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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loise Oct 31. 2021

"못 본 지 360일이 넘었어요..."

한국방송작가협회 교육원 창작반을 졸업하고... 



정말 오랜만에 브런치에 들어왔더니 알림이 하나 뜬다. 

"작가님, 글을 못 본 지 360일이 넘었어요..." 내 눈을 의심한다. 언젠가부터 통 모니터 앞에 앉는 일이 줄어든 것 같긴 한데 거의 1년씩이나? 글을 쓰지 않은 셈이다. 일 외적인 것들을 써내려 가는 건 브런치를 제외하고는 내 가계부 정도가 전부이기에, 나는 근 1년간 그 어떤 생각도 글로 옮겨 적지 않았다는 말이 된다. 


꼭 브런치뿐만 아니라, 지난 몇 개월 간 모니터 앞에 앉은 일이 없다. 새 집으로 이사 올 때 나는 현관 앞 작은 방을 서재로 꾸몄다. 그것도 1800짜리 책상을 두 개나 들여서 하나는 pc, 하나는 내 노트북을 두고 뭐라도 쓰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로 만들었다. 내가 7평짜리 단칸 자취방 시절 꿈꿨던, 그야말로 완벽한 면학 분위기의 서재. 그러나, 얼마 안 가 서재는 마치 샤이닝에 나오는 빨간 방처럼, 누가 들어가면 저주라도 걸린다고 말한 것처럼 아무도 찾지 않는 쓸쓸한 방이 되었다. 


문제는 명확해졌다. 한동안 글을 쓰는 게 방학숙제 같은 일이 돼 버렸단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이거 해야 하긴 하는데, 언제까지고 미루기엔 영 찜찜한데 오기는 계속 생겼다. 어디 끝까지 한번 미뤄보자! 와 같은 쓸데없는 오기. 그런데, 그전에 따져볼 게 있다. 난 어쩌다가 글을 안 쓰면 죄책감을 갖는 사람이 되었나? 그 과정들 사이에는 나의 교육원 여정이 한몫을 했다.




지난번에 연수반 탈락 후기를 썼던 것 같은데, 신기하게도 나는 한 학기를 쉬자 온 몸이 근질거려 로코랍시고  새 대본을 써 교육원에 보냈고, 전문반으로 합격을 했다. 그리고 전문반에서 창작반으로 승반을 했다. 나로서는 정말 수십 번 다시 확인하게 되는 결과였다. 대본으로 성적을 매겨 승반을 하는 시스템인데, 창작반은 열 명 내외의 학생만 뽑아 장학 개념으로 수업료가 면제되는 과정이라 서너 번 재수를 하는 경우도 있단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설렘과 걱정을 동시에 안고 수업을 듣기 시작했다. 코로나19로 수업은 당연히 비대면으로 진행됐다. 나로서는 오히려 다행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뜻밖의 승반에 도저히 생업을 포기할 수 없었던 내가, 그나마 회사에 궁둥이 붙이고 수업을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6개월여간의 수업은 정말 '빡셌다'. 승반 심사에 냈던 단막 분석에 이어 곧바로 미니시리즈 대본 1,2부와 통 줄거리가 과제로 주어졌다. 눈물 콧물로 써 내려가다가, 내 차례가 다돼갈 때쯤엔 거의 반 정신을 빼놓고 쓰고 나니... 막상 피드백을 받을 때 정말 말도 안 되는 설정을 했다는 걸 깨닫고 스스로 웃음이 났다. 분명 내가 좋아서 배우기 시작한 건데, "제발... 교육원만 빨리 끝나면 너무 행복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리고 교육원 과정이 끝났다. 열정적인 선생님, 멋지다는 말로는 부족한 동기들, 그 안에서 충분히 배우고 성장할 수 있는 시간이었지만 나는 최선을 다하지 못했다. 창작반 과제조차 벼락치기로 해내는 나 스스로를 보고 실망하면서 점점 더 무력해졌다. 드디어 교육원 졸업장을 품에 안고는 그 길로 단 한 번도, 모니터를 들춰보지 않았다. 동기들처럼 공모전도 내야 하는데, 뭐라도 좀 써야 하는데, 말만 하고는 아예 모든 글쓰기를 멈춰 버렸다. 심지어 고생했다는 의미로 발간해주는 작품집을 열 권이나 들고 와 놓고는 한 번을 들춰보질 못했다. 최선을 다하지 못한 나에게 내가 부끄러워서. 



함께 졸업한 동기들의 좋은 소식이 속속 들려온다. 주말마다 작업실에서 열 시간씩 보낸다는 50줄의 한 동기는 나에게 젊음이 무기라며 격려해준다. 그는 내가 건넨 작품집을 받더니 10만 원을 봉투에 담아 주었다. 그간의 노고가 실려있는 건데 어떻게 맨손으로 받냐는 거였다. 참 고마우면서도, 민망하면서도, 울컥하는 순간이었다. 


오랜만에 다시 '빨간 방'이 된 서재에 앉았다. "글을 안 쓴 지 360일..."이라는 브런치의 친절한 멘트를 보며 곰곰이 생각해본다. 꿈 있고 몸뚱이 있으면 언제고 쓸 수 있는 지금 이 시간, 그냥 내보내기 아깝지 않을까. 대학병원 간호사 때려치우고, 장장 10년을 매달려 얼마 전 당당히 치대에 합격한 사촌언니가 해준 말이 떠오른다. "그 말 있지. 열심히 하지 않은 사람은 죄를 두 번 받아야 한대. 하나는 불합격이고, 또 다른 하나는 같이 공부한 동기가 먼저 잘 나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거." 


예전엔 흘려들었던 언니의 말이 이제야 와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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