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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일’하는 여행이라고요? 여행 가서 뭔 일?

교환여행 헬프엑스에서의 '일'에 대하여

   

헬프엑스에 대해 설명하면 종종 이런 반응이 돌아온다.

나: 헬프엑스 여행은 호스트의 일을 돕고,
그 대가로 숙식을 제공받으며 하는 여행이에요.
상대방: 으엑, 여행 가서 일을 한다고요? 


그래서 나는 ‘일’이란 단어를 생각해보게 되었다. 우리에게 일이란 무엇인가? 먹고 살기 위해 억지로 가야 하는 회사부터 잔소리 때문에 꿈질꿈질 일어나 겨우 하는 방 청소까지, 일이란 가급적 피하고 싶은 것, 안 할 수 있으면 안 하면 좋은 것, 무엇보다 귀찮은 것이란 인식이 지배적이다. 원해서 하는 일, 즐거워서 하는 일, 자아실현을 위한 일도 물론 있겠지만 어쨌거나 어느 순간 일은 일이다. 귀찮음보단 쉼을, 부지런함보다는 늘어짐을 택하는 게 인간 고유의 본성 아니냐고 말하면 누군가는 화를 내려나. 


대한민국에서 태어나 각종 일(학생 때는 공부, 사회에서는 회사 일)을 해오면서 나 또한 일이란 단어에 대해 굳이 따지자면 긍정보다는 부정의 경험을 더 많이 했던 것 같다. 그런데, 헬프엑스의 일, 그러니까 헬퍼(여행자)로써 호스트(집주인)의 일을 도우면서 일의 내용과 시간 등에 대해 처음으로 생각해보게 되었다.   

  



헬프엑스 여행에서 하게 되는 일

평범하게 인문계 대학을 졸업하고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는 회사원이었던 난, 헬프엑스 여행이란 게 있단 걸 알고 떠나겠다고 결심할 때까지만 해도 도대체 내가 호스트에게 무슨 도움이 될까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미적 감각이라고는 없는 타고난 똥손에, 아무 기술도 없는 내가 무슨 일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최근 가장 많이 한 건 엑셀과 파워포인트인데, 별로 소용이 있어 보이진 않는데….     


할 필요도 없는 걱정이었다. 결론적으로, 유럽과 남미를 각 5개월여 간 헬프엑스로 여행하면서 나는 아래의 일들을 성공적으로 해냈다.    

  

이탈리아 어린이 둘과 레고놀이 하기

한국식으로 저녁밥상 차리기

숲속 산책길로 하루 4번 큰 강아지 산책 시키기 (+고양이들 밥 주기)

난로에 불 붙여 집 따뜻하게 데우기    

책장 하나 페인트칠 하기

영국 어린이들 실뜨기 가르쳐주기

텃밭 가꾸기

장작 패는 기계에 통나무 쪼갠 거 넣기

블루베리 덤불 걷어내기

풀 먹이는 데 라마 데려가기

걸어서 십분 거리에 도시락 배달하기

요리해서 같이 먹기

갓 낳은 신선한 계란 줍기

닭장 물통에 물 채워주기

강아지들 밥 주기

     

등등     

들어보니 어떤가? 꽤 할 만하지 않은가?     

 



일의 내용

헬프엑스의 일이란, 어떤 특별한 기술이 필요한 게 아니다. 어차피 그런 일들은 그 짧은 시간 안에 맡기기도 어렵다. (*물론 특별한 기술을 갖고 있으면 더욱 환영받긴 한다. 가령, 목공은 정말 환영받는 스킬 중 하나다. 무언가를(거의 집) 고치고, 새로 짓는 건 다 지어진 ‘아파트’에 들어가 사는 게 아니라면 인간이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일이니 말이다. 외국에선 헬퍼들의 도움을 받아 단독주택, 오두막, 돌집 등을 수리&보수해서 살아가는 경우가 꽤 있고, 우리나라에도 오래된 한옥을 그렇게 헬퍼를 받아 수리하고자 하는 프로젝트가 구례 쪽에 있다.)


내가 경험한 헬프엑스의 일들은 대부분 튼튼한 몸, 그리고 도움이 되고자 하는 마음만 있으면 해낼 수 있는 것들이었는데, 한 마디로 ‘돌봄’의 성격이 강했다. 아이를 돌보고, 동물을 돌보고, 텃밭을 돌본다. 기본적으로 엄청난 기술보다는 ‘시간’과 ‘애정’이 가장 필요한 일이다. 시간이 없어서, 혹은 혼자 계속 하기엔 지루해서라도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다. 아이 하나를 기르는 데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아프리카 속담처럼, 다른 어른의 손이 약간이라도 보태지면 주양육자는 훨씬 더 숨통이 트인다. 동물 또한 마찬가지다. 매일 정시에 밥을 주고 물을 주고 산책을 시켜야 하는(놀아줘야 하는) 동물은 아이와 다를 바 없고, 그걸 몇십 년씩 매일 하는 건 지겹고 힘든 일이다. 약간의 도움이 활력소가 될 수 있다.     

  

돌봄의 정점은 요리라고 생각한다. 요리는 기본적으로 ‘몸’을 돌보는 일이다. 신선한 식재료를 얻어 와서(사든, 밭에서 뽑든, 산에서 채취하든), 씻고 다듬고 조리해서, 균형 잡히게 구성하여 맛있게 내어놓는다는 건 실로 엄청난 일이다. 머리와 몸을 골고루 써야 하는 일이다. 대부분 현대인은 그 ‘일’을 타인에게 이관한다. 반찬가게에서 사 오고, 정기배송을 시키고, 엄마에게 받거나, 그것도 아니면 사 먹지 않는가. 

(그 과정에서 우리는 ‘내 입맛을 찾을 자유’와 ‘상상력’을 박탈당한다. 고소한 맛을 위해 들깻가루를 좀 넣어볼까, 어라, 생각보다 맛있네! 으음, 이 된장보다 저 된장을 넣어봐야겠다. 좀 더 진한 맛이 나면 좋겠어 – 같은 과정을 겪을 일이 없으니 말이다. 사 먹을 때의 자유란 기껏해야 이 소스냐 저 소스냐, 아니면 토핑을 선택하는 정도의, ‘이미 다 세팅된 판 위’에서의 자유일 뿐이다. 사회심리학자 하랄트 벨처가 말했듯,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는 “동물원의 하마와 같은 자유”다. 무언가를 소비하는 ‘소비자’로서만 존재할 때 우리는 시장을 이끌어가는 것이 아니라 시장에 이끌려가고 있을 뿐이고, 그것이 곧 동물원의 하마와 같은 자유란 것이다.)     


정리해보자. 헬프엑스의 일이란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필요한 일이란 게 내 생각이다. 그리고 감사하게도 어렵지 않게 도움을 줄 수 있고, 그 도움이 두세 배의 기쁨과 보람으로 서로에게 나누어질 수 있는 일이다. 잘 먹고, 건강하게 같이 시간을 보내는 것. 애정을 담아 눈앞의 존재에 시간을 쏟는 것이 유한한 시간을 사는 우리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행복이 아닐까? 

이 일들은 쉽게 평가절하되기도 한다. 가치를 몰라보고 다른 이들에게 쉽게 떠넘겨진다. 건강한 먹거리와 요리를 고민하기보단 한 끼 사 먹는 게 훨씬 더 쉽고, 육아와 돌봄의 가치가 우리 사회에서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것처럼,      


결국 핵심은 마음과 태도다. 위의 일들을 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면, 어떤 마음가짐과 태도로 그 일에 임할 것인가. 헬퍼가 되어 기회를 얻었다면, 그 일들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생각해보자. 지금 내 앞에 주어진 그 일은, 누구를 ‘살리고’ 있는지. 그리고 이제껏 나는 나와 내 주변의 사랑하는 존대들을 얼마나 살려 보았는지.      




일하는 시간

아무리 멋진 일도 하는 시간이 너무 길면 결국 지쳐버린다. 같은 일을 계속, 끝없이 하려니 지겹고 숨이 막혀오기도 한다. 사람은 다 비슷하다.

헬프엑스의 일은 평일에만 한다. 월화수목금, 하루에 5시간 내외로 한다. 물론 정해진 건 없어서 어떤 호스트는 주 30시간을 일하길 바랄 수도 있는데, 그러면 일하는 시간이 하루 6시간으로 상당히 길다. 물론 하루 5시간씩 6일을 일할 수도 있겠으나, 새로운 곳을 여행하려면 시간을 통으로 확보하는 게 필요하고, 그렇기에 주말을 비워두는 선택을 할 사람이 더 많을 것이다. 


어쨌거나, 어떤 일이든 하루에 5시간 정도 한다면 그닥 나쁠 건 없다. 헬퍼 입장에선 해보지 않았던 새로운 일을 새로운 환경에서 하는 것이고, 새로움은 일의 지루함을 이겨낼 힘을 준다. 호스트 또한 헬퍼의 신선한 관점에 힘입어 자신의 일을 새로운 힘으로 바라볼 수 있다.


무엇보다, 일하는 시간은 호스트와 이런저런 이야길 하면서(언어가 통하는 게 여기서 중요하다) 서로를 알아가고 관계를 맺어갈 수 있는 중요한 기회다. 서로 잘 모르는 사람끼리 ‘알아가기 위한’ 대화를 인위적으로 하려고 하면 상당히 어색하다. 하지만 어떤 일이든, 손으로 사부작사부작 일하면서 떠는 수다는 자연스럽다. 돌이켜보면 엄마와 가장 대화를 많이 할 때가, 때로 속 깊은 말도 툭 튀어나올 때가 같이 야채 다듬을 때 아닌가? 함께 시간을 보내며 같은 미션을 수행한 사람들은 서로 유대감을 쌓기 마련이고, 이것이 헬프엑스 여행의 묘미이자 원천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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