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
아메리카 인디언 부족들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중에, 사람들 마음속에 사는 두 마리 늑대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는 두 마리의 늑대가 싸우고 있다. 한 마리는 악한 늑대이다. 그것은 분노이고, 질투이고, 탐욕이다. 거만함이고, 거짓이고, 우월감이다. 다른 한 마리는 선한 늑대이다. 그것은 친절이고, 겸허함이고, 공감이다. 기쁨이고, 평화이고, 사랑이다."
- 류시화,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 중
어쩌면 <지킬 앤 하이드>는 누구나 마음속에 지니고 있는 두 마리의 늑대를 분리해보고자 한 인물의 이야기일 수 있겠다. 영국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지금 이 순간' 덕분에 뮤지컬 버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 듯하다.
뮤지컬은 의사 헨리 지킬이, 정신분열증으로 병원에 입원한 아버지를 바라보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그는 아버지를 비롯한 여러 정신병 환자들을 위해, 인간의 본성을 둘로 분리하는 약을 만들기로 결심한다. 인간들이 지니고 있는 선한 본성과 악한 본성을 분리할 수 있다면, 선만 남겨 좋은 방향으로 진화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으리라.
하지만 지킬의 이러한 아이디어는 이사회의 반대에 부딪히고, 급기야 지킬은 미친 사람 취급을 받는다. 결국 그는 자신의 생각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스스로 피험자가 되어 약을 투약한다. 하지만 당초 의도와는 다르게, 지킬이 통제할 수 없는 '하이드'라는 제2의 인격이 새로운 형체로 등장해버리고 만다.
아무런 거리낌 없이 범죄를 저지르고 다니는 괴물 같은 에드워드 하이드. 철저히 두 개의 인격으로 분리되어 버린 헨리 지킬은, 하이드가 저지르는 일들에 대해서는 기억하지 못한다. 하이드가 상징하는 악의 본성을 없애고자 실험을 강행했던 것인데, 결국 이중인격 그 이상으로 막강한 두 개의 인격체가 되어버리고 만 것이다.
그러다 보니 뮤지컬 속 지킬은 일종의 피해자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이드가 저지르는 일들을 지킬은 통제할 수 없고, 하이드가 저지른 끔찍한 일들을 시간이 지나 깨달은 후 대단히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정말로, 지킬과 하이드가 전혀 다른 인물이라고 확언할 수 있을까?
겉만 알고 속은 몰라
보이는 게 다가 아냐
인간들은 변장의 달인
이 음흉한 비밀은 뭘까
그 거짓은 사실일까
사실 인간들은
한 사람이 아닌 두 사람
- Façade
하이드는 지킬에서 떼어져 나온 존재다. 막상 하이드가 다가가고 해치는 인물들을 떠올려보면, 모두 지킬이 알고 지내던 인물들이다. 하이드가 죽이는 사람들은 모두 이사회에서 지킬의 실험을 반대하던 인물들이다. 물론 그중에는 미성년자 성매매범과 같이 죽어도 싼 인물들도 있었지만, 하이드가 그들을 죽인 이유는 그렇게 정의로운 이유가 아니었다.
하이드가 다가간 클럽의 댄서 루시라는 인물도, 지킬이 먼저 보고 약간의 연민 혹은 측은지심을 느꼈던 존재이다. 약혼녀 엠마가 있는 상태에서 루시에게 대시할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았겠지만, 깊고 깊은 내면에서는 그녀와 더 가까워지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결국 하이드는 지킬의 숨겨진 욕망을 대신 실현시켜 준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원작 책 속의 지킬과 하이드의 관계는 조금 다르다. 원작에서 헨리 지킬은 타인을 위해 실험을 시작하지 않았다. 실험의 동기를 아주 명확하게 명시하고 있지는 않았으나, 호기심 정도에서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원작 속 지킬은 그가 평소 자신의 위신 때문에 할 수 없었던 악한 짓들을, 하이드의 몸을 빌려 자유롭게 즐길 수 있었다고 당당하게 말한다. 뮤지컬은 특성상 머리를 묶거나 풀어헤치거나 정도의 차이만 둘 수 있으나, 원작에서는 체구와 눈빛 자체가 전혀 다른 사람처럼 묘사되니, 훨씬 더 자유로웠을 것이다. 그나마 뮤지컬 버전의 하이드는 지킬에게 잘못한 이들을 벌준다고 쳐도 (그것도 물론 매우 옹졸한 일이지만), 책 속 하이드는 아무런 기준도 이유도 없이 범죄를 저지르고 다닌다.
어떻게 만들어진 존재든, 지킬은 하이드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다른 존재라고 해도 하이드는 여전히 지킬의 내면을, 지킬의 과거를 공유한다.
날마다 넌 나를 숭배해
맹세코 결단코 그렇지 않아
난 너를 경멸해 저주해
난 너를 죽이고 웃음 질 테다
난 살아 영원히 네 안에
- The Confrontation
세상에는 완전히 선한 사람도, 완전히 악한 사람도 없다. 사람들은 모두 복합적인 존재들이다. 누구나 선하다고 믿는 사람의 내면에도 잠재적 악이 숨어있고, 누구나 악하다고 믿는 사람의 내면에도 잠재적 선이 숨어있다.
그래서 지킬과 하이드는 서로 다른 사람이 아니라, 멀티버스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수많은 선택들이 지금 우리의 모습을 만들 듯이, 사회적 지위를 지키며 타인을 나와 동등한 존재로 존중하고자 노력하면 지킬이 되는 것이고, 그 모든 걸 포기하면서 본능에만 충실하고자 하면 하이드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지킬의 실험은 실패했다. 성공했다면 지킬 안에 온전히 선만 남아있어야 하는데, 지킬의 이후 행보는 온전히 선만 남은 이의 것이 아니었다. 그는 하이드를 자신의 일부로 여기기에 쉽게 없애지도 못한다. 덕분에 관객들은 지킬/하이드 역을 맡은 배우가 각각 지킬과 하이드로 즉시 변신해 역할을 오가며 대립하는 넘버 'The Confrontation'을 즐길 수 있게 해 주지만, 그렇게 갈등만 이어갈수록 지킬과 하이드가 동일인물이라는 사실은 점점 더 부정할 수 없게 된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보자. 인디언들은 사람의 마음속에 두 개의 늑대가 싸우고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 싸움의 끝은 어디일까? 어느 쪽이 이기게 될까?
'우리가 먹이를 주는 쪽'이라고 인디언들은 답한다.
우리에게 어떤 잠재적인 면모들이 숨어 있는지, 스스로 모두 다 알기도 어렵다. 늘 좋은 면, 밝은 면만 있다면 좋겠지만, 살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분노와 짜증과 욕심이 생기기 마련이다. 가끔은 우리도 지킬처럼 위신 때문에 참는 순간들도 있지 않은가.
하지만 잠재적인 악한 본성은, 어디까지나 잠재적일 뿐이다. 잠잠해지도록 반복적으로 타이를 수만 있다면, 그리 쉽게 표출될 일은 없다. 지킬의 악한 본성 역시도 어디까지나 잠재적인 형태로만 있다가 사라질 수도 있었는데, 그 본성에 독립된 형체를 부여하면서 더 큰 힘을 쥐어주고 말았다. 당초 목적이야 어떠했든, 지킬은 악한 늑대에게 먹이를 준 셈이다.
어두운 면이 아예 생겨나지 않도록 자신을 완벽히 통제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 면을 끄집어내지 않는다면, 그건 나의 모습이 아니라고 선을 그어버린다면, 그 면모를 완전히 없애버릴 수는 없어도 더 커지지는 않게 할 수 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힘을 더 실어주고 싶은 늑대에게 먹이를 더 주는 일이다.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
▷ 개요 : 올해 한국 공연 20주년을 맞을 정도로, 국내에서 오랫동안 사랑받은 작품.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소설 <지킬 박사와 하이드>를 원작으로 하고 있으나, 뮤지컬의 줄거리 및 등장인물들은 대부분 새롭게 창작되었다.
▷ 작곡 : 프랭크 와일드혼 / 극본, 작사 : 레슬리 브리커스
▷ 윤색 : 고선웅 / 연출 : 데이빗 스완 / 음악감동 : 원미솔
▷ 국내 제작사 : OD컴퍼니
▷ 매우 주관적인 추천 넘버 : 'This is the Moment (지금 이 순간)', 'Alive', 'Façade', 'A New Life', 'The Confrontation’
▷ 2024년 20주년 기념공연 (구연) 캐스트 (블루스퀘어 신한카드홀, 2024년 11월 29일~2025년 5월 18일)
지킬/하이드 역 : 홍광호, 전동석, 김성철, 신성록, 최재림
루시 역 : 윤공주, 선민, 김환희, 아이비, 린아
엠마 역 : 조정은, 손지수, 최수진, 이지혜
댄버스 경 역 : 김봉환, 김용수
어터슨 역 : 이희정, 윤영석
스트라이드/스파이더 역 : 제병진
비콘스필드/기네비어 역 : 정재희
글로솝 역 : 장동혁
주교 역 : 이형준, 이호진 (커버)
프룹스 역 : 김이삭
새비지/풀 역 : 강상범
앙상블 : 이호진, 지원선, 최훈호, 박민혁, 정태진, 최지혜, 유지은, 박규연, 정수민, 이가은, 김지훈, 제진빈
스윙 : 한연주, 임유, 유환, 윤재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