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라이카>
(스포 약간 포함)
자꾸만 미워지는 사람이 있다. 나도 미워하고 싶어서 미워하는 건 아닌데, 자꾸만 미워할 일이 생기니 어쩔 수 없다. 하지만 내가 아무리 미워한다 해도, 그 사람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그에게 어떠한 불이익도 생기지 않는다. 그저 나만 더 기분이 나빠지고, 나만 더 시들어가는 기분이다. 타인을 혐오하는 건 결국 그런 걸까.
뮤지컬 <라이카>는 실제 존재했던 러시아의 강아지 라이카와 생택쥐페리의 소설 어린 왕자 속 캐릭터들을 엮은 작품이다. 라이카는 냉전시대 소련에서 스푸트니크 2호에 태워져 우주탐사견이 되었는데, 뮤지컬은 라이카가 어린 왕자의 별 B612에 도착해 왕자와 장미, 바오밥들을 만난다는 상상을 펼쳐낸다.
어린 왕자가 출판된 시점은 1940년도이기에, 라이카가 우주로 떠난 1957년의 왕자는 더 이상 어리지 않다. 분명 소설 속 화자 (생택쥐페리 본인)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던 왕자이지만, 어찌 된 일인지 이제는 지구를 싫어해서 부수고 싶어 할 지경이다.
오래전 처음 방문한 지구에서 생텍쥐페리를 만나고 자기 별로 돌아갔던 어린 왕자는, 이후 한 번 더 지구를 찾았다. 그런데 하필 그가 재방문한 시기는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였고, 하필 그가 우연히 만난 이탈리아의 파일럿은 어린 왕자를 뒤에 태운 채 생텍쥐페리가 타고 있던 비행기를 격추시키고 만다.
생텍쥐페리를 만났을 때 소년이었던 왕자는, 제2차 세계대전 때는 십 대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나이에 자신이 인연을 맺었던 인간의 죽음을 직접 목격하다니, 심지어 호의로 자신을 태워준 비행기의 조종사가 그 죽음의 원인이라니, 상상만으로도 얼마나 큰 트라우마였을지.
그는 이후 지구를 쭉 지켜보면서 인간은 더 이상 나아질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하게 된다. 인간은 서로 죽이고 헐뜯는 것도 모자라 동식물들까지도 못살게 구는 존재이니까, 사라져야 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인간들에 대한 혐오로, 그는 지구를 통째로 날려버릴 계획을 세운다. 그건 인간뿐 아니라 인간 외 다른 생명체들까지도 모두 죽이는 일이지만, 왕자는 '그들도 인간들 때문에 괴로울 테니 내가 다 끝내주는 것'이라며 합리화를 한다.
인간도 인간을 감당을 못해
서로가 서로를 헐뜯고 해쳐
무조건 자신이 옳다고 싸워
- '그 하찮은'
왕자도 처음부터 지구를 완전히 없앨 생각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장미(소설 속 왕자가 두고 떠났었던 바로 그 장미가 맞다)의 말에 의하면, 왕자는 바이러스를 만들어보려고 시도도 해보았고, 외계 생명체들이 지구를 침략하게끔 설득도 해보았다고 한다. 만약 그 방법들이 통했다면, 인간 외 다른 생명체들은 살아남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저런 방법들이 실패하며, 결국 소행성을 보내 지구를 멸망시키는 방법에 이른 것이다.
인간들을 죽일 생각, 죽일 계획을 준비하면서 왕자는 점점 어떻게 변화했을까? 그의 마음은 이미 확고했다. 인간들은 개선의 여지가 없으니, 그냥 없애는 게 맞다고. 방법을 찾기 위해 자신의 모든 시간을 다 써가면서, 그는 자신의 결정이 더 단단하고 확고해지도록 애썼을 것이다. 인간만이 아니라 다른 생명체들도 같이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 과거의 왕자에게는 계획을 엎을 만큼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을지 모르지만, 지금의 왕자는 개의치 않게 되었다.
라이카가 왕자의 계획을 들으면서 '우리 지금 인간 같네'라고 자조적으로 말할 때, 왕자는 자신이 그토록 경멸하는 존재에 빗대어졌음에도 '이걸 원한 거 아니었어?'라며 가시 돋치게 말한다.
왕자의 계획은 무모하고 결함도 많다. 그가 그토록 그리워하던 생텍쥐페리는 이미 죽었다 해도, 그의 가족들이나 친구들, 그가 사랑했던 사람들과 동물들을 모두 죽여버리는 일이 아닌가. 게다가 안타깝게 우주로 온 라이카가 함께 훈련을 받았을 동물 친구들, 그리고 어쩌면 라이카가 떠돌이 개가 되기 전에 있었을지도 모를 가족들까지도 죽이는 일이다.
한 사람이 한 번에 쓸 수 있는 에너지의 정량은 정해져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무언가를 미워하면, 그만큼 다른 무언가를 사랑할 시간이 사라진다고. 왕자는 사랑할 수 있었던 모든 시간을, 장미와 바오밥들과 더 깊이 교류하며 나눌 수 있었던 그 기쁨의 시간을 희생시켜 지구를 향한 혐오와 미움에 썼다. 지나간 일을 지나간 일들로 두지 않고 계속 현재화하며 혐오를 키웠다. 그게 자신을 갉아먹는 줄도 모르면서.
다행히 왕자는 결국 지구를 파괴하지 않는다. 인간들로부터 실질적으로 고통을 더 많이 받았을 라이카의 설득에, 왕자는 자신의 계획을 중단한다. 그건 인간들을 용서하거나 이해해서가 아니라, 혐오에 자신을 잃지 않기를 바라는 염원 같은 것이었을 것이다.
누군가를 미워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인생을 조종할 수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오로지 나 자신의 행복을 만들어가는 일. 나의 선택들은 오로지 나를 위한 것들이어야 한다. 내가 혐오하는 대상보다 나 자신이 더 중요하다면, 우리의 소망은 타인의 절망이 아니라 자신의 희망이어야 한다. 작품 속 캐릭터 장미의 말처럼, '나'를 향한 선택들이 더 중요하다.
내가 아름다운 건
내가 그걸 원해서야
앞으로 왕자는 어떻게 할까. 복수와 혐오에 쏟았던 지난날의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겠지만, 적어도 앞으로의 시간들은 더 이상 볼모로 잡혀있지 않다. 아마 이제부터 그가 내릴 선택들은 자신과 자신이 사랑하는 존재들을 위한 선택들일 것이다.
[뮤지컬 라이카]
▷ 개요 : 올해 초연된 국내 창작뮤지컬로, 냉전시대 소련에서 스푸트니크 2호에 탔던 우주개 라이카의 실화와, 생텍쥐페리의 소설 <어린 왕자>를 접목한 이야기다.
▷ 제작사 : 라이브러리컴퍼니 / 작 : 한정석 / 작곡 : 이선영 / 연출 : 박소영
▷ 매우 주관적인 추천 넘버 : '기다려', '그 하찮은', '내가 아름다운 건'
▷ 2025년 초연 캐스트 (두산아트센터 연강홀, 2025년 3월 14일~5월 18일)
라이카 역 : 박진주, 김환희, 나하나
왕자 역 : 조형균, 윤나무, 김성식
장미 역 : 서동진, 진태화
캐롤라인/로케보트 역 : 한보라, 백은혜
앙상블/바오밥 역 : 맹원태, 정소리, 김대식, 윤현선, 이종원, 이유리, 심민희, 권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