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소란스러운 나의 서림에서>
만약 과거를 살아가는 이들이 내게 현재의 삶이 어떤지 묻는다면, 나는 자신 있게 하나하나 다 솔직하게 답할 수 있을까. 당신들이 지켜낸 내일을, 오늘의 우리들이 잘 지켜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뮤지컬 <소란스러운 나의 서림에서>는 1940년도에 독립운동을 하는 양희와 1980년에 학생운동을 하는 해준이 책을 통해 소통하는 이야기이다. 해준은 우연히 서점에서 양희가 쓰다 만 책을 발견하고, 그 속에 자신의 생각을 적어 넣는다. 이후 양희가 해준의 흔적을 발견하면서 둘은 그렇게 필담을 나누게 된다.
양희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서점에서 익명으로 소설을 쓰며 남몰래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고, 해준은 학생 기자 활동을 하다 시위 속에서 선배를 잃고 후회 속에 은둔하며 지낸다. 40년의 시간을 사이에 두고 있지만, 자유를 되찾기 위해 탄압에 맞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들을 한다는 점에서 둘은 비슷한 삶을 살고 있었다. 차이가 있다면 양희는 여전히 싸우고 있고, 해준은 두려움과 절망 뒤에 숨어 정체되어 있다는 것 정도.
"그곳은 독립이 되었나요?"
양희의 먹먹한 질문에 해준은 고민 없이 1945년에 독립이 된다고 말해주지만, 다른 말은 아낀다. 솔직하게 다 알려주면 양희가 혹여 실망할까 봐, 적당히 넘어가 버린다.
실제로 필담을 나누기 시작한 초반,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시대에 산다는 사실을 곧장 인지하지 못한다. 양희의 '식민 지배'라는 언급에 해준은 갸우뚱하면서도 이를 비유적 표현으로 받아들이고 넘어갔으니. 양희가 그토록 꿈꾸던 독립한 미래를 살고 있지만, 해준의 세상에는 여전히 또 다른 억압이 존재하고 있던 것이다.
2025년을 살고 있는 나는, 아마 해준보다는 좀 더 솔직하게 말해줄 수 있지 않을 것 같지만, 그렇다고 정말 다 말해줄 수 있을까. 양희가 이 시대의 모든 면모를 다 알게 되면 과연 어떻게 생각할까.
여전히 어지러운 사회, 혐오와 증오로 가득한 온라인 세상,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타인의 권리와 자유를 짓밟는 사람들. 일제로부터 독립된 지 오래지만 친일파 정리는 여전히 안 되었고, 한반도는 남과 북으로 갈라져 대립하고 있고, 해결되지 않은 오래된 문제들에 매일같이 새로운 문제들까지 더해지고 있다.
한 쌍의 데칼코마니 같은 양희와 해준의 이야기는, 결국 또 다른 40년 후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었다. '여기서는 우리말을 지키려 애를 쓰는데 그곳에는 어떻게 다른 나라 말을 쓰는 게 유행이냐'는 양희의 말에 뜨끔했던 건 해준뿐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누군가가 그토록 바라고 염원하던 오늘을, 우리는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당연하지 않은 것들을 우리는 때로 너무도 당연하게 여기고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
실패한대도
너의 세상에 이어질 이 한 걸음
미래의 삶은 언제나 지금보다 나아졌으면 하는 생각을 한다. 그 미래에 내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내가 살아간 이 시대가 무너지지 않기를, 지금 우리가 열심히 일구고 있는 것들이 잘 꽃 피어나기를, 우리가 갈망하는 것들이 그곳에서는 현실화되기를.
과거의 이들도 그랬을 거라 믿는다. 자신이 살아갈 미래가 아닐지라도, 자신이 남기는 흔적이 미래의 이들이 살아갈 세상을 만드는 데에 긍정적인 발판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 그들이 자유를 잃을 때마다, 꿈을 꿀 수 없게 될 때마다, 포기하고 주저앉기보다 기꺼이 폐허 속으로 뛰어들 수 있었던 것은, 그 마음이 만들어낸 용기 덕분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으로만 살 수 없다. 내가 살고 있는 시대에는 과거가 있고 미래가 있다. 만나지 않더라도 우리의 이야기는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므로, 나라는 존재는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시작되었고 내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남아있을 것이다. 우리 각자의 이야기는 거대한 이야기의 작은 일부일 뿐이다.
과거의 이들에게 빚지고 있는 오늘을, 최대한 아름다운 내일로 빚어 미래의 이들에게 전해주고 싶다. 미래의 이들이 지금의 우리를 탓하기보다는, 우리에게 빚지고 있다는 생각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들의 내일이, 그토록 찬란하기를 바란다.
우리의 오늘이
누군가의 내일을 만든다는 것을
기억하며 나아갑시다.
[뮤지컬 소란스러운 나의 서림에서]
▷ 개요 : 올해 초연된 한국 창작 뮤지컬. 높은 완성도로 초반부터 호평을 받고 있다.
▷ 제작사 : 이모셔널씨어터 / 작·작사 : 김하진 / 작곡·음악감독 : 문혜성 / 연출 : 박한근
▷ 매우 주관적인 추천 넘버 : '사과를 하십시오', '내일을 기다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 2025년 초연 캐스트 (et theatre 1, 2025년 4월 8일~6월 21일)
양희 역 : 이봄소리, 이지수, 박새힘
해준 역 : 정욱진, 윤은오, 임규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