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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크 Jul 07. 2020

더 라스트 오브 어스 파트 2

Polygon: Ludonarrative Dissonance ESSAY

The Last of Us 2 epitomizes
one of gaming's longest debates

    by Chris Plante

Polygon 원문 링크: https://www.polygon.com/2020/6/26/21304642/the-last-of-us-2-violence

* 의역 및 생략된 문장이 존재합니다. 전체 글 맥락에 맞게 수정된 표현도 있습니다.


'더 라스트 오브 어스 파트 2'는 지난 13년 간 암암리에 이어져 오던 비디오 게임 업계의 오랜, 그리고 이상한 논의에 마침표를 찍었다. 게임 시나리오와 플레이 경험이 충돌해 빚어지던 불협화음(Ludonarrative Dissonace)에 대한 논의 말이다.


루도내러티브는 유저가 게임을 진행하면서 취해야 하는 행동 루도(ludo, 루도는 라틴어로 '플레이(Play)'를 의미한다)와 게임의 스토리가 말하고자 하는 바인 내러티브(narrative)를 결합한 단어다. 이 두 가지 요소가 자연스럽게 연결되지 않는 경향을 이르러 루도내러티브 디스오넌스라 부른다.


루도내러티브 디스오넌스는 게임 디자이너인 클린트 호킹(Clint Hocking)이 2007년 남긴 블로그 포스트에서 사용된 단어다. 클린트 호킹이 촉발한 루도내러티브 디스오넌스에 관한 이야기는 현재까지도 꾸준히 논의되어오고 있는데, 특히 대규모 예산이 투입된 비디오 게임들(big-budget video games, 이하 대작)에서 이런 딜레마 발생 사례를 꾸준히 수집할 수 있다. 실제로 2007년은 <바이오쇼크>와 <언차티드> 시리즈가 출시된 해였다. 게임 평론 씬에서는 이들이 게임이 성숙한 콘텐츠로 인정받을 수 있는 증거이면서 동시에, 성숙한 콘텐츠임을 증명하려는 과정에서 루도내러티브 디스오넌스가 사이드 이펙트로 등장했다고 본다.


루도내러티브 디스오넌스가 유행어처럼 이곳 저곳에서 인용되는 와중, 게임 개발자들이 패널로 나서 비디오 게임 시나리오 라이터에 대한 토론을 시작했다. 수많은 학계의 이야기들이 소셜 미디어에서 회오리치듯 소비되는 동안 맥락은 없어졌고, 스스로 '예술'이 되기를 열망하는 폭력적 게임들이 빠르게 등장했지만 그들의 목적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핵심 딜레마는 여전하다. 어떻게 해야 게임 제작자들이 스토리와 플레이 경험을 완벽하게 결합시킬 수 있을까? 또는, 그들은 그러기 위해 도전을 했는가?


2000년대 후반부터 대작 비디오 게임을 개발하는 스튜디오들은 성인들만이 이해할 법한 심각한 휴먼 스토리오를 보여주고 싶어했다. 영화제나 문학 공모전에서 수상할 법한 그런 이야기들 말이다. 그럼에도 대작 게임 스튜디오들은 여전히 하나의 문법에 지배당해 있다. 바로, 총(Shoot)이다.


총을 쏘는 행위, 슈팅은 근 40년 간 수많은 게임이 애용해온 재밋거리다. 무언가를 조준하고, 방아쇠를 당긴다. 그리고 무언가 폭발하거나, 힘없이 흔들거리며 계단에 나자빠지는 것을 지켜본다. 이렇듯 무언가를 쏘고 죽이는 건 아주 편하게 강렬한 효과를 줄 수 있는 방법이었다.


3D FPS는 성공할 확률이 높았다. <둠>과 <라이즈 오브 더 트라이어드>, <언리얼>, <골든아이 007>까지 사례도 다양하다. 자연스럽게 3D FPS 장르는 빠르게 성공했고 소위 AAA 게임이라 부르는 것들도 이 흐름을 벗어나지 못했다. 슈팅 요소가 들어간 게임은 가장 많이 만들어지고 있고, 팔리며, 당연히 퍼블리셔(유통사)들도 더 많이 팔기 위해 이 장르를 선호하게 된다.


1990년대에서 2000년대 사이, 게임 퍼블리셔들은 아주 많은 슈터 장르를 만들어냈다. 1인칭, 3인칭, 그저 눈 앞에 있는 것들을 모두 쏴 버리면 된다는 건 똑같다. 수많은 '총잡이'들은 캠페인과 멀티플레이 모드까지 진출했다. 급기야는 퍼즐 게임에도 총이 나왔으니 말이다.


그리고 2007년, 평론가들은 슈터 장르에 대한 피로감을 토로하기 시작했다. 실제로 그 해에  최다 GOTY(game of the year)를 수상한 게임은 <바이오쇼크>나 <포탈>, <모던 웨페어>, <매스 이펙트>가 아니었다. 영광은 <슈퍼 마리오 갤럭시>에 돌아갔다.


생각지도 못했던 슈터 장르의 무지막지한 성공 뒤에, 제작자들과 플레이어들도 지친 듯 보였다. 그래서 그들은 히어로와 히로인들의 자못 진지한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사실 대부분 그들이 수백 명에 이르는 사람들을 '쏘아 죽이며' 풀어내는 이야기긴 하지만 말이다. 여기까지가 2007년 이후, 게임 평론가들이 루도내러티브 디스오넌스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게 된 이유에 대한 나열이다.




더 라스트 오브 어스 파트 2가

다시 촉발시킨 논의

<언차티드: 드레이크의 행운>은 너티독이 만든 게임이다. <더 라스트 오브 어스 파트 2>의 그 개발사, 맞다. 좌우지간 <언차티드: 드레이크의 행운> 포스터를 보면, 슈터 장르가 만들어낸 폭력성의 전차에 기꺼이 베어링이 되고자 하는 열망이 느껴진다. 게임의 주인공 네이선 드레이크는 사랑스럽지만 다소 바보스러운 보물 사냥꾼이다. 아, 그리고 그를 처음 보는 순간 바로 알아챌 수 있는 다른 재능도 하나 있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냉혈한처럼 살해하는(cold-blooded killing) 능력.


드레이크와 그의 동료인 저널리스트 엘레나 피셔는 바다 한 가운데에서 해적 무리에 둘러싸인다. 엘라나는 당국에 구조 요청할 것을 제안하지만, 드레이크는 불법적으로 보물을 찾고 있는 거라며 난색을 표한다. 그러면서 드레이크는 동시에 그의 아주 오래된 친구를 꺼내든다- 크고 묵직한 권총을 말이다. 그리고는 총을 한 번도 다뤄본 적이 없다는 엘레나에게도 총을 쥐어준다. 흥미롭게도 엘레나는 곧 아주 능숙하게 총을 쏜다.


우리는 드레이크를 처음 조종할 때, 그의 손을 통해 상당한 수의 사람을 학살한다. <언차티드> 모든 시리즈에서 그렇다. 여기서 우리는 불협화음(또는 딜레마)를 마주하게 된다. <언차티드>는 즐겁고 신나는 보물 사냥꾼의 이야기를 다룬다. 하지만 게임 플레이를 통해 정작 경험하는 것은 백인 남성이 미지의 대륙을 탐방하며, 그 앞을 막아서는 누구인지도 모를 불특정 다수의 사람을 살해하는 일이다. (실제 보물 사냥의 역사가 그럴지라도, 게임에서는 그런 지점에 대한 언급을 깊게 하지는 않는다)


스토리와 설정상의 유쾌하고 바보스러운 보물 사냥꾼 네이선 드레이크와, 플레이 경험상의 냉혈한 킬러 네이선 드레이크 간에는 현격한 차이가 있다. 사실 다양한 스펙트럼을 지닌 게임 제작자들(인디와 대규모 스튜디오에 이르기까지)은 이런 문제점을 꾸준히 진단해왔다. 좀 더 성숙한 이야기를 하려면 '슈팅'보다 더 나은 문법이 필요하다고. 이런 움직임이 더 나은 스토리 경험을 만들 것이라고 말이다.


수백 개가 넘는 블로그 글과 트위터, 그리고 게임 매거진에 송고된 원고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의 논의가 이루어진 후, 평론가들은 전략적으로 그 단어를 언급하지 않기로 했다. 루도내러티브 디스오넌스를 말이다. 하지만 나는 지금 여기서 그 '피의 맹세'를 깬다. 몇몇 평론가들은 여전히 개발자들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시도중이라는 걸 논의에 올리고 있다. 그래서 루도내러티브 디스오넌스에 대한 도전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몇몇 인디게임 제작자들은 폭력 행위를 그들의 게임에서 제거하려는 시도도 한다. '워킹 시뮬레이션'이 수면으로 나오도록 이끈 <디어 에스더>와 <프로테우스>와 같은 작품 말이다. <프로테우스>는 1인칭 게임으로, 플레이어가 우주를 유영하며 그 속에서 하는 행위에 집중하게 만든다. <바이오쇼크> 시리즈 제작에 참여했던 개발자가 스튜디오를 떠나 만든 <곤 홈>과 <블랙아웃 클럽>도 있다. 게임 자체의 텐션은 AAA 게임 제작자의 그것이라고 생각하기는 어렵지만, 총을 제거한 채 어떻게 스토리를 풀어갈 것인지에 대한 나름의 해결책을 보여준다.


하지만 대작 게임 스튜디오들은 여전히 폭력성이 가져다 주는 경제적 안정성을 거부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지금 현재, 퍼블리셔들이 출시를 결정하는 게임 리스트만 봐도 어떤 게임이 수익을 내리라 기대되는지 적나라하게 알 수 있다. 총은, 돈을 만든다.



내러티브는
게임의 폭력성 '집착'에
면죄부를 줄 수 있나

2010년 초, 대작 비디오 게임 스튜디오들은 한 가지를 깨달았다. 액션을 스토리에 가깝게 수정할 수 없다는 것을. 그래서 스토리를 액션에 밀접하게 디자인하기로 결정했다. 좀 다르게 이야기하면, 게임 개발자들이 폭력에 대해 이야기하는 '성숙한' 게임을 만들기로 결심했다고도 말할 수 있다. <스펙 옵스: 더 라인>같은 게임은 전장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다. 백인이 민간인 사이에 떨어지면 벌어지는 학살극을 정면으로 보여주는 듯 하지만, 그들이 디자인한 게임은 직접 해 봤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크레딧 롤이 끝나면 우리는 멀티플레이 모드에 진입할 수 있다. 멀티플레이 모드에서는 죄책감 없이, 심지어 죄책감을 느끼게끔 하는 컷신도 없이 우리가 원하는 대로 타인을 죽일 수 있다. 인디게임 중에서도 이런 플레이가 가능한 게임이 있다. <핫 라인 마이애미> 시리즈 말이다.


앞서 언급한 <스펙 옵스: 더 라인>과 같은 게임들은 폭력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않으면서도 내러티브를 훌륭히 작동시키기는 했다. 그리고 도덕적인 판단도 모호하게끔 만들었다. 대작 비디오 게임들은 '스토리텔링'의 거대한 조류를 따랐고, 예술 작품을 만들고자 하는 개발자들도 그런 흐름을 거부하지 않았다.


하지만 돈을 벌기 위해서는 아주 현실적인 총을 만들어야 했다. 개중에는 거대한 메시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잔인하거나 멋져 보이는 살해 애니메이션을 만들고자 하는 사람도 있다. 게임 산업이 팽창하면서 수백, 심지어 수천 명의 사람이 게임 제작에 투입되다 보니 제각기 다양한 관점이 존재할 수밖에 없고, 수많은 아이디어가 충돌하는 현상을 불러일으켰다.


결과적으로, 폭력적인 비디오 게임은 여전히 이야기와 게임 경험을 일치시키지 못하고 있다. 누군가는 게임의 제 1가치는 '재미'라고 말하니, 플레이 경험은 여전히 무언가를 조준하고 쏘는 행위를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더 라스트 오브 어스 파트 2>는 스토리와 게임 플레이 경험의 불협화음에서 오는 괴리 현상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언차티드>의 개발사이기도 한 너티독이 찾은 불협화음 해소 방법은 스토리를 게임 플레이 경험과 맞추는 것이었다. 사람을 죽이는 행위 말이다. 결과는 초현실적이다. 이 비싼 내러티브 실험은,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난다면 현실의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를 묘사하고 있다.


엘리를 플레이하면, 포스트 아포칼립스 세계관의 시애틀에서 복수를 목표로 살아가는 소녀의 관점을 간접 경험할 것이다. 제작자들은 디스토피아가 된 미국에서 자신을 위협하는 세력들과 폭력에게서 자신을 지켜야 하는 상황을 엘리를 통해 상상하게끔 만든다. 엘리는 친구를 살리기 위해, 또는 자비를 베풀어달라며 울부짖는 사람들을 수없이 경험한다. 그리고 이내 그들이 처음 생각했던 것 만큼 악인이 아니며 각자 복잡한 동기 때문에 행동을 결정한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하지만 엘리는 바뀔 수 없다. 그리스 격언 따위 때문이 아니라, 그냥 정말 '바뀔 수 없는'것이다. <더 라스트 오브 어스 파트 2>의 라이터는 세대 간 분리에 대한 경고와(아포칼립스 이전에 살았던 세대와 그 이후의 삶만 경험했던 아이들) 그런 위협이 도사리는 와중에도 가족을 만들겠다 결심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했다. 바로 지금 현재 이야기되어야 할 이야기이고, 아포칼립스 세계에서 자라난 엘리 역시 성장해 깨달을 것이다. 삶을 산다는 것은 무거운 무기에 둘러싸인 시간이 아니라는 것을. 하지만 <더 라스트 오브 어스 파트 2>가 좀 더 큰 메시지를 꺼내려는 순간, 그들의 시도는 질시와 폭력에 납작해지고 말았다.


그래서 엘리는 바뀔 수 없다. 대작 비디오 게임이 바뀌지 않는 이상 엘리는 바뀔 수 없다. 엘리가 배운 건, 폭력은 폭력을 낳는다는 것이다. 엘리는 그녀 스스로와 세상을 구하려면 총을 내려놔야 한다는 사실을 안다. 그렇다면, 엘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좀 더 적나라하게 이야기하면, 대작 비디오 게임은 엘리가 그렇게 하도록 허락해 줄까?


대작 비디오 게임은 무언가를 파괴하고 죽이도록 설계됐다. 자, 이제 엘리는 사람을 죽이는 행위를 뭔가 조금 더 '도덕적인' 일로 전환하려면, 좀비를 죽이면 된다. 궁상맞은 엘리의 세계에서, 사람 몸의 형태를 한 좀비들 말이다. 그러면 좀 더 도덕적이고, 예측가능한 결과물이 나온다.


13년 전 평론가와 개발자들은 게임에서 더 이상의 루도내러티브 디스오넌스를 경험하지 않을 것이라 기대했다. 비디오 게임 스토리와 액션이 잘 결합될 거라 믿었다. 하지만 작금의 사태가 바로 결과다. 나는 이제 불협화음에 크게 신경쓰지 않는다. 게임에서 그다지 큰 의미를 찾지 않고, 폭력적인 게임을 집어다 재미로 즐기면 그만이다. 타인에게 폭력적인 게임을 찾는 이유에 대해 정당화해야 할 당위도 없다. 누군가가 내게 '무언가 죽이는' 게임을 하는 걸 좋아하냐고 묻는다면, 대답은 심플하다. 퍼블리셔들이 내게 그런 게임을 팔았으니까.


내가 가장 바랐던 건 <더 라스트 오브 어스 파스 2>가 폭력성에서 벗어날 수 있는 해결법을 제시해 주는 것이었다. 제작자들은 그들이 실제 사람들의 행동을 포착했다고 믿겠지만, 우리는 실제로 그런 상황이 오면 살인 분대를 꾸리게 될까? 아니면 우리는 이 이야기가 비디오 게임이라서 가능한 것이니, 이런 이야기를 이해하고 받아들어야 할까? 사실, 판단하기 어려운 일이다. 시장에는 여전히 '폭력성에 기대지 않은' 대작 비디오 게임이 많지 않으니까.


<더 라스트 오브 어스 파트 2>는 결국, 폭력은 피할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슬프게도, 이게 AAA 타이틀이라고 불리는 대작 비디오 게임의 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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