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적벽> 외
지난해 연말, 창극을 처음 보러 갔다. 늘 생소하고 멀게 느껴지던 장르였지만, 최근 들어 조금씩 관심이 생기던 차였다. 방송에 종종 나오는 소리꾼들이 가요나 서양 가곡들을 부르는 걸 보면서, 오히려 반대로 그들의 장르에 대한 낯섦이 조금 덜어졌던 것 같다.
덕분에 국립창극단의 공연을 처음 찾게 되었고, 서로 상반된 분위기를 지닌 두 편의 단편 창극을 한 번에 볼 수 있었다. 공연의 문을 연 <옹처가>는 '옹고집전'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창극으로, 옹고집이 아닌 그의 아내 '옹처'를 주인공으로 했다. 아무리 옛날이라지만 옹고집의 아내에게는 이름조차 지어주지 않고 그저 옹고집의 처라니, 이게 말이 되느냐는 문제 제기에서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원작에서는 착해진 진짜 옹고집과 해피엔딩을 맞지만, <옹처가>는 아내의 입장에서 기존 서사를 완전히 비틀어 통쾌한 결말을 보여주었다. 시원하게 내지르는 창과 랩처럼 빠른 박자, 그리고 현대적인 의상과 메시지를 통해 색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었다.
이어서 공연된 건 <덴동어미 화전가>였다. 내방가사에서 영감을 얻어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웃음을 많이 유발했던 <옹처가>와는 반대로 잔잔하고 차분했다. 제목 속 '덴동어미'는 화상을 입은 아이의 엄마라는 뜻으로, 주인공이 살아오면서 어떤 어려움을 겪고 어떤 절망을 이겨내야 했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과거를 무대로 과거의 이야기를 풀어냈지만, 비극 속에서도 삶을 이어갈 수 있는 희망 한 줄기와 주변 인연들의 힘처럼, 현대에도 공감할 수 있는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세련된 음악과 폭넓은 감정들이 어우러져, 깊고 따뜻한 여운을 남겼다.
창극은 지금이야 굉장히 오래된 것으로 느껴지지만, 사실은 개화기 때 판소리를 변형시켜 탄생한 장르라고 한다. 전통예술은 오래전부터 그렇게 꾸준히, 시대에 맞추어 변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올해는 또 하나의 특별한 작품을 만났다. 바로 판소리 뮤지컬 <적벽>이다. 잘 알려진 삼국지의 적벽대전, 즉 적벽가를 토대로 한 이 작품은, 판소리의 창에 각종 군무와 무대 연출을 더해 뮤지컬로 완벽하게 재탄생되었다. 실제 판소리를 할 때 소리꾼이 다양한 도구로 활용하는 부채를, 여기서도 굉장히 적극적으로 활용했는데, 웅장하게 소리를 내지르며 박자에 맞춰 부채를 펼쳤다 접었다 하는 군무들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또한 판소리에서 북을 치는 고수처럼 이곳에서도 북을 치던 사람이 중간에 카메오처럼 합류해 능청스러운 연기를 보여주어 유쾌했다. 기본적으로 판소리의 구성에 수많은 배우들의 군무와 화려한 연출을 더하니 신선한 장르가 만들어졌다.
내가 즐기는 뮤지컬이 이야기와 음악과 춤을 한데 엮은 예술이라는 걸 생각해 보면, 창극도 판소리도 뮤지컬의 한 종류가 될 수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오래된 것들이 반드시 낡게 여겨지지 않고, 생소하던 것들이 그렇게 낯설지만은 않다.
올 초, 예술의 전당에서 서예 전시 <Still Alive>를 봤다. 작가 박진우는 '서예는 더 이상 이해할 수 없는 예술'이라는 편견을 깨고자, 한글과 그림을 활용한 독특한 구성을 통해 서예의 가치를 새롭게 재탄생시켰다. 전통을 그 자체로 고집하기보다, 현대인들이 편하고 쉽게 즐길 수 있는 방식으로 바꾸어간 작업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전통의 변화는 훼손이 아니라 발전이다. 아무도 찾지 않는 예술은 결국 잊힐 위기에 처한다. 그러니 사라지지 않으려, 없어지지 않으려, 애정을 담아 가꾸어가는 것이다.
여기 아직 남아있다고, 아직 살아있다고, 그렇게 외치는 음악과 무대와 공연에, 한 걸음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가 보고 싶다. 내가 아직 발견하지 못한 장르까지도, 하나하나 발견해 나가며 새로운 재미를 알아가고 싶다.
[뮤지컬 적벽]
▷ 개요 : 중앙대학교 학부 워크샵의 무용극 '적벽무'서 시작된 작품으로, 2017년 뮤지컬로 초연되었다. 판소리에 무용, 도창 역할까지 있어 단순히 뮤지컬로만 정의하기는 어려운 퓨전 종합예술이다. 젠더프리에 캐릭터프리 작품으로, 주요 인물들이 때때로 특정 장면에서는 군사1 등을 연기하기도 한다.
▷ 제작 : 국립정동극장 / 대본, 연출 : 정호붕 / 작창 : 유미리
▷ 2025년 육연 캐스트 (정동극장, 2025년 3월 13일~4월 20일)
조조 역 : 이승희, 추현종
유비 역 : 정지혜, 이건희
관우 역 : 이재박
장비 역 : 김의환
공명 역 : 임지수
자룡 역 : 김하연
정욱 역 : 한진수, 강나현
도창 역 : 김소진, 박자희
주유 역 : 이진주, 이용전
황개 역 : 정혜수 / 서서 역 : 노창우 / 노숙 역 : 최진욱 / 서성 역 : 이아현 / 정봉 역 : 이해원 / 문빙 역 : 송다훈 / 골내종 역 : 배연우 / 전동다리 역 : 임태희 / 구먹쇠 역 : 남상동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의 토니상 6관왕을 축하합니다! 최우수 작품상에 극본상, 작곡•작사상까지. 우리나라를 배경으로 한 우리나라의 작품으로 이렇게 큰 상을 받게 되다니 제가 다 벅차네요. 올해 10월에 또 공연될 예정이라고 하니, 관심 있으신 분들 꼭 보러 가시기를 추천드립니다. 정말 좋은 작품이에요.
<뮤지컬의 뮤 1편 23화> https://brunch.co.kr/@felizerin/4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