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objActivity Oct 20. 2021

감비아에서 만난 사람들 #6 (The Gambia)

2018/04 서아프리카, 감비아, 바세산타수(Basse Santa Su) → 세네갈, 탐바쿤다(Tambacounda) → 말리, 바마코(Bamako)


  우바카 아저씨와의 작별인사가 겸연쩍게도 세레쿤다에서 떠나지 못하고 하루 더 머무르게 되었다.


  터미널에는 제때 도착했다. 버스 출발시간인 8시를 십여 분 정도 남겨두고 있었다. 터미널 안으로 들어서니 가지런히 주차되어 있는 초록색 버스들이 눈에 띄었다. 서울의 지선버스나 마을버스와 똑같은 색깔인 것이 괜히 반가웠다. 게다가 생각보다 버스의 상태가 좋고 말끔했다. 한 달 넘게 셉플라스나 겔리겔리 같은 낡아빠진 차에 몸을 구겨 넣고 다니며, 행여 사고라도 나면 어쩌나 매번 마음을 졸였었는데 모처럼 제대로 된 버스를 타게 된 것이 퍽 안심이 되었다.

  매표소 창구는 닫혀있었다. 정문의 경비원에게 물어보니 버스기사에게 직접 요금을 지불하면 된다고 했다. 일단 사람들이 몰려있는 버스 쪽으로 갔다. 승객들의 짐을 짐칸에 차곡차곡 밀어 넣고 있던 직원에게 다가가 물었다.

“이거 바세 가는 버스인가요?”

“바세? 바세 가는 버스는 벌써 떠났는데?”

“네? 벌써 갔다고요?”

“바세까지 가는 건 아침 6시에 출발하는 한 대 밖에 없어요. 내일 오셔야겠는데?”

“6시요? 8시에 출발하는 거 아니었어요?”

Gambia Trasport Service Company의 신형 버스, https://www.gtsc.gm/


  사정은 이러했다. 톰봉 아저씨가 GTSC 터미널에서 아마 오전 8시쯤 바세로 가는 버스가 있을 거라고 말해 주셨는데 그걸 내가 재차 확인하지 않은 탓이었다. 터미널에 전화해보거나 숙소 리셉션에 한 번 물어라도 봤으면 됐을 것을 또 이렇게 삽질을 하고야 말았다. 배낭을 대충 벗어 내던지듯 놓고 모래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숙취에 시달리는 와중에 부지런 떨어서 기껏 왔는데 이게 뭐람. 허탈함과 피로가 동시에 몰려왔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내일 표라도 미리 예매해둘까 했는데 9시는 넘어야 직원들이 오기 시작할 거라는 경비원의 말에 그냥 돌아가기로 했다. 곧장 숙소로 돌아가면 파비오랑 스테파니한테 작별인사라도 할 수 있겠지. 아침부터 기운만 잔뜩 뺐다. 다시 배낭을 짊어지고 터덜터덜 숙소로 향했다.


  불과 30분 전에 사진까지 찍어가며 작별인사를 나눈 우바카 아저씨네 가게에 불쑥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아저씨 저 왔어요! 샌드위치 하나요.” 아무 일 없단 듯 평소처럼 가게에 들어서며 능청맞게 주문을 했다.

“왜 다시 왔어? 떠나는 거 아니었어?” 가판대 너머에서 등을 돌린 채 물건을 정리하고 있던 아저씨가 놀란 얼굴로 돌아보았다.

“그게... 가보니까 버스가 진즉 떠나고 없더라고요. 콜라도 한 병 주세요. 힘드네요. 아침부터 이거 짊어지고 왔다 갔다 했더니.”

  아저씨한테서 샌드위치와 콜라를 받아 들고 숙소로 돌아왔다. 숙소 주인네 큰 딸이 리셉션 테이블 안쪽에 앉아 TV를 보고 있었다. 아까 내가 두고 간 방 열쇠가 리셉션 데스크에 그대로 있었다.

“아직 저 있던 방 안 치웠죠? 버스를 못 타 가지고 오늘 하루 더 묵어야 할 것 같아요.”

“네네 이따 아버지한테 말씀드릴게요.” 큰딸은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TV에서 눈도 떼지 않고 건성으로 대답했다.


  방으로 돌아왔다. 눈 뜨자마자 급하게 나간 흔적 그대로였다. 배낭을 방구석에 던져두고 침대에 드러누웠다. 그래도 며칠 지냈다고 익숙해졌는지 편하고 아늑한 느낌이 들었다. 아침에 혼자 쌩쑈한 것도 이제 아무렇지 않았다. '내일 가면 되지 뭐, 이런 적이 한두 번도 아니고. 그런데 오늘 뭐하지?' 이제 겨우 9시를 넘긴 참이었다.


  멍하니 누워서 한 숨 돌리고 있는데 창밖으로 파비오와 스테파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층계참으로 나가 두 사람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너네 이제 가?”

“응 슬슬 출발하려고. 그런데 너 오늘 아침에 일찍 떠난다고 하지 않았어? 늦잠 잔 거야?” 스테파니가 환한 얼굴로 물었다. 두 사람 다 간밤에 잘 쉬었던 모양인지 활기찬 이탈리아 사람으로 돌아와 있었다.

“내가 버스 시간을 잘못 알았어. 터미널까지 갔는데 벌써 가고 없더라고.”

“그럼 하루 더 있는 거야?”

“응. 버스가 하루에 한 대 밖에 없어.”

“잘됐다! 나 부탁 하나만 하자.” 리셉션으로 짐을 옮기던 파비오가 문득 생각난 듯 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뭔데?”

“엽서 하나만 보내주라. 우표는 다 붙여뒀어 우체국에 가서 보내기만 하면 돼.”

“엽서? 무슨 엽서?”

“집으로 보낼 엽서야. 난 기념품 대신 집으로 엽서를 부치거든 그런데 아무래도 우체국에 들를 시간이 없을 것 같아서 말야.”

파비오가 가방에서 노트를 꺼내 그 안에 끼워두었던 엽서를 꺼내 보란 듯 팔랑거렸다. 배낭에서 책을 한 권 꺼내 들고 1층으로 내려갔다.

“그냥 우체국에 가서 보내기만 하면 되는 거지? 이따 오후에 가볼게.”

파비오가 건넨 엽서를 살폈다. 아마 이탈리아어로 급하게 휘갈겨 쓴 글씨가 빼곡했다. 엽서 한 귀퉁이에는 새가 그려진 우표가 몇 장 붙어있었다. 엽서를 뒤집자 감비아 해변 사진을 배경으로 'THE GAMBIA'라고 쓰인 형광색 글씨가 인쇄되어 있었다. 폰트와 색의 조합이 눈에 거슬릴 정도로 촌스러웠다. 책을 펼쳐 엽서를 조심스레 끼워 넣었다.

“어디서 이런 걸 잘도 구했네.”

“기념품으로는 이런 게 딱이지. 잘 도착해야 할 텐데. 어느 나라였더라? 전에 엽서가 아예 안온적도 있어서 걱정이야.”


  두 사람은 리셉션에 옮겨다 놓은 짐을 정리하며 잊은 물건이 없는지 확인하고 떠날 채비를 했다. 체크아웃까지 끝낸 두 사람이 배낭과 백팩을 앞뒤로 메고 길을 나섰다. 대문 앞까지 배웅을 나갔다.

“출국이니까 별 문제는 없겠지만, 그래도 지보로 국경에 가면 조심해.” 감비아에 입국할 때 곤혹스러운 일을 겪었던 나는 노파심에 재차 당부했지만 두 사람은 듣는 둥 마는 둥 손을 흔들며 골목 모퉁이를 돌아 사라졌다. 방으로 돌아와 한소끔 눈을 붙였다.



  정오나 되었을까 바깥에서 들리는 요란한 소리에 잠에서 깼다. 무언가를 정신없이 두들기는 소리, 왁자지껄한 아이들 소리가 창문으로 흘러들어왔다. 층계참으로 나가보니 골목 저편에서 뿌연 흙먼지가 소란과 함께 이 쪽으로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난 건가 싶어, 계단을 뛰어 내려가 숙소 대문 밖으로 나갔다. 골목에는 이미 사람들이 많이 나와 있었다. 이내 골목 모퉁이를 돌아, 한 무리의 사람들이 등장했다. ‘아니 저게 뭐지?’ 사람들의 선두에는 내가 가진 언어로는 도깨비라고 설명할 수밖에 없는 존재가 커다란 칼을 춤추듯 휘두르며 다가오고 있었다.

  도깨비는 사자놀이할 때 뒤집어쓰는 사자가면에 달린 털 같은 것이 온몸에 덮여있었다. 도롱이 같아 보이기도 하는데 그것보다는 훨씬 풍성했고 색도 강렬한 노란색이었다. 이 도깨비는 사자가면의 익살맞음과는 굉장히 거리가 먼 모습이었는데, 그것은 도깨비의 머리가 뿔이 길게 솟은 동물(아마도 염소)의 해골인 데다, 흡사 마체테 같은 둔중한 칼을 연신 휘두르며 발을 구르기도 하고 알 수 없는 소리를 내지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머리로는 안에 사람이 있다는 걸 알았지만 얼굴이 전혀 보이지 않았기에 도깨비의 정면이 내 쪽을 향할 때마다 섬뜩한 위압감이 들었다.

  도깨비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은 신기하게도 대부분 아이들이었다. 아이들은 들고 있는 나무 막대기나 플라스틱 양동이를 요란스럽게 두들기며 리듬에 맞춰 구호인지 노래인지 나로서는 알 수 없는 것을 함께 합창을 하면서 도깨비를 따라 걸었다. 도깨비는 사람들 주변을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걷고 뛰기를 반복하고 있었는데, 그러다 갑자기 몸을 휙 돌려 아이들 쪽으로 달려들면 아이들은 꺅꺅 소리를 지르며 사방팔방으로 정신없이 도망쳤다. 그러나 도깨비가 다시 차분히 앞장을 서면 아이들은 다시 한데 모여 도깨비의 뒤를 따랐다.


  내 앞을 지나쳐 골목 반대편을 따라 점점 멀어지는 도깨비와 이이들을 보며 ‘도대체 방금 무엇이 지나간 것인가? 이건 당최 무슨 일인가?’ 어리둥절해하고 있었다. 옆에서 같이 이 소동을 지켜보던 숙소 직원 아저씨는 다시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그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서며 아저씨한테 물었다.

“저 칼 든 귀신? 몬스터? 는 뭐예요? 무슨 세레모니 같은 건가요?” 내 말에 아저씨가 껄껄 웃었다.

“저건 칸쿠랑(Kankurang)이야. 우리 만딩카 소년들의 성인식을 관장하는 영험한 존재지. 지금은 숲에서 며칠 동안 무사히 의식을 마치고 이제는 진짜 만딩카 남자가 된 아이들을 집까지 데려다주면서 아이들 주변에 있을지 모를 악한 기운들을 쫓아내는 거야.”

“숲에 있는 동안에는 뭘 하나요?”

“엄격하게 부족의 전통과 규율을 가르치고 그것을 지키고 따르고자 하는 마음을 갖도록 돕는 거지. 그래야만 진정한 만딩카 남자가 될 수 있어. 아이들은 아직 어린 나이지만 칸쿠랑과 의식을 하고 나면 만딩카 공동체에서 한 사람의 어른으로 받아들여지는 거지.”

“그럼 아저씨도 어릴 때 했겠네요?”

“물론이지! 나 어릴 때는 지금보다 훨씬 터프했어!” 아저씨는 재차 웃음을 터뜨리며 대답했다.

칸쿠랑(Kankurang), https://ich.unesco.org/en/RL/kankurang-manding-initiatory-rite-00143
칸쿠랑에게 압도되어 정면에서는 사진 한 장 못 찍었다

  숲 속에서 정령인지 도깨비인지 모를 무서운 존재와 함께하는 며칠이라... 칸쿠랑의 외형 때문인지 여러 가지 괴이한 상황과 장면들이 그려졌다. 그러나 단순하게 들여다보면 보이스카웃 캠프랑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칸쿠랑은 까다롭고 엄격하기 그지없는 대장이고... ‘한 사람의 어른으로 받아들여진다.'는 아저씨의 말이 한참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 말에 칸쿠랑과 의식을 보이스카웃 캠프와는 전혀 다른 것, 의례로서의 어떤 의미심장함이 있는 것으로 만드는 힌트가 있는 것만 같았다.

  아이들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보호를 받고 동시에 아이들만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공동체에 기여하며 자랐을 것이다. 그 아이들에게 의식을 통해 ‘이것으로 이들의 존재는 어른으로 받아들여졌다.’는 선언하는 것의 의미를 생각해본다. 물론 의식을 거쳤다고 해서 아이들이 별안간 어른의 신체, 지식, 경험을 갖게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의식은 아이들에게 자신들이 공동체 내에서 어른으로 받아들여진 존재라는 상징적 표식을 부여한다. 아이들은 그렇게 유년기의 경계를 넘어선다. 삶이 저마다 다른 궤적을 그리며 흘러가더라도 그것은 이미 충분히 어른의 삶인 것이다.


  나는 언제 한국에서 어른으로서 받아들여졌을까? 주민등록증을 받았을 때? 고등학교를 졸업했을 때? 성년의 날, 꽃다발과 향수를 선물 받았을 때? 군대 전역했을 때? 아니면 직장에서 첫 월급 받았을 때? 잘 모르겠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키우게 되면 어른이 되는 걸까? 아니다. 여전히 뭔가 부족한 느낌이다.

  적어도 내가 겪은 삶에서는 나를 어른으로 만들어 준 의례나 절차가 없었던 것 같다. 어쩌면 유년기가 끝없이 이어지고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다. 매일 쏟아지는 새로운 지식, 새로운 기술, 새로운 직업, 새로운 상품, 새로운 경험들을 기꺼이 받아들여 그것들을 능숙하게 다룰 수 있고 소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라는 명령이자 엄포가 담긴 기호들의 기습만이 끊임없이 이어져왔던 것 같다. 이 명령을 충실하게 따르며 남보다 빨리 성공적으로 해내는 사람들을 어른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우리들은 결코 어른이 될 수 없을 것이다. 모든 것이 너무나도 빨리 일관성 없이 변하고 뒤바뀌기 때문이다. 어떤 지식이나 기술은 금방 쓸모없는 것이 되어 버리고, 어떤 직업들은 손쉽게 대체되거나 사라지고, 유행은 지극히 일시적이다.

  고정된 공동체적 정체성, 가치, 준거들이 흐릿해져 버린 사회에서, 한계 없는 가속과 변화만을 추구해온 결과로, 우리는 어떤 고정점도 부여받지 못한 채, 결코 그 끝을 알 수 없는 유년기를 영원히 살아가게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 무엇이든 될 수 있고, 할 수 있다는 유년기적 가능성으로부터 끊임없이 채근당하는 삶은 결코 불안과 방황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인간의 생은 한번뿐이고 수명은 유한한데, 평생 불안과 방황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알량한 소비주의적 자유 말고 우리 삶에 남는 게 도대체 뭘까?

  숙소 마당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위키피디아와 유네스코에서 칸쿠랑에 대한 소개 글을 찾아 읽으며, 사람을 결코 어른에 도달할 수 없게 이리저리 끊임없이 몰아가는 사회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은 것 같다고 막연히 생각했다.



  오후 내내 빈둥거리다가 파비오가 부탁한 엽서를 부치러 느지막이 나섰다. 구글 지도로 찾아보니 우체국은 다행히 1km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자주 지나다닌 대로변에 있어서 차를 잡아타거나 누구한테 물을 것도 없이 설렁설렁 걸어갔다.

  지도에 표시된 우체국을 찾아갔더니 허름한 슬레이트 건물이 나왔다. 건물 벽을 빙 둘러 칠한 빨간, 파란색이 눈에 띄었다. 아마 빨강, 하양, 파랑이 감비아 우체국의 상징색인 모양이었다. 어디서 어떻게 우편을 보내야 하나 알 수 없어 무작정 건물 바깥을 빙 돌다가 사무실 문 옆 벽에 구멍을 뚫어서 만들어 놓은 우편 수거용 창구를 발견했다. 구멍 위에는 수거시간을 알려주는 안내문이 붙어있었다. 지금은 목요일 오후 5시 20분, 파비오의 엽서는 10분 뒤에 수거되어 월요일에나 발송될 모양이다. 엽서가 룩셈부르크까지 무사히 도착하기를 기원하며 엽서를 넣고 우편함 사진을 찍어 메신저로 파비오에게 전송했다. 그 두 사람은 지금쯤 붉은 흙먼지를 뿌옇게 날리는 셉플라스를 타고 카폰틴이나 아베네로 향하고 있을 것이다.

벽에 구멍을 내서 만든 우편 수거함, 난데 없이 나타난 LG 매장

  엽서는 아마 배에 실려 유럽으로 가겠지? 그나저나 룩셈부르크는 바다가 없는데 어떻게 거기까지 가려나? 같은 EU니까 스페인이나 프랑스로 가는 배에 실려 가려나? 아니면 벨기에? 상상 속 지도를 펼치고 감비아에서 룩셈부르크까지의 경로를 이렇게 저렇게 그려보았다. 엽서가 세레쿤다 우체국을 떠나 파비오네 집 우편함에 들어가기까지의 여정을 지켜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우체국까지 나간 김에 터미널에 다시 들러 내일 아침 바세로 떠나는 버스표를 미리 사두었다. 출발은 오전 6시, 동이 채 트기도 전에 숙소를 나와서 깜깜한 거리를 걸어야 하는 게 조금 불안하지만 어쩔 수 없다.


  다시 숙소로 돌아가는 길, 뒤에서 누가 큰 소리로 나를 불렀다.

“헤이 차이니즈! 헤이 웨잍! 헤이!”

‘또 뭔데 나를 불러 세우시나’ 하고 못마땅하게 돌아봤더니 인상 좋은 사내가 경쾌한 걸음으로 성큼성큼 나에게 다가왔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나 중국사람 아닌데?”

사내는 흠칫 놀란 얼굴로 나를 훑어보더니 상관없다는 듯 말을 이었다.

“그래? 그럼 어느 나라 사람이야? 나는 네가 중국 사람인 줄 알고 반가워서 인사하려고 했어. 일 때문에 중국에 다녀온 적이 있거든.”

“사우스 코리아!”

퉁명스러운 내 대답에도 사내는 오히려 반색을 표했다.

“아! 한국 사람이구나! 한국도 핸드폰 잘 만들지! 내가 저 앞에서 핸드폰 가게를 하거든, 중국에서 물건을 많이 들여오니까 네가 중국 사람인 줄 알고 혹시 더 싸게 살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너한테 물어보려고 했어. 그나저나 바빠? 내 가게 구경하고 갈래?”

내가 대답을 채 하기도 전에 사내가 앞장을 섰다. 얼결에 바로 옆 길가 가게로 들어갔다.


  넓지는 않지만 제법 구색을 갖춘 가게 안에는 2G 폰부터 스마트폰까지 제법 많은 물건들이 가지런히 진열되어 있었다. 대부분 중국에서 온 것들이었다. 특히 TECNO 제품이 많았다. 중국 핸드폰은 아프리카 시장을 그야말로 쓸어 담고 있는데, 그중에도 매우 저렴하면서 로컬라이징을 적극 반영한 기술과 기능을 탑재한 TECNO의 점유율이 높다. 아프리카 밖에서는 아무도 모르는 브랜드지만 여기서는 이게 원탑이다. 대부분의 핸드폰에 듀얼 심카드 기능이 있어 국경을 넘을 때도 편리하고, 아프리카 어느 나라에서든 수리점을 찾을 수 있어. 장기간 아프리카를 여행하는 여행자들한테도 인기가 많다.

  건성으로 가게를 둘러보는 나를 앞에 두고, 사내는 구매루트를 뚫느라 칭다오인가 톈진인가를 몇 번 다녀왔다는 이야기를 시작으로 자기 얘기를 줄줄 늘어놓았다. 별 다른 계획이 없었던 나는 잠자코 앉아 그의 얘기를 들었다. 흥미가 동하는 얘기는 아녔지만, 장사하는 사람 특유의 달변가 느낌이 있어서 듣는 재미가 있었다.

  제법 긴 얘기를 전혀 막힘없이 늘어놓는 걸 보니 아마 주변의 다른 사람들한테도 몇 번이고 같은 얘기를 되풀이했던 것 같다. 그는 중국 방문기며 사업 얘기를 한바탕 늘어놓고 나서야 나에 대해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 뻔한 질문과 대답이 몇 차례 오고 갔다. 나는 슬슬 나갈 눈치를 보고 있었다.


“감비아에 직접 와서 여행해보니 어땠어? 감비아에는 얼마나 더 있을 예정이야?”

“너무 좋았지. 이제 슬슬 떠나려고. 내일 바세로 가거든 거기서 다시 세네갈로 넘어갔다가 말리까지 가 볼 생각이야.”

“바세? 바세산타수? 이것 참 재밌네. 내가 바세 출신이야! 잠깐 기다려봐.”

그는 갑자기 탁자 위에 놓여있던 핸드폰을 집어 들어 버튼을 꾹꾹 눌러 어디론가 전화를 걸고는 귀에 가져다 댔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다른 손으로 나에게 잠시 기다려 보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이윽고 통화가 연결되었는지 그는 전화기 속 너머의 누군가와 내가 알 수 없는 언어로 몇 마디 말을 주고받더니 금세 전화를 끊었다. 통화를 마친 그가 가게 탁자 위의 영수증 전표를 아무렇게나 찢어 뒷면에 뭔가를 적으며 말했다.

“재밌는 우연이네 안 그래? 바세라니... 나도 바세에 다녀온 지는 제법 오래되었는데 말야. 바세에 내 가족들이 있어. 여기 내 동생 전화번호를 줄게 내일 도착하면 곧장 이 녀석한테 전화해.” 그가 내민 쪽지에는 대충 휘갈겨 쓴 전화번호가 적혀있었다.

“바세에서 네 동생을 만나라고? 만나서 뭘 어쩌라고?”

“바세는 여기에 비하면 완전 시골인데 한 명이라도 아는 사람이 있는 게 좋잖아? 너 국경도 넘어야 한다며, 걔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을 거야. 도착해서 그 번호로 전화하면 우리 삼촌네 가게를 알려줄 거야 거기서 만나면 돼. 버스 내리는 곳 바로 근처니까.”

  우연히 도움을 받게 된 쪽은 나인데, 오히려 그가 눈을 반짝 거리며 이 조우에 감격하는 눈치다. 그가 준 쪽지를 접어 지갑에 넣으면서도 괜히 미덥지 않은 기분이 들었다. 해가 저물고 있는 것을 핑계로 이제 가봐야겠다며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그래 내일 아침 버스지? 조심해서 가고 내 동생한테 꼭 전화해!”


  돌아오는 길에 톰봉 아저씨네 댁에 들를까 하다가 버스를 놓친 일 때문에 아저씨가 미안해하실 것 같아 관두었다. 그냥 우바카 아저씨네 가게로 갔다. 평소와 달리 조용히 밥을 먹었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괜히 쪽지에 적힌 번호로 전화했다가 나쁜 일 당하는 거 아냐?’, ‘그냥 전화하지 말까?’, ‘뭔가 나쁜 의도가 있었으면, 확실히 엮으려고 내 연락처도 물어봐서 바세 쪽에 알려줬어야 하는 거 아닌가? 왜 내 연락처는 안 물어봤지?’, ‘그냥 내일 가서 생각하자 아직 무슨 일이 일어난 건 아니니까’

  한국에서 누가 길을 가는 나를 붙잡아두고 주절주절 이야기를 하다가 자기 동생한테 전화해보라는 말을 했다면 나는 그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을 거다. 동생 얘기는 나오기도 전에 이미 “아 예 수고하세요.”하고 자리를 뜨고도 남았을 것이다. 뭐든 혼자서 해결하는 것이 편하고 익숙한 나에게 이런 낯선 방식의 친절과 환대는 어지간히 난감한 것이다.

  그러나 친절과 환대를 멋대로 속단하지 않고 인색하지 않게 받아들이면, 우연으로부터 무작정 도망부터 치지 않고 조심스레 그것에 기대 보면, 꽤나 재미있는 순간들과 마주하게 될 가능성이 생겨난 다는 것을 길 위에서 배웠다.

  아무리 멀리 여행을 떠나더라도, 지금껏 살아온 시간과 공간의 중력에서 벗어나기란 좀처럼 쉽지 않다. 그 완고함을 누그러뜨려 슬그머니 제쳐두지 않으면 바로 눈앞에 두고도 결코 조우할 수 없는 것들이 세상에는 정말 많이 있다.

  생각이 많은 채로 대강 저녁을 먹고 아저씨한테 다시 잘 지내시라는 인사를 하고 가게를 나섰다. 우바카 아저씨와의 두 번째 작별은 아침에 비해 조금 싱겁게 끝나고 말았다.



  오전 5시로 맞춰둔 핸드폰 알람 소리에 벌떡 일어나 졸린 눈으로 주섬주섬 짐을 싸고 다시 배낭을 멨다. 아무도 없는 컴컴한 리셉션 데스크에 방 열쇠를 올려두고 대문을 나서 터미널로 향했다. 낮에는 그렇게나 복작복작한 동네였는데 어두컴컴한 길에는 간간히 차만 쌩쌩 지나다닐 뿐 아무도 없었다. 낡은 디젤차의 매캐한 매연도 뿌연 흙먼지도 없는 새벽 공기에 콧속이 시원해지는 것을 즐기며 천천히 걸었다.

  터미널에는 이것저것 잔뜩, 이고 지고 온 사람들이 버스 앞에 몰려있었다. 검표를 하고 화물칸으로 갔다. 직원이 어디까지 가냐고 물었다. 바세라고 했더니 내 배낭을 가장 안쪽에 쑤욱 밀어 넣었다. 버스는 겉모습만큼이나 내부도 깔끔했다. 세네갈부터 내내 정원초과가 기본인 차에 몸을 구겨 넣고 다니던 게 몸에 배었는지 몸도 돌릴 수 있고 다리도 뻗을 수 있는 좌석이 너무나도 아늑했다. 내 옆자리에는 전형적인 서아프리카 무슬림 복장에 하얀 쿠피(kufi) 모자를 쓴 노년의 신사가 앉았다.

  만석을 채운 버스가 이내 출발하고, 금방 세레쿤다 시내를 빠져나와 사우스 뱅크 로드에 접어들었다. 감비아 동쪽 끝 바세까지는 340km, 대략 7시간 정도가 걸릴 예정이다. 한동안 창밖의 어스름을 멍하니 들여다보다가 이내 잠들었다.


  노면이 울퉁불퉁해서 버스가 덜컹거리거나, 중간 기착지에서 사람들이 타고 내릴 때마다 잠깐 눈을 떠 차창의 커튼을 살짝 젖히고 바깥을 살피다 다시 잠들기를 반복했다. 시간이 정오에 가까워질수록 차창 주변의 열기가 강해지는 것을 느꼈다. 좌석에 기댄 등에서 땀이 배어 나오는 느낌을 견디지 못하고 잠에서 깨어났다. 도착까지는 1시간도 채 남지 않은 듯했다.

  바세에 가까워지니 사람들이 분주해졌다. 버스도 더 자주 정차했다. 핸드폰으로 지도 앱을 들여다보며 내릴 곳을 가늠하고 있었는데 이미 종착지에 도착한 것인지 버스 안에 남아있던 사람들이 전부 자리에서 일어섰다. 눈치를 살피던 나도 사람들을 따라 내렸다. 터미널도 아니고 정류장 표시도 없는 아닌 마을 한복판이었다. 화물칸에서 배낭을 끌어내려 문이 닫혀있는 가게 차양 아래에 옮겨놓았다. 출발할 때만 해도 말끔했던 버스는 바퀴 주변을 중심으로 고운 황토 흙먼지가 잔뜩 뒤덮여 있었다.

  ‘어디로 가지?’ 배낭 옆에 서서 핸드폰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요 며칠간 인터넷을 뒤져 숙소를 미리 알아보려 했지만 지도에서 숙소처럼 보이는 곳 몇몇을 간신히 찾은 게 전부였다. 그 이상의 정보는 없었다. 다들 마을 외곽에 띄엄띄엄 간격을 두고 퍼져있어서 마땅한 곳을 찾으려면 꽤나 발품을 팔아야 할 것 같았다. ‘마살루한테 전화를 해볼까?’

바세산타수 시장 거리

  'Masalieu Jallow' 어제 핸드폰 가게 사장이 건네준 쪽지에 적힌 전화번호 위에는 그의 동생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워낙에 휘갈겨 쓴 글씨라 알아보기 쉽지 않았다. 쪽지와 핸드폰 화면을 번갈아 들여다보며 더듬더듬 전화번호를 옮겨 누르다 문득, 우리가 서로의 이름을 묻지도 알려주지도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한참 통화음이 울리더니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헬로?"

“마살루인가요? 저는 어제 당신의 형이 얘기했던 한국 사람인데요...”

“아! 그렇군요! 어디예요? 도착했나요?”

  마살루는 아직 집인데 금방 도착할 수 있다며 나보고 먼저 삼촌네 가게에 가 있으라고 했다. ‘버스에서 내린 곳에서 강을 향해 난 길을 따라 걷다 보면 나오는 적갈색 철문 앞에 전자제품 상자가 많이 있는 가게’, 설명이 굉장히 부실한 것 같았지만 마살루의 안내는 완벽했다. 100여 미터 정도를 걷다가 한 가게 앞에서 확신에 차 거침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안녕하세요오~” 아무도 안 보여서 어색하게 허공에 대고 인사를 했더니 어둑한 가게 안쪽에서 40대 초중반으로 보이는 남자가 나오다가 낯선 외국인을 발견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재빨리 말을 꺼냈다.

“마살루 삼촌 분이시죠? 저는 마살루를 만나러 왔는데요...”

그는 조카의 이름이 나오자 그것만으로 이 상황이 전부 이해되었다는 듯, 무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

“걔는 아직 안 왔는데?”

“아 방금 통화했어요. 지금 오고 있답니다.”

“그래요 그럼 뭐 천천히 기다리슈.” 가게 주인 삼촌은 대수롭지 않게 나를 내버려 두고 가게 안쪽으로 다시 들어갔다.


  문 근처에 배낭을 세워두고 가게 앞에 놓인 플라스틱 의자에 앉았다. 가게 밖, 차양 아래에는 선풍기며 라디오며 소형 가전제품들 박스가 잔뜩 쌓여있었다. 푸석푸석하고 고운 모랫길 위로 사람들이 바삐 오가는 풍경. 자전거, 당나귀 달구지, 낡은 트럭, 오토바이가 지날 때마다 건조한 흙먼지가 일었다. 한국에서는 이제 좀처럼 쓸 일이 없는 ‘저잣거리’라는 말이 떠올랐다. 사람들이 모여드는 곳, 부족과 부족, 왕국과 제국의 경계들이 맞닿는 곳. 바세는 13세기부터 서아프리카 각지에서 온 사람들과 갖가지 물건들과 온갖 이야기들이 넘나드는 곳으로 줄곧 이 자리에 있었다고 했던가...

  그때 100cc짜리 중국산 오토바이 한 대가 가게 앞에 멈춰 섰다. 연료통과 바퀴에 달린 흙받이의 촌스러운 메탈릭 레드가 익숙한 정감을 불러일으켰다. 시티백의 그것과 똑같은 색이었다. 16~18살? 확실히 20대는 아닌 앳돼 보이는 소년이 오토바이에서 내렸다. 화려한 마름모무늬가 들어간 알록달록한 체크 셔츠와 블랙진, 투박한 디자인의 검정 구두 차림에 블루투쓰 이어폰을 목에 감고 있었다.

“마살루?”

“네! 내가 마살루예요. 당신은 이름이?”

“아 이름을 모르겠구나! 진. 진이라고 불러. 그런데 너네 형 이름은 뭐야? 우리 서로 이름을 안 물어봤지 뭐야.”

“형은 에브리마! 에브리마예요.”

  이마부터 뒤통수까지 라인을 깔끔하게 정리한 까까머리와 두툼하고 짙은 눈썹이 인상적인 마살루는 커다란 눈동자를 이리저리 옮겨가며 조심스럽게 말을 했다.

“어디서 묵을 예정이에요?” 발치에 놓인 내 지저분한 배낭을 보고 마살루가 물었다.

“글쎄 잘 모르겠네. 지도로 몇 군데 봐 두기는 했는데 어디가 괜찮은지 알 수가 없어서 일단 가보고 결정하려고.”

“거기 이름 알아요? 아니면 지도로 보여줄래요?”

핸드폰을 꺼내 지도 앱을 켜고 찍어두었던 장소들을 마살루에게 보여주었다. 마살루는 그중 한 군데를 찍으며 같이 가보자고 했다.

“여기는 종종 당신 같은 여행자들이 와서 지내는 곳이에요. 지금은 아마 중국 사람들이 많이 있을 거예요. 잠깐만 기다려요. 삼촌한테 얘기하고 올게요.”

  가게 안에 들어갔다 나온 마살루가 오토바이 시동을 걸었다. 나는 배낭을 메고 뒷자리에 앉아 짐받이를 단단히 붙잡았다. 달리는 중에 흔들리거나 떨어지지 않도록 미리 자세를 안정적으로 고쳐 잡았다.

“급할 거 없으니까, 살살 가 살살.”

“걱정 말아요.”

  거리 위 사람들의 시선이 커다란 배낭을 등에 메고 오토바이에 찰싹 달라붙어있는 동양인에게로 쏠렸다. 시장통을 빠져나가는 동안, 사람들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재미 삼아 일부러 익살맞게 씨익 웃어 보였다. 누군가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실없이 미소를 지었고, 누군가는 깔깔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어젯밤 저녁을 먹으며 했던 걱정들을 단번에 씻겨 내는 환한 얼굴들이었다.


  지도에 표시된 목적지 근처에 다 와서 울퉁불퉁 흙모래 길을 몇 바퀴 빙빙 돌며 주변을 헤맸다. 게스트하우스는 바세 중심가에서 1km 정도 떨어진 비교적 한적한 곳에 위치해있었다. 부지가 넉넉해서 널찍널찍하게 건물들이 떨어져 있는 게 좋았다. 숙소동 건물도 여럿 있었고 리셉션 건물도 대문 옆에 아예 따로 있었다. 더 볼 것도 없이 여기에 묵으면 될 것 같았지만, 일단 리셉션에 방을 보여줄 수 있겠냐고 물어봤다. 직원은 나를 방까지 안내하며 높게 설치된 물탱크며, 태양열 집열판을 가리키며 지내는 동안 불편함은 없을 거라고 친절하게 얘기했다. 방도 말끔하니 괜찮아 보였다. 에어컨도 있고 샤워기가 설치된 화장실도 방에 딸려있었다. 숙소동과 리셉션을 오가는 동안 마살루가 얘기했던 중국 사람들 몇을 멀찍이 보았다. 직원에게 물어보니 바세 주변에 중국에서 진행 중인 건설 프로젝트들이 있는데 그 현장 노동자들이라고 했다. 다들 만리타국까지 와서 고생이 많다.

  체크인을 마치고 나올 때까지 마살루는 오토바이를 나무 그늘에 세워둔 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괜찮은 거 같아요?”

“응! 너무 좋네. 세레쿤다에서 지내던 곳보다 훨씬 좋은 걸? 고마워! 오늘 어떻게 해야 하나 막막했는데 네 도움 덕분에 살았어.”

“다행이에요. 일단 지금은 너무 더울 때고, 피곤하기도 할 테니까 좀 쉬어요. 나는 삼촌 가게일 도와주러 가봐야 해요. 이따가 일 끝나고 볼 수 있을까요?”

“물론이지! 나중에 내가 전화하고 가게로 찾아갈게.”

“알겠어요. 이따 봐요.”

뿌듯한 표정으로 오토바이에 오른 마살루는 울퉁불퉁 흙모래 길을 천천히 되짚어 가게로 돌아갔다.     


  시간은 오후 1시 반, 마살루의 말대로 햇볕이 쨍했다. 35도는 되는 것 같았다. 장시간, 장거리 이동과 머물 곳을 찾느라 마음 졸이는 동안 누적된 긴장과 불안이 일시에 해소되면서 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갔다. ‘어쨌든 오늘도 무사히 왔다’는 뿌듯함이 섞인 기분 좋은 피로감이다.

  거울을 보니 온몸이 흙먼지에 땀에 꼴이 말이 아니다. 이런 몰골의 나를 선뜻 자기 오토바이에 태워 숙소 구하는 것까지 도와준 마살루는 도대체 어떤 사람인 걸까? 특별한 결심도 동기도 없이 그저 눈앞의 다른 이를 돕는 착한 사람들은 정말이지 신비롭다는 말 말고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내가 객사하지 않고 여행을 이어가고 있는 것은 순전히 그 신비로운 사람들 덕이다.

  일단 샤워부터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들러붙은 떠돌이의 꾀죄죄함은 이제 비누로 박박 문질러도 씻기지 않고, 옷도 갈아입어봤자 꼬질꼬질한 옷에서 덜 꼬질꼬질한 옷으로 갈아입는 정도다. 개운하게 씻고 나와 일단 선풍기를 틀고 뽀송뽀송한 침대로 몸을 날렸다.


  TV를 틀었다. 놀랍게도 알자지라 뉴스에서 대한민국의 전직 대통령이 유죄판결을 받았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생방송이었다. 징역 24년 벌금 180억. 징글징글했던 한 시절이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여행길에 오른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았을 무렵, 모스크바의 아르바트 거리에서 ‘최순실 태블릿 PC’에 대한 보도를 접한 게 벌써 1년 반 전이다. 한동안 정말 많이 심란했고, 정말 많이 무기력했다. 그 추웠던 겨울, 수많은 사람들이 촛불을 들고 거리를 가득 채운 모습을 보면서 나는 여기서 뭘하고 있나 하는 생각에 도무지 기운을 낼 수가 없었던 시기도 있었다. 이상한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은 나라 사람이라고 비웃음거리가 되기도 했고, 한국의 촛불시위 덕분에 자기들도 힘이 난다며 응원과 지지의 목소리를 들려준 사람들을 만나 감격에 차오르기도 했다. 상황이 새로운 국면을 맞을 때마다 한국에서 소식을 전해오는 친구들은 물론 여행 중에 만난 사람들과도 참 많은 이야기들을 나눴었다.

  이 판결 하나로 많은 것이 바뀌리라는 기대는 전혀 없다. 그러나 이전까지는 기대조차 할 수 없었던 어떤 변화를 그려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라면 희망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법한 것이 썩 개운하지 않게 마음에 일었다. 그토록 바라고 기다렸던 판결인데 그 맛이 쓰다. 방에서 나와 리셉션에서 맥주를 한 병 사 그 자리에서 단숨에 비우고 돌아왔다. 다시 뉴스를 틀어놓고 느린 와이파이에 의지해 친구들과 메시지를 주고받다가 까무룩 잠에 들었다.


숙소에서 바세 시내로 들어가는 길

  선선한 선풍기 바람 덕분에 세상모르고 푹 잤다. 눈을 뜨니 시간은 이미 다섯 시 반을 넘기고 있었다. 핸드폰을 확인하니 한 시간 즈음 전에 마살루에게서 전화가 와있었다. 얼른 전화를 걸어 내내 잠들어 있었다고, 금방 가겠다고 전한 뒤 곧장 숙소를 빠져나왔다. 설렁설렁 15분 정도를 걸어서 다시 마살루네 가게에 도착했다. 가게는 이미 오늘 영업을 마칠 준비를 거의 끝냈는지 문밖에 쌓여있던 상자들이 가게 안 통로에 옮겨져 있었다. 마살루가 먼저 들어가 보겠다고 삼촌에게 얘기를 하는 동안 나는 문 밖에서 마살루네 삼촌에게 꾸벅 눈인사를 했다. 그는 여전히 시큰둥한 눈치였다.

“그런데 우리 뭐하지?” 가게를 나오는 마살루를 향해 내가 말했다.

“그러게요? 바세에는 뭐 대단한 게 없는데...”

“여기서 강 별로 안 멀지 않아? 강가로 가보자.”     

  쿤타킨테 섬에 다녀오며 건넜던 감비아 강은 배를 타고도 한참이 걸릴 정도로 넓었는데 이곳의 강폭은 기껏해야 50미터나 될 것 같았다. 짧은 강폭에 걸맞게 자동차 서너 대만 실어도 갑판이 꽉 찰 것 같은 아담한 크기의 연락선이 분주하게 강 이쪽저쪽을 오가며 사람들을 실어 나르고 있었다.

바세에서 본 감비아 강

  여기까지 걸어오는 동안 이미 내 자기소개 레퍼토리를 다 써먹어버려서 우리는 한동안 별다른 말없이 좁은 강을 왔다 갔다 하는 배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형과는 달리 말수가 적고 수줍음 많은 마살루는 내가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며 사진이며 동영상을 찍다가 바닥에 주저앉아 멍하니 있는 동안 멀찌감치 떨어져서 혼자 셀카를 찍고(마살루가 쭈뼛쭈뼛 같이 찍자고 해서 같이 찍었다.) 누군가와 통화를 했다. 황사로 뿌연 하늘 저편에서는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 가고 있었다. 마살루가 불쑥 말을 꺼냈다.

“정말 대단한 거 같아요. 그 먼 나라에서 여기까지 올 수 있다는 게, 여행을 할 수 있다는 게. 나는 고작 세레쿤다에 다녀오는 것도 일 년에 몇 번 안 되는데.”

언뜻 마살루의 얼굴에서 내 여행을 동경하고 선망했던 많은 이들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나는 대답 대신 쓴웃음을 지었다. 속으로 자문했다. ‘도대체 이 허풍 같은 여행 어디에 대단한 구석이 있을까?’ 잘 모르겠다.

  사실 생각해보면 여행을 떠나야겠다는 나의 의지라던가 결단 같은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도 결정적이지도 않았다. 도리어 아주 사소한 것이었다. 이 여행이라는 것도 그저 내 삶의 어떤 맥락, 상황, 조건들이 맞아떨어진 결과에 불과한 것 같다. 1년 6개월 전,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하는 배 위에서 멀어지는 동해항을 보며 떠올렸다. 아주 오래전부터 희원했던 여행을 이렇게 떠날 수 있게 된 것은 순전히 운이 좋았기 때문이라고.

  나를 보는 마살루의 눈빛 앞에 부끄러워 말을 잃었다. 그저 되는대로 무작정 떠났을 뿐인데, 내 삶의 맥락이 이 대책 없는 떠남을 감당할 수 있었을 뿐인데, 가본 적 없는 먼 곳으로 날 데려다 줄 표 삯을 낼 돈이 있었을 뿐인데...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여기서 계속 삼촌 가게 일을 돕거나, 세레쿤다로 가서 형과 함께 일하게 될 거예요.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아요.”

“그럼 너는 뭘 하고 싶은데?”

“외국의 대학에 가서 공부해보고 싶어요. 그래서 장학생으로 지원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고 “생각하고 있는 나라는 있어?”

“미국이랑 캐나다요.”

“어우 캐나다는 겨울에 무지 추울 텐데?”

  내내 조용했던 마살루가 마냥 고등학교를 마친 뒤의 삶에 대해 꿈꿔왔던 것들을 줄줄 늘어놓았다. ‘대학 진학이라는 수단을 통해 외국에 나가보겠다.’라는 발상의 엉성함이 못내 아쉬웠지만, 외국의 대학에서 공부하고 싶다는 바람을 갖는 것조차 상상하기 힘든 이 시골에서 마살루는 꽤 오랫동안 야무지게 자신의 야망을 키워 온 듯했다. 아마 세레쿤다로 상경해 가게도 차리고, 중국에도 여러 번 다녀온 형 에브리마의 영향이 컸을 것이다.

  마살루의 얘기를 듣다 떠오르는 생각 몇 가지를 아이디어로 내놓았는데 그게 뭐라고 마살루의 눈이 초롱초롱하다. 들뜬 얼굴로 이것저것 내게 묻는 마살루를 보니, 에브라마가 뜬금없이 바세에 가면 동생을 꼭 만나보라고 했던 것에 속 깊은 의도와 기대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마살루의 사정을 미리 얘기해주지 않은 것도 이 우연한 만남의 극적인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예비가 아니었을까? 어릴 적 우연히 펼쳐본 책 안의 사진 한 장이 나를 감비아로 이끌었듯, 나와의 이 짧은 만남이 미래의 마살루를 뜻밖의 어딘가로 데려다 놓을지도 모른다.

마살루의 뒷모습


  사하라에서 날아온 모래먼지가 뒤섞여 탁한 잿빛 하늘 너머로 태양이 자취를 감추고 바세 거리는 온통 어둠에 짙게 물들었다. 이제 거리에는 사람들도 별로 없고, 띄엄띄엄 전등 불빛만 창밖으로 맥없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마살루는 집 구경을 시켜주겠다며 나를 자신의 집으로 안내했다. 구불구불 골목길을 걷고, 누군가의 집에 정문으로 들어가 마당을 가로질러 뒷문으로 빠져나오길 몇 번 반복해서 우리는 마살루의 집 대문 앞에 섰다. 담 너머로 크게 틀어놓은 TV 소리가 들려왔다.

“여기가 제 집이에요.”

  마살루가 대문을 열었다. 군데군데 칠이 벗겨진 파란 철문이 끼익 소리를 냈다. 마살루의 뒤를 따라 집 안에 들어섰다. 마당에는 등받이 의자에 앉은 초로의 남자가 틀어놓은 방 안의 TV 화면을 유심히 보고 있었다.

“저 왔어요. 여기는 어제 형이 얘기했던 한국인 친구예요.”

“안녕하세요! ‘진’이라고 합니다.”

약간 과장된 쾌활함을 담아 붙임성 있게 인사를 했다. 마살루의 아버지는 앉은 채로 고개만 돌려 나에게 알았다는 듯 끄덕거렸다. 이쪽이 약간 더 나이 들어 보이는 것 말고는 낮에 가게에서 보았던 마살루의 삼촌과 차이점을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비슷한 얼굴이었다. 그는 별다른 말도 없이 고개를 돌려 다시 TV 화면을 보았다. 낯선 외국인이 느닷없이 자기 집 대문을 열고 나타났는데도 의연한 그의 모습에 오히려 내가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마살루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나를 자기 방으로 안내했다. 낮에 가게에서 마살루의 삼촌을 만났을 때도 그랬고, 어쩌면 이런 시큰둥함이 마살루의 아버지와 삼촌 형제의 성정이겠거니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전자제품 장사를 하는 집안답게 마살루의 방에는 작은 TV도 있고 구형이지만 콘솔 게임기와 PC도 있었다. 마살루가 준 캔 음료를 마시면서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눴는데 금방 할 말이 동났다. 한참 마음 복잡한 시기를 보내고 있을 과묵하고 수줍음 많은 소년과의 대화는 감비아 사람이 아니라 한국 사람이었어도 쉽지 않았으리라. 결국 내가 먼저 어색한 공기를 참지 못하고 다시 나가자고 말을 꺼냈다. 온 지 20분도 안되어서 가보겠다고 말하고 집을 나서는 내게 마살루의 아버지는 이번에도 무심히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숙소로 돌아가기 전에 뭘 좀 먹으면 좋겠는데, 숙소 밥은 비싼 거 같더라고.”

“뭐가 좋을까요? 뭐 먹고 싶은 거 있어요?”

“난 그냥 타파라파 샌드위치면 돼. 혹시 아는 데 있어?”

“있어요! 같이 가요.”

  아까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왔다. 골목에는 아까보다 더 사람이 없었다. 캄캄한 골목 맞은편에서 이따금 불쑥불쑥 사람이 나타나 우리를 지나쳐 등 뒤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마살루네 가게가 있는 시장 거리에서 한 골목 안 쪽, 후미진 곳에 허름한 샌드위치 가게가 있었다. 가게 앞에 내놓은 화로와 나무 벤치가 아니었으면 여기서 샌드위치를 판다고는 상상하기 어려웠을 것 같았다. 마살루가 가게 주인과 익숙하게 인사를 주고받고는 나를 소개했다. 샌드위치를 하나 달라는 내 말에 가게 주인은 특별 주문이라도 받은 듯 유난을 떨며 가스버너에 팬을 올렸다.

  몇 번이고 괜찮다고 했는데도 샌드위치 값을 자기가 내겠다고 마살루가 기어이 고집을 피워서 결국 얻어먹게 되었다. 채소가 들어간 양념에 삶은 계란을 으깨 넣은 샌드위치가 나왔다. 특별히 신경 써서 더 준 것인지 속 재료가 옆으로 삐져나올 정도로 푸짐했다. 가게 주인이 샌드위치를 신문지에 돌돌 싸서 건네주었다. 장거리 이동을 하는 날에는 종일 신경이 곤두서 있을 수밖에 없어서 제대로 식사를 못하는데, 샌드위치를 받아 든 순간 잊고 있던 허기가 되살아났다. 입 안 가득 샌드위치를 베어 물어가며 허겁지겁 먹고 있었더니, 고맙게도 마살루가 탄산음료를 사다 주었다.     


  샌드위치를 다 먹고 그냥 돌아가기가 못내 아쉬워 차를 마시기로 했다. 주인이 숯이 담긴 화로와 찻주전자를 우리 앞에 가져오고는 박스 종이 몇 장을 북북 찢어 불을 붙였다. 불이 붙은 종이를 화로 속 숯 사이사이에 찔러 넣자 금방 열기가 올라왔다. 마살루가 물을 채운 찻주전자를 화로 위에 살포시 올려놓고 남은 박스 종이를 집어 들어 부채질을 했다. 타닥타닥 숯이 타들어가는 소리와 풀벌레 소리가 밤이 내려앉은 어둑한 골목을 채웠다. 잠자코 뻘겋게 타들어가는 숯을 보고 있었다.

  이내 찻주전자에서 김이 올랐다. 마살루는 조심스레 주전자 뚜껑을 열고 찻잎 포장을 뜯어 찻주전자에 털어 넣었다. 유리 찻잔에 절반 정도 설탕을 채우더니 그것도 주전자에 전부 붓고는 뚜껑을 닫았다.     

“나는 아타야 티 마시는 게 좋더라.”

“왜요?”

“그냥 다 좋아. 화로도 좋고, 만드는 사람마다 만드는 방법도 맛도 조금씩 다른 것도 좋고, 무엇보다 여유로워서 좋아. 느긋함 없이는 아타야 티를 마실 수가 없잖아.”     

  차 마시는 걸 좋아하는 나는, 차 문화가 발달한 러시아, 터키, 영국, 모로코에서 그러했듯 세네갈과 감비아에서 접한 사헬 지역의 ‘아타야 티’에도 푹 빠져 있었다.


화로 위에 놓인 찻주전자

  어느 정도 차가 우러나자 마살루가 찻주전자를 높이 들어 유리 찻잔에 넉넉하게 부었다. 부어놓은 차를 다른 유리 찻잔으로 부었다가 다시 원래 잔에 붓기를 몇 번 반복하자 차에 거품이 잔뜩 생겼다. 거품과 함께 차를 다시 찻주전자에 붓고 다시 유리잔에 따라서 거품을 만들기를 몇 번 반복하면 거품이 더욱 풍성하고 부드러워지는데 이 거품을 잘 만드는 게 아타야 티의 핵심이다. 나도 몇 번 만들어 보았는데, 거품이 충분하지 않으면 차가 맛이 없고, 거품을 만드는데 너무 오래 시간을 들이면 화롯불에 찻주전자 물이 졸거나 차가 너무 우러나 첫 잔이 써진다. 마살루가 내게 잔을 건넸다. 차를 한 모금 마신다. 거품은 부드러우면서 달고, 차는 적당히 씁쓸하니 딱 좋다. 나는 손에 든 찻잔 속 거품에서 눈을 떼지 않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첫 번째 잔은 ‘인생’처럼 쓰고, 두 번째 잔은 ‘우정’처럼 조화롭고, 세 번째 잔은 ‘사랑’처럼 달콤하다.‘ 맞지? 세네갈 친구가 알려줬어.”

“맞아요! 잘 아시네요?”     

  아타야 티는 재탕, 삼탕까지 세 번을 우려 마신다. 주전자의 차를 다 마시지 않고 물을 추가로 더 부어 다시 끓이는 거라 차의 씁쓸한 맛이 점점 옅어지다 보니 저런 표현이 나온 듯하다.     


  지나가던 행인들이 별다른 말도 없이 하나 둘 우리 옆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다들 익숙한 얼굴인 듯 가게 주인은 몇 마디 인사를 주고받고는 찻잔을 더 내어온다. 찻주전자 속 차는 넉넉하다. 다들 찻잔을 손에 들고 작은 화로 주변에 둘러앉았다. 재탕을 올린 찻주전자 위로 김이 몽글몽글 오른다.     

  하루를 마무리하는 티타임에 끼어든 이방인이 주목을 받는 것도 잠시뿐, 둘러앉은 사람들은 서로 안부를 묻고 오늘 하루 어떻게 보냈는지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차를 마셨다. 잔에 담긴 것이 술은 아니지만 가본 적도 없는 옛날 대폿집에 앉아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근처를 지나던 누군가가 ‘어이 형씨 오늘은 일찍 마쳤나봐?’ 하며 내 옆에 와 앉을 것 같은 그런 기분.


  호기심 많은 마살루는 한국에 대해 이것저것 물었다. 차 문화에 대한 얘기를 하다가 느려 터진 인터넷으로 한국의 다례와 다구부터 카페 사진까지 보여주고 있었는데, 뒤에서 사람들이 불쑥 핸드폰 화면을 들여다보며 한국은 어쩌냐 저쩌냐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 구체적으로 어떤 얘기를 했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말로만 설명하는 것의 한계를 느낀 내가 유튜브로 하이퍼 랩스며 드론으로 촬영한 한국 소개 영상 같은 것들을 작은 핸드폰 화면에 틀어놓고 서로 머리를 부딪혀가며 보고 나서 한참 떠들었던 것만 기억난다.

  어둑어둑한 시장통 골목에서 바세의 사람들과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던 이 시간은 달콤 쌉싸름한 아타야 티와 더불어 나에게 묘한 감격을 남겼다. 잠시 대화의 중심에서 멀어진 나는 말없이 찻잔을 입에 댄 채 홀짝거리며 함께 자리한 이들의 표정과 음성을 한 명씩 한 명씩 찬찬히 살피고 있었다. 불현듯 ‘얼마나 많은 것들이 지금 이 순간에 딱 맞물려, 이 마주침을 성립시킨 것일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순간 전율과도 같은 감격이 돌았다.

  자동차, 비행기 같은 운송수단의 발명부터, 한국 군사정권의 종식과 88 올림픽을 계기로 전면 자유화된 해외여행과 글로벌리즘, 그로 인해 출간된 다양한 나라를 소개하는 아동서적과 그것을 펼쳐보고 감비아의 사진을 발견했던 순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부터 감비아 바세까지 길었던 내 여정을 뒤흔들고 비틀었던 온갖 우발적인 순간들, 감비아 입국을 거부당했던 것, 바세로 가는 버스를 놓친 것과 덕분에 마살루의 형 에브리마과 우연히 만나게 된 것, 그리고 여기 자리한 사람들이 그려온 각자 삶의 궤적들까지. 시공간적으로 아득히 멀리 떨어져 있던 수많은 것들이 맞물려 이 잠깐의 마주침을 빚어낸 것임을 온몸으로 실감했다. 1만 킬로미터 넘게 떨어져 살아온, 서로 전혀 마주칠 일이 없었던 사람들의 조우는 그렇게 거짓말처럼 일어난 것이다. 아무런 상관도 없어 보이는 수많은 우연들이 켜켜이 쌓이고 쌓여서 지금을 현현한다.

  프랑스 철학자 알랭 바디우는 극단적으로 우연한 상황과 맥락에 대해 필연성을 부여하는 것이 바로 사랑의 선언이라고 했다. 어쩌다 우연히 조우한 것에 마음을 빼앗기고 그것에 충실하게 되는 것, 우연히 일어난 일을 그저 우연으로 내버려 두지 않겠다는 각오, 그것이 마치 처음부터 필연적인 것이었던 것처럼 내 삶에 고정시키고자 애쓰는 것이 바로 사랑이라고. 바디우의 말대로라면, 우리의 우연한 마주침에서 내가 어떤 운명적인 것을 느끼고 감격했던 이날 밤, 나는 나의 우발적인 여정과 삶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사실 오늘은 좋은 일이 있어서 맥주라도 한 잔 해야 하는데, 이따 숙소에 가서 마셔야겠어.”

“무슨 좋은 일인데요?”

“전직 대통령이 나쁜 일을 많이 했는데 오늘 24년형 선고받았거든.”

“대통령이 감옥에요?”

마살루의 눈이 동그래졌다. 주변의 다른 사람들도 대통령이 감옥에 갔다는 얘기에 흠칫 놀라 내 얘기에 귀를 기울였다. 한국의 ‘나쁜 대통령’ 얘기를 듣고 난 마살루는 감비아 ‘나쁜 대통령’에 대한 회상으로 답했다.     

“어릴 때 몇 번인가 자메가 바세에 온 적이 있었어요. 대통령이 차를 타고 퍼레이드를 하면 구경을 나가서 아이들이랑 그 뒤를 쫓았는데 군인들이 사탕이나 초콜렛 같은 걸 막 던져줬어요. 그래서 그땐 그냥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마살루의 얘기를 들은 다른 사람들이 대통령에 대한 이야기를 이러쿵저러쿵 목소리를 높여가며 늘어놓았다. 대통령에 대해서 이전에 어떻게 생각했든 간에, 선거에 패배하고도 불복하며 독재를 이어가려다 실패하고, 국고를 수천만 달러나 횡령해서 적도기니로 도망치듯 망명한 야햐 자메를 아직도 좋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야햐 자메가 무책임하게 도망가 버린 것과는 다르게, 한국의 대통령이 유죄를 선고받고 감옥에 들어가 있는 것을 사람들은 적잖이 부러워했다. 누군가 ‘그것이 바로 정의로운 일’이라고 추켜세웠지만 나는 여전히 뒷맛이 썼다. 전직 대통령도 잡혀가는 나라라고는 해도 그 속은 여전히 복잡하다. 영악하고 몹쓸 인간들도 여전히 많다.


  마살루가 오토바이로 다시 숙소까지 데려다주었다. 내일 아침, 세네갈로 떠나기 전에 잠시 만나 작별인사를 나누기로 했다. 숙소 식당의 야외 테이블에는 일을 마치고 돌아온 중국 사람들 몇이 앉아서 늦은 저녁식사를 하며 TV를 보고 있었다. 젊은 멜 깁슨과 대니 글로버를 보니 리썰 웨폰 같았다. 맥주를 한 병 시켜 마셨다. 풀벌레 소리와 영화 대사의 음성이 영 어울리지 않게 뒤섞여 들렸다.

  핸드폰으로 지도를 열어 내일 움직일 경로를 확인한다. 바세에서 국경을 넘어 세네갈 벨링가라(Velingara)까지 24킬로미터, 벨링가라에서 탐바쿤다(Tambacounda)까지 95킬로미터, 탐바쿤다에서 또 국경을 넘어 말리의 수도 바마코(Bamako)까지 897킬로미터, 1000킬로미터가 넘는 긴 여정이다. 감비아 시골구석 바세에서 사헬의 대도시까지 가야 하는데, 벨링가라까지 오토바이 택시를 타고 가는 것 말고는 언제 뭘 타야 하며 얼마나 걸리는지 아무것도 모른다. 물어물어 셉플라스를 잘 잡아타기를, 내일 국경을 넘는 버스가 있기를 막연히 기대하는 수밖에 없다. 내일 안에 도착할 수는 있을까?



  다음 날 오전 8시, 떠날 준비를 마치고 마살루에게 전화를 했는데 무슨 일인지 받지 않았다. 9시까지 기다렸는데도 여전히 연락이 되지 않아 일단 숙소를 나섰다. 혹시나 해서 찾아간 마살루 삼촌네 가게는 아직 닫혀있었다. 주변 가게들은 대부분 이미 문을 연 것으로 보아 무슨 사정이 생긴 모양이었다. 조금 더 기다려 볼까 하다가 관두었다. 오늘 안에 국경을 두 번이나 넘어야 하는데 시간이 넉넉지 않을 것 같았다. 고맙고 섭섭한 기분으로 마살루에게 문자를 남겼다.


  이제 세네갈로 국경을 넘어야 한다. 시장을 빠져나와 국경으로 향하는 도로 쪽으로 걸었다. 어제 버스에서 내린 로터리까지 나왔더니 길 건너편 한 구석에 오토바이가 모여 있는 것이 보여 그쪽으로 갔다. 한담을 나누고 있던 오토바이 기사들 중 한 사람이 길 맞바라기에서 배낭을 짊어진 외국인이 건너오는 것을 발견하고는 몸을 돌렸다. 다른 오토바이 기사들도 그제야 내가 오는 것을 알아채고 고개를 돌렸다. 대부분 이런 상황에선 기사들이 소리를 질러가며 호객을 하거나, 서로 나를 데려가려고 실랑이를 벌이고 짐을 뺏어가듯 들고 가 대뜸 실어버리고 난리도 아닌데, 이 사람들은 그냥 가만히 내가 오는 걸 보고 있었다. 예상과는 다른 반응과 여러 명이 한꺼번에 나를 보고 있는 탓에 오히려 더 긴장이 되었다.

  차도를 건너와 내가 그들 앞에 서자, 양손으로 오토바이 안장에 거의 엎드리다시피 앉아 양손으로 턱을 괴고 있던 한 사람이 입을 열었다.

“헬로우 마이 프렌드! 어디 가게?”

“국경 넘어서 셉플라스 타야 하는데 벨린가라 셉플라스 주차장까지 얼마예요?”

“200달라시(약 4500원)!”

“에이 너무 하네. 100에 갑시다.”

“뭐? 100에 가자고? 푸하하하!”

뭐가 웃긴지 기사들이 서로 쳐다보며 웃고 난리도 아니다. 어제 마살루가 120달라시면 벨린가라 까지 갈 수 있을 거라고 알려줘서 과감하게 흥정을 한 것뿐이다. 다른 기사가 웃음기가 채 가시지 않은 표정으로 익살맞게 물었다.

“어떤 바보가 벨린가라까지 100에 가?”

“그래도 200은 심하잖아요. 딱 봐도 투밥(Toubab) 프라이스구만.”

“뭐? 투밥 프라이스? 푸하하하하!” 기사들이 또 한 번 자지러지게 웃었다.     

  투밥은 세네갈, 감비아에서 외국인을 지칭하는 말이다. 원래 식민지 시절, 유럽에서 온 백인을 일컫는 표현으로 생겨난 것이지만, 지금은 외국인 일반을 뜻한다. 길을 걸다 보면 아이들이 멀리서 “투밥! 차이니즈!”하고 놀리듯 소리를 지르고 도망가곤 했다.


  아침밥 먹은 배가 다 꺼지게 웃어젖히는 기사들을 보니 100달라시에는 절대 가지 않을 것 같다. 지갑에는 마지막으로 남은 200달라시 한 장 밖에 없었다. 오토바이로 국경을 넘고 남은 돈은 기념으로 간직하려고 했는데, 꼼짝없이 다 뜯길 판이다.

“그럼 120에 갑시다.”

“벨린가라까지 왕복 50킬로미턴데, 120이면 기름 값도 안 나와. 게다가 너 외국인이라 여권 검사하는 거 기다려야지, 또 벨린가라에서 바세 가는 손님 올 때까지 죽치고 있어야 한다고!”

“아 그럼 나는 걸어가야겠네.”

말을 마치자마자 몸을 돌려 발을 떼 몇 발짝 걸으면서 정말 가는 시늉을 해보았는데, 기사들이 또 깔깔 웃는다. 이것도 안 통할 듯싶다.

“알았어요! 알았어! 150! 오케이?”

“오케이! 누가 갈래?” 아까 먼저 말을 걸었던 턱을 괴고 있던 사람이 대번에 오케이를 하더니 좌우로 고개를 돌려 기사들을 둘러보았다.

150달라시도 딱히 내키는 액수는 아니었던지 바로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기사들이 서로 미루듯 눈빛만 몇 번 주고받더니, 한 사람이 오토바이 시동을 걸어 내 앞으로 몰고 왔다.     

“가방 무거워 보이는데 이리 줘. 그거 네가 메고 타면 중심이 뒤로 쏠려서 운전하기도 불편하고, 너도 위험해.”

배낭을 맡기는 게 탐탁지 않아 그냥 메고 타겠다고 우길까 하다가 배낭을 벗어 건넸다. 기사가 내 배낭을 연료탱크 위에 올리고 끌어안듯이 자세를 잡았다.

“그렇게 무겁지는 않네. 내가 잘 안고 갈게.”

다른 기사 몇몇은 아침부터 재미난 구경을 해서 만족스러운 듯, 웃는 얼굴로 내게 조심히 잘 가라고 인사를 하고는 오토바이를 몰아 시내 쪽으로 손님을 찾으러 갔다. 오토바이 뒷자리에 올라탔다. 엉덩이를 앞뒤로 옮겨가며 몸을 들썩거려 천천히 안정적인 자세를 찾았다.

“잘 탔어? 출발할까?”

“갑시다! 천천히 천천히!”


  오토바이는 금세 바세 시내를 빠져나왔다. 듬성듬성 나무가 보이는 황량하고 건조한 평원이 나왔다. 전형적인 열대 사바나 기후 건기 풍경이다. 한 손으로 핸드폰을 단단히 붙잡아 지나가는 풍경을 동영상으로 찍었다. 두어 달이 지나면 길지 않은 우기가 시작된다. 다른 계절의 풍경은 또 어떻게 다를지 궁금하다.

소리 주의! 감비아 출입국사무소 가는 길

  차 한 대 보이지 않는 도로를 10여분 정도 달리다가 작은 건물 앞에서 오토바이가 섰다.

“여기가 출입국사무소야.”     

여기가 국경이라고? 믿을 수 없었다. 도로는 차단기 하나 없이 양방향 모두 뻥 뚫려있었다. 게다가 낡고 작은 출입국사무소 건물 앞에는 초소는커녕 사람 하나 보이지도 않았다. 국경이 이래도 되나? 앞장을 서는 오토바이 기사를 따라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사무실 정 중앙에 놓인 테이블에 앉아 오래된 브라운관 TV로 뉴스를 보고 있던 두 사람이 고개를 돌려 나를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두 사람이 입고 있는 검정 제복을 보자 입국할 때 고생했던 게 떠올라 마른침을 삼켰다. 한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나 나에게 다가왔다. 얼른 가방에서 여권을 꺼내 최대한 공손히 건넸다.


“입국? 출국? 아 출국이겠군.” 여권을 받아 펼치며 직원이 말했다. 내가 어느 쪽에서 왔는지 모르니 입국인지 출국인지부터 묻다가, 내 옆의 오토바이 기사를 알아본 것이었다.

“벨린가라로 갑니다. 거기서 탐바쿤다까지 가야 해요.”

“여행객입니까?” 직원이 여권을 뒤적거려 감비아 입국도장을 찾으며 물었다.

“네!”

“감비아는 어땠어요?”

“즐거웠죠!”


  감비아 입국도장을 확인한 직원이 여권을 든 채 책상 쪽으로 가서 출국 도장을 찍고 돌아와 내게 여권을 돌려주었다. 감비아에서 출국할 때 외국인들한테 돈을 뜯어낸다는 얘기를 워낙 많이 들어서 긴장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간단하게 출국 도장을 받았다. 역시 외국인이 거의 다니지 않는 한적한 시골 국경으로 입출국하면 편하다. 까다롭지도 않고 오히려 친절하게 반겨줄 때도 있다. 물론 국경까지 오는 게 문제지만. 오토바이 운전기사는 신분증만 확인했다. 감비아, 세네갈은 둘 다 서아프리카 경제 공동체(ECOWAS) 회원국이고, 서로 사증면제협정이 체결되어 있어 왕래가 자유롭다.


  다시 오토바이에 올라 감비아 영토를 벗어났다. 물론 경계나 장애물이 없어 언제 어디부터 세네갈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인간이 만든 국경이라는 게 참 터무니없이 허구적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1km를 채 못가 이번엔 세네갈 출입국사무소에 도착했다.

  이쪽에도 차단기는 없었지만, 감비아 쪽 출입국사무소보다는 훨씬 번듯하고 널찍한 건물이었다. 공교롭게 이곳에서도 두 사람이 소파에 앉아 TV로 뉴스를 보고 있었다. 위성방송 수신기가 달린 36인치 정도 크기의 벽걸이 TV에서 FRANCE 24 채널 앵커가 프랑스어로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여권을 꺼내 사무소 직원에게 다가갔다.     


“봉주르!”

“bonjour! tu parles français?(프랑스어 할 줄 알아?)”

“노. 앙글레.(영어는 해요.)”

“오케이 오케이. 꼬레아?” 직원이 여권을 펼치며 물었다.

“네. 한국인이에요. 사우스. 꼬레 뒤 수드.”

“노스 아니고? 하하하! 킴중구운?(‘김정은’의 프랑스어 발음)” 직원은 남한인지 북한인지 물을 때마다 레퍼토리처럼 따라오는 지겨운 농담을 뱉더니 혼자 킥킥 웃으며 도장을 찾으러 갔다.

“꼬레 뒤 수드, 꼬레 뒤 노드 프로블렘 프로블렘. 세네갈 어디로 가?”

“벨린가라, 탐바쿤다, 바마코. 말리 바마코까지 갑니다.”

“멀리 가네? 무슨 일로 가는 거야?”

“voyage(여행). 가능하다면 오늘 버스로 출국할 예정이에요." 직원은 더 묻지 않고 여권에 입국 도장을 찍고는 내게 여권을 돌려주었다.

“오케이 오케이. 굳 럭! bon voyage!(좋은 여행 되세요!)”

“오케이. 땡큐, 메르시, 제뤼젶.” 땡큐 3 연발에 놀라 웃는 직원들을 뒤로하고 밖으로 나왔다. 다시 세네갈에 입국했다.

소리 주의! 세네갈로 다시 돌아왔다


  세네갈 출입국사무소에서 15분 정도를 더 달려, 벨린가라에 도착했다. 오토바이가 셉플라스 주차장 길 건너편에 섰다.

“저기서 셉플라스로 갈아타면 될 거야.”

200달라시 한 장을 꺼내 줬더니, 오토바이 기사가 거스름돈 50달라시를 꺼내며 주저주저했다.

“이거 50달라시 그냥 나 주면 안 될까? 너는 이제 감비아 돈 쓸데도 없잖아?”

“안 돼! 나 쎄파(CFA) 별로 없어서 이거 환전해야 해!”

딱 잘라 말하고 냉큼 50달라시를 받아 주머니에 넣었다. 50달라시 지폐 한 장 환전해봤자, 겨우 500프랑(약 1000원) 남짓, 동전 서너 개 밖에 안 된다. 쓰지도 못할 50달라시를 기념품으로 간직하겠다는 말이 너무 사치스럽게 들릴까 싶어 거짓말을 해버렸다. 오토바이 기사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조심히 잘 가라는 인사를 툭 뱉고는 오토바이를 몰아 어디론가 가버렸다. 배낭을 짊어지고 길을 건너려는데 옆에서 세네갈 오토바이 기사 하나가 눈치 없이 호객을 한다.

“치누아!(중국사람) 모나미!(친구) 어디가? 내가 태워줄게! 컴! 컴!”

“탐바쿤다! 오토바이로 거기까지 갈 수 있어? 셉플라스 보다 싸?” 50달라시 때문에 기분이 찝찝해져서 애꿎은 사람에게 퉁명스럽게 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오토바이 기사는 오토바이에 기댄 채로 익살맞게 말을 받아쳤다.

“오! 탐바쿤다는 너무 멀지이~ 안 되겠네. bon voyage mon ami!”


  셉플라스 주차장에 들어서서 주위를 쓱 둘러보니 호객꾼들이 득달같이 몰려들었다. 탐바쿤다로 가는 셉플라스를 타고 싶다고 했더니 매니저로 보이는 한 사람이 나서서 나를 안내했다. 따라간 곳에는 낡은 푸조 웨건 한 대가 텅 빈 채로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연식이 하도 오래된 차라 라디에이터 그릴 위 사자 엠블럼이 아니었으면 푸조 인지도 못 알아봤을 것이다.

“언제 출발해요?”

“알면서 뭘 묻고 그래? 사람이 다 차야 가지! 급하면 한 대 통째로 빌려 가시던가.”

승객은 언제 다 모일 것이며, 탐바쿤다 까지 가는 데는 얼마나 걸릴 것이고 언제 도착할 것이며, 도착해서는 하루 묵어야 할지 바로 버스를 찾아 나서야 할지 막막하게 가늠을 해보아도 딱히 답이 없었다. 국경 하나 건넜을 뿐인데 또 말이 안 통하니 답답했다. 영어가 통하는 감비아가 좋은 곳이었구나... 그러고 보니 이 매니저가 영어를 곧잘 하는 것 같아 궁금한 걸 다 물어보기로 하고 그가 다른 일로 자리를 뜨려는 걸 얼른 붙잡았다.

“영어 잘하시는데 뭐 좀 물어봐도 될까요?”

“뭔데?”

“제가 탐바쿤다에서 말리 바마코로 가는 버스를 타야 하는데, 어디서 타야 하는지 모르거든요. 혹시 아시나요?”

“물론 알지, 근데 셉플라스 내리는 데서는 좀 거리가 있어. 잠깐 기다려봐.”

말을 마친 매니저가 내가 탈 셉플라스 운전수를 찾아가더니 한참 설명을 하고는 돌아왔다.

“운전수한테 다 말해 놨어. 승객이 금방 모여서 시간이 넉넉하게 도착하면 버스 타는 곳까지 태워다 줄 거고, 아니면 도착해서 오토바이 택시를 잡아 줄 거야.”

“버스는 오늘 중으로 탈 수 있을까요?”

“다카르에서 아침에 출발한 버스가 탐바쿤다로 오고 있을 테니, 아마 그 버스를 탈 수 있을 거야. 바마코까지 가는 건 그거 한 대 밖에 없어.”

“정말 감사합니다. 덕분에 살았어요.”

대충 머릿속에서 상황 정리가 되고 나니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이제 같이 타고 갈 승객만 오면 된다. 이제 겨우 10시 반이니 시간은 충분하다.

벨린가라 셉플라스 승차장, 간단하게 먹을 걸 파는 가게들이 있었다


  는 개뿔, 11시가 다 되어 가는데 아직 아무도 나타나질 않는다. 기온은 벌써 40도 가까이 치솟았는지 너무 덥다. 모래가 끼어 지퍼가 망가진 보조가방에서 물병을 꺼내 벌컥벌컥 마셨다. 바마코까지 가는 동안 핸드폰과 보조배터리가 버틸 수 있을지 걱정이다. 통화나 인터넷은 안 되더라도 GPS로 작동하는 오프라인 지도 어플은 쓸 수 있어야 할 텐데...

  승객은 오지 않고 또 어디로 갔는지 운전수도 보이지가 않는다. 더운 와중에 무작정 기다리고 있느라 짜증이 슬슬 오르기 시작하는 와중에 어디서 나타났는지 아이들 넷이 나를 보고 “잭키찬!”하고 소리 질러가며 장난까지 걸었다. 한 500번 정도는 적당히 웃어주고 무시했음에도 아예 자리를 잡고 앉아 네 명이 돌림노래처럼 끊임없이 “잭키찬!”콜을 하는 통에 결국 굴복하고 말았다. 견디다 못한 내가 아이들을 향해 휙 돌아보며 한국말로 소리를 질렀다.

"그래 내가 바로 취권! 잭키찬이다! 이 자식들아. 사진이나 한 방 찍자! 자 찍는다!"

  녀석들이 의외의 반응에 흠칫하더니 카메라를 들이대자 이내 다시 실실 웃고 앉았다. 그래 할 것도 없는데 니들이랑 놀면서 시간이나 때우자는 생각으로 왈로프어로 "노토두?(이름이 뭐야?)"하고 물었더니 아이들이  순간 놀랐다가, 내가 왈로프어를 제대로 할 줄 아는 건 아니라는 걸 금방 알아채고는 다시 깔깔거리며 자기들 이름을 연달아 외쳤다.

  말이 전혀 통하지 않는 아이들과 한참 동안 '니들에게 줄 동전이 정말 한 푼도 없다.' '나는 중국인이 아니다.' '잭키찬은 중국 아저씨다.' 따위의 무용한 의사소통을 시도하다가 집어치웠다. 가방에 챙겨두었던 비스킷을 꺼내 아이들과 나눠 먹었다.


  세네갈 부랑아들은 과일이나 음식을 담기 위한 플라스틱 통이나 깡통을 목에 걸고 거리를 누비며 사람들 사이에서 구걸을 하거나 재주껏 망고를 따먹는다. 아이들을 귀찮아하며 매정하게 내치는 사람들이 종종 있지만 아이들은 결코 주눅 드는 법이 없다. 그것은 아무래도 사람들이 자신들을 굶게 내버려 두지는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 아닐까? 어른들은 자주 마주치는 아이들 몇몇의 이름도 알고 인사도 곧잘 주고받는다. 가끔 오며 가며 마주칠 때 주머니를 뒤적거려 몇 푼의 동전이나 먹을 것을 건네며 혼자만 먹지 말고 다른 아이들과 꼭 함께 나누어 먹으라는 당부를 한다. 그렇게 허기를 채우고 난 아이들은 함께 어울려서 진이 빠지도록 실컷 뛰어논다. 그러다 또 몰려다니며 구걸을 한다. 하루하루 고된 일상이지만 온 동네를 누비며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이웃들이 베푸는 작은 도움들에 기대어 살아간다. 그래서인지 이 장난기 어린아이들의 웃음과 미소는 때론 얄미워 보일만큼 씩씩하고 마음이 복받칠 정도로 희망적이다.

  적당히 영악하고 모자람 없이 무구한 생기발랄함을 보고 있으면 아이들이 가엽고 딱하다는 생각 따윈 들지 않았다. 나는 아이들이 어쩌다 부랑아가 되었는지도 알지 못하고, 그들 삶의 팍팍하고 고단한 면면들을 상상할 수도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아이들의 삶과 미소를 계속해서 이어나가게 하는 것이 바로,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풍요로움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그토록 맹신해온, 삶을 재고 평가하는 온갖 기준들과는 전혀 상관없는, 서로 기대어 함께 살아가기 위한 풍요로움 말이다.

  우리는 아이들의 오늘과 내일을, 일상과 미소를 지켜내야 한다. 사회를 직조하는 그 어떤 관념과 사상도 궁극적으로 그것을 위한 것이다. 라고 푸석푸석한 비스킷을 우물거리며 멍하니 생각하다 보니, 비스킷은 전부 아이들 입 속으로 사라진 지 오래였고, 운전수가 나를 부르며 얼른 차에 타라고 했다. 좀 전만 해도 텅 비어있던 차가 어느새 만석이었다.


  차에 몸을 실었다. 문을 열고 닫을 때마다 먼지가 풀풀 날렸다. 차 안은 뜨거운 열기로 가득했다.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바깥공기로 숨을 쉬고 있었는데 아이들이 "잭키!"하고 쪼르르 창가로 달려왔다. 손을 내밀어 한 명씩 악수를 했다. 속으로 '나는 이 아이들 기억 속에 영원히 중국인으로 남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어 혼자 피식 웃다가 '뭐 아무렴 어때?'하고 말았다. 문득 주머니 속 50달라시가 떠올라 꺼내서 아이들에게 주었다. 국경 마을이니까 환전 정도는 알아서 할 수 있겠지. 이윽고 차가 탐바쿤다를 향해 출발했다. 아이들은 멀어지는 나를 향해 손을 흔들다 이내 저들끼리 어디론가 함께 신나게 달려갔다.          



  정말 숨이 턱턱 막힐 정도로 더운 날씨였다. 그런데도 워낙 공기가 건조해 땀이 나오기 무섭게 증발해버려 찝찝하지는 않았다. 차가 덜컹거리거나 말거나 열기에 지쳐 꾸벅꾸벅 졸았다. 중간에 어느 마을에 잠시 차가 정차했다.

“바난! 바난!”

젊은 여자 몇 명이 바나나가 담긴 플라스틱 대야를 들고 우리 차로 달려와 차창 안으로 바나나를 들이밀었다. 다른 승객 몇이 사 먹는 걸 보고 나도 한 송이 샀다. 차가 다시 출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강을 건너는 다리 위를 지났다. ‘여기는 그래도 다리가 잘 놓여 있네?’ 하고 얼른 사진을 찍었더니 옆 자리 사람이 이 강이 감비아강이라고 알려주었다.

세네갈에서 본 감비아 강 상류


  오후 2시 즈음 탐바쿤다에 도착했다. 세네갈 동부지역에서 가장 큰 거점도시답게 셉플라스 타고 내리는 곳도 복잡하기 그지없었다. 다른 승객들은 도착하자마자 뿔뿔이 흩어져 제 갈 길 가는데, 나 혼자 안 가고 있으니 운전수가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얼른 오토바이 택시 한 대를 불러 기사에게 내가 갈 곳을 일러 주었다.

  오토바이 택시를 타고 탐바쿤다 시내를 빠져나와 동쪽 외곽에 내렸다. 길가에 있는 조그만 건물이 버스회사 사무소였다. 버스도 이 앞에 선다고 했다. 건물 앞에 사람이 하나도 보이지 않아, 이미 버스가 가버린 것은 아닐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안으로 들어갔다. 머리에 하늘색 천을 두른 낯선 옷차림의 사내들이 있었다. 짧은 프랑스어로 물으니 짧은 영어로 대답해준다.     

“살람알리쿰! 봉주르, 사바? 나, 간다. 바마코? 버스 언제?”

“말리쿰살람! 바마코? 아직, 아직! 표 사고 여기서 기다려.”     

15,000프랑(약 3만 원)을 내고 버스표를 샀다. 버스는 언제 오냐고 몇 번을 물어봤는데, 자기들도 모르지만 하여튼 오고는 있다고, 오늘 안에는 온다고 한다. 이래서야 영 맘을 놓을 수가 없지만, 여기까지 수월하게 온 것만으로도 감사할 일이다. 사무소 밖으로 나가려는데 직원이 나를 불러 세운다.

“바가지!(짐!) 바가지!(짐!) 히어 히어. 너~무 무거워.”

직원이 사무소 안쪽에 작은 문 앞으로 나를 데려가 문을 열자, 작은 창고가 나왔다. 두 평도 안돼 보였다. 여기다 짐을 맡겨 두라고 했다. 영 내키지 않아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자, 창고 안의 다른 짐들을 가리키며 다른 사람들 짐도 다 여기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배낭에 자물쇠도 잘 채워 뒀고, 버스가 언제 올지 몰라 어디 다녀올 수도 없으니 맡겨 두기로 하고 한쪽 구석에 가방을 잘 세워두고 나왔다. 직원이 문을 일부러 소리가 나게 쾅 닫더니 말했다.

“이제 우리가 지켜. 아무도 못 들어가. 걱정하지 마.”     

구글 맵 스트리트 뷰로 찾은 사진, 오른쪽에서 두 번째, 나무 기둥으로 차양을 세워 둔 건물이 버스 회사

  사무소 밖으로 나왔다. 가게 앞에 달린 나무 기둥을 세워 만든 차양 아래에 벤치랑 평상이 있어서 햇볕을 피하는 데는 문제가 없어 다행이었다. 40도 가까이 되는 더운 날씨지만 건조해서 응달에 앉아 있으면 의외로 시원한 느낌도 있었다. 습도가 높은 한국의 여름 날씨와는 정말 판이하게 다르다.

  버스회사 앞 도로는 아스팔트 포장이 잘 깔려 있었는데, 유조차며, 컨테이너 트럭 같은 커다란 차들이 심심하면 한 대 씩 지나갔다. 지도를 확인해보니 세네갈 서쪽 끝, 수도 다카르부터 동쪽 끝, 말리 국경까지 이어지는 N1번 국도였다. 국경까지는 183킬로미터, 버스로 얼마나 걸릴까? 벨린가라에서 여기까지 오는데 걸린 시간을 가지고 어림짐작 해보면 네 시간에서 다섯 시간은 걸릴 것 같다. 183킬로미터 가는데 네댓 시간이라... 그럼 국경 건너서 바마코까지는 얼마나 걸린다는 거야? 시간도 때울 겸 산수 계산을 해보니 국경을 지나 바마코까지 711킬로미터를 더 가는데 걸리는 시간이 대략 15시간이다. 지금 당장 버스를 타도 내일 아침 무렵에나 도착한다는 얘기다. 손안에 있는 작은 지도 위에 그어진 선이 보이는 단순함에 새삼 놀랐다. 그 작은 지도 위로 그어진 선을 물리적으로 직접 따라가는 일은 떠나기 전 품었던 상상을 아득히 뛰어넘는다. 생각해보면 여행의 목적지보다 지도의 선 위를 따라 흘러가는 여정에서 우리는 더 많은 것들과 마주하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얼결에 밥까지 얻어먹었다

  버스회사 직원들 서너 명이 커다란 양은 대접에 밥을 잔뜩 담아 나왔다. 뗴부젠(Thieboudienne)이 오늘 점심인 모양이었다. 맛있는 냄새가 풀풀 났다. 내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아 식사를 시작하려던 직원이 나를 보고 물었다.

“같이 먹을래?”

아침에 바세에서 출발해 여기까지 오는 동안 비스킷 몇 개랑 바나나밖에 안 먹은 내가 마다할 리 없었다. 숟가락을 하나 받아 들고 같이 열심히 퍼먹었다

  뗴부젠은 세네갈과 감비아에서 가장 흔한 식사다. 양파, 마늘, 매운 고추 넣고 끓인 토마토소스에 야채를 듬뿍 넣어 밥과 구운 생선에 끼얹어 먹는데, 점심이나 저녁으로 먹는다. 무슬림 사회라 동네 식당에 가면 숟가락을 안 주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난감하긴 하지만, 오른손을 잘 오므려 살살 떠먹는 것도 한국에 온 외국인이 젓가락질 연습하듯 연습하다 보면 금방 익숙해진다. 생선 비린내가 나거나 야채와 향신료 조합이 안 맞으면 먹기 힘든데, 이건 맛있다. 버스회사 직원들과 말이 통하면 통하는 데로 안 통하면 안 통하는 데로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받으며 정말 맛있게 먹었다. 버스 오는 시간은 자기들도 진짜 모르겠다고 했다. 진짜 모르나 보다.


언제 올지 모를 버스를 가만히 앉아 하염없이 기다렸다

  버스회사 앞에 붙박이처럼 앉아 기다린 지도 두 시간이 넘었다. 시간은 좀처럼 가질 않고 버스는 오지 않는다. 건물 바로 옆 길가 노점상에 한 아주머니가 가판대를 가져다 놓고 망고를 팔길래 사 먹었다. 칼로 대충 쓱쓱 깎아서 주는 걸 받아, 한 입 크게 베어 물면 달달하니 맛있었다. 땀을 워낙 많이 흘려 달달한 게 계속 당겨, 하염없이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한 번에 한 개씩 세 번을 사 먹었다. 덕분에 바로 단골이 되었다. 세 번째 사러 갔을 때는 망고를 몇 개나 먹을 셈이냐고 사갈 거면 한꺼번에 사가라며 아주머니가 깔깔 웃었다.

  물을 사러 구멍가게에 들어갔더니 페트병에 담긴 물이 없다. 대신 비닐봉지에 담긴 물만 판다. 비닐봉지 물은 다카르에 있을 때부터 봤지만, 전혀 마시고 싶지 않아서 내내 애써 피해왔는데 이젠 선택지가 없었다. 흔히들 농담처럼 생수 한 병 원가 계산하면, 물보다 페트병 값이 더 비싸다고들 했었는데, 그래서 상대적으로 더 싼 비닐봉지에 물을 담아 싸게 파는 게 아닐까? 비닐봉지에 담아 파는 물이라니 한국에서는 상상도 못 할 물건이다.


  세네갈에서 1.5리터 페트병 생수 값이 4~500프랑(약 1000원)이나 하는데 반해, 이 비닐봉지에 담긴 물은 300~500밀리리터 짜리가 하나에 고작 몇십 프랑, 100원도 안 한다. 소득 수준을 생각하면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선택지가 아예 없는 셈이다. 가게 냉장고에 넣어두고 팔거나, 길에서 어린아이들이나 여자들이 시원한 물을 채운 대야에 물 봉지를 잔뜩 담아 돌아다니며 판다, 냉장고도 없고 수돗물도 안 나오는 집에 사는 사람들이 그나마 깨끗하고 시원한 물을 쉽게 마실 수 있는 방법은 이걸 사 마시는 것뿐이다.

  그러나 가격도 너무 싸고, 정체불명의 회사가 만드는 물도 많다 보니 수질에 문제가 있다. 봉지를 물어뜯어 마셔보면 바로 안다. 잘 걸리면 그냥 수돗물 맛이지만, 잘못 걸리면 염소나 불소 같은 소독약 냄새에 인상을 찌푸리지 않을 수가 없다.

  물 봉지 때문에 나오는 쓰레기도 굉장히 큰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쓰레기를 수거해 처리하는 체계가 미비해 사람들이 물을 마시면 봉지를 그 자리에 그냥 버린다. 물을 안 마시는 사람은 없으니 매일 어마어마한 양의 쓰레기가 나온다. 한국에서 가을날 낙엽 굴러다니듯 서아프리카에서는 물 봉지가 굴러다닌다. 붕지가 터지면 곤란하기 때문에 대부분 질기고 튼튼한 저밀도 폴리에틸렌(LDPE)으로 봉지를 만드는데 이거 안 썩는다.


  봉지에 담긴 물 하나에서도 참 많은 것들이 보인다. 이 저렴한 물건은 서아프리카의 열악하고 부족한 물 공급을 보완하는 획기적인 발명품이면서도, 한편으론 페트병 물과 대비되어 전형적인 아프리카 이중 경제구조를 상징하는 상품이기도 하다.

  플라스틱 맛이 나는 소독약 냄새 진한 물을 마시며 인류문명의 이기와 어리석음을 생각한다. 쓰고 나서 발생하는 쓰레기를 처리할 방법도 계획도 없이 생산과 공급에만 열을 올려, 누군가가 떼돈을 버는 동안 다른 한쪽에선 상품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짐과 동시에 심각한 문제들이 발생하는 것이 그렇다. 20세기 문명의 성취로 여겨졌던 수많은 것들이 지금 와서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골칫거리가 되어버린 것처럼. 이 물 봉지도 그렇게 되어버렸다. 그러나 이미 이 물에 의존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처지에 놓인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아져 버렸다. 우리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앞으로 질리도록 마시게 될 비닐봉지 물, 이것 때문에 쓰레기가 넘쳐난다, https://www.makery.info/en/2017/04/25/les-sacs-plastiq

  버스는 오지 않고, 해가 저물어간다. 망고 장수 아주머니도 진작 장사를 마치고 돌아갔다. 그냥 지나가는 트럭 하나를 히치하이킹해서 잡아 타버릴까 하는 생각마저 들기 시작할 즈음에 하나둘 짐을 잔뜩 든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길가에 짐을 쫙 늘어놓고 선지 10분도 채 안되어 거짓말처럼 대형 버스가 나타나 그 앞에 섰다. 그 누구에게 물어도 버스 오는 시간을 모른다고 했는데 이 사람들은 어떻게 알고 온 걸까? 알 수 없다.

  버스회사 사무소로 들어가 배낭을 다시 꺼내왔더니 짐칸에 짐을 싣고 검표를 하느라 버스 주변이 시끌시끌했다. 장거리 이동에 지쳐 보이는 승객 몇 명이 버스에서 내려 구멍가게에 먹을 것을 사러 갔다. 몇몇은 으슥한 담벼락 뒤로 달려가 소변을 누고 있었다. 버스회사 직원에게 표를 보이고 화물칸에 배낭을 실었다. 마침내 버스에 올라 창가 빈자리에 앉았다. 저녁 7시 반이었다. 탔으니 됐다. 버스가 사방이 암흑천지인 도로를 뚫고 달렸다. 이내 기절하듯 잠들었다.

  버스 전면 중앙에 달린 작은 TV로 DVD인지 USB에 담긴 영상을 틀어주었는데, 대부분 코미디 쇼나 시트콤 같은 것들이었다. 그래서 승객들이 “와하하하!”하고 웃을 때마다 깨는 바람에 잠을 설쳤다. 에어컨은 또 어찌나 세게 틀어놓았는지, 가방에서 점퍼를 꺼내 입었는데도 추웠다.



  몇 시간이 지나 버스가 서고 실내등이 켜졌다. 사람들이 웅성웅성 내리기 시작했다. 국경마을 키디라(Kidira)에 도착한 모양이었다. 시계를 보니 자정을 막 넘기고 있었다. 국경이고 나발이고 너무 졸려서 눈을 반쯤 감은 채로 버스에서 내려 사람들 뒤를 따라갔다. 주변은 가로등 하나 없이 어두컴컴했다. 출입국사무소 대문 안으로 들어서니 경찰 직원 한 명이 돌아다니며 승객들의 신분증과 여권을 싹 걷어갔다. 피로한 기색이 역력한 승객들이 출입국사무소 마당 아무 데나 앉거나 드러누웠다. 사무소 문 앞의 직원이 한 명씩 호명해서 건물 안으로 불러들여 출국심사를 했다. 시간이 제법 걸릴 모양이었다. 화장실에 다녀와서 나도 대충 자리를 잡아 가방을 베고 드러누웠다.

  심사를 마친 사람이 한 명씩 사무소를 빠져나가고, 몇 명 채 남지 않았을 때가 되어서야 내 이름이 호명되었다. 호명한 직원이 하도 이상하게 발음해서 ‘내 이름이 맞나?’ 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출입국 심사를 담당하는 직원 책상 위에 포개진 여권 몇 개 위로 내 여권이 눈에 띄었다. 아마 자국민인 세네갈 사람들부터 출국심사를 끝내고 외국인 출국심사를 하는 것 같았다. 심사관이 내 여권을 집어 들고 내 이름을 부르며 고개를 들었다. 이번에도 엉뚱한 발음이었다.


“오늘 입국했는데 오늘 바로 출국하네요? 어디까지 갑니까?”

“바마코요. 그 전에도 세네갈에 있다가 오늘까지 감비아에 있었습니다.”

“세네갈은 언제 왔었죠? 비행기로 왔나요?”

“날짜는 정확히 기억 안 납니다. 입국 도장을 찾아보시죠. 모리타니아에서 친구들이랑 차로 입국했습니다. 디아마(Diama) 국경으로요.”

심사관이 여권을 이리저리 넘겨서 첫 번째 세네갈 입국도장을 찾았다.

“친구들은 지금 어딨죠?”

“한 친구는 아직 다카르에 있고, 다른 친구는 먼저 말리로 갔습니다. 우리는 모로코에서 만나서 다카르까지만 같이 여행했어요.”

"네. 그거면 됐습니다. bon voyage!"


  여권을 돌려받아 출입국사무소를 나오니 버스가 없어져서 순간 당황했다. 다행히 버스는 검문을 받느라 저만치 멀리 가 있었다. 다시 버스에 올라타서 세네갈과 말리 국경을 가르는 팔레메(Falémé) 강을 건넜다. 강을 건너자마자 버스에서 또 내렸다. 다리 옆에 설치된 초소에서 나온 완전 무장을 한 군인이 승객 한 사람 한 사람 신분증을 확인한 뒤 동과 시켰다. 버스는 우리를 지나쳐 먼저 말리 쪽으로 넘어가서 검문을 받았다. 입국도장은 어디서 받는 건지 알 수 없어 헤매다가 먼저 통과한 사람 뒤를 졸졸 따라갔다.

  도로변 작은 건물 앞으로 새어 나오는 불빛에 같이 버스를 타고 온 다른 승객들이 보였다. 탐바쿤다에서 버스표를 샀던 버스회사 사무소보다 작은 이 허름한 초소만 한 건물이 말리 출입국사무소였다. 입국심사를 받으려고 줄을 섰다. 금방 내 차례가 되었다. 사무소 안으로 들어가니 녹색 베레모를 쓴 완고한 인상의 장교가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늦은 시간인데도 피곤한 기색이 보이질 않았다. 다카르에 있는 말리 대사관에서 미리 받아둔 말리 비자가 보이게 여권을 펼쳐서 장교에게 건넸다.


“꼬레아... 어디로 갑니까?”

“바마코로 갑니다.”

“여행?”

“네 여행입니다.”

“얼마나?”

“2주에서 3주 정도입니다.”

“말리에서 체류하는 동안 다른 방문지는 예정에 없습니까?”

“현재 말리 북부 전황이 좋지 않은 걸 알고 있어서, 거의 바마코에 머물 예정이지만, 세구(Ségou)에는 가보고 싶습니다.”

“남부라고 해서 상황이 완전히 안전한 건 아니니 항상 조심해야 할 거요. 출국은?”

“기니로 갑니다.”

“c'est bon(좋습니다!) bon voyage!"

  말리로 무사히 입국했다. 이 밤중에도 문을 연 가게가 있어 차에서 마실 물이랑 비스킷을 샀다. 아직 갈 길이 멀다. 버스에 다시 타자마자 다시 곯아떨어졌다.

깜깜한 국경 말리 출입국사무소 앞, 세네갈에서 발급받은 말리 비자 (단수 비자라 s를 볼펜으로 대충 지워 놨다)


  날이 밝아 오기 시작할 즈음에 일찍 잠에서 깼다. 버스는 아직도 사하라 사막 남쪽 경계를 달리고 있었다. 핸드폰의 GPS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지도를 봐도 지금 내가 어디를 지나고 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버스 안은 조용했다. 시끄러웠던 TV도 꺼져있고 승객들도 대부분 곤히 잠들어 있었다. 좌석 사이 통로에 놓인 쓰레기통에는 사람들이 먹고 나서 버린 쓰레기와 음료수 병들이 가득 쌓이다 못해 넘쳐서 지저분하게 바닥에 굴러다녔다.

  조용히 잠든 사람들을 둘러보다 문득 다들 어딘가로 그리운 누군가를 만나러, 혹은 어떤 목적이 있어 이 먼 길을 가고 있을 텐데, 나만 목적 없이 막연히 길 위에 있다는 사실이 마음에 사무쳤다. 나는 무엇을 좇고 있기에 이 먼 곳까지 와있는 걸까? 아니면 그저 무언가로부터 끊임없이 벗어나고 도망치기 위해 이 긴 도주선을 그리고 있는 것일까? 정말이지 알 수가 없다.


  바깥으로 보이는 황량한 풍경에 마음을 빼앗겨 내내 창밖을 보고 있었다. 이 거칠고 메마른 대지에서도 매 순간 셀 수도 없이 많은 생명과 물질들이 약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너무나도 쉽게 망각한다. 오래된 폐허처럼 내 안을 차지한 헛헛함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저 공허하게 텅 빈 채로 마냥 죽어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아침이 밝고, 버스가 어느 마을 어귀에 섰다. 15분 정도 쉬어가는 모양이다. 승객들이 버스에서 내려 기지개도 켜고 물도 마시고 하면서 아침을 맞는다. 5분 정도 길을 따라 걸으며 몸을 풀고 다시 버스로 되돌아왔다. 도로변 한 구석에 마련된 장소에 몇 사람이 모여 조용히 아침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버스가 다시 출발했다. 얼마쯤이나 지났을까, 내내 동쪽을 향해 달리던 버스가 오른쪽으로 크게 방향을 틀어 남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다시 사하라를 벗어났다.

2018. 02~04월, 모리타니아, 세네갈, 감비아, 세네갈, 말리


감비아에서 만난 사람들 -끝-


지난 이야기

감비아에서 만난 사람들 #1

감비아에서 만난 사람들 #2

감비아에서 만난 사람들 #3

감비아에서 만난 사람들 #4

감비아에서 만난 사람들 #5



매거진의 이전글 감비아에서 만난 사람들 #5 (The Gambia)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