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스웨그에이지: 외쳐, 조선!>
제목만 보고 망설여질 때가 있다. '표지만 보고 판단하지 말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첫인상은 언제나 표지에서 오는 걸 어떻게 하나. 표지를 넘겨 뒷내용을 들여다보기 전까지, 어느 정도의 편견은 어쩔 수가 없는 것이다.
지난해 연말, 뮤지컬 <여신님이 보고 계셔>를 드디어 보고 왔다. 제목만 놓고 보면 내가 결코 관심을 가지지 못할 순정만화와 같은 분위기가 풍겨와서, 좋은 평에도 불구하고 꽤 오랫동안 선뜻 들여다볼 생각을 하지 못했다. 시놉시스를 읽고 나서야 비로소 예매를 했고, 기대 이상으로 재밌게 보고 왔다.
<스웨그에이지: 외쳐, 조선!> (이하 <외쳐 조선>)도 마찬가지다. 당최 장르를 알 수 없는 이 오묘한 제목에서, 나는 재미를 느끼기보다는 '이게 뭐야?' 싶은 마음만 들었다. 힙합계에서나 쓰일 법한 '스웨그'라는 단어가, '조선'과 나란히 놓이다니? 조선시대가, 스웨그의 시대가 되다니?
조선이라는 배경은 흥미롭게 느껴졌지만, 힙합 장르에는 흥미를 느끼지 못해 그다지 끌리지 않았다. 그렇지만 마찬가지로 많은 이들의 꾸준한 호평이, <여신님이 보고 계셔>를 떠올리게 했다. 이번에도 제목과 달리 강력한 반전이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리고 역시나 이번에도, 나는 '왜 이제야 봤을까' 하는 마음으로 공연장을 나섰다.
그동안 다양한 공연을 많이 봤다고 생각했는데, 오랜만에 정말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신선한 충격'이라는 말 자체가 그다지 신선하게 들리지 않겠지만, 그럼에도 오랜만에 진심을 다해 이 말을 붙일 수 있는 공연을 만났다. 국악의 리듬을, 이렇게 새롭게 재해석하는 일은 상상조차 해보지 않았던 일이다. 서울예술대학교 학생들이 만든 학교 공연에서 시작되었다고 하니, 대학생들의 아이디어가 새삼 대단하다 느껴졌다.
나는 국악의 대표 감성은 한이라고, 그래서 우리 음악에는 언제나 잔잔한 슬픔이 있다고 여겼다. 국악의 흥은 타령 정도에서만 느껴지는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모든 장르가 그렇듯이, 국악에도 한계가 없었다. 국악에서도 누군가는 충분히, '스웨그'를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뮤지컬은 '시조'를 국가 이념으로 하는 상상 속의 조선을 배경으로 하고 있어, 자연스럽게도 '라임'이 잘 맞아떨어지는 가사를 힙한 국악 음악 속에 녹여내었다. 이 작품을 위해 창작된 것들은 물론이고, 정몽주의 '단심가'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나 이방원의 '하여가'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와 같이, 뮤지컬에서도 일부 차용한 유명한 시조들에도 이미 라임이 있었다. 같은 시조를 놓고도 이걸 어떻게 비트느냐에 따라, 음악은 다양하게 만들어질 수 있었다.
이 세상이 만들어 낸
정해진 생각을 깨버려
보여줄게 갇혀있던 울타리를 넘어서
하늘 높이 날아 크게 외쳐
꿈같은 세상
새로운 세상
'새로운 세상'
생각지 못한 변주와 조합 덕분에, <외쳐 조선>의 넘버들에는 다른 뮤지컬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독특한 매력이 있다. 새로운 멜로디와 가사는 한 번 들으면 머릿속에서 맴돌 정도로 중독성이 있고, 이 신선한 음악에 맞춰 한복을 입은 배우들이 현대적인 춤을 추는 모습 또한 재미있다. '전국노래자랑'을 연상케 하는 '전국시조자랑'과, 랩 배틀이나 댄스 배틀을 연상케 하는 시조 대결은 관객들의 박수와 호응을 계속해서 이끌어낼 정도로 흥이 난다.
신선한 캐스팅 또한 이 신선한 매력에 힘을 더한다. <외쳐 조선>은 신인 배우 등용문으로 잘 알려져 있을 정도로, 앙상블 및 조연뿐 아니라 주연에도 새로운 배우들을 발굴해 캐스팅하는 편이다. 언제부턴가 우리나라 뮤지컬 산업이 일부 스타 배우들에게 집중되는 경향이 크다는 점을 생각하면 꽤나 과감한 선택을 하는 것이다. 새로운 음악을, 새로운 인물들로 꾸려나가는 것.
음악도, 춤도, 캐스트도, 과감한 선택들이 있었기에 새로운 공연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누군가는 낯설게 느낄 수 있는 것을 오히려 강점 삼아 신선함을 이뤄내었다. <외쳐 조선>는 익숙하지 않은 것들이 어딘가 어색하고 부족할 것이라는 편견을 시원하게 날려버린다.
새로운 감동과 새로운 감정은 언제나 새롭게 탄생한 무언가에서 온다. 어울릴 수 없다고 생각한 장르가 너무나도 완벽하게 어울리고 섞인 무대를 보며, 좁게 갇혀 있던 내 마음이 활짝 열리는 걸 느꼈다.
뮤지컬 속 주인공들은 기득권을 향해 외치고, 뮤지컬 작품은 틀에 박힌 생각을 향해 외치고 있었다. 세상에 당연하게 정해진 건 없고, 우리는 그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꿈꾸고 상상하는 모든 게 가능할 거라고.
간절한 소망은 이뤄지리
꿈꾸던 내일이 찾아오네
'운명'
[뮤지컬 스웨그에이지: 외쳐, 조선!]
▷ 개요 : 서울예술대학교 학생들이 만든 창작 뮤지컬 <외쳐, 조선!>이 시작이며, 2018년 쇼케이스 후 2019년 초연되었다. 제4회 한국뮤지컬어워즈 남/녀 신인상, 제5회 한국뮤지컬어워즈 작품상 및 안무상 등을 수상한 바 있다.
▷ 제작사 : PL엔터테인먼트 / 극작 : 박찬민 / 작곡·음악감독 : 이정연 / 프로듀서 : 송혜선 / 연출 : 이경수
▷ 매우 주관적인 추천 넘버 : '시조의 나라', '새로운 세상', '나의 길', '이것이 양반놀음', '운명'
▷ 2025년 사연 캐스트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 대극장, 2025년 6월 20일~8월 31일)
단 : 양희준, 임규형, 박정혁, 김서형
진 : 김수하, 주다온, 김세영
홍국 : 임현수, 조휘
십주/자모 : 이경수, 진태화
호로쇠 : 장재웅, 황성재
기선 : 정선기, 임동섭
순수 : 정아영, 강경현
임금 : 최일우, 변재준
조노 : 오승현
엄씨 : 김승용, 노현창
주모 : 황자영, 윤혜지
백성(앙상블): 김재형, 류하륜, 안예빈, 이서영, 김은애, 황찬일, 박슬빈, 김진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