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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loise Feb 26. 2020

교육원 동기를 만나다

같은 취미와 꿈을 공유한다는 것

나는 늘 누군가 나를 발견할까 봐 두려웠고,
막상 아무도 발견해주지 않으면 서글펐다. 

[책 사립학교 아이들 중에서]

교육원 기초반 시절, 늘 맨 뒷자리를 고수하며 앉아있던 나는, 나에 대해 적어도 한 가지 확실한 점을 깨달았다. 내가 생각보다 붙임성이 없고, 그렇다고 혼자서 뭔가를 하는 게 썩 유쾌하다고 느끼진 않는 사람이라는 것. 그러니까, 소위 '인싸'까진 아니어도 몇 마디를 섞어 줄 친구 한 명이 꼭 필요한 사람, 그게 바로 나였다.


1주, 2주 시간이 지날수록 앞자리에 앉은 사람들은 삼삼오오 친해지는 듯 보였다. 그중에는 벌써 스터디를 꾸린 듯한 모임도 보였고 나는 묘한 소외감을 느끼기에 이르렀다.


그러던 어느 날, 옆자리의 같은 반 학생이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긴 생머리에 세련된 분위기를 풍기는, 나보다 나이가 많아 보이지만 정확히 몇 살인지는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우리는 첫 회식 자리에서 같은 테이블에 앉게 됐고 공교롭게도 그분은 한때 방송작가로 활동하던 동종업계 선배였다. 


"애 학교 때문에 오늘은 좀 일찍 가봐야 되겠어요." 

"어머, 결혼하셨어요?"

"무슨, 우리 애가 고등학생인데." 


그때의 신선한 충격이란! 비단 외모뿐 아니라, 친한 언니처럼 세대 차이가 느껴지지 않는 그녀였기에 나는 새삼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을 실감했다. 




그날 이후 언니(나이 차이가 꽤 나지만 언니라 부르기로 했다)와 나는 종종 만나 커피도 마시고, 맛있는 음식도 먹으며 서로의 글에 대해 이야기했다. 나이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같은 취미와 꿈을 공유한다는 것만으로도 함께 하는 시간이 즐거웠다. 덩달아, 한 아이의 엄마이자 아내, 성실한 학생의 역할까지 척척 해내는 언니가 참 멋있었다. 


대충 생각하고 대충 글을 쓰는 나와는 달리, 언니는 등장인물을 구상하는 것부터 남달랐다. 아마 모르긴 해도, 혈액형과 손톱을 물어뜯는 등의 사소한 습관까지 머릿속에 다 담겨 있었을 것이다. 


참 운이 좋게도 언니와 나는 나란히 연수반에 올라갔고, 서로의 작품을 본인 것처럼 꼼꼼히 읽고 의견을 나누었다. 언니는 모든 부분에 최선을 다했고, 수업을 들을 때면 눈빛이 반짝반짝거렸다. 


'내가 엄마가 되고, 아내가 되었을 때에도 스스로를 위해 저렇게 열정을 쏟을 수 있을까?' 


나는 어느새 언니를 진심으로 응원하는 팬이 돼 있었다. 



무엇이든 눈빛을 반짝이며 열심히 하던 언니는 전문반에 올라갔고, 나는 떨어졌다. 


"아니 도대체 이해가 안 돼. 나이가 어려서 그런 거 아니야?"

"떨어질 만하니까 떨어진 거죠 뭐. 나이가 어려도 진짜 잘 썼으면 올라갔을 텐데요." 

"지금 그만두지 말고 꼭 다른데라도 가서 배우고 해야 해." 


서대문역의 유명한 국수전골 집에서 우리는 두런두런 회포를 풀었다. 감기에 걸린 내게 따뜻한 국물로 몸이라도 녹이라며 언니가 고른 메뉴였다. 언니는 몇 번이고 이해가 안 된다며 눈살을 찌푸렸고 나는 떨어질 만해서 그랬다, 그렇지만 선생님이 내 진가를 못 알아보셨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다른 건 둘째 치고, 더 이상 언니와 함께 수업을 듣지 못한다는 게 아쉬웠다. 이렇게 마음 맞는 동기를 또 만날 수 있을까. 같은 꿈을 꾸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야기할 게 한 트럭인데. 




얼마 전, 오랜만에 만난 언니는 벌써 두 번째 대본을 쓰는 중이었다. 언니의 대본은 전보다 더 깔끔해졌다. 두 번째 대본은 멜로로 써보려 한다며 언니는 또 새까만 눈을 반짝였다. 나는 언니의 앞날이 진심으로 기대된다며 힘주어 얘기했다. 빈말이 아니고 정말, 언니의 이름을 내건 드라마를 볼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랐다. 


이런 게 교육원의 좋은 점 아닐까. 질 좋은 수업을 들을 수 있다는 것, 대본을 강제로라도 어쨌든 써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같은 꿈을 꾸는 멋진 동기를 만나는 것. 비록 한 템포 쉬게 되긴 했으나 지난 1년의 시간 동안 난 이 세 가지를 모두 경험했다. 


아마 언니는 지금쯤 썩 잘 어울리지만 불편해서 싫어하는 뿔테 안경을 끼고, 모니터 앞에 앉아 있을 것이다. 그런 언니를 떠올리며 나도 조금이나마 자극을 받아 본다. 언젠가 다시 한번 서로의 대본을 보며 끝도 없는 수다를 떨길 바라면서. 그리고 먼 훗날 서로의 이름을 내건 드라마를 보며 "저 사람이 내 동기야~!"라고 신나게 외치길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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