀리 떠나 본 적이 없어 잘 모르겠지만 말이야. 그렇지 않아? 하지만 무턱대고 믿지 않으면 애초에 여행 같은 건 불가능한 일이겠지?" 스티브는 취기 어린 미소를 지으며 계속 말했다.
"네가 우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네가 이렇게나 먼 감비아까지 와서 우리와 이 아름다운 바닷가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는 건 정말이지 기적 같은 일이라고 생각해. “
첫인상과는 거리가 먼 의외의 진지함과 감상이 뒤섞인 말이었다. 다른 녀석들도 한 마디씩 보태가며 스티브의 말에 동조했다. 격양된 누군가가 술병을 들어 올려 다 같이 건배를 했다.
이런저런 시시콜콜한 얘기들을 이어가며 맥주를 대여섯 병은 더 마신 것 같다. 스티브가 불현듯 생각난 게 있는지 말을 꺼냈다.
"진! 아까 사람을 믿는다는 건 어려운 일이라고 했지만, 우리가 너에게 특별한 하루를 만들어 줄 수 있다면 어때? 믿어보지 않을래?"
"무슨 얘기야?"
"밤에 파자라에서 파티가 있어. 우리랑 같이 가서 놀면 어떨까 해서 어때?"
익숙하지 않은 음악이 요란하게 울려 퍼지는 후덥지근한 곳에서 낯선 사람들과 함께 뒤섞여 밤늦게까지 춤추고 술 마시며 놀자는 별것 아닌 뻔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순간 나와 스티브의 우연한 조우와 그가 말했던 낯선 이를 완전히 믿을 수도 아예 믿지 않을 수도 없는 곤란함에 대한 이야기가 뒤섞여 마치 묵직한 울림처럼 내 마음 이곳저곳에 파문을 일으키며 퍼져나갔다. 여러 생각들이 뒤죽박죽으로 한꺼번에 튀어나왔다. 지금까지 1년 넘게 이곳저곳을 떠돌며 마주쳤던 많은 사람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상대를 너무 믿어버려서 오해를 사거나 곤란한 일을 겪은 적도, 너무 매몰차게 돌아서서 뒤늦게 스스로를 자책했던 일들이 생각났다. 돌이켜보면 사람과의 마주침은 언제나 믿음과 나 자신에 대한 문제였다. 애초에 누군가를 믿는다는 게 가능하기는 한 걸까?
실은 우리가 무엇인가를 신뢰할 수 있는 절대적인 근거라는 것은 그 어디에도 없다. 상대방이 내게 무엇을 말하고 내보이건 간에 그것이 진의라는 보장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냥 적당한 선에서 일단은 믿어보기로, 마치 결과를 알 수 없는 도박에 배팅을 하듯 막연하게 결정을 내리는 것뿐이다. 심리학인지 뇌과학인지를 다룬 어느 책에선가 그랬다. 인간의 뇌는 직관으로 결정하고 나중에서야 그에 맞는 합리적인 설명을 지어내는 식으로 작동한다고. 여하튼 우리는 우연한 마주침에서 그 연약하기 짝이 없는 믿음으로 기적처럼 사랑과 우정을 길어 올리고 각각의 희극과 비극을 빚어내며 살아간다. 스티브의 말은 간결했지만 나는 거기서 어떤 순간적인 번뜩임을 보았다. 그래서인지 이국의 낯선 해변에서 스티브가 조심스레 나를 초대했던 이 장면이 감비아에서 있었던 일중 그 무엇보다 가장 선명하게, 짭조름한 그날의 바다 내음과 함께 기억 속에 남아있다.
"아 그런데 어쩌지? 저녁에는 세레쿤다로 돌아가 봐야 해."
스티브의 와의 대화에서 만남이 어쩌구 믿음이 어쩌구 하며 상념에 잠긴 것과는 아무 상관없이. 내 입에서는 시시하고 쌀쌀맞은 거절의 대답이 나왔다. 딱 보니 밤새 술 마시고 쿵작거리며 놀 기센데 그랬다가는 내일 종일 침대에 쓰러져 있을 것만 같았다. 무엇보다 나는 애초에 그런 파티를 즐기는 타입도 아니고, 시끄러운 음악이 내내 흘러나오는 곳에서 안 그래도 서로 알아듣기 힘든 영어로 의사소통을 해야 하는데 서로의 귀에 소리를 질러가며 대화하는 답답함도 싫다. 생각해보니 오늘 저녁에는 톰봉 아저씨를 다시 한번 찾아가 봐야 할 것도 같고, 내일 일찍 일어나 갑자기 쿤타킨테 섬에 다녀오고 싶어 질지도 모를 일이다. 사실 이 모든 핑계는 내가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서 이 사람들을 의심하며 믿지 못하는 탓에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람의 뇌라는 게, 마음이라는 게 이렇다.
"그럼 이따가 세레쿤다까지 우리가 태워줄게. 어차피 파자라로 가려면 지나가야 하니까. “
스티브는 재차 권유하지도 않고, 실망하거나 아쉬운 기색 하나 없이 말하며 내게 맥주를 한 병 더 꺼내 주었다.
문득 한 녀석의 목에 걸린 두툼한 나무 십자가가 눈에 들어왔다.
"너는 크리스천이야? 감비아 사람들은 대부분 무슬림 아냐?" 내가 묻자 다른 녀석이
"이 녀석 집안이 완전 별종이라 그래!"라고 캘캘거리며 농담을 했다.
목에 걸린 큼직한 십자가와 한쪽만 노랗게 탈색한 짧은 드레드 머리의 조합이 인상적인 녀석은 십자가를 매만지며 자기네 가족은 전부 기독교 신자라고 했다. 감비아 전체 인구의 90% 이상이 무슬림인 걸 감안하면 굉장히 드문 경우다. 타이거가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다른 사람을 내게 가리켜 보이며 말을 보탰다.
"저기 앉아있는 저 녀석도 크리스천이야. 하지만 우린 그런 건 하나도 신경 쓰지 않아."
"한국에서도 그래. 개신교도 있고 불교도 있고 카톨릭도 있고 이것저것 많은데 그냥 다 뒤섞여서 살아."
"그런데 진 너는 종교가 없다고 했잖아? 그럼 너희 가족들은 아무런 믿음이 없는 거야?"
"우리 부모님은 그래. 그런데 친척 중에는 종교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있어. 한국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부모님의 종교를 따라가는 경우가 많지만 이곳처럼 절대적이진 않아. 보통 한국 사람들은 여러 가지 개인적인 이유와 계기로 종교적 믿음을 갖게 되는데, 아무튼 대부분은 스스로 선택하는 과정을 거친다는 공통점이 있는 것 같아. 물론 나와 우리 가족처럼 선택을 하지 않는 것 역시 선택으로 받아들여지고 말이지. 이런 선택을 당연시하는 세속주의 그 자체도 역시 어쩌면 하나의 종교인 게 아닐까?"
조금 더 자세하게 설명을 해보려고 고심하는 사이에 한 녀석이 날카롭게 쏘아붙이듯 물었다.
"종교가 없다니! 그럼 넌 무신론자란 얘기야?"
"아마 굉장히 불쾌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대다수 종교에서 말하는 절대적인 유일신이 존재를 하거나 말거나 딱히 놀랄만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해." 잠시 혼란, 내가 말을 이었다.
"지금 거의 외계인 보듯이 다들 나를 보고 있는데 한국에는 나 같은 '믿음이 없는 자'가 전체 인구의 절반이 넘어. 그러니까 못해도 2천5백만 명 이상. 나 역시 그중 한 명일 뿐 야." 여전히 혼란.
종교를 취향대로 선택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은 이미 종교를 뛰어넘는 어떤 메타적인 관점이 앞서 존재한다는 얘기가 되어버린다. 그 지점에서 이미 기존의 종교가 가지고 있던 절대적 준거가 무너져 내린다. 그것이 지금 이 친구들을 혼란스럽게 만들었을 것이다. 이 친구들의 상상 속에선 믿음이 없는 자들이 다수인 공동체와 사회는 혼돈 그 자체나 다름없을 테니까. ‘그런 곳에서 사회가 어떻게 가능할까?’ 하고 말이다. 그러나 그 메타적인 관점조차도 실은 종교다.
종교 없는 사회란 애초에 불가능하다. 인류사에서 종교가 사라지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그저 어떤 종교를 상상해내고 어떤 사회를 정초할 것이냐 하는 문제만 남는다.
술꾼들의 난상토론은 그 뒤로도 한참 이어졌다.
불쑥 메모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핸드폰을 꺼내 메모장을 켰다. 나는 이런 일에 꼼꼼한 사람이 아니라서 또 구체적인 내용은 홀랑 빼먹고 대충 한 줄을 적어 넣었다.
'감비아, 산양, 바닷가에서 만난 애들한테 술을 얻어 마심. 많이 얻어 마심.'
메모를 쓱 읽어보고 핸드폰을 도로 주머니에 넣으며, 어쩐지 현실감이라곤 하나도 없는 메모 같다는 의아한 느낌이 순간 들었다.
지금 불쑥 떠오르는 생각. 저 때 내가 느꼈던 의아함은 저 짤막한 메모의 내용이 비현실적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실은 내 안에 내면화된 고정관념이 현실과는 사뭇 동떨어져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내게 '아프리카'는 여전히 아득하게만 느껴지는 단어다. 지구 반대편 유라시아 대륙 한 구석태기 작은 반도에서 살아온 나는 이 광막하고 신비한 대륙에 대해 별로 아는 게 없다. 유난히 몸이 비쩍 말랐던 꼬맹이 시절 주변 어른들은 여름날 반바지 아래로 드러난 꼬챙이 같은 내 다리를 보고, 밥을 골고루 잘 먹어야지 '이디오피아 사람' 같이 말라비틀어지면 못쓴다고 말하곤 했었다. 이디오피아가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어른들은 지구 반대편에 있는 저주받은 땅('저주'라는 말이 그때의 나에게는 너무나 충격적이고 살벌한 표현이라 이 대답을 듣던 순간이 뇌리에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있다.) 아프리카에서는 피부가 새까맣고 헐벗은 사람들이 배를 곯으며 온갖 고통 속에 살아가고 있다고 했다. 어째서 그곳은 저주받았으며 왜 사람들이 밥을 굶고 있는지 궁금했지만 그곳은 기후가 혹독하리만치 더워 사람이 살 곳이 못되고, 사람들이 미개하고 야만스럽다는 대답만 반복해서 들었던 것 같다.
아마 이것이 '아프리카'에 대한 내 최초의 인식일 것이다.
몇 해가 지나자 어른들은 나를 '이디오피아 사람'같다고 하는 대신 '소말리아 사람'같이 비쩍 말랐다고 했다. 그 뒤론 온갖 매체에서 아프리카와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왜곡되고 희화화되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나도 주변 분위기에 맞춰 적당히 호응해주며 살았던 것 같다. 햇볕에 피부가 유독 잘 타는 아이의 별명은 '아프리카 깜시', 머리가 곱슬거리는 아이의 별명은 '부시맨'인 시절이었다. 부끄럽지만 그랬었다. 내가 태어나기 몇 해 전 있었던 에티오피아 대기근과 아직도 그 끝이 보이지 않는 소말리아 내전에 대해 조금이나마 알게 된 것은 정말 많은 시간이 지난 뒤였다.
'아프리카도 사람 사는 덴데 까짓 거 가보지 뭐'라고 가볍게 결정을 해버리고는 무엇하나 제대로 정해지지 않은 어설픈 계획을 호기롭게 떠벌려가며 스스로의 등을 떠밀었지만, 내심 두려웠던 것이 사실이다. 지도 위로 낯선 땅을 더듬더듬 짚어가며 앞으로의 여정을 그려보는 밤이면 이유 없이 겁이 나곤 했다. 세월의 무게가 묵직하게 걸린 고정관념이 내 마음을 사정없이 잡아 끌어내리며 걱정을 키웠다. 인터넷을 아무리 뒤져도 여전히 이곳엔 내가 알지 못하는 것들이 너무나 많아 보였다. 아니 정확히는, 나는 너무 걱정스러운 것들만을 알고 있었다. 게다가 그것들을 멋대로 예단하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모로코를 떠나 모리타니아를 거쳐 세네갈과 지금의 감비아까지 여정을 이어오는 내내 어떤 당혹스러운 혼란과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예상보다 훨씬 길어졌던 내 서아프리카 여행은 이런 혼란과 착종의 연속이었던 것 같다.
이만하면 됐다. 벌써 이런 이야기를 꺼내기는 성급한지도 모른다.
나는 이제 고작 몇 군데를 구경꾼마냥 어영부영 둘러보았을 뿐이다.
일단 계속 가보기로 한다.
"그나저나 밥은 왜 이렇게 안 나오는 거야?"
테이블 위의 빈 술병들을 신경질적으로 치우며 스티브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래도 직접 가봐야겠군. 진! 너도 괜찮으면 같이 먹을래?"
얼결에 스티브를 따라 모래사장 안쪽에 자리 잡은 식당 건물로 들어갔다. 겉보기엔 대충 지어놓은 콘크리트 건물이었는데 내부는 그럴싸한 식당의 구색을 갖추고 있었다. 스티브와 그 친구들은 이곳에 자주 오는 모양인지 식당 여주인과 점원을 상대로 너스레를 떨며 농담을 주고받았다. 스티브 일행은 식당 앞의 테이블로 술병들을 옮겨와 계속 술을 마시며 자기들끼리 떠들고 낄낄거리고 있었다. 나는 식당 안쪽으로 안내를 받아 스티브와 마주 보고 앉았다.
"월요일에는 손님이 드무니까 미리 음식 준비를 넉넉하게 해두지 않은 모양이야. 금방 나올 거래"
"그런데 왜 우리 둘만 따로 앉는 거야? 다른 사람들은?"
"보시다시피 다들 이미 너무 취했잖아 다 함께 모여서 먹으면 또 엉망진창으로 떠들고 난리법석일 텐데 그러면 네가 식사하기에 불편할 것 같아서 내가 따로 앉겠다고 했어. 그리고 실은 네가 손님이니까 제대로 대접하고 싶었는데 네가 오기 전에 우리 식사를 이미 주문해버려서 이제 와서 뭘 더 시키려고 했더니 우리가 주문한 요리가 거의 끝나가서 주방에서 곤란해하더라고 그래서 그냥 내 걸 나눠 먹어야 할 것 같아. 미안해 진."
아까는 그렇게 격 없이 나를 불러 세워 느닷없이 술을 주더니, 지금은 또 이렇게 세심하게 신경 써주는 모습이 조금 헷갈렸지만 지금껏 마주쳤던 감비아의 사람들을 돌이켜보니 조금 알 것도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느 곳이든 낯선 이방인을 맞이하는 태도와 관습에는 저마다의 독특함이 있다. 어딘가 모르게 서어하게 느껴지는 낯선 환대의 어색함을 몇 번 겪고 나면 내가 갖고 있는 것과는 판이하게 다른 이방인에 대한 관념을 어렴풋하게나마 느낄 수 있다. 나의 언어, 나의 사고방식으로는 상상하기도 형용하기도 어려운 그 차이의 이미지가 미세하지만 순간적으로 확 하고 느껴지는 그런 장면들이 있다.
식사가 나오고 나니 그제야 주방에서 왜 주문을 추가로 받는 걸 번거로워했는지 알 수 있었다. 접시에는 갓 지은 따끈따끈한 밥 위로 땅콩소스를 끼얹은 커다란 생선구이가 올라가 있었다. 주문을 받자마자 아까 해변에서 본 어부들이 방금 잡아온 사온 생선을 사 온 게 분명했다. 더워서 콜라 하나만 마시고 점심도 건너뛴 채, 맥주만 한참 마시고 난 뒤라 허기가 져서 맛있게 먹었다. 다 먹고 나서 밥값을 보태려고 했더니 스티브가 그럴 필요 없다며 웃으며 사양했다.
식당을 나서서 이곳 주변에 사는 스티브의 친구들과 작별인사를 하고 건물 보퉁이를 돌았더니 수풀 앞에 도요타 랜드 크루저 한 대가 근사하게 서있었다. 그런데 차가 근사하게 생긴 것과 다르게 시동을 걸 때마다 보닛을 열고 어딘가를 만져줘야 하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돌아가는 내내 차를 세우고 다시 출발할 때마다 보닛을 열고 시동을 거는 게 꽤나 우스꽝스러웠다. 스티브가 차의 어느 부분이 문제인데 대수롭지 않은 것이라고 설명을 해줬지만 차에 대해 잘 알지 못해 대충 넘겨들었다. 실은 것보다 나는 아까부터 '그나저나 다들 술을 이렇게 많이 마셨는데 운전을 해도 괜찮은 걸까?' 하는 생각에 내내 불안해하고 있었다. 다행히 운전대를 잡고 있는 녀석은 내내 술병에는 입도 안 대던 녀석이었다.
차가 들썩들썩하며 모래밭을 건너 흙길 위로 올라타서는 거칠게 달리기 시작했다. 내가 지나가는 말로 "이 친구가 제일 운전을 잘하나 봐?"라고 했더니 일행 중 어느 녀석이 웃음을 터뜨리며 "그런데 이 녀석은 OOOO라서 면허가 없어!"라고 했다. 차 안의 음악소리가 너무 큰 탓에 말이 잘 들리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돌려 귀를 기울이며 "왜 면허가 없다고??"라고 물었더니 운전을 하는 녀석은 이제 겨우 16살이라고 했다. 그래서 면허가 없단다. 그러니까 운전 때문에 술을 일부러 안 마신 것이 아니었다. 그냥 아직 어리니까 술을 못 마신 것뿐이었고 덕분에 상태가 제일 온전해서 비록 면허는 없지만 운전대를 잡은 것이었다. 정말이지 골 때리는 상황이었다.
나를 세레쿤다까지 데려다주러 가는 길에 일행 중 몇 명을 내려주고 밤에 있을 파티에 함께 갈 다른 일행 몇 명을 태우러 브리카마에 들려야 한다고 했다. 비포장도로를 벗어나 다시 산양 마을을 거쳐 브리카마로 향했다. 중간에 한 작은 마을 입구에 차를 세웠다. 스티브가 차에서 내려 사람들에게 안부를 묻고 인사를 했다. 그러고는 길가에서 놀다가 차를 보고 달려온 아이들 무리에서 한 아이를 번쩍 안아 들고 와서 내게 보여주며 자기 동생이라고 했다. 대여섯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는 오빠 품에 안겨 나를 신기하게 보다가 갑자기 겁이 났는지 고개를 획 돌렸다. 친구 한 명을 내려주고 우리는 다시 출발하려고 보닛을 열고 차 시동을 걸고 있었다. 그때 경찰 한 명이 나타났다. '운전자는 무면허에 나머지는 잔뜩 취해있는 이 상황에 경찰이라니! 젠장!' 나는 얼큰하게 취한 채로 얼어붙어버렸다. 그런데 경찰은 스티브와 악수를 하더니 밝은 얼굴로 몇 마디를 주고받는 게 아닌가? 스티브가 차 안에 앉아있는 나를 손으로 가리키자 경찰이 반가운 기색을 보이며 차창 안으로 손을 내밀어 악수를 했다. 알고 보니 이 경찰도 스티브의 동네 친구였다.
브리카마는 세레쿤다 만큼이나 크고 분주한 도시였다. 우리는 시내 골목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일행들을 내려주었다. 대부분 이곳 뮤지션들이 지내는 곳이었다. 스티브와 일행들은 매번 차에서 내려 집에 들러 어른들에게 안부 인사를 묻고 나를 소개해드렸다. 다들 일행 중 누군가의 숙부, 고모, 할머니 같은 친척 어른들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직 해도 저물지 않았는데 난데없이 얼큰하게 술에 취한 외국인이 나타나서 오늘 댁의 아이 아무개와 친구가 되었다며 어색하게 인사를 하는 모습이 우스꽝스러워 보였을 것도 같다. 어쨌거나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어르신들 대부분 내 기준으로 보자면 조금 과하다 싶을 정도로 반갑게 나를 맞아주셨다. ‘아니 나는 그냥 얘네들이랑 오늘 처음 만나자마자 내내 술 퍼마시다가 잠깐 들러 인사만 하고 다시 사라지는 것뿐인데 뭐 이렇게 까지들 반겨주시나’하는 마음에 취한 채로 몸 둘 바를 몰라했다. 그렇게 몇 번을 반복하다 보니 어릴 적 설날 아침이면 친척 형/누나를 따라 내가 잘 모르는 친척들 집을 하나하나 찾아가서 어색하게 세배를 하던 기억이 떠오르기도 하고 그랬다.
브리카마에서의 볼일을 다 마치고 세레쿤다로 향하기 전에 누군가의 제안으로 술집에서 맥주를 몇 병 더 마셨다. 술집과 차 안에서 요란하게 틀어둔 레게와 힙합 음악에 귀가 먹먹해지고 나서야 세레쿤다에 도착했다. 스티브와 타이거 그리고 다른 친구들과 차례차례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해가 거의 저물어가고 있었다. 비틀비틀 골목을 걸어 숙소로 돌아와 그대로 쓰러져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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