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더킹 The King 2016》: 대한민국의 왕은 누구인가.
친한 대학 선후배와 함께 동래 CGV에서 맞이한 더킹. 가감 없이 말하자면, 정우성이 나오는 영화는 많은 부분에서 재미와 흥미를 못 느꼈다. 그렇기에 이번 더킹이라는 작품 역시 그렇게 크게 기대를 하지 않았다. 크게 기대를 하지 않았던 덕분이었던 걸까, 올해 정유년에 들어서면서 나에게 가장 크게 와 닿는 영화가 되었다. 올해 들어 나의 가슴 무언가를 끌어올리는데 크게 성공했다고 여겨보는 이 영화는 아이러니하게도. 이 영화의 핵심적인 메시지를 곱씹어보는데 자세한 의미를 찾아보질 못하겠다. 영화 내에서 펼쳐진 권력의 쟁투에서 일어나는 부패와 폐단의 그림보다, 샤머니즘에 놀아난 엘리트 만능주의의 추락과 민주주의의 후퇴가 생생하게 펼쳐진 오늘날 시국의 부패가 더욱 크게 느껴지기 때문이겠다.
영화 더킹은, 주인공 태수의 회고록에 가까운, 인물의 기억을 시작으로 현재에 도달하고 미래를 여겨보는 영화였다. 시작을 기점으로 찬찬히 살펴보면 우리나라의 근현대사의 모습이 그려지면서, 현대사의 가장 굵직한 이야기들이 의제로 설정되어 시작된다. 영화 초반에 이렇게 현대사의 그림을 펼치지고 이에 맞물려 나타나는 태수 이야기의 시작은 보는 이로 하여금 "이게 무엇을 뜻하는 걸까?"라는 의문을 던지게 된다. 그리고 이 의문점은 영화의 긴 러닝타임 중후반부에 이르기까지 해소되질 못하는 모순을 만들게 된다.(이런 메시지의 해소는 감독이 의도한 바로 여긴다.)
주인공 태수는 일련의 사건(?)을 통해 자신이 갖추어야 할 진짜 '힘'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고 아주 독창적이고 획기적인 방법으로 인내와 노력 끝에 '힘'을 얻는 데 성공한다. 바야흐로 태수의 응축된 욕망이 터지는 시기다. 태수 자신이 스스로 쟁취한 '힘'에 대한 이해도를 쌓기 시작할 무렵, 태수는 사회의 '보이지 않는 힘'에 맞닥드리게 되고, 그 '힘'에 대해 맞서려는 순간 '보이지 않는 힘'에 태수는 넘어가게 된다. 한 사건을 계기로 '힘'을 가지려고 했던 태수의 시간과 노력은 자신이 쟁취한 '힘'에 대한 정의와 이해를 가지기 직전에, 더 큰 '힘'이 자리하는 '역사'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태수가 '힘'에 대한 이해가 우선이었다면 이 영화의 전개는 확실하게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한강식(정우성 역) 검사가 만들어낸 '역사'의 전략팀에 들어간 태수는 기존의 '힘'이 가지질 못했던 진정한 '힘'에 마음껏 취한다. 그럼에도 그 '힘'은 정권교체에 따른 라인의 변칙적인 요소를 고려하면 고정적인, 정규적인 것은 아니었다. 아울러 '힘'을 취하기 위해서는 '약점'이 없어야 하듯, 한강식 검사를 필두로 전략팀은 많은 부분에서 약점을 노출시키지 않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쏟고 있었다. 하지만 태수는 그러질 못했다. 자신의 고향 친구이자 검은손인 두일이를 최선의 방법으로 돕다가 약점을 노출한 나머지, 한강식에게 '팽' 당하고 말았다. 일련의 '꼬리 자르기'가 그려진다.
꼬리를 자르면서 약점을 최소화시키는 전략팀의 행동에서 가장 인상 깊게 느껴졌던 것은. 자신의 라인을 확고하게 지키기 위해서는 법조계임에도 불구하고, 샤머니즘의 농간에 놀아나는 모습이 나온다는 점이다. 법을 수호하고 민주주의의 그 힘을 가지는 사법기관에서 샤머니즘에 신뢰를 넣는 것, 아이러니하게 영화는 게이트가 터지기 전에 제작되었으나. 오늘날의 시국이 투영되는 모습이다. 이런 모습들은 '힘'을 유지하기 위해서 어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점이 부각되는 요소겠다. 사법 엘리트들의 보이지 않는 '추악함'을 배가시키는 증폭적 장치라고도 여겨본다. (물론 영화 내, 몇 안 되는 웃음 코드다.)
한강식 검사의 전략팀에 '팽' 당했던 태수는 자신이 좇던 '힘'의 정의성에 대해 다시금 고찰하게 된다.(이러한 연출은 영화 '나비효과'가 떠오른다.) 두일이의 희생과 더불어 무기력, 무능력하게 숨 죽여야 했던 태수는 그들이 말했던 '정치 엔지니어링의 철학'처럼 반격의 의제를 설정하고 실행한다. 그가 선택한 것은 기관으로의 '힘'이 아닌 의회로의 '힘'을 선택하게 된다. 이후 한강식을 비롯한 전략팀을 "이슈는, 이슈로 덮는다."라는 그들의 방식대로 카운터를 날린다. 태수의 반격은 성공했다. 반격의 성공 후, 태수는 진짜 '힘'이 무엇인지, 관객에게 질문을 던지며 영화의 끝을 맺는다. 태수가 말한 진짜 '힘'은 무엇이었던 걸까.
더킹이라는 영화에서 쭉 지켜봐야 할 것은, '힘'의 정의다. 태수의 "힘을 가져야겠다."라는 발언을 시작으로 태수의 선거운동까지 이어지는 '힘'의 이야기는 당최 무엇을 말하고자 했던 걸까 하는 의문이 남는다. 긴 러닝타임 동안 태수와 그가 속했던 전략팀의 구성과 역사적인 이야기는 알게 모르게 하나의 투명한 사실과 함께하고 있다. 바로 '정치'다. 영화의 연출에서 '정치'는 사법계의 구조적인 부분으로 비치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나는데. 사실 그보다 더 윗단계의 정치가 항시 공존하고 있었다. 의회의 '힘'이 자리하는 정권교체의 장면들이 더 큰 정치로의 '힘'을 가지고 있다. 사법기관이라고 하더라도 정권교체에 따른 정계의 영향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장면이 두 번 자리한다. 바로 샤머니즘의 굿과 함께 일어나는 이야기다.
사법기관의 말도 안 되는 '힘'을 추구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던 전략팀은 결국 정권이라는 거대한 '힘'에 눌려야만 했고, 그 결과는 정권의 요소인 의회라는 '힘'을 택한 태수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자칫 보면 사법기관과 의회의 양극적인 각축전이라고 여겨볼 수 있으나, 마지막 태수의 물음에 의해 모든 것이 깡그리 뒤엎어진다. "내가 어떻게 되었냐고?"라는 물음의 장면은 선거철, 개표일에 비치는 국회의원들의 모습이고, 그 결정권은 누가 가지고 있을까 하는 물음. 결국 이 엘리트들의 수 싸움과 거대한 '힘'의 암투는 정권교체에 따라 달라지는 그들만의 리그며, 그들의 경기장을 제공하는 것은 정계의 '힘', 정계의 교체와 '힘'은 '투표'로 나오게 되며, '투표'는 '국민주권'에서 비롯되는 민주주의의 숭고한 이념을 보여주게 된다.
결국 이 영화는 '힘'을 좇아 '힘'에 의해 철저히 유린되고, 파괴되며 관객을 '힘'에 의해 시간을 소모시킨다. 하지만, 진짜 우리 사회와, 이 세상의 숭고한 가치를 만들어내는 올바른 '힘'은 바로, 엘리트인 그들이 아니라, 우리의 '힘'인 민주주권에서 나옴을 처음부터 끝까지 강조하는 영화였다. '힘의 논리'라는 사뭇 불편한 전개로 주야장천 관객을 끌어당기고 코너로 밀어붙이나, 그 '힘'은, 정치권의 변화를 야기하는 국민주권의 '투표'에서 비롯됨을 확인할 때. 비로소 풀리지 않던 응어리가 풀리면서 이 영화의 가치를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
영화의 흐름과 그 스토리 자체는 재밌다. 다만 내가 불편했던 것은, 엘리트주의의 밥그릇 싸움이 만들어낸 공직자들의 투쟁들이, "민심을 대변한다."라는 슬로건이 장착되고 있다는 점이다. 오늘날 샤머니즘의 폐단에 엘리트들이 놀아나는 것을 보고 더욱더 불쾌한 영화가 되었다. 그만큼, 현실을 투영시키는 부분은 훌륭하다 여겨지지만, 결과론으로 보았을 때, 자신들의 이권을 위해 움직이는 엘리트 관료들이. 진정 법치와 정의의 이념을 수호하고, 민주주의의 그 숭고함을 생각하고 있는 것인가 라는 의문을 지울 수가 없다. 그러나 오늘날, 특검을 통해 이 나라의 법이 마냥 고여있는 물이 아님을 확인하고. 올바른 길로 가는 방향을 잡기 위해 노력함을 느끼면서 사필귀정이라는 말을 다시금 상기시켜본다.
영화의 앞쪽에서 펼쳐진 현대사 30년의 모습이 주마등처럼 다시금 펼쳐진다. 현대사를 바꾸고 현대의 정권을 뒤치락 엎치락하게 만드는 과정에서 엘리트들의 고군분투가 자리하겠지만, 결국은 국민의 '힘'이 모든 것을 바꾸게 된다. 그렇게 이 영화가 끝날쯤에는 "대한민국의 왕은 누구인가!"(관상 '이정재' 수양대군 역)라는 물음에 "우리가 왕 이외다!"라는 당찬 대답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대들의 왕은 누구인가.
대한민국의 왕은 누구인가.
국민이 곧 '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