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마리 퀴리>
모든 것에는 이름이 붙는다. 우리는 탄생함으로써 이름을 얻고, 관계가 형성됨으로써 이름을 얻고, 무언가를 이뤄냄으로써 또 이름을 얻는다. 사람들은 누구나 한 개 이상의 이름을 지니고 있고, 한 개 이상의 이름을 붙여본 일이 있다. 다른 사람이든, 반려동물이든, 어떤 물건이나 장소든.
그래서 '이름 있는', 혹은 '이름 없는'이라는 형용사는 재밌으면서도 씁쓸하다. 세상에는 '이름 있는'이라는 명예로운 수식어 아래 오래도록 이름이 불리는 사람들도 있지만, 반대로 '이름 없는'이라는 통칭 아래 소리소문 없이 사라지는 사람들도 있다. 모두 다 소중한 이름 하나쯤 있는 존재들일 텐데도.
뮤지컬 <마리퀴리>는 이름이 있음에도 그 이름으로 불리기 위해 애써야 하는, '이름 없는' 이들의 여정을 그린다.
과학자 마리 퀴리는 폴란드 태생으로, 프랑스 소르본 대학에서 물리학과 수학을 전공했다. 프랑스 유학은 당시 폴란드에서는 여자가 대학교에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에 결정한 일이었다. 하지만 마리는 파리에서도 여전히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받고, 유학생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받으면서, 수많은 편견과 장벽을 마주해야 했다.
실제로 라듐과 폴로늄으로 처음 노벨물리학상에 이름은 올린 건 피에르 퀴리뿐이었다. 다행히 피에르가 이를 미리 알고 손을 쓴 덕분에 마리도 함께 상을 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이후에는 단독으로 노벨화학상을 수상하기에 이르렀지만, 불과 몇십 년 전 우리가 읽은 위인전에 적힌 이름은 여전히 '마리 퀴리'가 아닌 '마담 퀴리', '퀴리 부인'이었다. 독립적인 사람이 아니라 누군가의 부인. 생각해 보면 마리 퀴리는 사후에도 편견과 싸워야 했던 것이다.
뮤지컬은 마리가, 만약 라듐걸스 (라듐 제품 공장에서 피폭당한 여성 노동자들을 지칭하는 말)를 만났다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에서 출발한다. 라듐 덕분에 과학계에 길이 남을 이름을 얻게 된 마리퀴리가, 이름 없이 사라져 간 라듐 피해자들을 실제로 알고 대면했다면 어땠을지를 말이다.
마리는 남편 피에르와의 공동연구를 통해 발견해 낸 새로운 원소에, 하나는 자신의 고국 폴란드를 떠올리며 폴로늄이라는 이름을, 다른 하나는 빛을 방사한다는 뜻의 라듐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그 명명은 곧 자신의 이름을 선명히 새기는 일이기도 했다.
마리가 라듐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과 인연이 있다는 건 뮤지컬에서 덧붙인 허구적 설정이지만, 라듐으로 연결된 두 개의 다른 삶이 함께 조명되어 극에 흥미를 더한다. 뮤지컬에서는 '안느'라는 허구의 캐릭터가 공장 피해자들을 대표하는데, 그는 라듐 공장에 소송을 걸면서 라듐의 위험성을 널리 알린 실존인물들을 모티브로 한 것으로 보인다.
안느의 동료들은 하나둘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지만, 라듐의 유해성을 숨기려는 공장 측에 의해 다들 매독이라는 말도 안 되는 오명을 쓰고 만다. 누구도 선뜻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상황에서, 안느는 용기를 내어 진실을 파헤치려 한다. 자신 또한 그렇게 입막음당하게 될 것을 알면서도. 라듐으로 인해 비로소 자신의 입지를 다질 수 있었던 마리의 인생과 상반되게, 안느의 인생은 조용히 사라져야 할 운명이 되어버린다.
극 중에서 마리는 윤리적 책임과 정의, 그리고 연구에 대한 열정 사이에서 조금은 갈등하는 모습을 보인다. 윤리적 책임을 다하는 것이 옳다는 걸 알지만, 겨우 얻은 기회가 사라질 수도 있다는 생각에 덜컥 겁이 났던 것이다. 물론 작품 속 마리는 옳은 결정을 내리고, 온 힘을 바쳐 진실을 밝히기 위해 노력한다.
실제로 라듐의 위험성은 마리 퀴리가 나이가 좀 더 든 뒤에야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미 라듐에 수도 없이 노출된 마리는 10년 넘게 병든 상태로 고생하다 사망한다. 그가 생전에 라듐의 위험성에 대해, 그리고 라듐으로 인해 공장 근로자들 등 피해자들이 겪어야 했던 고통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진 내용이 없다.
그렇지만 만약 마리가 그토록 아프기 전에, 라듐으로 인해 고통받고 죽어간 사람들에 대해 알았다면, 나는 그가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라듐의 위험성을 강조했을 것이라고 믿는다. 처음 발표했을 때부터 잘못된 손에 들어가면 위험할 수 있다고 경고했듯이. 라듐의 발견과 활용이 마리 퀴리의 엄청난 업적인 것은 사실이지만, 수많은 편견과 좌절을 이겨내며 겨우 이룩해 낸 업적들이, 자신과 닮은 타인의 이름들을 지워내기를 바라지는 않았을 거라 믿는다.
마리가 바랐던 건 무작정 유명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름 하나로 홀로 설 수 있는 능력이었을 것이다. 여성 혹은 이방인이라는 이유로 하고 싶은 일에서 배제되지 않고, 누군가의 아내나 남편처럼 어디 종속되지 않고, 그저 자신의 이름 하나만으로도 충분한 삶. 마리와 안느는 실제로 만나지는 못했지만, 만약 만났다면 마리는 안느를 알아봤을 것이다. 자신처럼 정당하게 일하고, 정당하게 보수를 받고, 그에 맞는 삶을 살기 위해 애쓰는, 자신과 비슷한 사람임을.
뮤지컬 <마리퀴리>의 모든 배우들은 저마다의 역할과 선명한 이름이 부여된다. 이름 없는 존재란 없다. 마리의 정식 배역 이름도 그저 마리 퀴리가 아닌, '마리 스클로도프스카 퀴리'로, 폴란드의 정체성도 함께 담긴 이름이 부여되었다. 그것이 마리라는 존재를 더 잘 표현하는 이름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름은 그저 누군가를 부르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때로 그 누군가의 인생이고 다짐이다. 우리의 인생은, 각자 바라는 이름으로 불리기 위해 나아가는 여정이 아닐까. 내가 이루어낸 것들을 넘어, 나의 소망들과 바람들이 내 이름 속에 함께 남기를 바란다. 다른 이들도 그랬으면 좋겠다. 서로의 분명한 이름을 불러주고 그렇게 기억해 주는 세상이기를 바란다.
[뮤지컬 마리 퀴리]
▷ 개요 : 2021년 제5회 한국뮤지컬어워즈에서 대상 포함 5관왕을 달성했다. 마리 퀴리의 고향인 폴란드에서도 공연해 실제 마리 퀴리의 후손인 한나 카레제프스카로부터 극찬을 받기도 했다. 영국 및 일본에서도 공연을 했고, 2024년에는 웨스트엔드에서 현지 배우들이 영어로 라이선스 공연을 진행하기도 하였다.
▷ 제작사 : 라이브 / 작·작사 : 천세은 / 작곡 : 최종윤
▷ 매우 주관적인 추천 넘버 : '또 다른 이름', '예측할 수 없고 알려지지 않은', '그댄 내게 별'
▷ 2025년 사연 캐스트 (광림아트센터 BBCH홀, 2025년 7월 25일~10월 19일)
마리 스클로도프스카 퀴리 : 김소향, 박혜나, 김려원, 옥주현
안느 코발스카 : 강혜인, 이봄소리, 전민지
루벤 뒤퐁 : 박시원, 강태을
피에르 퀴리 : 테이, 차윤해
조쉬 바르다 / 이렌 퀴리 : 김아영, 금보미
폴 베타니 / 병원장 : 박영빈, 신은호
아멜리에 마예프스키 / 루이스 보론스카 : 홍이솔, 홍산하
마르친 리핀스키 / 닥터 샤갈 마르탱 : 김지욱, 장준우
레흐 노바크 : 송정훈, 김보근
알리샤 바웬사 : 장희원, 윤수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