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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레나 Sep 05. 2022

조현화랑: 내 마음을 초록하게

부산여행을 계획할 때 제일 먼저 둘러보는 건 전시 일정이다. 지도 앱에 표시해둔 갤러리를 하나하나 클릭하며 전시 여부를 확인한다. 그다음 인스타그램에 접속해 어떤 전시인가 들여다본다. 화면 속 그림들은 여행을 갈까 말까 고민할 때 확신을, 확정된 여행에는 기대감을 더해준다.


올여름, 내게 확신과 기대를 더한 건 조현화랑이었다. 특정 작품을 위해 지어진 갤러리와 그 공간에 자리한 작품을 보는 걸 좋아하는데, 그런 곳은 흔치 않다. 오랑주리 미술관에 있는 모네의 <수련>과 제체시온에 있는 클림트의 <베토벤 프리즈> 정도가 떠오른다. 특정 화가를 위해 지어진 미술관은 더 많지만, 그 화가의 특색을 살린 공간은 많지 않다. 내가 경험한 건 나오시마의 이우환 미술관과 로댕미술관 정원 정도다. 그런 와중에 조현화랑은 어떤 화가 혹은 작품을 위해 설계된 것도 아닌데, 전시마다 공간과 작품이 어우러져 빛을 발한다.


그 빛의 강도는 지난봄 <이배:비스듬히>에서 폭발했다. 화랑계에서 잘 팔리기로 유명한 이배 화백의 작품이 갤러리의 벽과 바닥에 새겨졌다. 검은 붓칠은 바닥에 차곡차곡 쌓여 바다로 향하는 몽돌해변 같았고, 그 끝에서 고개를 들면 한 줄기 붓칠이 지평선처럼 이어졌다. 귀를 기울이면 파도 소리가 들릴지도 모르겠다. 바로 옆에 바다가 있으니. 길을 따라 올라가면 청사포 몽돌해변도 있다. 신발 밑창 너머로 느껴지던 울퉁불퉁한 돌멩이의 촉감이 생생해진다. 지금 여기서만 볼 수 있는 작품을 두 눈으로 보고 싶었다. 근데 그림만 보러 부산에 가는 건 좀 아닌 거 같고 그런 와중에 그림만 보러 다녀온 지인을 보며 지금이라도 갈까 고민하다 보니 여름이 성큼 와버렸다.


해외에서 여름휴가를 보내려던 계획이 무산됐을 때, 제일 먼저 떠오른 건 부산과 조현화랑이었다. 전시 일정을 검색하니 김종학 화백의 <SUMMER>가 시작될 참이었다. 포스터에는 짙은 풀잎과 여름이 무성했다. 파도가 훅-하고 밀려오듯 여행에 대한 기대감이 삽시간에 온몸을 가득 채웠다. 가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조현화랑은 달빛이 예쁘다는 달맞이길에 있다. 문탠로드라고도 불리는데, 달빛을 받으며 가볍게 걷는 길이란다. 해운대 바다를 곁에 두고 걷다가 흥망성쇠라는 태풍이 스쳐 간 듯한 미포항 골목을 굽이굽이 지나간다. 이 길이 맞나 싶은 사잇길을 올라가면 블루라인파크 정류소가 나온다. 잠시 잘 닦인 데크 길을 걷다가 선로를 가로질러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 광안대교가 찔끔 곁들어진 해운대 해수욕장 전경이 보인다. 여기서 사진도 찍으며 잠시 숨을 돌린 뒤 기다란 나무를 차양 삼아 언덕을 오른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도로 건너에 넝쿨로 둘러싸인 회색 돌벽 건물이 짠! 하고 나타난다. 이 길은 여러 번 오르내렸지만 여기서 달을 본 적은 없다. 그러니까 내게는 조현화랑길인 것이다.


화랑을 처음 찾은 건 어느 겨울 늦은 오후였다.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어 모네의 그림 같은 풍경이 펼쳐졌다. 걷다 멈춰 서서 사진찍기를 반복하다 보니 마감 30분 전에야 도착했다. 밖에서 본 건물은 어둑했는데 창문 너머로 따스한 조명 아래 이우환 화백의 그림이 환히 보였다. 마음이 다급해져 돌계단을 성큼성큼 올라가 묵직한 철문을 밀었다. 열리지 않았다. 당겨 보였다. 요지부동이었다. 옆 건물에서 나를 발견했는지 어느 직원이 뒤늦게 문을 열어주며 생일파티를 하느라 잠깐 닫아두었다고 말했다. 나는 시간이 부족할까 걱정된다고 말했고 직원은 지금 보이는 이 공간과 벽 너머의 영상이 전부라 충분하다고 답했다. 사실이었다. 권대섭 도예가의 달항아리가 하나하나 다른 곡선을 띄고 있고 자세히 들여다봐야 질감과 색의 차이를 발견할지라도 다 보는데 10분이면 충분했다. 아쉬운 마음에 하나의 달항아리가 완성되는 영상까지 보고 나서야 문밖을 나섰다. 날은 어둑해지고 있었고 내리막길 덕에 몸은 가뿐해진 와중에 머릿속에는 물레질이 계속해서 맴돌았다. 달항아리와 달맞이길과 겨울밤이 잘 어울려서 내 마음도 보름달처럼 충만해진 시간이었다.


이번엔 한여름 낮에 움직였다. 같은 계절의 같은 풍경을 많이 찍어뒀다며 핸드폰 한 번 안 꺼내고 올라왔는데도 목적지에 다다랐을 때는 더위에 완패한 상태였다. 그럴 때 감동은 휙-하고 빠르게 스쳐 지나간다. 수풀 사이의 S자 돌계단을 올라가니 건물의 벽이 접이식 부채처럼 접혀있어 작품이 바로 눈앞에 펼쳐졌다. ‘와, 너구나, 예쁘다!’ 감탄이 나를 툭 치고 지나갔다. 아마도 김종학 화백은 시중에서 파는 제일 큰 종이 4장을 이어붙여 자신이 설악산에서 몇십 년 동안 바라본 여름을 옮겨 놓았으리라. 그 종이는 천장에서 바닥으로 늘어져 있어 멀리서 보면 화려한 꽃무늬 천 같기도 했고, 더 멀리서 보면 과장을 조금 보태 꽃 비탈길 같았다. 자연과 작품을 갈라놓는 벽이 없어 그리 느꼈을 것이다. 작품명은 <대혼란>인데 꽃과 식물과 곤충이 강렬한 색채를 뽐내며 한데 어우러져 있어 얼굴을 들이밀고 바라보면 조금 어지럽기도 했다.


아쉬움도 달래고 등줄기의 땀도 식힐 겸 화백이 화랑의 쇠문에 새긴 두 마리의 벌과 꽃 한 줄기를, 흰 벽에 외로이 걸린 검정 바탕에 투명한 유리병과 그 안의 자주색 꽃 4송이를 현미경 보듯 찬찬히 바라봤다. 돌아갈까 하며 고개를 돌리니 흰 계단이 보였다. 2층에서 전시가 이어진다는 걸 그제야 알았다. 어떤 장면이 펼쳐질지 1도 모른 채 좁은 계단을 올랐다.


‘이 순간은 영원히 기억되겠구나.’ 그런 순간이 있다. 어릴 땐 마냥 웃고 울었고 무의식적으로 인상적이었던 순간을 오래 기억했다. 어느 순간이 떠오르면, 이 순간이 내게 강렬했나보다고 받아들였다. 지금은 다르다. 좋은 순간은 더욱 의식적으로 곱게 접어 고이 간직한다. 기억의 조각이 쌓여 지금의 나를 형성하는 걸 아니까, 그런 찐감동의 순간이 흔치 않다는 걸 아니까 말이다.


푸르게 우거진 숲과 힘찬 폭포와 우뚝 선 나무와 듬성듬성 피어오른 여름꽃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가로 길이 18m의 여름 <풍경>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경연 프로그램을 보다 보면 가끔 심사위원이 “이건 현장에서 봐야 알 수 있는 감동이에요”라는 말을 한다. 이 <풍경>도 그렇다. 먼저 크기에서 압도되고 그다음으로 작품에서 뿜어져 나오는 아우라에 무너진다. 산을 타며 많은 절경을 보았는데, 이건 또 다른 절경이다. 정신을 차리니 바로 앞의 창밖으로 소나무와 바다와 하늘이 보인다. 나는 계곡보다 바다를, 그림보다 자연을 좋아하는 사람인데 이번만큼은 예외다. 감동은 나를 휙-하고 스쳐 지나갔지만, 그 여파는 오래 남았다.


2022년 여름을 보내며 이 여름은 어떻게 기억될까 종종 생각했다. 비가 많이 내려서 습하고 피로했다. 몇 년 만에 레인부츠를 꺼내 신으며 비가 많이 내렸던 입사 첫해의 여름을 떠올렸고 나는 그동안 무얼 이뤘나 조금 울적해지기도 했다. 여름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계절이고 여름에 재미난 일이 많이 일어나는 법인데, 그래서 겨울에 여름 나라로 여행을 떠나며 여름을 연장하기도 하는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싶었다. 이렇게 2022년 여름은 먹구름색으로 남는 건가, 위기였다.


그때 김종학 화백의 <풍경>을 만났다. 이 여름은 초록빛으로 기억되겠구나, 내 마음에 확신이 들어섰다. 그렇다면 이 여름을 더욱 열심히 초록색으로 색칠해야지. 나는 무성한 초록의 풍경을 기다란 벤치의 끝에서부터 조금씩 옮겨 앉으며 보고 가까이 다가가 천천히 걸으면서 보고 사진과 영상으로 남기고자 핸드폰 화면으로도 봤다. 심지어 해운대를 떠나는 날에 들러 또 보기도 했다. 처음 봤을 때만큼의 감동은 없었지만, 그 덕에 나는 지금도 그 풍경을 세밀하게 그릴 수 있다. 계단을 오르면 왼편에 보이는 귀여운 대각선 폭포와 전시장 안에 들어서면 정면으로 보이는 창밖의 바닷가, 시선을 조금만 오른쪽으로 틀면 산속의 수풀과 여름의 꽃들 그리고 쏟아지는 폭포수와 그 가운데 묵직하게 서 있는 고동색 고목 나무, 저 멀리 넝쿨 숲까지 펼쳐진다. 그림의 끝에서 오른쪽 벽을 바라보면 식물도감 같은 그림 50점이 줄지어 걸려 있다. <풍경>과는 사뭇 다른 얌전하고 정적인 분위기다. 여기서 왼쪽으로 몸을 틀면 또다시 창밖으로 나무와 바다와 하늘이 층층이 펼쳐지고 나의 뒤로는 검정 캔버스에 자리 잡은 작은 노란 넝쿨 꽃이 있다. 이 여름은 비 때문에 참 피곤하다 싶었는데, 빗물이 없었다면 눈앞의 자연과 그림도 없었을 것이다.



여행을 마치고 서울에 돌아오니 장마라고 더 많은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심지어 전국 곳곳에 침수 피해가 일어나기도 했다. 너무 습해서 에어컨 없이 살 수 없는 날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내 마음은 <풍경>을 만나기 전보다 평온했다. 출퇴근길에 초록한 풍경을 바라보며 그날의 <풍경>을 떠올렸고, 덕수궁 연못에서 장 오토니엘의 작품을 보며 내 여름에 초록색을 덧칠해주기도 했다.


그래서 지금 나는 이렇게 적을 수 있기에 이르렀다. 

2022년 여름은 참 초록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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