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천성이 예민하고 소심하다. 남들은 웃어넘기는 작은 말에 상처 받기도 하고, 10년 뒤에도 일어날까 말까 한 일을 마치 내일 일어날 것처럼 전전긍긍하기도 한다. a를 생각하면 어느새 d까지 생각하고, 늘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둔다. 한마디로 굉장히 피곤한 성격이다.
국어사전에 등재된 예민하다는 뜻은 생각보다 긍정적인 의미다. 저 말처럼, 남들보다 무언가 판단하는 과정이 아주 조금은 더 빠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수많은 분석을 거치면서 오는 곱절의 스트레스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다.
천성이 그런데다, 일분일초 촌각을 다투는 방송업계에서 지금까지 일하고 있으니 나의 예민함은 아마 지난 7년 동안 조금씩 몸집을 불려 왔을 것이다. 작은 꼬투리 하나라도 잡히면 안 되니만큼, 예민함이 필수 요건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방송작가는 일을 할 땐 예민하되, 갑작스러운 폐지나 결방에는 초연해져야 한다. 왜냐면, 그 일이 비일비재하니까.
얼마 전 내가 일하고 있는 프로그램이 또다시 폐지설에 휩싸였다.
"이번엔 진짜 폐지된대."
10년이 넘도록 있어 왔던 폐지설이기에 마음을 굳게 먹고 시간이 지나가는 대로 내버려두리라 다짐했건만, 걱정에 숨이 턱 막히기 시작한다. 불과 2,3년 전만 해도 "꼬우면 때려치우자, 갈 덴 많다."라는 막연한 근자감이 있었는데 이상하게 앞자리에 3을 달고 나니 그게 어렵다. 지난 2년 동안 매일 반복되는 루틴에 나도 모르게 적응을 해버렸고, 이 평온한 일상이 깨지는 것과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사람들과 일을 해나가야 할 생각에 그만 앞이 깜깜해지고 만 것이다. 수많은 프로그램 중 내 한 몸 갈 곳 없을까 하며 마음을 다잡아 보지만, 한편으론 또다시 이력서를 들이밀고 면접을 보는 모든 상황들이 눈 앞에 펼쳐져 버겁기만 하다. 게다가 방송업계는 완벽한 피라미드 구조다. 피라미드 꼭대기에 있는 메인작가라는 자리는 차지하려는 자가 너무나 많다.
이제 8년 차인 나는, 앞으로 이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얼마나 많은 프로그램에 이력서를 내고, 얼마나 많은 사람을 만나야 할까. 부당한 일 때문에 팀원 중 누군가와 싸움이라도 하고 나온다면, 내 평판에 흠집이 나 일을 구하지 못하는 건 아닐까... 이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다 보면, 스쳐 지나는 여의도의 회사원들이 내심 부러워진다. 물론 각자의 고충이 있겠지만, 불안정함을 느끼는 이런 시기가 오면 그저 내 눈엔 그들의 규칙적인 출퇴근 시간과 휴가, 퇴직금, 소속감과 안정감만 확대돼 보일 뿐이다.
밥벌이가 걸려 있는 상황에서, 프로그램 폐지는 적색경보다. 당장 카드 할부와 월세 등등 현실적인 문제들이 수백 가지 떠오른다. 이러한 상황에서 가뜩이나 예민한 나의 천성은 극도의 스트레스를 불러온다. 하지만, 앞으로도 겪어나갈 수많은 상황 중 하나일 뿐인데 스트레스만 받고 있으면 곤란하다. 걱정한다고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지금 다른 일이라도 구하려고 구인 구직란을 들여다봐도 타이밍이 안 맞으면 무용지물이다.
몇 년간 쌓여온 내 경험 데이터로 미루어 봤을 때,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딱 한 가지. 그저 묵묵히 지금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 나와 함께 프로그램을 만드는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늘 촉각을 곤두세우고, 내 예민함을 좋은 쪽으로 활용하는 것뿐이다. 내가 이 일에 최선을 다했을 때, 그 기운이 훗날 나에게 새로운 기회의 장을 열어줄 수 있기에.
어쩌면, 나처럼 게으른 사람에게는 '불안정함'이라는 것이 어느 정도 필요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불안정함에서 오는 불안은 내 정신을 더 바짝 차리게 만들고, 작은 돈이라도 조금씩 모아 미래를 대비하게 만들고, 끊임없이 나를 배우게끔 만든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는 말처럼, 이제 나는 불안정함에 스트레스받는 대신 즐겨야 함을 깨달았다.
세상 모든 일이 어떻게 스트레스받지 않고 불안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저 내가 선택했고, 내가 좋아하는 이 직업을 끊임없이 불안해하는 대신, 사랑하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