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4 서아프리카, 감비아, 쿤타킨테 섬(Kunta Kinteh Island)
하루는 저녁 늦게 톰봉 아저씨 댁에 잠시 들러 차를 마시며 얘기를 나눴다. 차에 설탕을 전혀 넣지 않는 나를 아저씨는 여전히 신기해했다. 이야기를 나누다 문득 생각이 나셨는지, 아저씨는 사무실에 있는 컴퓨터가 아무래도 바이러스에 걸린 것 같다며 내게 좀 봐줄 수 없겠냐고 부탁하셨다. 내일 오전에 같이 사무실에 가서 컴퓨터의 상태를 확인해보기로 했다.
아저씨가 식탁 위에 놓여있던 신문을 무심히 집어 들어 휙휙 넘겨가며 훑어보다가 불쑥 한국의 인쇄술은 어떠냐고 물으셨다. 난데없이 인쇄술이라니? 고려시대 금속활자가 독일의 구텐베르크가 만든 것보다 수십 년 앞서 발명되었다는 것을 학교에서 배운 뒤로, 살면서 단 한 번도 인쇄술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볼 일이 없었던 것 같은데. 눈만 끔뻑거리고 있는 내게 아저씨는 말없이 보고 있던 신문 어느 한 면을 펼쳐 보여주셨다. 한눈에 봐도 질 나쁜 종이로 만들어진 신문은 귀퉁이 단락의 글자가 읽을 수 없을 정도로 번져 있었다.
"음, 솔직히 말씀드리면 잘 알지도 못하고 딱히 생각해본 적도 없어요."
어리둥절해하는 나를 두고 아저씨는 말을 이었다.
"가난한 나라에서의 삶이라고 하면 보통 열악한 환경과 불편한 생활,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힘들게 일해 겨우겨우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모습들을 떠올리지만, 빈곤은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아. 보다시피 감비아는 인쇄술조차 이렇게 형편없지. 책은 고사하고 신문 하나 제대로 만들 여건이 안 된다는 것이 얼마나 슬픈 일인지. 상상할 수 있겠나?”
물론 그것을 내가 쉽게 상상할 수 있을 리가 만무하다.
“글쎄요, 어렵네요. 저로서는.”
“매일매일 고단한 삶을 이어나가는 것도 벅찬 사람들에게 책이나 신문 따위 어쩌면 아무짝에 쓸모없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 당장 나와 가족들이 먹을 게 없는데 그게 다 무슨 소용이겠어. 괜히 경찰한테 끌려가서 험한 꼴이나 안 당하면 다행이지. 하지만 너도 알 거야, 그것은 정말 소중하고 우리 모두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이라는 것을.”
여전히 내겐 막연하고 어려운 이야기다. 22년 가까이 이어진 장기집권과 독재, 악독한 검열과 잔혹한 언론 탄압. 오죽했으면 정치/사회 기자에서 스포츠 잡지 기자로 전업까지 해야 했을까? (아저씨는 자신과 가족의 안전, 생존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무력했던 과거를 어쩔 수 없었던 것이었다고 말씀하셨지만, 그 목소리와 표정에서 나는 왜인지 아저씨가 당신의 삶에서 여전히 짙게 배어나는 어떤 쓴맛 같은 것을 견디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부가 발행하는 기관지 말고는 양질의 도서나 제대로 된 신문이 나오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고질적인 빈곤과 위압적인 정부, 거기에 더해 다른 여러 요인들이 겹겹이 쌓여 감비아의 인쇄술을 여전히 낙후된 채로 남아있게 만든 것일까? 이것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적어도 그것은 조악하게 인쇄된 신문에 얼룩처럼 번진 활자들을 아득히 뛰어넘는 것이겠지. 나는 막막한 무기력감 같은 것을 느꼈다.
“빈곤과 독재는 사람들에게 물질적인 불편과 자유의 제한을 초래하는 것만 아니라 우리의 생각과 마음 그리고 삶을 통째로 움켜쥐고 제멋대로 뒤흔든다네.”
각자의 생각에 잠겨 말이 없어진 우리는 묵묵히 차만 홀짝거렸다. 아저씨가 이리저리 신문을 넘기는 소리, TV에서 흘러나오는 이곳 억양이 강한 뉴스 아나운서의 목소리, 막내아들 술레이만이 태블릿으로 아동용 낱말퍼즐 같은 걸 하는 소리들만이 조도가 낮은 거실 형광등 불빛 아래를 떠다녔다.
누군가의 말처럼 문화라는 것이 ‘인간이 위기에 직면하는 기술’이라면, 그것을 직조하기 위한 도구와 수단은 물론 그것을 희구하는 마음을 갖는 것조차 쉬이 용납되지 않는 삶, 그 가혹함과 위태로움에 대해 아저씨는 내게 말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뒤늦게 해 본다. 그때 아저씨 앞에서 이런 어렴풋한 생각이나마 더듬더듬 꺼내놓고 좀 더 얘기를 나눌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이후로 나는 ‘인쇄’라는 글자를 볼 때면 문득문득 톰봉 아저씨를 떠올린다. 그날 밤의 어둑어둑한 거실 식탁 위 홍차가 담긴 하얀 머그컵을 떠올린다. 아저씨의 말을 곱씹는다. 대화는 아주 일부분밖에 기억이 나질 않는다. 아저씨가 어떤 어휘를 동원하여 얘기했는지도 묘연하다. 이제 그것은 나의 의식 속에 영어가 아닌 한국어로 번역된 일종의 더빙본만 남아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따금 아저씨와 이야기했던 것들에 대해 어렴풋이 생각해보곤 한다. 내 설핀 생각들은 여전히 불명료하고, 기억은 속절없이 아련하게 옅어져만 간다.
우리가 삶에서 드물게 마주하게 되는 어떤 것들은 비록 그것이 선명함을 갖지 못한 채 흐려지거나 흩어지고 말지라도 언제까지나 생생하게 우리 안에 남는다. 설령 우리가 그것을 완전히 잊는 날이 온다 해도, 그것은 결코 소실되지 않는다. 이날 밤 우리의 짧았던 이야기처럼. 톰봉 아저씨는 그런 것을 내게 많이도 전해주었다.
아저씨는 나를 배웅하는 길에 인쇄소를 구경시켜 주겠다며 집 근처에 있는 인쇄소로 나를 데려갔다. 아저씨 말에 따르면 세레쿤다에는 신문을 인쇄할 수 있는 규모의 인쇄소가 서너 곳 밖에 없는데, 다들 낡아빠진 인쇄기를 쓰고 있어서 인쇄의 질도 엉망이고 비용은 비용대로 비싸서 여러모로 곤란을 겪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톰봉 아저씨는 최근 다른 언론사, 출판사들과 함께 돈을 모아서 아예 새 인쇄소를 차릴 방법을 찾고는 있지만, 상대적으로 저렴한 중국에서 인쇄기를 들여오려고 알아보니 그것도 비용이 만만치 않아 난항을 겪고 있다고 했다.
밤인데도 인쇄소는 분주했다. 을지로나 문래동과는 입자의 질감이 다른 기름 쩐내와 잉크 냄새가 풍겨왔다. 건물 내부의 대부분을 차지한 육중한 인쇄기들 뒤로 손에 잉크 때가 잔뜩 묻은 한 사내가 나타났다. 아저씨와 안면 깊어 보이는 사내는 흔쾌히 인쇄기 이곳저곳을 가리켜가며 내게 인쇄 과정을 설명해주었다. 낡은 인쇄기는 연신 요란하게 종이를 빨아들여가며 내일 신문을 내뱉고 있었다.
아침에 다시 아저씨를 만나 우리가 처음 만났던 사무실에 갔다. 내가 컴퓨터를 들여다보고 있는 동안 아저씨가 밀크티를 타서 가져다주셨다. 아저씨가 취재를 다니실 때 사용하는 디지털카메라의 SD카드가 바이러스에 감염된 것이 문제였다. 다행히 심각한 상태는 아니어서 컴퓨터와 디지털카메라 SD카드에 바이러스들을 찾아 제거하는 것으로 고칠 수 있었다.
멀쩡해진 컴퓨터로 아저씨가 취재차 방문한 서아프리카 여러 나라들의 사진을 같이 보았다. 대부분 축구 경기장에서 찍은 사진들이었는데, 축구장을 배경으로 아저씨와 함께 나란히 서서 팔짱을 끼고 웃고 있는 선수들과, 코치, 다른 기자들의 시원한 미소가 기억에 남았다.
컴퓨터를 고치고 돌아가는 길에 아저씨가 잠시 이발소에 들러야겠다고 해서 따라갔다. 골목 사이로 두어 평 남짓 되는 작은 공간에 자리 잡은 한 이발소였다. 아저씨는 이곳의 단골인 듯 이발사가 반기며 아저씨에게 인사를 하고 내게도 인사를 했다. 인사를 건넨 이발사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내 머리로 옮겨가더니 일순간 그의 눈빛이 당혹감에 흔들렸다. 그 찰나의 동요를 나는 놓치지 않았다.
“저는 안 자를 거니까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덩치 큰 이발사는 내 말을 듣고 머쓱해져 웃고 말았는데, 뒤늦게 상황을 이해한 톰봉 아저씨가 이발사를 보고 껄껄 웃었다.
“그렇겠네!? 너 동양사람 머리 잘라본 적도 없고 자를 줄도 모르겠네?”
“하하핫! 네! 이쪽도 손님이면 오늘 골치 아프겠구나 생각했습죠.”
나는 긴 옆머리를 젖혀 안쪽의 짧은 머리를 보이며 말했다.
“걱정 마세요. 이래 봬도 이발한 지 얼마 안 되었어요. 세네갈 이발사랑 둘이 아주 난리도 아니었어요.”
타국에서 이발소에 가는 일은 그 자체로 가슴 뛰는 놀라움 가득한 모험과 다를 게 없다. 불안한 내 속도 모르면서 무조건 최선을 다해보겠다는 결의의 눈빛을 계속해서 보내고 있는 외국인 이발사 앞에서 절실한 표정으로 손짓 발짓은 물론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내가 원하는 스타일을 설명하고 나면 조심스럽고 섬세한 가위질과 함께 본격적으로 일이 펼쳐진다. 일단은 과감히 이발사에게 맡기고 지켜보다가 아니다 싶으면 재빨리 “스탑! 스탑! 플리즈!”를 외쳐 이발사의 손을 멈춰 세운 뒤, 커트보 밖으로 손을 쭉 빼 머리를 만져가며 ‘여긴 이렇게 이렇게’ 하고 보여주며 부연한다. 중간중간 이런 혼란스러운 커뮤니케이션을 성실히 주고받다 보면 한국에서 자르던 것보다 3~5배 정도의 시간이 걸려 이발이 끝난다. 이발사도 나도 기진맥진이다. 험난한 과정을 지나 마지막으로 잘린 머리카락들이 붙어있는 목덜미를 스펀지로 털어내는 동안 거울 속에서 ‘이것 봐! 우리가 해냈어!’ 같은 느낌의 흡족한 미소가 두 사람 사이를 오고 가면 대성공이다. 이때의 성취감이 주는 묘한 짜릿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물론 이렇게 완성되는 것은 그럭저럭 나쁘지 않게 자른 지극히 평범한 한국 스타일의 ‘투블럭 머리’지만 말이다.
문화마다 동네마다 이발소의 역할과 풍경도 제각각이기 때문에 이게 몇 번 해봤다고 해서 결코 익숙해지지 않는다. 덥수룩해진 머리를 견디지 못해 이발소 문을 열고 과감히 입장하는 순간 번번이 새로운 도전, 새로운 역경과 마주하게 된다.
그렇다면 서아프리카 이발소는 어떨까? 동양인 남성이 이발소에 들어오는 것부터가 이미 미증유의 상황이다. 이곳에서는 보통 80년대 극장에 걸린 상영작 간판그림 같은 느낌의 그림을 가게 앞 입간판이나 입구 벽에서 발견하는 것으로 이발소를 찾게 된다. 그림 속에는 잘 생긴 남자들이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머리 스타일을 뽐내고 있다. 물론 이게 사람이 손으로 그린 그림이다 보니 그 솜씨가 제각각이라 기습적으로 맞닥뜨리면 풉하고 웃음을 내뿜을 만큼 서툴게 그린 것들도 있고 놀랄 만큼 뛰어난 것들도 있어 나름 보는 재미가 있다. 이발소 안의 벽에도 우리나라로 따지면 스타일북이라고 할 수 있는 포스터가 벽에 여기저기 붙어있는데 그래도 이건 사진이라서 좀 낫다. 스타일북의 그것처럼 정말 다양한 머리 스타일을 한 사진들이 유아용 알파벳 포스터의 그것처럼 칸칸이 자리하고 있다. 스타일마다 이름도 다른데 내 눈에는 다 똑같아 보이는 짧은 빡빡이 스타일 들이다. 바로 여기서 큰 문제가 발생한다. 서아프리카의 이발소에서 이 온갖 빡빡이 머리 스타일을 구현하기 위해 쓰이는 주된 도구는 바리깡과 면도칼뿐이라는 사실이다. 그렇다. 이발소에 가위가 없다! 있다고 해도 손잡이가 플라스틱 재질인 종이공작용 가위 같이 생긴 부실한 것뿐이다. 덕분에 몇 주 전 덥수룩해진 긴 머리가 덥고 거슬려 무작정 찾았던 다카르의 한 이발소에서 아주 요란한 경험을 했었다.
이발사가 아저씨 머리와 수염을 면도하는 동안 나는 옆에 앉아 이발사의 능숙한 손놀림을 구경하고 있었다. 길 건너편을 지나던 한 아이가 이발소에 앉아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가던 길을 멈춰 안을 기웃거리며 내 차례가 오기를 기다렸지만 아저씨가 면도를 끝내고 그대로 우리가 함께 이발소를 나서자 실망한 기색을 보이고는 골목으로 내달려 사라졌다.
시장을 지나다가 길가에서 파는 히비스커스를 보았다. 큰 대야에 잔뜩 담아놓고 팔고 있었다. 이렇게 꽃잎만 파는 게 아니라 히비스커스를 우린 물에 설탕을 넣어 얼려 만든 음료를 페트병에 담아서도 파는데 온조(Wonjo)라고 부른다. 감비아 어디에서나 볼 수 있다.
“히비스커스가 정말 많네요.”
“더운 날에 시원하게 마시면 정말 좋지. 그러고 보니 자네 내일 쿤타킨테 섬에 간다고 하지 않았나? 조금 사야겠군. 아내가 온조를 정말 잘 만들거든 한 병 줄 테니 냉장고에 넣어두었다가 내일 챙겨가도록 해.”
아저씨가 히비스커스를 사고 나는 설탕과 과일 에센스를 사서 아저씨 댁으로 돌아왔다. 톰봉 아저씨는 만드는데 시간이 좀 걸리니 저녁 늦게라도 와서 꼭 찾아가라고 당부하셨다.
슬슬 감비아를 떠나 다시 세네갈을 거쳐 말리까지 이동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다음 목적지로 삼은 말리의 수도 바마코까지 단번에 가는 버스가 있다고 해서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버스 회사를 찾아갔다. 세레쿤다를 빠져나가는 큰 도로 한 길목에서 버스회사를 찾았다. 문에 그려진 버스 그림이 아니었으면 쌀가게 같은 비주얼 탓에 그냥 지나칠뻔했다.
버스회사 앞에 걸려있는 운임표에 적힌 목적지들을 주욱 보니 안 가는 곳이 없다. 말리는 물론이고 부르키나파소, 코트디부아르 심지어 저 멀리 가나, 토고, 베넹까지 버스 노선이 있었다. 목적지가 가나 빼고는 죄다 프랑스어권이라 그런지 요금은 감비아 달라시가 아니라 서아프리카 CFA 프랑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바마코까지는 3만 프랑(약 6만 원), 소요시간은 대략 30시간, 하루를 꼬박 버스에서 보내야 하긴 하지만 이동시간이 긴 것에는 딱히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 편이라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며칠 뒤에 바마코로 가는 버스를 탈 예정인데 몇 시에 출발 하나요?”
“표를 예약하고 목요일 아침 7시에 이곳으로 오면 됩니다.”
오늘이 화요일인데 목요일은 너무 이르다.
“목요일요? 다음 버스는 언제 있나요?”
“다음 주 목요일이요. 바마코로 가는 버스는 1주일에 한 대 뿐이에요.”
그럼 그렇지. 국경을 두 번이나 건너 1500킬로미터를 넘게 가야 하는데 버스가 자주 있을 리가 없다. 당장 모레에 버스를 타는 것도, 다음 주까지 세레쿤다에서 기다렸다 다음 버스를 타는 것도 딱히 마음에 차지 않았다. 너무 급하지 않게 그렇다고 너무 느긋하지도 않게 꾸준히 어디론가 움직이고 싶었다. 다른 방법을 찾아보기로 했다.
온조를 받으러 톰봉 아저씨 댁에 들렀다. 짙은 석류석 빛깔의 히비스커스 주스가 가득 담긴 1.5리터 생수병을 건네받았다. 끓여 내 옮겨 담은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아직 주스는 뜨뜻했다.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나는 아저씨에게 버스 얘기를 꺼냈다.
“아무래도 여기서 말리로 바로 가는 건 여의치 않을 것 같아요. 세레쿤다, 반줄 주변에만 있다가 떠나는 게 아쉽기도 하고요. 아예 동쪽 끝 바세산타수(Basse Santa Su)까지 가볼까 해요.”
“바세까지라면 아마 매일 아침 8시에 출발하는 버스가 GTSC(Gambia Transport Service Company)에 있을 걸세. 그래 언제 떠날 참인가?”
“내일은 쿤타킨테 섬에 다녀오기로 했으니까. 모레에 갈 생각이에요.”
“금방이구만. 내일 저녁에 꼭 들르게. 떠나기 전에 인사는 해야지.”
아저씨는 수첩의 한 귀퉁이를 찢어 누군가의 이름을 적어 나에게 건네주었다.
“혹 GTSC에서 문제가 생기면 이 사람을 찾아가게. 내가 보냈다고 하면 도움을 줄 거야.”
“매번 감사해요. 너무 도움만 받고 가는 건 아닌지...”
“하하하! 아니야 아니야. 자네가 기적처럼 나를 찾아와서, 내가 자네를 도울 기회를 얻은 거지. 그리고 나중에 내가 한국에 가게 되면 자네가 도와줄 것 아닌가?”
나는 막연히 우리가 어느 가을날 하늘공원을 함께 걷는 모습을 떠올렸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길가 가게 앞 아무렇게나 놓인 기다란 널빤지 의자에 힘없이 앉아 있던 한 노인이 지나가는 나를 발견하고는 눈을 부릅떠 노려보았다. 노인은 아무렇게나 자라 덥수룩한 하얀 수염을 씰룩거리더니 큰 소리로 나를 불렀다.
“헤이 차이니즈 보이! 금을 찾으러 온 건가?”
감비아에서는 상대적으로 어린 남자(아마도 어린아이부터 결혼하지 않은 20대까지)에게는 ‘보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은데 덕분에 20대도 아니고 차이니즈도 아니지만, 나는 이곳에서 팔자에 없는 ‘차이니즈 보이’가 되었다. 여하튼 금이라니 이 무슨 소린가 싶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노인에게 무슨 말인가를 하려 했으나, 내 입에서 말이 채 나오기도 전에 노인은 갑자기 나를 향해 소리지르기 시작했다.
“여기에 금은 없어! 감비아에 금은 없다고! 금을 찾으러 온 거라면 말리로 썩 가버려! 아직도 금을 찾으러 오는 녀석들이 있다니! 얼마나 더 땅을 파려는 거야! 아무튼 금은 없어 없다고!”
갑작스러운 소란에 당황하는 것도 잠시, 가게 안쪽에서 손자로 보이는 한 청년이 나타나 노인을 일으켜 세워 부축해 가게 안으로 들어가며 나에게 괜찮으니 얼른 가라는 듯 눈짓을 했다. 노인은 청년에게 몸을 기댄 채 가게 안으로 들어가면서도 나를 노려보고 있던 두 눈을 거두지 않았다.
그날 밤 나는 숙소 주차장에 쭈그리고 앉아 리셉션에 있는 와이파이로 인터넷에 접속해 구글 검색창에 ‘mining in gambia'라고 적어 넣었다. 느릿느릿 페이지가 로딩되더니 결과 목록에 위키피디아 링크가 나왔다. 구글 번역기를 사전 삼아 더듬더듬 페이지를 읽었다.
’2005년 중국의 Astron(50%)과 의 합작투자로 호주의 Carnegie Corporation Ltd. (CCL) (50%)는 Batukunku, Kartung 그리고 Sanyang의 무기물 모래 매장층에 대한 독점 라이센스를 획득했습니다. 어쩌고 저쩌고... 이 매장층 중광물 집합체의 71%는 일메나이트 15%는 지르콘, 7%는 금홍석, 그리고 기타 11%로 추정됩니다.‘
그랬다. 노인이 맞았다. 감비아에 금은 없었다. 대신 티타늄과 지르코늄이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쿤타킨테(Kunta Kinteh) 섬에 다녀오려면 아침 일찍 나서야 할 거라는 톰봉 아저씨 말을 따라 알람을 맞춰 6시에 일어났다. 일어나긴 했는데 아직 하늘도 어둡고 바깥공기가 생각보다 써늘했다. 아무리 가는 길 중간에 배를 타고 강을 건너야 한다지만 다 해서 50킬로미터도 안되는데 그렇게까지 서둘러야 할 이유는 없을 것 같아 계속 침대에서 꾸물거리다 결국 8시가 넘어서야 반줄에 도착했다.
아침이 되어 오가는 사람들로 분주한 반줄 시내를 가로질러 곧장 선착장으로 갔다. 선착장 주변은 이미 배를 타러 온 사람, 마중 나온 사람, 물건 팔러 나온 사람들로 북적북적했다. 나는 좌판에서 비스킷을 한 통 사 가방에 넣고 눈치껏 사람들의 뒤를 따라갔다. 줄을 서고, 여권을 보여주고, 지갑을 열어 죄다 똑같은 얼굴이 그려진 지폐들 사이에서 하늘색과 붉은색 지폐를 각각 한 장씩 골라내어 25달라시(약 500원)를 내고 표를 샀다. 쫓겨난 독재자의 초상은 지폐를 움켜쥔 사람들 손 안에서 여전히 여유롭게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1년 뒤, 2019년 6월, 감비아 중앙은행이 드디어 ‘야햐 자메’의 초상을 뺀 감비아 달라시 신권을 발행하였다. 앞면의 새들과, 뒷면에 감비아 사람들의 생활상을 그려 넣은 것이 인상적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_aqHiEGP8lQ)
사람들 틈바구니에 계속 휩쓸려 가다 보니 어느새 부두로 나가는 쇠창살문 앞에 다다랐다. 문 건너편은 경찰과 직원들이 지키고 있었고 안쪽은 대합실이었다. 말이 대합실이지 건물 안 공간이 모자라 바깥에 지붕만 만들어놓은 공간이었는데 연락선을 타려는 승객들만 있는 게 아니라, 작은 시장처럼 간단한 먹을 것을 만들어 파는 사람 돌아다니면서 온갖 잡다한 물건을 파는 사람들도 있어 북적대는 통에 비좁았다. 벤치에 빈자리가 생겨 냉큼 비집고 들어가 앉았더니 옆에 앉아있던 네댓 살 정도의 아이가 잠자코 고개를 돌려 나를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아침 대신으로 먹고 있던 비스킷을 아이에게도 몇 개 주었는데 아이는 동그랗게 뜬 두 눈을 내게서 전혀 떼지 않은 채 비스킷을 물고 있던 입만 우물거렸다.
30분 정도 기다렸을까 승객을 가득 실은 연락선이 나타나 느릿느릿 부두로 접안하기 시작했다. 배에서 승객들과 차가 다 빠져나가고 나서야 드디어 게이트가 열렸다. 나는 아까부터 제법 많은 사람들이 굳이 따가운 햇볕이 드는 게이트 앞에 딱 붙어서 기다리고 있는 이유가 궁금했는데, 게이트가 열리자마자 그 사람들이 재빠른 걸음으로 배에 올라앉을만한 자리를 전부 차지해버리는 것으로 의문이 풀렸다. 느지막이 사람들을 뒤따르던 나는 갑판 위의 사람들과 짐 보따리들을 요리조리 피해 구석으로 가서 난간에 몸을 기댔다. 수상 수송 말고는 감비아 강의 북안과 남안을 오가는 방법이 없다 보니 ‘과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탑승객이 많았다.
10시가 조금 넘어 배가 출발했다. 부두를 벗어나자마자 다른 연락선 ‘쿤타킨테'호가 역시 사람을 가득 태우고 나타났다. 작년(2017년), 감비아의 새 정부가 출범 직후, 대통령 선거 공약 이행의 일환으로 네덜란드의 한 조선소에 긴급히 건조를 의뢰하여 제작, 인수받아 운영 중인 새 연락선이다. 지금 내가 타고 있는 배는 ’카닐라이(Kanilai)‘호다. 그 뜻이 궁금해서 분주히 갑판 위를 오가는 선원 한 명에게 다가가 슬쩍 물어보았더니 시큰둥한 대답이 돌아왔다.
“야햐 자메가 태어난 마을이 카닐라이야.”
배는 잔잔한 감비아 강의 수면 위로 디젤기관의 묵직한 소음을 흩뿌리며 서서히 북쪽으로 움직였다. 미세한 진동이 난간을 타고 내 손끝으로 전해져 왔다. 지도를 보니 서쪽으로 곧장 가면 카리브해의 섬들 사이를 지나 니카라과에 다다를 때까지 육지는 없었다. 대략 7000킬로미터가 넘는다. 서쪽은 그야말로 망망대해였다.
날씨는 맑지만 하늘에는 사하라에서 바람에 실려 온 모래 입자들이 끼어있어 파랗다기보다 조금 희뿌연 느낌이 있었다. 10시가 조금 넘었을 뿐인데 벌써 햇볕이 따가웠다. 달랑 반팔 티셔츠 한 장 걸친 채 그늘 하나 없는 갑판 위에 서 있으려니 은근 고역이었다. 바라까지 40분이 채 걸리지 않는다는 걸 위안 삼아 이마를 찡그린 채 그냥 버티고 서있었다. 그런 나를 발견한 눈치 빠른 한 음료 장수가 내 앞에 와서 머리에 이고 있던 작은 세숫대야를 내려놓고 대야 안의 시원한 물이며 음료수를 팔려고 했다.
“암 파인 땡쓰.”
나는 손사래를 쳤지만 음료 장수가 고집스럽게 재차 뭐든 사줄 것을 권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가방을 열어 어젯밤 숙소 리셉션에 부탁해 냉동고에 밤새 넣어두었다가 가져온 히비스커스 주스를 꺼내 보이며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맺힌 물방울들이 햇살을 머금어 난반사하는 빛에 병 안의 붉은 얼음 덩어리가 흡사 보석처럼 빛났다. 음료 장수는 흠칫 놀랐다가 이내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OK. You are really prepared." 주변 일동 폭소. 음료 장수는 실망한 기색도 없이 다시 세숫대야를 머리에 이고 절묘한 균형감각을 뽐내듯 계단을 사뿐사뿐 걸어 내려갔다.
바라에 도착했다. 이 많은 승객들이 몰렸다간 버스고 택시고 남아나지 않을 것 같아. 이번엔 내가 앞장서서 배에서 내렸다. 선착장을 빠져나와 모퉁이를 돌자마자 바로 넓은 택시 파크가 나왔다. 행선지를 외치며 승객들을 모으고 있는 한 호객꾼에게 알브레다(Albreda)로 가는 겔리겔리를 어디서 타는지 물어 그가 알려준 쪽으로 향했다. 군집 어류처럼 가지런히 주차되어 있는 겔리겔리들 사이를 종종걸음으로 돌아다니다 마침내 알브레다로 향하는 차들이 모여 있는 곳을 찾았다. 차에 기대어 서 있는 젊은 드라이버에게 이 차가 가장 먼저 출발하는 차가 맞는지 물었더니 순서는 따로 없고 손님이 꽉 차면 출발한다고 했다. 여튼 차에 올라 자리를 잡고 앉으니 한결 마음이 편했다.
사람들이 몰리는 버스 터미널이나 이런 택시 파크에서 어리숙하게 두리번거리며 우물쭈물하고 있으면 온갖 장사꾼이며 호객꾼들이 달라붙어 여간 성가신 게 아니다. 언제나 ‘나는 내 갈길 간다. 신경 쓰지 마라.’ 하는 표정과 걸음걸이를 유지하고 있어야 한다. 멈춰 선 채로 계속 주변을 둘러보거나, 갈팡질팡 같은 곳을 왔다 갔다 하는 것은 금물이다.
알브레다는 주도로에서는 꽤나 멀리 떨어진 강가 작은 마을인 탓에 사람들의 왕래가 드문 듯, 한참을 기다려도 좀처럼 승객이 늘질 않았다. 배를 40분 타고 건너왔는데 차 안에서 다른 승객을 기다리느라 이미 1시간을 허비했다. 괜히 톰봉 아저씨가 아침 일찍 서둘러서 다녀오라고 말했던 게 아니었던 것 같다. 기다리는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그래도 너무 늦어지면 나중에 세레쿤다까지 돌아갈 일이 걱정이었다. 어쩔 수 있나, 차창 밖으로 지나가던 빵 장수를 불러 세워 빵을 하나 사서 우적우적 씹어 먹으며 시간을 때웠다.
마지막 두어 자리를 남겨 놓고 나타난 외국인 두 사람이 빨리 차에 타라고 호들갑을 떠는 호객꾼에게 떠밀려 허둥지둥 차에 올랐다. 다른 승객들과 짐을 피해 가며 허리를 굽힌 채 차 뒤편의 빈자리로 향하는 두 사람의 불안한 눈길이 이리저리 차 안을 훑었다. 그러다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고 있는 나와 눈이 마주쳤는데, 나는 말없이 ‘이 차가 맞아요.’하는 눈빛을 보냈다. 그들이 맨 뒷좌석에 몸을 구겨 앉자 마침내 차가 출발했다.
차는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주도로를 벗어나 흙길로 접어들었다. 알브레다까지는 30킬로미터 남짓이었지만 움푹 파인 곳을 지나거나 길 위의 돌덩이들을 피하느라 차가 들썩거리고 지그재그로 움직이는 통에 속도가 더뎠다. 꽁무니로 붉은 흙먼지를 뿌옇게 날리며 속도를 좀 내는가 싶다가도 중간중간 마을이 나올 때마다 멈춰 서서 승객 몇몇을 내려주느라 시간이 더 지체되었다. 1시간을 넘게 달려 차 안에 승객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을 즈음에서야 알브레다에 도착했다.
사람들이 제법 내렸는데 금세 다들 뿔뿔이 흩어져 사라지고, 외국인 셋만 마을 한가운데 덩그러니 남았다. 한창 더운 시간대라 그런지 주변에는 사람 하나 보이질 않았다. 나는 이마에 손을 올려 햇빛을 가리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두 사람을 향해 비로소 말문을 열었다.
“드디어 왔네. 그런데 어디로 가야 하지?”
“모르겠네. 우리도 여긴 처음이라.” 남자는 당연한 소리를 장난스럽게 내뱉으며 씨익 웃었다.
멀리 강가 쪽에 조형물이 보여 일단 그쪽으로 걸어갔다. 가까이 가서 보니 머리가 있을 자리에 지구본이 얹어진 사람의 형상을 한 ‘자유의 동상’이라는 조형물이었다. 하늘을 향해 뻗은 양팔의 손목에는 쇠사슬이 끊어진 수갑이 채워져 있었고, 발밑에는 'NEVER AGAIN!'이라고 적혀 있었다.
근처에서 관광객 안내소를 발견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벽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사진이며 홍보 포스터를 들여다보며 “헬로우~”만 반복하던 우리 뒤로 불쑥 붙임성 있는 목소리가 들렸다.
“쿤타킨테 섬에 가십니까?”
뒤를 돌아보니 이마에 선글라스를 걸친 한 남자가 서있었다. 그가 입고 있는 흰 폴로셔츠 양 가슴에 있는 유네스코와 세계문화유산 엠블럼이 눈에 들어왔다. 자신을 라민이라고 소개한 가이드는 친절한 태도로 차근차근 방문 코스, 코스별 소요시간, 요금 등을 설명해주었다. 우리는 배를 타고 쿤타킨테 섬에 갔다가 돌아와서 박물관을 둘러보는 코스로 정했다. 예상보다 시간이 많이 지체되어 돌아갈 일이 걱정이었던 내가 물었다.
“바라로 돌아가는 겔리겔리는 자주 있나요?”
“여기는 외진 곳이라 차가 금방 끊깁니다. 아마 오후 3시 반 즈음에 출발하는 게 마지막일 겁니다. 그 뒤로는 운전수와 차를 섭외하셔야 합니다. 혹시 그렇게 되면 제가 아는 운전수에게 연락해 드릴 수 있습니다.”
“마지막 차를 놓치고 싶지는 않은데 그때까지 충분히 다 둘러볼 수 있을까요?”
“빠듯하지만 차 시간에 맞춰서 마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퀵하게! 하지만 중요한 것들을 놓치지 않도록 잘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제가 여기 가이드 중에 가장 오래 일한 프로니까 믿으셔도 됩니다. 일단 우리가 타고 갈 배를 얼른 구해오겠습니다.”
말을 마친 라민은 선글라스를 이마에서 내려쓰고 셔츠의 목깃을 가다듬으며 밖으로 나갔다. 농밀한 햇빛과 미세한 흙먼지가 스며들어 누렇게 변색된 가이드 셔츠의 목깃과 소매가 이곳에서 ‘가장 오래 일한 프로 가이드’를 더욱 믿음직스럽게 보이도록 해주었다.
라민이 나루터로 배를 구하러 간 사이 파비오가 오는 길에 마을 입구에서 재미난 것을 보았다며 얼른 다녀와 보자고 우리를 부추겼다. 스테파니와 나는 안 그래도 시간이 빠듯한데 무슨 소리냐며 만류했지만 파비오는 막무가내로 앞장을 섰다. 빠른 걸음으로 벌써 저만치 앞서가던 파비오는 연신 뒤를 돌아보며 얼른 오라고 우리를 재촉했다.
“파비오는 정말이지 못 말리는 사람이야. 뭔가를 발견하면 꼭 쫓아가서 직접 확인을 해야 된다니까?” 미소 띤 얼굴로 그를 대신해 변명이라도 하듯 내게 말한 스테파니는 여전히 우릴 재촉하고 있는 파비오에게 알았다며 손을 흔들었다.
이 커플은 룩셈부르크에서 온 파비오와 스테파니다. 이탈리아가 고향인 이 둘은 남유럽 사람 특유의 활기와 재치 넘치는 정서를 가진 커플이었는데, 죽기 전까지 가보고 싶은 곳은 전부 가보겠다는 일념으로 휴가가 생길 때마다 여행을 다닌다고 했다. 여행지는 그때그때 끌리는 곳으로, 왕복 비행기 티켓만 구하면 그것으로 준비 끝인 스타일이다. 이번에는 2주 정도의 휴가를 보낼 생각으로 무작정 세네갈의 수도 다카르로 날아와 어쩌저찌 하다 보니 감비아 까지 온 모양이었다.
재밌게도 이 두 사람은 당장 내일 남쪽 국경을 넘어 세네갈 까사망스로 가겠다는 확고한 의지는 있었지만, 어디서 무엇을 타고 어떻게 국경을 넘을지 국경을 넘은 뒤에는 어디로 갈지에 대해서는 계획은커녕 필요한 정보들도 전무하다시피 했다. 그 와중에 쿤타킨테 섬에 가겠다고 이 시골까지 들어와서 돌아가는 막차가 아슬아슬한 상황에 처해있는데도 저렇게 태평히 여유를 부리고 있는 거다. 어떤 면에서 대단하면 대단하다고도 할 수 있는 그런 여행 스타일이다.
멀리서 파비오가 빽빽한 나무 덤불을 향해서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러 대더니 덤불 안쪽으로 사라졌다. 가까이 가보니 덤불 사이로 게스트하우스의 입구가 있었다. 입구는 물론 입구에 걸린 간판도 뭔가 호화로움을 표방하고는 있지만 그 만듦새가 허술하고 조잡해서 헛웃음이 나오는 그런 물건이었다. 입구 양쪽으로 길게 담벼락처럼 뻗어 있는 짙푸른 나무 덤불도 그 괴이한 분위기를 자아내는데 일조하고 있었다. 허나 딱 그 정도였다. 시간이 촉박한데 굳이 찾아와서 사진을 남기고 할 만한 그런 건 또 아니었다. 스테파니와 나는 고작 이것 때문이었냐고 투덜거리며 파비오를 찾아 안으로 들어갔다.
입구의 철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널따란 공간이 나왔다. 입구 쪽의 덤불과 나무들이 전체 공간을 ㄷ자 모양으로 감싼 형태로 입구의 정반대 편 경계에 맞닿은 감비아 강이 시원하게 보이는 구조였다. 건초 지붕을 얹은 동그란 숙소 건물들 사이에는 청소가 필요해 보이긴 했지만 실외 수영장도 있었다. 입구의 조악함이 실은 이 서프라이즈를 위해 치밀하게 의도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파비오는 벌써 리셉션 앞에 서서 직원과 뭐라 뭐라 말을 주고받으며 소리 내어 웃고 있었다. 우리를 본 파비오가 리셉션 건물 밖으로 나왔다.
“아까 차 안에서 슬쩍 봤는데 입구가 웃겨 보여서 사진 찍어두려고 와봤는데 너무 좋잖아? 조금 비싸긴 하지만 애초에 여기로 와서 지낼걸 그랬어. 반줄은 아무래도 좀 지루하니까 말이야.”
우리는 울타리에 있는 쪽문을 통해 강가로 나왔다. 100미터 정도 길이의 아담한 모래톱이 나루터까지 이어져있었다. 강물 위로 작은 고깃배들이 여럿 보였다. 대부분은 모터도 없이 노질로 움직이는 나무배였다. 바닷가 고깃배들보다는 크기도 작은 듯했다. 바오밥나무 한 그루를 통째로 깎아 만든 배가 제일 튼튼하다고 했던가... 문득 세네갈 친구의 말이 떠올랐다.
한 무리의 아이들이 강에서 미역을 감고 있었다. 몇몇은 물 안에서 첨벙첨벙 물장구를 치거나 자맥질을 하며 꺅꺅 소리를 지르고 있었고 나머지는 강가에 앉거나 선 채로 몸을 말리고 있었다. 아예 알몸인 녀석도 있었다. 아이 살갗에 달라붙은 모래가 햇살에 반짝였다.
우리들을 발견한 아이들이 손을 흔들며 “헬로우~!”하고 소리를 질렀다. 쿤타킨테 섬 때문에 찾는 사람이 많아 외국인이 익숙한 모양이었다. 물속에 있던 한 녀석이 우리가 가까이 지나가는 때를 노려 익살맞게 “give me my money!”하고 소리를 질렀다. “nope! it's not yours." 나와 파비오가 거의 같은 말로 장난스럽게 받아치자. 녀석은 대꾸도 없이 ‘그래? 아님 말고’라는 식으로 부러 세차게 물을 첨벙거리며 돌아갔다. 한적한 강변, 바람소리 하나 없이 아이들 노는 소리만 가득한 이 경묘한 풍경을 나는 멀찌감치 서리하듯 사진에 담았다.
멀리 나루터 부두 위에서 손을 흔들고 있는 라민이 보였다. 말도 없이 사라진 손님들 때문에 난감해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걸음을 재촉해 나루터로 갔더니 볼캡에 선글라스를 쓴 날렵한 인상의 뱃사공이 배에 매어두었던 밧줄을 풀어 출발할 준비를 마쳤다. 낡은 모터가 달린 이 동네 평범한 고깃배의 후줄근한 비주얼에 파비오와 스테파니는 잠시 동요한 듯했지만 군말 없이 배에 올랐다. 우리는 배에 있던 오렌지색 구명조끼를 나눠 입고 자리에 앉았다. 사공이 모터에 시동을 걸고 능숙하게 배를 돌려 강 한가운데로 향했다. 라민이 유창하게 가이드를 시작했다.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감비아강은 감비아를 남북으로 가르는 큰 강입니다. 우리가 출발하는 이곳은 감비아강의 북안입니다. 저기 멀리 보이는 반대편 남안까지의 거리는 대략 6킬로미터 정도 됩니다. 쿤타킨테 섬은 이곳에서 동쪽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감비아 강을 거슬러 올라가게 됩니다. 도착까지는 약 15분 정도 걸립니다.”
강폭이 워낙 넓어 반대편이 아득했다. 나는 이렇게 넓은 강은 처음이라 강이라기보다는 되려 바다에 나와 있는 느낌이었다.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보트 위에서 감비아와 이 주변에 대한 라민의 개괄적인 안내를 들었다.
섬 가까이 도착해서 시끄러운 모터를 끄고 잠시 멈춰 고요한 쿤타킨테 섬을 마주했다. 감비아강이 강이라기엔 내게 너무 넓었다면, 쿤타킨테섬은 섬이라기엔 너무 작았다. 굵직한 바오밥나무들이 섬 여기저기 자리를 차지하고 높게 뻗어 있기는 하지만 섬의 한 구석에서 크게 소리를 지르면 섬의 정반대 편에서도 충분히 들릴 수 있을 정도로 그 면적이 애초에 좁았다. 사공이 다시 시동을 걸고 천천히 배를 움직여 섬의 긴 나무 부두 끝에 배를 댔다.
유럽에서 대항해시대가 열린 15세기, 그 선두에 있던 포르투갈의 탐험대가 이 섬에 당도한 이후, 유럽의 여러 원정대들이 소위 대박의 꿈을 안고 아프리카 항로를 따라 하나 둘 이곳으로 왔다. 가는 곳마다 자신들이 그곳을 새로이 발견했다고 믿으며 여기저기 깃발을 꼽고 다녔던 정복자들의 도래는 그들의 알량한 발견이 있기 훨씬 이전부터 기나긴 시간 동안 세대를 이어 이곳에서 살아온 사람들에게 침략이라는 재앙이 되어 모든 것을 뒤바꾸어 놓았다.
여러모로 유리한 조건을 갖춘 이 작은 섬을 거점으로 삼기 위해 수백 년에 걸쳐 빼앗고 뺏기는 싸움이 이어졌고 주인이 바뀔 때마다 섬은 파괴되고 재건되기를 반복하며 점점 더 요새화 되었다. 1664년, 네덜란드로부터 섬을 양도받은 영국은 자신들 왕의 이름을 따서 섬과 요새에 ‘제임스 섬’, ‘제임스 요새’라는 이름을 붙였고, 그 뒤로 영국의 서아프리카 무역 특히 대서양 노예무역의 주요 거점 중 하나가 되었다.
1807년, 영국에서 노예 제도가 폐지되어 노예무역은 공식적으로 불법화되었지만, 노예상인들은 여전히 노예무역이 합법인 다른 나라로의 수출을 위해 막바지까지 최선을 다했다. 1833년, 마침내 섬을 버리기로 한 정복자들은 수감되어 있던 90명의 사람들에게 ‘자유를 위해 반대편 강둑까지 헤엄치라’는 마지막 말을 남겼다. 그러나 물에 빠져 죽지 않고 강을 건너 자유를 되찾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삐걱거리는 부두를 건너 요새의 뒤편이었던 곳에 도착했다. 섬 안으로 접어들자 이제는 폐허로 남아있는 제임스 요새가 눈앞에 황량한 모습을 드러냈다. 무너져 내린 벽 사이로 섬의 반대편이 훤히 보였다. 예전의 요새를 복원해 놓은 모형 앞에서 라민은 이곳저곳을 가리키며 섬의 각 구획들에 대해 설명했다. 폐허 안으로 들어서며 나는 라민에게 물었다.
“그런데 섬 이름이 쿤타킨테로 바뀐 게 언제죠?”
“2011년입니다. 전 대통령 야햐 자메의 초상을 그린 미국의 예술가가 이곳을 방문했을 때 대통령에게 섬의 이름을 쿤타킨테로 바꾸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을 한 것을 계기로 제임스에서 쿤타킨테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그건 좋네요. 세네갈 생루이(St.Louis)에 갔을 때 아무리 오래되어 익숙해진 이름이라고는 해도 그 땅을 식민 지배했던 나라의 왕 이름을 여전히 쓰는 게 도저히 이해가 안 됐거든요.”
요새의 두꺼운 벽들은 상대적으로 보존상태가 온전했다. 라민을 따라 바깥벽 안으로 난 좁은 통로의 계단을 내려가니 천장이 둥글게 움푹 들어간 공간이 나왔다. 서너 평 정도 좁은 공간에는 요새 안쪽으로 난 창이 있었다. 2미터 높이 정도의 천장에 맞닿아 나있는 창은 두꺼운 벽을 따라 바깥으로 갈수록 점점 좁아지는 형태로, 바깥쪽 구멍은 그 크기가 사람 팔 하나 정도 겨우 빠져나갈 정도로 작았다. 애초에 창의 위치가 높고 벽이 두꺼워 혼자서는 창밖으로 손가락 하나 내밀기도 힘든 구조였다. 라민이 창을 등지고 우리를 향해 섰다.
“제임스 요새는 기본적으로 강제로 끌고 온 사람들을 노예로 팔기 전까지 임시로 수용하는 시설이었습니다. 지금 이곳은 요새에 있던 여러 감옥 중에서도 가장 특별한 곳입니다. 잡혀 온 사람들 중 건강한 성인 남성들은 무거운 족쇄에 결박당한 채 그들이 저항할 수 없을 만큼 쇠약해질 때까지 우선 이곳에 수감되었습니다. 우리가 들어온 계단 앞에는 두꺼운 문이 있었고, 창문은 바깥 통로의 바닥과 닿아있어 지나다니는 감시자들의 발 밖에 볼 수가 없습니다. 구조적인 면에서 이곳은 지하감옥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쿤타킨테도 섬에 끌려온 직후에는 한동안 이곳에 수감되어 있었을 겁니다.”
미국의 작가 알렉스 헤일리 소설 『뿌리』는 아프리카의 한 소년 ‘쿤타킨테’가 미국으로 끌려가 혹독한 노예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을 시작으로, 쿤타킨테와 그의 후손들의 발자취를 따라 격변과 혼란 일로였던 미국 역사를 아프로-아메리칸의 삶을 통해 그려낸 작품이다. 알렉스 헤일리는 어린 시절 자신의 외할머니로부터 들었던 아프리카 조상들에 대한 짤막한 이야기들을 바탕으로 오랜 취재와 연구를 통해 이 책을 집필했다. 쿤타킨테의 흔적을 좇아 감비아까지 오게 된 그는 알브레다 바로 옆 마을 주푸레(Juffure)에서 자신이 외할머니에게서 들었던 것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는 한 부족과 마침내 조우하게 된다. 알렉스는 자신이 이들과 같은 혈통을 지닌 쿤타킨테의 후손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고 열정적으로 집필을 이어나가 1976년 마침내 『뿌리』를 완성하였다. 오랜 차별과 핍박으로 지난한 삶을 이어온 아프로-아메리칸의 정체성의 근간을 되짚은 『뿌리』는 미국뿐만 아니라 세계의 많은 독자들을 감화시켰다.
그러나 나는 알렉스 헤일리의 『뿌리』가 아니라 미국 힙합을 듣다가 뒤늦게 쿤타킨테와 알렉스 헤일리에 대해 알게 되었고, 이 섬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켄드릭 라마의 ‘King Kunta'였다.
Stuck a flag in my city, everybody's screamin', "Compton!"
I should probably run for mayor when I'm done, to be honest
And I put that on my momma and my baby boo too
20 million walkin' out the court buildin', woo-woo!
Aw, yeah, fuck the judge
I made it past 25, and there I was
A little nappy-headed nigga with the world behind him
Straight from the bottom, this the belly of the beast
From a peasant to a prince to a motherfuckin' king (oh yeah)
외부로부터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지어졌던 이 요새는 영국이 감비아를 차지하게 되고 노예무역이 호황을 맞으면서 외부의 적이 아닌 내부의 수감자를 감시하고 억압하는 것으로 그 목적이 바뀌어버렸다. 뭍에서 가져온 돌을 쌓아 올려 만든 높고 견고한 벽은 사슬에 묶여 이곳으로 끌려와 갇히게 된 사람들로부터 희망을 빼앗고 그들을 불안과 공포로 몰아넣었을 것이다. 위압적이었을 그 견고함조차 이제는 흔적으로만 남아 침묵하는 폐허를 이리저리 거닐었다.
요새의 반대편, 즉 앞마당으로 나오자 너르고 평평한 모래밭이 나왔다. 라민이 요새와 물가의 중간쯤 되는 한 지점을 가리켰다.
“서너 명씩 사슬에 묶여 감옥에서 끌려 나온 수감자들은 마지막으로 저곳에서 흙탕물로 간단히 세척된 후, 말 그대로 배에 적재되었습니다. 저곳을 넘어 배에 오른 사람들은 다시는 이 땅으로 돌아오지 못했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저곳을 ‘no return point'라고 불렀습니다.”
수세기 동안 대서양 노예무역으로 아프리카 곳곳에서 실려 간 사람의 숫자는 아무리 적게 잡아도 1000만 명이 넘는다는데, 그 많은 사람들 모두 어딘가에서 이것과 비슷한 'no return point'를 넘었을 것이다. 그 ‘돌아올 수 없는 지점’에 가만히 서보았다. 이곳을 건넜을 수많은 심정들을 그저 요연하게 상상해보는 것 외에는 달리 도리가 없었다.
이 작은 섬에서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바다 건너로 실어 보냈을까? 우리는 아직도 그 정확한 숫자를 알지 못한다. 기록된 것 중 가장 긴 수명을 가진 표본은 2000살이 넘는다는 바오밥나무, 이 나무들은 우리의 야만과 폭력이 섬을 뒤덮었던 과거조차 제 안에 오롯이 품고서 조그만 모래섬의 세월을 묵묵히 지키고 있는지도 모른다.
정리되지 않는 생각들에 사로잡혀 멍한 상태로 부두로 돌아왔다. 사공 아저씨가 우리를 기다리는 동안 낚싯대도 없이 줄낚시로 재주 좋게 물고기 한 마리를 잡은 모양이었다. 무뚝뚝한 아저씨는 고작 물고기 한 마리에 대단하다며 호들갑을 떠는 우리들을 보고 그제서야 씨익 웃으며 미소를 보였다.
알브레다로 돌아오자 라민이 서둘러 우리를 박물관으로 안내했다. 박물관에는 족쇄나 사슬부터 노예무역에 관련된 문서, 판매 광고 같은 온갖 사료와, 강제로 잡혀온 사람들이 노예로 팔려 아메리카에 도착하기까지의 수난을 마네킹으로 재현한 것들이 전시되어있었다.
잡혀온 사람들은 철저하게 인간이 아닌 상품으로 취급되었기 때문에 성별, 연령, 건강상태에 따라 꼼꼼하게 분류되어 명수가 아닌 무게 단위로 팔려나갔다. 분류가 끝나고 나면 잡혀온 가족들이 모두 뿔뿔이 흩어져 서로 다른 만리타국으로 팔려갔기 때문에 다시는 만날 수 없었다는 이야기가 내 마음을 짓눌렀다.
우리들은 이리저리 전시들을 들여다보며 궁금한 것들을 라민에게 물었다. 성실하게 답하며 전시에 대해 충분히 부연해준 라민 덕분에 짧은 시간이었지만 박물관을 알차게 둘러볼 수 있었다.
“여러분 안타깝게도 이제 가셔야 할 것 같은데요? 바라로 가는 차가 도착했다고 합니다.”
마을 입구에는 낡은 승합차 한 대가 덩그러니 승객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직 자리도 널널하고 운전기사도 보이지 않는 걸 보니 출발하기까지는 여유가 있는 모양이었다. 라민과 작별인사를 나누고 차에 앉았다. 아침부터 땡볕 아래에서 계속 정신없이 돌아다녔더니 슬슬 피로가 몰려오는 듯했다. 얼마 남지 않은 히비스커스 주스를 비웠다. 파비오와 스테파니도 지쳤는지 가게에서 시원한 물과 샌드 비스킷을 사서 가게 앞 차양 아래에 앉아 먹고 있었다. 차 안이 더워 나도 나와 가게 앞에 철퍼덕 앉았다. 비스킷이 별로 맛이 없는 모양인지 스테파니가 얼굴을 찡그리며 비스킷 껍데기 뒷면의 깨알 같은 글씨들을 애써 들여다보았다.
“빨리 반줄로 돌아가서 뭐라도 좀 제대로 된 걸 먹고 싶다.”
“배 시간이 맞아야 할 텐데 돌아가는 길도 만만치가 않네. 나는 세레쿤다까지 가야 돼.”
“우리도 오늘 세레쿤다로 옮겨야 하지 않을까 싶어. 안 그래 파비오?”
“응. 아무래도 여기서는 거리에 비해 이동시간이 오래 걸리니까. 국경에 조금이라도 더 가깝고 차를 구하기가 쉬운 곳에서 출발해야 할 거 같아.”
“오늘 밤 세레쿤다에서 묵었다가 갈 생각이면 지금 내가 머무는 호텔로 오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야. 방도 많이 남아 있고 큰 길하고 가까워서 국경까지 가는 겔리겔리 잡아타는 것도 문제없을 거고.” 내 덕에 걱정을 덜은 무계획 커플의 표정이 밝아졌다.
“진 네가 세네갈에서 감비아로 넘어온 국경이 내일 우리가 넘어야 되는 국경이지? 세레쿤다에서 세네갈 국경까지는 얼마나 걸릴까?”
“50킬로미터도 안되긴 하는데 중간중간 계속 사람들을 태우고 내려주고 하니까 거의 한 시간 반? 그쯤 걸렸던 거 같아. 세레쿤다에서는 차를 구하기가 쉬우니까 부지런히 움직이면 국경 넘어서 아베네나 카폰틴까지 가는데 아무리 오래 걸려도 네 시간 정도면 도착하지 않을까?”
한 숨 돌리며 국경 얘기를 하다 보니 어느새 만차가 되어있었다. 내내 보이지 않던 운전수가 차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짐들을 이미 지붕 위로 꾸역꾸역 다 올려놓고 차 좌우로 밧줄을 단단히 묶어가며 결박하고 있었다. 이리저리 흔들리고 가다 서다를 반복하는 차 안에서 나는 꾸벅꾸벅 졸았다.
차가 바라에 도착해 번쩍 눈을 떴다. 벌써 6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부리나케 선착장으로 달려갔더니 반줄로 가는 배가 막 떠나고 있었다. 다음 배로 반줄에 도착하면 대충 8시, 세레쿤다 까지 가면 9시가 넘겠다는 생각에 기운이 빠졌다. 배 시간이나 맞았으면 하고 바랐건만 재수도 없다. 내일 아침 일찍 떠나야 하는데...
우리는 투덜거리며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반줄의 선착장과 달리 이쪽은 마땅히 앉아서 시간을 때울만한 곳도 없고 배가 올 때까지 여기 서서 하릴없이 기다리는 수밖에 없어 보였다. 그때 한 건장한 체구의 남자가 말을 붙여왔다.
“안녕? 반줄로 가는 배를 기다리고 있지? 다른 배로 빠르게 가는 건 어때? 그렇게 비싸지도 않아.”
도착 시간만 조금 더 지체될 뿐, 다음 연락선을 타더라도 별다른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 나는 남자의 제안을 딱 잘라 거절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파비오와 스테파니가 마치 구세주를 만난 것처럼 반색을 하며 남자에게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 한꺼번에 외국인 셋을 호객하는데 거의 성공했다고 생각한 남자는 조금 더 공을 들여 차근차근 모터보트를 타고 강을 건너는 과정을 설명했다.
“우선 나는 너희들을 반줄로 데려가는 사람은 아냐. 너희가 타고 가게 될 보트까지 너희를 무사히 데려다주는 게 내 역할이야. 한 명당 50달라시(약 1000원)만 내.”
“보트까지 데려다준다는 게 무슨 말이야? 그냥 내가 보트를 찾아가서 타면 되잖아?”
“옷이 전부 물에 젖어도 상관없다면 그렇겠지. 반줄로 가는 모터보트들은 물 위에 떠있어. 내가 보트를 모는 사람한테서 너희에게 자리를 내달라고 하고 난 다음에 한 명씩 어깨 위로 목말을 태워서 보트까지 데려다 줄 거야. 그렇게 하면 신발 끝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보트에 탈 수 있지.”
“그래도 모터보트를 타고 이 넓은 강을 건넌다고? 위험하지 않을까?”
수영은커녕 물에 제대로 뜨지도 못하는 나는 전혀 내키지 않았다.
“보다시피 연락선이 자주 다니는 게 아니니까 강을 건너다니는 사람들은 다들 이렇게 모터보트를 타고 다녀. 보트에 구명조끼도 있으니까 괜찮아.”
우리는 일단 보트를 보고 나서 탈지 말지 결정하기로 하고 호객꾼 남자를 앞세워 물가로 향했다.
“그나저나 보트 타는 값은 얼만데?”
“음... 30에서 40달라시.” 내 물음에 남자는 허를 찔린 듯 잠시 뜸을 들였다 대답했다.
“야이 씨!” 욱한 내 입에서 순간적으로 한국말이 나왔다.
“보트 값이 30달라신데 네 어깨에 올라타서 몇 미터 가는 게 50달라시인 게 말이 돼? 20달라시로 해줘.”
무지렁이 외국인들인 값을 후렸을지도 모른다는 짐작은 했으나 이렇게 허술하게 들통이 나는 것을 보니 ‘꾼’은 아닌 모양이었다. 남자는 멋쩍게 웃으며 20달라시만 받겠다고 얼버무려 말했다.
바닷가로 나오니 어림잡아 5~60명은 태울 수 있을 것 같은 모터보트 대여섯 척이 물 위에 떠있었다. 뱃일을 보는 사람들과, 물속을 드나들며 분주히 오가는 짐꾼들, 보트를 타러 온 사람들로 주변이 어수선했다. 적당히 간격을 두고 있는 보트들 사이에는 사람 하나 지나다닐 정도 폭의 널빤지가 놓여있었다. 배위를 분주하게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이 짐을 들고 물속을 걸어오는 짐꾼들과 다른 뱃사람들에게 뭐라 뭐라 소리를 질러댔다. 보트에는 사람만 타는 것이 아닌지 포대자루에 담긴 온갖 것들도 함께 배에 싣고 있었다. 보트 바닥에 짐을 차곡히 다 싣고 나서야 그 위로 사람이 탈 수 있었다.
짐꾼들은 사람들이 보이는 족족 달려들어 호객을 했는데 돈을 받고 나면 사람이며 짐이며 전부 뻔쩍 들어다가 보트 위로 옮겨다 놓았다. 우리는 이미 우리를 데려온 짐꾼에게 선점된 것으로 여겨지고 있어서인지 아무도 말을 걸지 않았다.
난생처음 보는 광경에 얼떨떨해하는 것도 잠시 남자가 우리를 다그쳤다.
“자 이제 결정해야 해! 다들 바쁜데 나만 한가하게 이러고 있을 수가 없다고! 탈 거야 말 거야?”
우리를 독촉하는 그의 말과 정신없이 돌아가는 주변 상황에 떠밀리듯 배에 타기로 결정을 하고 60달라시를 건넸다. 나, 스테파니, 파비오 순으로 보트에 태우기로 했다. 그가 나를 어깨에 태우기 전 당부하듯 말했다.
“내가 너희 셋을 보트에 태우고 나면 그걸로 내 일은 끝이야. 하지만 한 가지는 내가 알려주지. 보트가 출발하기 전까지는 절대로 돈을 내면 안 돼. 알겠어?”
말을 마친 그가 무릎을 굽히고 앉아 나를 어깨 위에 태우더니 10여 미터 정도 떨어진 보트를 향해 성큼성큼 물속으로 들어갔다. 난데없이 처음 보는 사람 어깨 위로 목말을 타고 물속으로 들어가 배에 오르는 이 희한한 상황에 저절로 어이없는 웃음이 나오면서도 어딘가 꺼림칙한 느낌이 드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혹여 물에 빠지는 게 아닐까 하는 마음에 몸이 움츠러들자 내가 뒤로 넘어가지 않게 그가 내 팔을 무릎까지 당겨 단단히 잡아주었다. 보트에 가까워지자 그의 가슴팍 언저리까지 물에 잠겼다. 그는 나를 뱃전 위로 사뿐히 올려놓고는 별다른 말없이 스테파니를 데리러 서둘러 돌아갔다.
보트 위에 서서 올라오는 짐이며 사람들을 챙기고 있던 사람이 가장 바깥쪽에 있는 보트를 가리키며 저기로 옮겨 타라고 했다. 내가 방금 올라탄 보트가 수심이 제일 얕은 곳에 떠있어서 일단 여기로 사람들을 태운 뒤 다른 보트로 옮기는 모양이었다. 뱃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아슬아슬하게 널빤지를 건너 보트 두 척을 지나 간신히 가장 끝 보트로 옮겨 탔다. 이미 사람들이 많이 타고 있었다. 자리를 잡고 앉아 돌아보니 스테파니가 긴장한 얼굴로 조심조심 널빤지를 건너고 있었다. 마지막 널빤지를 건너 내 옆에 앉고 나서야 스테파니는 안도한 듯 이 상황이 너무 신기하다며 깔깔 웃었다.
마지막으로 파비오가 보트에 올라 들뜬 표정으로 덤벙덤벙 널빤지를 건너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파비오가 마지막 널빤지에 발을 올리려는 순간 한 사람이 파비오를 툭 건드려 불러 세웠다.
“몇 명이야? 세 명? 150달라시야. 얼른 내 이제 곧 출발하니까.”
파비오가 돈을 내고 우리 쪽으로 와서 앉았다.
“와 이거 굉장한데? 우리 진짜 이거 타고 가는 거야? 정말 믿기지가 않네!”
배에는 어림잡아 80명이 넘는 사람이 다닥다닥 붙어 앉아있었다. 엉거주춤 일어서서 구명조끼를 찾아보았으나 구명조끼는 먼저 탄 사람들이 전부 입어버려서 남은 게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조끼 없이 배 중간쯤에 앉았다. 하필 우리가 앉은자리 아래 포대자루가 움푹 꺼져 있어서 주변의 사람들이 사방을 벽처럼 두르고 앉아있는 꼴이 되었다.
시동이 걸리고 배가 출발했다. 바깥은커녕 뱃머리도 보이지가 않는데 파도에 배가 흔들리기 시작하니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핸드폰을 머리 위로 번쩍 들어 올려 뱃머리 쪽을 향해 사진을 찍어보았다. 찍힌 사진을 보니 다들 짐 위에 앉다 보니 뱃전이 낮아 바깥쪽에 앉은 사람들이 제법 위태해 보였다. 그러나 내 우려와는 상관없이 사진 속 사람들은 하나같이 무심한 얼굴로 자리에 앉아있었다.
다부진 몸매의 뱃사람이 배가 흔들리는 와중에 사람들 사이사이 좁은 틈으로 다리를 쑥쑥 넣어 날렵하게 옮겨 다니며 돈을 걷었다. 배 뒤편부터 한 줄씩 한 줄씩 건너와 마침내 우리가 앉은 줄 뱃전에 우뚝 섰다.
“거기! 외국인 세 명 90달라시!”
“우리 아까 돈 냈는데?” 파비오가 고개를 치켜들고 뱃사람을 향해 따지듯 말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뱃사람이 내밀고 있던 오른손에 쥐고 있던 지폐들을 주머니에 쑤셔 넣고는 우리 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우리 아까 돈 냈다니까? 그것도 150달라시나!”
“뱃삯 받는 사람이 난데 무슨 소리야? 누구한테 냈는데? 어이! 여기 이 사람들한테 돈 받은 녀석 있나?”
돈을 걷던 뱃사람이 목소리를 높여 다른 뱃사람들을 불렀다. 우리도 잽싸게 고개를 빼들고 다른 뱃사람들을 훑어보았다. 그러나 셋 다 파비오한테서 돈을 받아간 사람이 누구였는지 좀처럼 기억나질 않았다. 아무래도 배 안에 없는 듯했다. 온갖 짐이며 사람들 사이를 뚫고 흔들리는 보트 위를 곡예하듯 걷느라 너무 정신이 없었다. 우릴 태워준 짐꾼이 배가 출발하기 전에는 절대 돈을 내지 말라고 했었는데 바로 이 얘기였나 보다. 우리 사기당했다.
사정을 설명했지만 뱃사람은 고개를 저었다. 우리 얘기를 들은 다른 사람들도 당연히 배가 출발하고 나서 돈을 줘야지 아무한테나 무턱대고 돈을 주면 어떡하냐고 바보 취급을 하는 통에 더 따지지 못하고 90달라시를 냈다. 하긴 겔리겔리도 돈을 차가 출발하고 나서 내거나 목적지에 도착해서 내리기 직전에 내는데 보트라고 안 그러겠나 싶었다.
“갓뎀! 어쩐지 돈을 주는데 그 새끼 표정이 뭔가 이상했다니까? 내가 이렇게 당하다니! Bastardo!!”
파비오는 몹시 분해하면서도 허탈한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분명 파비오가 너무나도 허술하게 당한 것은 맞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 영악한 사기꾼의 대범한 수법에 다시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냐. 내가 마지막에 탔으면 분명히 나도 당했을 거야.”
나는 파비오에게 50달라시를 주려고 했지만 파비오는 자신의 실수라며 기어이 받지 않았다.
한바탕 소동이 지나가고 30분 정도 지났을까 터키 발전선이 점점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발전선 옆을 지나 모래사장에 도착하자 그늘에 앉아서 쉬고 있던 짐꾼들이 달려 나와 첨벙첨벙 물로 뛰어들었다. 물에 몸이 반쯤 잠긴 짐꾼들이 뱃전 위의 사람들을 향해 자기 어깨에 올라타라고 등을 보이며 소리를 쳤다. 나는 얼른 배에서 내려 이 광경을 사진에 담고 싶어 다른 사람들처럼 뱃전에 걸터앉아 짐꾼의 어깨 위로 잽싸게 올라탔다. 배에서 모래사장까지는 고작 5미터 정도였다. 돈을 내려고 주머니를 뒤졌더니 10달라시 한 장 밖에 없어서 일단 주고, 10달라시를 더 주려고 가방을 여는 와중에 짐꾼이 별말 없이 그냥 가버렸다.
바라에서 ‘사기당하지 않는 팁’을 알려준 건실한 짐꾼한테 준 20달라시 마저도 팁을 포함한 바가지요금이었던 모양이다. 물론 유용했던 팁을 새겨듣지 못한 우리는 노련한 사기꾼을 만나 대가를 치렀지만...
내가 먼저 내려 사진을 찍는 동안 내내 보트에서 내리지 않고 구경하고 있던 스테파니와 파비오도 주춤주춤 손을 뻗어 짐꾼 어깨에 올라타고 있었다. 모래사장에 무사히 안착한 파비오는 자기를 옮겨다 준 짐꾼과 함께 셀카를 찍었다. 나는 멀찍이 떨어져 있었는데 파비오가 같이 찍자고 졸라서 나도 한 장 같이 찍었다.
해가 채 지지도 않았는데 반줄 시내는 이미 한산했다. 활기 넘치던 아침의 모습이 마치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길에는 사람도 거의 없고, 가게들도 대부분 이미 문을 닫았거나 영업을 마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폐장한 거리를 이리저리 기웃거리며 몇 번인가 허탕을 치다가 넬슨 만델라 스트릿에서 아직 문을 닫지 않은 케밥집을 겨우 발견했다. 종일 차 타고 배 타고 다니느라 제대로 식사를 못했던 터라 우리는 거의 환호성을 지르다시피 하며 가게에 들어갔다. 그러나 우리 말고는 손님도 없고, 카운터 너머 주방 안쪽에서 일을 하다 힐끗 내다보는 사람들의 눈빛을 보니 여기도 마감 중인 것 같았다. 마지못해 카운터에서 수첩을 챙겨 테이블로 주문을 받으러 오는 종업원을 향해 그냥 지금 되는 메뉴 중에 제일 빨리 나오는 걸로 달라고 부탁하여 돌려보냈다. 뭐가 나왔었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기다리는 10여분 동안 내내 ‘배고프다’ 소리만 100번 정도 하고 나서, 마침내 나온 접시 위의 음식을 허겁지겁 말끔히 먹어 치웠다.
밥을 먹고 파비오와 스테파니가 묵고 있던 숙소에 들렀다. 체크아웃을 마친 두 사람이 빵빵한 여행 배낭을 메고 나타났다. 합성섬유 사이사이에 고운 흙먼지가 촘촘히 박혀있는 배낭에는 지난 몇 해 동안 여러 대륙을 넘나들며 생긴 해지고 긁힌 자국들이 군데군데 훈장처럼 남아있었다.
‘아치 22’ 근처에서 지나가는 겔리겔리를 잡아타고 세레쿤다로 돌아왔다. 반줄과 달리 해가 저물고도 복작복작한 세레쿤다의 거리를 스테파니와 파비오는 꽤나 신기해했다. 점원들에게 끊임없이 잔소리를 하는 깐깐한 인상의 인도 사람이 운영하는 마트에 들러 군것질 거리를 사서 숙소로 돌아왔다.
쿤타킨테 섬에 다녀온다며 아침 일찍 나갔던 내가 새로 손님까지 데리고 돌아오자 평소 무뚝뚝했던 숙소 주인도 반기는 기색이었다. 파비오와 스테파니는 반줄에서 머무는 동안 시끄러운 차도 바로 옆 숙소의 4층 객실에서 지냈는데, 고작 하룻밤 마당이 있는 주택가 단층 건물로 옮긴 것을 가지고 내가 보기엔 유난하다 싶을 정도로 만족해했다.
어두침침하고 부실한 샤워실의 낮은 수압과 씨름하며 땀과 흙먼지에 절은 몸을 씻고 톰봉 아저씨 댁으로 갔다. 간단히 작별인사만 하러 들른 건데 자연스럽게 아저씨 가족들과 거실 식탁에 둘러앉아 평소처럼 얘기를 나누게 되었다. 나는 종일 뙤약볕 아래서 히비스커스 주스 한 통에 의지하여 쿤타킨테 섬에 무사히 다녀온 얘기, 돌아오는 길에 모터보트를 탔다가 어처구니없게 사기당한 얘기(아저씨는 매우 안타까워하며 당신 탓도 아닌데 사과까지 하셨다.), 새로 만난 파비오와 스테파니 얘기를 줄줄 늘어놓았고, 다들 한 마디씩 거들어가며 내 얘기를 재밌게 들었다. 적당히 이야기를 끝낸 나는 그동안 베풀어준 친절에 너무나 감사한다는 말로 인사를 마쳤다.
“그래 감비아에는 언제쯤에나 다시 올 텐가?” 마지막으로 나를 배웅하러 나온 아저씨가 장난처럼 내게 물었다.
떠돌이 생활에 아무리 익숙해졌다고는 해도, 작별의 순간 불쑥 마주하게 되는 이 질문에 나는 도저히 요령이 생기질 않았다. “글쎄요.”라며 얼버무리는 내게 아저씨는 짐짓 웃어 보였다. 만나고 헤어짐에 있어 군더더기가 없는, 연륜을 가진 사람의 담백하고도 온화한 미소였다.
“하하하 농담이네. 우리가 어찌 알겠나. 결국 다 인샬라 아니겠나. 그저 건강하시게.”
내게 여행지에 대한 온전한 감상이란 이상하게도 그곳을 떠날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선명해지는 것이었다. 낯선 객지에 머물며 처음 보는 경이로운 것들과 마주하고 별의별 일들이 내 앞에서 벌어지는 와중에도 나는 그냥 좀 멍한 느낌이었다. 항상 무언가 부족한, 실감이라는 것 어딘가에 정체 모를 미세한 구멍이 뚫려 안의 것들이 밖으로 계속 새어 나가는 듯한 느낌. 그런 멍하고 무덤덤한 감각이 내 여행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단 그곳을 떠날 때만 빼고.
떠나는 차에 올라 자리에 앉으면 어느덧 조금 익숙해져 버린 그곳에서 보낸 시간들이 아주 사소한 것들까지 또렷이 떠오르며 설명하기 힘든 어떤 절절한 느낌들을 내게 불어넣었다. 하나씩 하나씩 기억들이 차창 밖 풍경위로 선명히 펼쳐질 때마다, 그것들은 그제야 생기를 얻어 하나의 추억으로 내 안에 자리매김하는 듯했다.
그래서일까 나는 어디에 가더라도 마음 한 구석으로 그곳을 떠나는 순간을 고대하곤 했다. 어딘가로부터 떠나가는 여정이란 또 다른 어딘가에 다다르기 위한 여정이기도 하지만 나는 목적지에 대해서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차창을 스크린 삼아 뒤늦게 밀려오는 이런저런 감상에 흠뻑 빠져들었다. 무심한 내가 서투르게나마 무언가를 느끼고 깨달은 순간들이 있었다면, 그것은 내가 잠시 머물며 마음을 두던 곳으로부터 느릿느릿 떠나가는 바로 그 여정의 시간 속 어딘가에 있었으리라.
모레 즈음 계획대로 감비아를 떠나게 되면, 아니 당장 내일 바세로 가는 버스 안에서, 나는 톰봉 아저씨를 만난 것에 대해 떠올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아저씨가 마지막으로 농담처럼 했던 말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과연 내가 감비아에 다시 올 수 있을까? 아저씨와 다시 만날 날이 있을까? 아저씨와의 만남은 어떤 기억으로 남게 될까? 아저씨와 헤어지고 돌아오는 길, 막연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내가 다시 감비아에 가거나 아저씨를 만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요원하지만 아저씨에 대한 기억이 내게 어떻게 남았는지는 이제 알 것도 같다.
숙소로 돌아오니 약속이나 한 듯 파비오와 스테파니가 샤워를 막 마친 듯 젖은 머리를 털며 밖으로 나왔다. 우리는 리셉션에서 맥주 몇 병을 샀다. 리셉션 건너편 별채에 간단한 휴게공간이 있었지만 안이 너무 어두컴컴해서 그냥 밖에서 마시기로 했다. 모래 바닥이나 다름없는 마당 한쪽에 지면보다 약간 높게 만든 시멘트 바닥 위로 타일을 깔아놓은 곳이 있어 그곳에 앉아 맥주병을 따고 과자 봉지를 뜯었다.
나는 ‘마당이 좁아 차 두 대를 간신히 주차할 정도인데 굳이 왜 이런 걸 만들어 공간을 차지하게 해 놨나’하며 맥주를 들이켜다가 문득 이것의 용도를 깨달았다. 회교도들이 기도시간에 편하게 기도를 하기 위해 마련된 것이었다. 나는 슬며시 맥주병을 손에 쥔 채 자리에서 일어나 리셉션으로 갔다. 무심히 뉴스를 보고 있던 주인에게 내가 앉아있던 곳을 가리키며 쭈뼛쭈뼛 물었다.
“그런데 저기서 마셔도 되나요?” (내가 가리키는 걸 보고 파비오와 스테파니는 앉은 채로 속 편하게 손을 흔들며 싱글벙글거렸다.) 주인은 뭐 이딴 걸 다 물어보냐는 듯 달갑지 않은 표정으로 당연히 안 되지만 이미 밤이 늦어 내일 새벽까지 기도시간이 없으니 또 딱히 상관은 없다고 말해 나를 갸우뚱하게 만들었다. 미련한 이방인들이 몰상식한 짓을 벌이고 있는데도 어쨌든 지금은 상관없다며 용납해준 주인의 태도가 사뭇 비범하게 느껴졌다. 숙소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나 주인 가족들도 조금 신기하다는 눈으로 우리를 보고 지나다닐 뿐, 우리의 불경스러운 맥주타임을 딱히 개의치 않아하는 것 같았다. 너그러움, 무심함, 두려움... 나는 이곳 사람들이 이방인을 대하는 마음의 배합 비율 같은 것을 생각하며 맥주를 홀짝였다.
여행자들이 모여 술을 마시면 대체로 주구장창 여행 얘기만 하게 된다. 어쩌다 보니 2년째 여행을 지속하고 있는 나와, 매번 휴가를 탈탈 털어 이곳저곳을 부지런히 다닌 파비오와 스테파니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작은 핸드폰 화면 위로 머리를 맞댄 채 지난 사진들을 꺼내 보며 각자의 여행 얘기를 늘어놓았다. 낮의 피로 때문인지 몇 병 마시지도 않았는데 다들 거나하게 취했다. 맥락 없이 웃긴 얘기를 하기 시작한 외국인 셋은 여행에서 마주했던 황당한 일들이며 어디 가서 얘기하기 부끄러운 온갖 삽질과 시행착오들을 만취한 술꾼의 언어로 떠들며 낄낄거렸다.
이야기는 자연스레 이번 세네갈-감비아 여행 얘기로 넘어갔다. 우리는 아프리카 여행의 다면성에 관한 얘기를 한참 나눴다. 이를테면, 천혜의 자연경관과 야생동물들의 낙원과도 같은 사파리를 기대하고 대륙을 건너온 이들이, 해양쓰레기로 뒤덮인 해변과 선진국에서 버리다시피 팔아치운 낡은 자동차가 내뿜는 매연냄새 가득한 도시를 마주하게 되는 마비적인 충격과도 같은 것들에 대한 얘기랄까?
어느 곳을 가더라도 여행은 근본적으로 복잡한 세상의 온갖 면면과 조우하는 일이다. 행선지를 정하고 몇 가지 목표들을 하나하나 차분히 적어 내려가며, 상상력을 총동원해 여행지에서 자신이 겪게 될 것들에 대해 예상해 본들, 그곳을 다녀오는 과정에서 마주하게 될 뜻밖의 것들까지 전부 상상할 수는 없다. 여행 중간중간, 바람에 솜털이 날려 볼을 간질거리며 지나가는듯한 느낌을 주는 것들부터, 불시에 정면에서 비수가 날아와 가슴팍에 퍽하고 꽂히는 것만 같은 충격을 주는 것들까지, 세상의 온갖 면면이 번뜩번뜩 모습을 드러내 우리에게 서어하고 괴이하고 불투명하고 엉성하고 꺼림칙하고 경박하고 아득한 느낌을 주는 정체 모를 일격을 가한다. 나는 그 보이지 않는 뜻밖의 일격인지 뭔지를 받아들이는 자세 어쩌구 하는 얘기를 술에 취해 횡설수설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너는 굉장히 serious 하게 여행을 하는 스타일인 거네?” 잠자코 내 헛소리를 듣던 스테파니가 고맙게도 내 말을 끊어주었다.
“응. 나름 serious하지. 그런데 말야 serious가 한국어로는 조금 뜻이 달라. ‘제대로 꽉 잡는다’(진지하다에서 진지의 의미, 참'진'眞 잡을'지'摯)는 뜻이야. 영어로 serious disease는 괜찮지만 한국어의 serious는 그렇게 쓰면 어색해. 어떤 느낌인지 알겠어?”
설명이랍시고 내뱉은 말에서는 여전히 술 냄새만 진동했다.
“‘제대로 꽉 잡는다’라 그게 왜? serious 한 거지? 난 잘 이해가 안 가는데?”
“지금 내 앞에 있는 거, 보이는 거, 내가 느끼는 거, 생각하는 것들을 제대로 움켜잡는 건 serious 한 태도가 아니면 할 수 없는 거니까. 지금 내가 구글 번역기며 사전까지 동원해가며 너희랑 대화하는 것도, 열심히 술병을 비우는 것도 어떻게 보면 굉장히 serious 한 거란 말이지. 한국어의 serious에는 heavy 하고 deep 한 것만 있는 게 아니라 웃음도 있고 유쾌함도 있고 경박함도 있어. 아니 그런데 내가 이 얘기를 왜 하고 있지?”
“그거야 너가 serious 한 여행자니까 그렇지.” 파비오가 놀리듯 말했다.
“그래! serious 한 여행 얘기였지. 그러니까 내가 생각하는 내 여행의 방식이란. 우연히 마주한 뜻밖의 것들을 이상하다고 아예 못 본 척 외면해 버리거나 괜히 오버해서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그저 느낀 대로 ‘제대로 꽉 붙잡아’ 간직하고 싶다는 의미에서 serious 한 것이라는 말이야. 뻔한 걸 상상하고 뻔한 걸 기대하고 뻔한 감상에 빠지고 도취되는 건 지긋지긋해. 난 이제 그런 것 앞에서는 오히려 등을 돌리는 사람이 되어버렸을 정도로 말야.” 한바탕 일장연설을 마치고 할 말이 동나버려 뻘쭘해진 나는 병 안에 남은 술을 단숨에 비웠다.
“너 되게 재밌는 녀석이네? 꼭 옛날 중국 영화에서 나오는 하얀 수염을 가지런히 기른 마스터들이나 수도승이 말하는 알쏭달쏭한 얘기 같아.”
지금이야 맨정신으로 기억나는 것들을 그나마 말이 되게 옮겨 썼으니 망정이지, 처음 보는 외국인이 꼬인 혀로 중언부언 어쭙잖은 말을 늘어놓으며 술주정을 부린 것이 두 사람에겐 꽤나 가관이었을 거다. 그러나 이 둘도 제대로 기억을 할지는 모르겠다. 두 사람도 내내 내가 이해 못할 이상한 농담을 자기들끼리 주고받으며 꺽꺽거리며 웃거나, 갑자기 핸드폰으로 노래를 틀어 크게 따라 부르는 둥 만만치 않은 술주정을 보였다.
전원이 만취한 술자리가 보통 그러하듯 우리는 이렇다 할 인사도 없이 비틀비틀 방으로 돌아갔다. 나는 배낭을 싸려다 관두고 침대에 누워 헤드폰을 끼고 윌리엄 바신스키의 'Cascade'를 크게 틀어 몇 분인가 듣다가 빨려 들어가듯 잠에 들었다.
이른 아침 간신히 알람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깬 나는 허겁지겁 짐을 싸 배낭을 짊어지고 방을 나왔다. 아무도 없는 리셉션 테이블 위에 방 열쇠를 올려두고 숙소를 나섰다. 골목 모퉁이를 돌자 차가운 아침 공기 사이로 막 가게 문을 열고 장사 준비를 하는 우바카 아저씨가 보였다.
“저 이제 가요.” 몸을 돌려 아저씨한테 배낭을 보이며 내가 말했다.
“어이구 짐이 엄청 많네? 말리로 간다고 했던가?”
“네. 그런데 오늘은 일단 바세까지 가요. 말리 다음에는 기니로 가보려고요. 아저씨 덕분에 확실히 정했어요.”
“말리는 정말 터프한 곳이야 조심해야 해!”
“아무렴요! 아저씨가 만들어 준 파스타 생각 많이 날 거예요. 안녕히 계세요.”
문득 아쉬운 마음이 들어 아저씨에게 사진 한 장 찍어도 괜찮겠냐고 불쑥 말을 꺼냈다. 아저씨는 흔쾌히 그러라며 포즈까지 취해주셨다. 가게 앞에서 엄지를 치켜세운 채 옅은 미소를 머금은 아저씨의 모습을 고마운 마음으로 사진에 담았다. 조심히 잘 가라는 아저씨의 인사를 뒤로한 나는 느릿느릿 숙취로 무거워진 발걸음을 옮겨 버스터미널로 향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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