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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근정 May 01. 2022

엄마도 퇴근합니다

그리고 사이드프로젝트를 시작합니다.

  회사다닐 때 내 별명 중 하나는 KTX였다. 그만큼 출근시간이 정확해서다. 회사는 사내 인트라넷에 로그인, 로그아웃 된 시간으로 출퇴근 시간을 체크했다. 내 출근시간은 9시 30분이었는데, 31분이 되기 3초 전에 메신저에 로그인하는 모습을 보고 동기들이 붙여 준 별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베이터나 지하철을 눈앞에서 놓치면 2-3분씩 늦곤 했다. 이 버릇을 고쳐보려 노력을 안 해본 게 아니다. 한번은 한 달 동안 지각하면 동기 모두에게 커피를 쏘겠다고 선언했다. ‘정시출근 챌린지'라고 이름까지 붙이고 꼭 성공하리라 결의를 다졌다. 대놓고 지켜보는 눈이 많아지면 조금이라도 더 일찍 출근할 줄 알았는데, 나는 더 죽을힘을 다해 뛰어왔다. 그리고 그해 여름 커피값이 밥값만큼 나왔다는 슬픈 결말의 이야기...


  느닷없이 나의 슬픈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절대 바뀌지 않을 것 같았던 내가 아이를 낳고 바뀌었기 때문이다. 일단, 매일 새벽 6시에 일어난다. 주말도 예외 없는 미라클 모닝이다. 회사도 지각하던 올빼미형 인간인 나에게는 엄청난 변화다. 아기는 100일 무렵부터 통잠을 자기 시작했는데, 잠드는 시간과 상관없이 매일 새벽 6시에 일어났다. 나의 생활패턴도 아기와 비슷해졌다. 아기가 낮잠 잘 때 같이 자고, 같이 먹고, 아기가 놀 때 집안일을 틈틈이 했다. 7kg의 아이를 수십번씩 들어 올리는 고강도 육체노동을 마치고 나면 녹초가 되어서 영화 한 편 볼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휴직하는 동안 대학원 진학도 알아보고, 자격증 공부도 하려고 했는데 꿈같은 일이었구나 싶었다. 장류진 작가의 소설 『일의 기쁨과 슬픔』의 단편 「도움의 손길」에 나오는 딩크족 주인공 부부가 아이를 가지지 않기로 결정한 이유를 ‘이십 평대 아파트에 그랜드 피아노를 들이지 않기로 했다’고 비유한 것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가 되었다.


우리 부부는 아이를 가지지 않기로 했다. 나에게 아이는 마치 그랜드 피아노와 같은 것이었다. 평생 들어본 적 없는 아주 고귀한 소리가 날 것이다. 그 소리를 한번 들어보면 특유의 아름다움에 매혹될 것이다. 너무 매혹된 나머지 그 소리를 알기 이전의 내가 가엾다는 착각까지 하게 될지 모른다. 당연히, 그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책임감 있는 어른, 합리적인 인간이라면 그걸 놓을 충분한 공간이 주어져 있는지를 고민해야 할 것이다. 집 안에 거대한 그랜드 피아노를 들이기 전에 그것을 놓을 각이 나오는지를 먼저 판단해야 할 것이다. 아무리 부족해도 어떻게든 욱여넣고 살면 살아진다는 것도 알고 있다. 물론 살 수는 있을 것이다. 집이 아니라 피아노 보관소 같은 느낌으로 살면 될 것이다. 그랜드 피아노가 거실 대부분을 차지하게 될 테고 패브릭 소파와 소파 스툴, 원목 거실장과 몬스테라 화분은 둘 엄두도 못 낼 것이다. 거실을 통해 부엌으로 가려면 한가운데로 가로지르지 못하고 발뒤꿈치를 들고 피아노의 뒷면과 벽 사이로 겨우 지나가거나, 기어서 피아노 밑을 통과해야 할 것이다. 우리 부부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 여태까지 단 한 번도 충분하다거나 여유롭다는 기분으로 살아본 적 없는 삶이었다. 삼십 대 중반, 이제야 비로소 누리게 된 것들을 남은 인생에서도 계속 안정적으로 누리며 살고 싶었다. 이십 평대 아파트에는 그랜드 피아노를 들이지 않는다. 그것이 현명한 우리 부부가 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었다.(『일의 기쁨과 슬픔』「도움의 손길」중)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아기의 모습을 보는 일은 고유한 그랜드 피아노의 선율처럼 아름답고 매혹적이지만 개인적인 보람을 느끼기는 어려웠다. 회사일은 힘들어도 월급이라는 보상이 있고, 성장하고 있다는 효능감과 무언가 이루었다는 성취감을 느낄  있으며, 연차가 쌓이면  나아지리라 기대할  있지만 엄마의 삶은 달랐다. 매일 열심히 해도 매일 쌓이는 집안일에서 좀처럼 보람을 느끼기 어려웠다. 무럭무럭 자라는 아기는 매달 새로운 미션을 던져주었고, 모든 것이 처음인 초보 엄마는 서툴어서 아기에게 매일 미안했다. 아기를 재우며 옆에 함께 누워서 하루를 돌이켜 볼 때면, 마음 한 구석이 허전했다.


  마음을 고쳐먹게 된 계기는 MBC 라디오 PD 장수연의 책, 『처음부터 엄마는 아니었어』에 나온 ‘퇴근 마인드'를 생각하고 나서부터다. 어떤 일은 ‘끝'이 있는 게 아니라, ‘시간'이 지나야 끝난다고 했다. 그럴 때는, ‘이 일을 다 끝내고 퇴근하리라'는 임전무퇴의 각오보다는 ‘오늘이 끝나면 퇴근하자'는 마음가짐이 버티기에 낫다는 것이다. 회사에서 하루 종일 시달려서 멘탈이 온전하지 못한 날에도 퇴근을 하면 알 수 없는 에너지가 차올랐던 것처럼 하루 종일 우는 아이와 씨름하느라 밥 한 끼 못 먹고 녹초가 된 날에도 퇴근(아이 잠듦)을 생각하며 버텼다. 퇴근을 위해 100일이 지날 무렵부터 분리 수면과 수면교육에 공을 들였다. 서서히 수면 패턴이 잡히자 아기는 밤 9시에 규칙적으로 잠이 들었다. 처음에는 퇴근을 하고 난 뒤에도 젖병을 씻고 잡다한 집안일을 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그 시간과 에너지를 오롯이 나를 위해 썼다. 맥주를 마시며 글을 쓰거나 영화를 보고, 운동을 했다. 오늘 못다 한 젖병 세척, 장난감 정리 등은 내일 하면 되고, 남은 집안일은 남편 몫인 거다. 퇴근 후에 육아 모드의 스위치를 끄고 나니 조금 숨통이 트였다. ‘결국 시간이 지나야 해결될 일’을 만났을 땐 오늘의 몫만큼만 견디는 게 방법이라고 했던 장수연 PD 말이 옳았다.


  그렇게 200일이 지났다. ‘나는 절대 하지 못할 거야’라고 생각했던 미라클 모닝을 반년 째 하고 있다. 몸은 고되지만, 적응을 하고 나니 나름의 장점도 있다. 하루가 길다. 특히 오전이 길다. 오전에 가능한 집안일(빨래, 청소, 이유식 만들기, 장난감 세척, 분리수거 등)을 해치운다. 몸을 바삐 움직이고 나니 낮잠이 달다. 낮잠으로 에너지를 충전하고 산뜻하게 오후 일정을 시작한다. 엄마 경력도 2년 차가 되니 나름의 요령이 생겨서 틈틈이 개인적인 시간도 갖는다. 일상에서 떠오른 글감을 휴대폰 메모에 적어두고, 생각날 때마다 한두 문장을 써 놓고, 육퇴 후에 모아서 문단을 썼다. 시부모님 찬스를 이용해 스피치 강의를 열고, 업무 관련 자격증 공부도 한다. 한달에 한 번 씩 아이의 발달 과정에 맞춰 도움이 되는 육아서를 읽고 주변의 또래 엄마들과 줌으로 독서모임을 한다. 완벽하지 않더라도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만큼의 노력으로 한 발짝을 뗀다. 이것도 육아가 내게 가져온 변화 중 하나다.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 두려움과 걱정에 사로잡혀 쉽게 첫 발을 떼지 못했던 내가 육아에 온 정신을 빼앗기자 오히려 스스럼없이 첫 발을 떼게 된 것이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아서 글을 쓰고, 강의를 하고, 공부를 하며 나만의 사이드프로젝트를 시작했다. 혼자서는 시작할 용기가 나지 않았던 일들을 기꺼이 벌리고 해낸다. 아기 덕분에 나는 소중한 시간을 의미 있게 사용하기 위해 이전보다 더 용기 내는 사람이 되었다.


  "폴폴아, 오늘 하루종이 바지 거꾸로 입고 있어서 불편했지. 목욕하기 전에 옷 갈아입히면서 알아차렸지 뭐야. 엄마도 엄마는 처음이라 서툴고 어설플 때가 많단다. 내일은 오늘보다 더 잘해볼게. 새로 산 턱밭이도 빨아서 말려놨어. ‘소창’이라는 좋은 소재로 많이 샀으니까 자주 바꿔줄게. 이제 축축한 턱받이 뒤로 돌려가면서 안 해도 된단다. 마음껏 침 흘리렴. 그리고 이번 주 화요일에는 엄마가 새로 시작한 스피치 강의 상담이 있어서 서울을 가봐야 해서 연차 좀 쓸게. 할머니 할아버지랑 잘 놀고 있어."


오늘도 수고 많았다 나 자신.

오늘은 이만 퇴근!


장류진 / 창비 / 2019 / 236p


장수연 / 어크로스 / 2017 / 26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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