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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은, 어제의 내가 아닌 내일의 내가 살아갈 날이니까

뮤지컬 <라흐헤스트>

by 바다의별
Les gens partent mais l'art reste
(사람은 가고 예술은 남아)


뮤지컬 라흐헤스트의 수수께끼 같은 제목은, 김향안이 남긴 말 중 '예술은 남는다'를 프랑스어로 변환한 것이다.


호랑이는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는 오래된 속담이 떠오른다. 몇십 년, 몇백 년 전에 죽은 예술가들은 결국 세상에서 사라졌지만, 그들이 만든 작품들은 빛이 바랠지언정 여전히 우리와 함께 한다.


라흐헤스트는 제목에서부터 예술에 대한 이야기이다. 정확히는, 예술가의 아내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된다. 시인 이상의 아내 '동림', 그리고 화가 김환기와 여생을 함께 한 '향안'에 대한 이야기다. 그리고 시놉시스에도 이미 드러나듯, 동림과 향안은 동일인물이다.


1936년, 이화여자전문학교에서 영문학을 공부하던 변동림은 '낭만파라'라는 다방에서 시인 이상을 만나게 된다. 모두가 이상의 시를 이상하다고 무시할 때, 진지하게 읽고 자신의 감상을 나누는 동림에게 이상은 점점 빠져든다. 매일 그를 만나러 오던 이상은 "우리 같이 죽을까? 어디 먼 데 갈까?"라며 고백하기에 이르고, 동림은 가방 하나 챙겨 들고 그에게로 간다.


동림은 예술가의 아내로서의 삶이 정말로 괜찮을지 고민하지만, 그런 걱정에도 불구하고 그를 사랑하는 마음은 분명하기에 결혼을 결심한다. 그러나 이후 폐결핵을 앓던 이상이 홀로 일본행을 선택한 후 결국 그곳에서 사망하면서, 둘의 결혼생활은 3개월 만에 비극으로 끝이 난다.


이후 몇 년이 흘러, 동림은 우연히 김환기 화백을 알게 된다. 자신에게 편지를 보내며 관심을 표하는 환기를 보며, 동림은 고민에 빠져든다. 다시 한번, 예술가의 아내로 살 자신이 있는가. 이상과의 만남은 좋았던 기억들만큼이나 아팠던 기억들도 많았기에, 또 한 번 그 비슷한 길을 갈 자신이 있는지를, 스스로에게 묻는다.


그러면서 이상과 함께 했던 시간들을 떠올린다. 이 모든 걸 알고도 과거로 다시 돌아간다면, 이상을 다시 만날까. 그는 고민 없이 그럴 거라 결론을 내린다. 가방 하나 들고, 그에게 달려갔을 거라고. 그러니 이번에도 자신의 마음을 믿고, 가방 하나 들고 환기에게로 달려간다.


"당신의 아호, '향안'을 내게 주세요."



실제로 향안이 환기와 재혼을 할 때, 가족과 주변인들이 모두 뜯어말렸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환기에게는 전처 사이에서 낳은 자식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향안에게는 이상과의 과거도 있었으니, 또다시 예술가인 환기를 만난다고 할 때 걱정도 많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향안은 그 모든 주변의 반대와 우려에도, 자신의 마음이 이끄는 대로 그에게로 간다.


그리고 동림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환기의 성과 아호를 따, '김향안'이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살아가기로 한다. 환기와 함께 하면서 가족과의 연을 끊었다고 하던데, 어찌 되었든 과거의 자신과 다른 인생을 살겠다는 의지가 담긴 것이지 않았을까.


'동림'으로 살았던 과거의 자신과, '향안'으로 살게 될 앞으로의 자신을 분리하면서 과거에 얽매이지 않겠노라 다짐했을 것이다.


나는 어릴 때 친척들과 제주도 여행을 간 적이 있다. 중문 해수욕장은 그날따라 파도가 거셌고, 나와 사촌동생은 둘 다 바닷물에 들어갔다가 고꾸라져 얼굴이 모래 속에 꽂히는 경험을 했다. 그래서 다음날 협재해수욕장에 갔을 때, 우리는 둘 다 감히 물속에 들어가지 않고 해변에서만 놀았다. 중문에 갔던 날은 바람이 셌고, 협재에 갔던 날은 날도 맑고 햇살도 따사로워 물살도 잔잔했지만, 어른들의 회유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꿋꿋하게 모래사장을 벗어나지 않았다.


반복이라고 여겨지는 것들은 대개 그런 것들 인지도 모른다. '바닷속에 들어갔다가 머리가 거꾸로 박혔다'는 생각, 그게 굳어지면 전혀 다른 바다임에도 걱정이 앞서 차마 들어가지 못한다. 하지만 한 번의 사건은 단지 그곳의 지형 때문이었을 수도 있고, 그날따라 유독 심했던 바람 때문일 수도 있다. 오늘 내가 마주한 바다가 어제의 바다와 같은 거라는 건 나의 생각, 나의 편견일 뿐이다.


향안이었다면 협재 해수욕장 바닷물에 곧장 뛰어들었을 것이다. 그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온 마음을 걸어 앞으로 달려 나갔던 사람이니까. 한 번 비슷한 경험을 통해 아픔을 겪었다고 해서, 굳이 과거에 얽매인 채 현재를 부정하거나 피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지나간 아픔은 그 자체로 과거에 내려두었던 사람. 오늘과 내일은 다를 거라 믿었던 사람.

그는 스스로를 그저 예술가의 아내로만 한정 짓지도 않았다. 직접 글을 써서 작가가 되고 그림을 그려서 화가가 되었던 사람이다. 그래서 자신만의 예술을 남긴 예술가이기도 했던 사람. 스스로의 의지를 믿었던 사람이니 자신의 모든 선택들에 대해서도 더 굳게 확신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또다시 예술가와 사랑한다고 해도, 지금의 나는 그때와 다르고, 지금 만난 사람은 과거의 사람과 다르다고. 달라질 거라고.


이젠 내가 너의 빛깔이 되고
너의 글자가 되어
너를 축복할게
모든 순간 빛났던 너를
사람은 가고 예술은 남아
Les gens partent
mais l’art reste

- '라흐헤스트'


사람은 가고 예술은 남는다. 그리고 삶은 그 자체로 예술이 되기도 한다. 시간이 흘러 잊히는 부분들이 생기고, 내 힘으로 어찌할 수 없이 상처가 나고 뜯기기도 하겠지만, 우선은 내가 최선을 다해 빚어내야 하는 나의 삶, 나의 예술.

향안이 스스로 내린 선택들로 그려낸 삶은, 모든 순간들이 용기 있고 아름다웠다. 누군가에게 이토록 뭉클함을 줄 수 있다면, 예술과 같은 인생이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나의 기억들도 언젠가 추억이 되고 예술이 되어, 그렇게 의미 있는 무언가로 계속 살아남기를 바라본다.



[뮤지컬 라흐헤스트]

▷ 개요 : 수필가/화가 김향안의 실화를 다룬 창작 뮤지컬로, 2명의 배우가 각각 '동림'과 '향안'이라는 이름으로 같은 인물을 연기한다. '동림'은 시인 이상과의 시간을, '향안'은 이후 김환기와의 시간을 표현한다. 제8회 한국뮤지컬어워즈에서 작품상(400석 미만), 극본상, 음악상(작곡 부문) 3개 부문을 수상한 바 있다.

▷ 제작사 : 홍컴퍼니 / 작·작사 : 김한솔 / 작곡 : 문혜성, 정혜지 / 연출 : 김은영

▷ 매우 주관적인 추천 넘버 :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너로 인하여', '라흐헤스트'

▷ 2025년 삼연 캐스트 (예스24스테이지 1관, 2025년 3월 25일~6월 15일)

향안 역 : 이지숙, 최수진, 김려원

환기 역 : 김종구, 윤석원, 박영수

동림 역 : 홍지희, 김주연, 김이후

이상 역 : 변희상, 최재웅, 임진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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