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데없는 자만심과 이별하기
나의 2019년을 표현하자면, 불합격이라는 세 글자로 말할 수 있을 듯싶다. 도통 되는 게 없고 집중도 안 되고, 무엇 하나 손에 잡히지 않고, 괜히 마음만 싱숭생숭. 무라도 썰려고 칼을 뽑았는데 칼은 간데없고 오징어 다리 같은 것만 삐죽 나와있는 어설픈 모양. 나는 이상하게 어릴 적부터 나에게는 관대했다. 뭘 해도 잘될 것 같았고, 내가 열심히 하면 못할 건 없다고 믿었다. 여기까진 좋다. 그러나 어느 순간 점점 게으르기만 하고 무슨 일이든 최대한 뒤로 미루며 '난 잘 될 거야'라고 되뇌기만 하는 그런 사람이 돼 있었다. 이럴 경우, 밑천이 드러나면 크게 한 방 먹는 법이고 나는 그 대가를 '불합격'으로 치렀다.
나는 드라마 아카데미 교육원 승반에 떨어졌다. 교육원 수업이 능사가 아니라는 것은 잘 알지만, 그래도 기회를 받고 선택을 안 하는 것과, 선택권 조차 주어지지 못하는 것은 천지차이다. 여태까진 그저 운이 좋았다. 나를 제외한 모든 이들이 드라마를 진짜 사랑하고, 또 절박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 사이에서 어중간하게 있던 나는 어느 순간 방향을 잃었다. 동기들이 으쌰 으쌰 하자는 의미로 건넨 칭찬은 나에겐 독이 돼 돌아왔다. 결국 이렇다 할 주제 의식도 없이 나는 시간 맞추기에 급급해 대본을 써냈고 결과는? 전문반 승반에 당당히 실패!
한동안 아무것도 쓰지 않고 아무것도 보지 않았다. 꼭 상심해서라기보다는, 그냥 눈에 들어오는 것도 없었고 뭔가 쓰고 싶다는 생각도 안 들었다. 심지어 매일 쓰던 몰스킨도 사지 않았다. 드라마를 보는 것도 스트레스를 받았고 그나마 가끔 보는 영화들은 또 어찌나 재미가 없는지, 이게 과연 내가 보는 눈이 높아져서 그런 건지 아니면 그냥 삶의 모든 것들이 다 재미없어져 버렸는지 심각하게 고민이 될 정도였다. 나를 잘 챙겨주시고 매사 밤을 새울 정도로 열성적이던 동기님은 승반 했고, 내 소식을 듣더니 엄청 놀라셨다.
"쉬는 것보다는 그래도 뭐라도 써. 꼭 교육원 아니어도."
"나이 좀 더 먹어서 다시 해. 지금 하는 일 계속하고, 천천히. "
동기님은 내게 진심으로 재능이 있으니 포기하지 말고 꾸준히 하라고 격려해주었다. 연수반 담당 선생님은 내게 나이 좀 더 먹고 오라고 말씀하셨다. '제가 그래도 앞자리에 3을 달았습니다 선생님, 동안이라 그래요'라고 외치고 싶었으나, 그냥 내 글이 그만큼의 세계밖에 담지 못했기에 하신 말씀이라고 생각했다.
대본을 다시 보며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내 글의 가장 큰 문제가 뭘까, 스스로 부끄럽지 않을 만큼 노력했을까? 답이 나왔다. 연수반에서 내가 실패한 이유는 내가 진짜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쓰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내 주제와 장르가 완전히 따로 노는 느낌이었다. 스스로 부끄럽지 않을 만큼 노력하지 않았다는 것도 한몫했다. 써내기에 급급했고, 어떻게 하면 더 자극적인 장면을 넣을 수 있을지, MSG 치기에만 바빴다.
지금은 오히려 이렇게 한 템포 쉬게 된 게 다행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침에 일을 하고 오후에 수업을 듣고 대본을 구상하고 쓴다는 것이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언젠가부터 하기 싫은 걸 억지로 하면서 스트레스받는다는 생각까지 들었으니, 선생님이 나를 제대로 본 것이었다.
수업을 (강제로) 쉬면서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드라마도 봤다. 신기하게 어느 순간부터 다시 모든 게 재밌어지기 시작했다. 2020년부턴 나에 대한 너무 과한 믿음도 조금은 내려놓기로 마음먹었다. 브런치에 쓰는 글도 내킬 때만 쓰기보다는, 요일을 정해서 아무리 짧은 글이라도 올려보기로 했다. 대본 구상도 여유를 가지고 정말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곰곰이 생각해서 써보기로 마음먹었다. 쓸데없는 자만심보다는, 나를 사랑하는 만큼 노력하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