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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의별 Dec 12. 2023

없어지는 공항, 그리고 없어지지 않을 노을

캄보디아 여행 8 - 톤레삽 일몰, 그리고 시엠립 공항 (옛 공항) 일몰

캄보디아에서 비를 정말 많이 봤다. ‘맞은’ 게 아니라, ‘보기만’ 했다. 그곳의 날씨는 예측할 수 없는 가위바위보와도 같았지만, 나는 그 안에서 머무는 내내 계속 이기는 편에 속했다.


눈물겹게 조마조마했던 일출 성공기는 이미 글 한 편을 할애했지만, 일몰을 보기 위해 톤레삽 호수를 찾았던 셋째 날도 상황이 비슷했다. 시엠립 시내에서 점심을 먹고 출발하자마자 비가 마구 쏟아졌는데, 노을은 둘째치고 배를 타도 괜찮을지를 걱정해야 할 수준의 폭우였다. 그래도 이미 일출의 경험이 있으니, ‘캄보디아 날씨가 원래 그렇지’, ‘한번 속지, 두 번 속냐?’하는 마음으로 기다려보기로 했다.


물론 먹구름이 이상할 정도로 우리만 쫓아오는 듯하여 찜찜하긴 했지만… 놀랍게도 매표소에서 티켓을 구입한 뒤 얼마 되지 않아 비가 뚝 그쳤다. 일출을 보러 가던 날의 앙코르와트처럼, 안쪽으로 들어가는 비포장도로에 도착해 보니 비 온 흔적 하나 없이 마른 흙길이 우리를 맞아주고 있었다.



덕분에 계획했던 대로 무사히 배를 타고, 수상가옥을 보고, 맹그로브 숲을 보고, 일몰까지 볼 수 있었다. 톤레삽 호수는 저 건너편에 육지가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커서, 그곳에서 보는 일몰은 바다에서 보는 일몰과 비슷했다. 배 위에서 일몰을 보는 것이 얼마만의 일인지. 사실 맹그로브 숲이 주목적이었고 톤레삽 일몰은 부수적인 일이었건만, 막상 오랜만에 이런 풍경을 마주하니 마음이 설렜다.


배까지 엔진을 끄고 나자, 고요함이 찾아왔다. 호수의 파동에 적당히 흔들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대부분의 배들은 태양에 좀 더 가까운 곳에 멈춰 섰고, 우리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덕분에 더 조용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고, 태양 앞에 선 배들이 만들어준 더 아름다운 풍경을 즐길 수 있었다.



비록 수평선 근처에는 낮게 구름이 많이 깔려 있었지만, 그 위의 하늘은 불과 몇 시간 전에 폭우 속을 달렸다는 게 믿기지 않게 맑았다. 태양은 수평선에 점차 가까워지며 구름과 호수의 파도 결을 물들여갔다. 노란색, 분홍색, 그리고는 태양이 구름 뒤로 완전히 넘어가자 진한 오렌지빛이 되었다. 우리는 그 오렌지빛 세상 속에서 그렇게 잠시 머물렀다.


여담이지만, 호수에서 얻은 평화는 또 한 번의 반전으로 이어졌다. 시내로 돌아가는 길, 먼발치에서 어마어마하게 번개가 치는 것이었다. 끝까지 변덕스러운 날씨였다.



다음날 오후, 캄보디아에서의 여정을 마치고 하노이로 향할 시간이 되었다. 저녁 비행기라, 오후 3시쯤 호텔에서 차를 타고 15분 거리의 공항으로 이동했다. 출발한 지 5분쯤 되었을까, 갑자기 흐려지더니 순식간에 비가 또 내리기 시작했다. 역시 우기라더니, 비가 안 오는 날이 없었다. 다행히 데려다준 차량 기사님은 비를 맞지 않을 수 있는 위치에 우리를 내려주어서, 이번에도 비 한 방울 맞지 않고 무사히 공항에 들어갈 수 있었다.


곧 없어질 공항에는 열려있는 가게가 많지 않았다. 우리는 몇 안 남은 가게들을 기웃거리다 라운지에서 남은 시간을 보냈다. 아직 베트남 일정도 남아있었기에 여행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캄보디아를 떠난다는 아쉬움이 마음 한편에 크게 자리 잡았다. 도착한 지 며칠 만에 사랑에 빠지게 되는 건 여행이 줄 수 있는 묘미다.


라운지에서 빗줄기에 휩싸인 바깥 풍경을 바라보다, 탑승시간이 다 되어 탑승구로 향했다. 시엠립의 작은 공항, 이제는 폐쇄된 이 공항은 너무 작아서 비행기를 탑승하러 갈 때 별도의 탑승브릿지가 없었다. 공항 건물을 나서서 비행기로 직접 걸어가야 했다. 그리하여 결국 마지막 순간에는 우산을 펼쳐야 하는 건가 싶었으나… 이번에도 역시 비는 우리를 피해 사라졌다. 마지막날까지도 하늘이 개는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폐쇄를 3일 앞둔 시엠립 공항의 활주로에서 비행기로 향하는 길, 캄보디아를 거쳐간 모든 여행자들을 내가 대신해서 마지막 인사를 전하는 기분이 들었다. 수많은 여행자들과 그들을 싣고 온 비행기들의 사연을, 이 공항은 얼마나 많이 보아왔을까. 나의 뒷모습도 잘 담아주기를 바랐다.


모든 여행지가 다정하게 화답해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캄보디아에서는 다정함 외에는 받은 것이 없었다. 모든 날의 날씨도, 마주친 모든 사람도. 그저 운이었다고 해도, 여전히 감사하다.


작고 아기자기한 공항은 사라질지라도, 마음에 들었던 호텔과 식당들도 언젠가 사라질지라도, 캄보디아의 하늘과 나무와 물소리는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있을 것이다. 나는 비행기에 오르기 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뒤를 돌아보며, 주황빛 하늘과 구름을 바라보았다. 기적적인 일출과 일몰이 반복되는 그 신비로운 시간 속에, 이 풍경들을 다시 만나게 될 날을 소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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