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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은 복제나 박제되는 것이 아니라

번역과 번안, 레플리카와 논 레플리카

by 바다의별

그리스로마 신화를 바탕으로 한 뮤지컬 <하데스타운>에서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가 처음 만날 때, 오르페우스가 맨 처음 건네는 말이 있다. 아, 그 바로 직전에, 먼저 이 작품의 내레이터이자 오르페우스의 삼촌 격인 헤르메스가 다급하게 오르페우스에게 충고를 해준다.


"오르페우스, 너무 성급하게 굴지 말고."


그 말에 오르페우스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런데 그 직후 오르페우스가 에우리디케에게 내뱉는 말은,


"Come home with me." (나와 함께 집에 가요)


관객들은 바로 웃음이 터진다. 이걸 한국어로 어떻게 번역해야 할까? 영화였다면 그냥 '나랑 우리 집으로 가요'와 같은 자막을 붙일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뮤지컬은 음악이 중심이 되므로 멜로디의 박자를 바꿀 수는 없다. 주어진 건 딱 네 음절. 원어와 똑같이 '집에 가요'라고 하기에는 원래 뜻이 제대로 살지 않는다. 황석희 번역가는 '결혼해요'를 택했다. 한국 공연에서도 관객들은 웃음이 터진다.


엄밀히 말하면 '집에 가자'와 '결혼해요'는 완전히 다른 말이다. 하지만 첫눈에 반한 오르페우스의 성급함과, 노래를 부르면 봄이 다시 올 거라 믿는 그의 순수함, 그리고 이후 극 중에서 이어질 그의 순애보를 함축적으로 표현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표현은 떠오르지 않는다.


뮤지컬 <하데스타운> (좌) 웨스트엔드 공연사진 (playbill.com) / (우) 국내 공연사진 (뉴스핌/에스앤코)


지난해 국내에서 초연된 뮤지컬 <디어 에반 핸슨> 넘버 'You will be found'도 마찬가지다. 홀로 어딘가에 갇혀있는 것 같을 때,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할 때, 분명 누군가가 너를 찾아 도와주게 될 거라는 위로가 담긴 넘버다. 한국어로 직역하면 '너는 찾아질 거야' 혹은 '너는 발견될 거야'와 같은 말이 될 테지만 수동태는 매우 어색하다. 그러면 '우리가 너를 찾을게'라고 해야 할까? 하지만 이번에도 주어진 건 고작 네 음절이다.


'You will be found'는 결국 '그대 곁에'라고 변환되었다. 넘버 후반부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You are not alone''잊지 않을게'가 되었다. 일대일로 대응시켜 보면 의문이 들 수 있지만, 작품의 전체적인 줄거리 속에서 해당 넘버의 역할을 생각해 보면 원작의 의미는 여전히 유지된다. 주인공이 자신의 외로움과 죽은 친구에 대한 그리움을 전하는 데에서 시작되어, 이걸 듣고 있는 모두가 혼자가 아니길 바란다는 바람으로 퍼져나가는 노래이기 때문이다.


뮤지컬은 사실 번역보다는 번안이라고들 한다. 번역은 원문의 형태를 최대한 많이 살리는 일이지만, 번안은 핵심적인 메시지 정도만 유지하면서 새로 쓰는 2차 창작에 가깝다. 그래서 라이선스 공연을 국내에서 처음 보고 난 뒤 오리지널 공연의 음원을 찾아 들으면, 멜로디는 대체로 같지만 가사가 전혀 다른 경우를 자주 볼 수 있다.


그건 음악의 박자에 맞추어 가사를 바꾸어야 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현지 관객들의 정서나 눈높이를 고려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영화나 드라마는 자막 외에는 현지화할 수 있는 방법이 없지만, 공연은 현지 배우들을 새롭게 캐스팅해서 제작하는 것이므로 대본을 새롭게 짤 수 있다. 그러다 보니 종종 아예 논 레플리카 (완전히 똑같이 가져오는 공연은 레플리카, 그렇지 않으면 논 레플리카. 논 레플리카 공연은 문화적 차이나 해당 시장의 특성에 맞추어 일부 내용이나 넘버가 수정될 수 있다) 형태로 유연하게 들여오는 작품들도 많다.


뮤지컬 <컴프롬어웨이>의 경우도 국내에서 논 레플리카 형태로 초연되었다. 2011년 9월 11일, 끔찍한 테러가 발생했던 그날 미국 상공이 닫히면서 캐나다에 불시착해야 했던 여객기 승객들과 그곳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다. 2017년 브로드웨이에서 초연된 이 작품은 2023년에서야 국내에 들어왔다. 아무래도 사건이 일어난 때로부터 시간이 많이 흘렀기 때문에, 나보다 어린 사람들은 잘 와닿지 않을 수 있다. 그래서인지 당시 상황을 좀 더 잘 표현하기 위해 몇몇 사라진 넘버들도 있고 변경된 부분들도 있다고 한다.


뮤지컬 <컴프롬어웨이> (좌) 브로드웨이 공연 사진 (playbill.com) / (우) 국내 공연 사진 (문화뉴스/쇼노트)


당시 여객기들이 불시착한 곳은 캐나다 뉴펀들랜드주 갠더라는 곳인데, 굉장히 외진 시골 어촌마을이다. 첫 넘버인 'Welcome to the rock'은 갠더 사람들이 9/11 당일 어떻게 지내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며 이방인들을 맞이하는 내용의 넘버다. 원 가사에는 영문법에 맞지 않는 사투리도 있지만, 국내 가사에서 그런 부분들은 표현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I am an islander (나는 섬사람)'이라고 여덟 차례 반복되는 부분이, '거친 바위에 난 뿌리내렸네 / 거친 땅 위에 난 살아간다네'와 같이 웅장하게 바뀐 것이었다. 이는 음절 때문이 아니므로, 지명이 낯선 관객들도 갠더가 얼마나 외진 지역인지 상상할 수 있도록 표현한 걸로 느껴졌다.


뮤지컬 <드라큘라>의 변신은 여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간다. 'I never knew I'd get such pleasure whispering your name (당신의 이름을 속삭이는 것이 이토록 즐거울 줄 몰랐죠)'라는 다소 평이한 가사를 '그 이름만 속삭여도 내 세상은 떨려'처럼 시적으로 바꾼 번안도 매우 멋지지만, 국내 재연 때는 세계 최초로 새로운 넘버가 추가되기까지 했다.


한국 초연부터 드라큘라 역을 맡았던 김준수 배우의 제안으로, 드라큘라가 400년 전 죽은 연인 엘리자벳사를 향한 괴롭고도 애틋한 사랑을 표현한 'She'라는 넘버가 생겨났다. 덕분에 그전까지 다소 아쉽다는 평을 듣던 해당 작품의 개연성이 한껏 보완되었다. 이제 해당 넘버는 작품의 주요 넘버로 자리 잡았다. 브로드웨이에서 시작된 뮤지컬이 한국 공연에서 보완되고 변화한 모습을 보여준 예이다.


뮤지컬 <어쩌면 헤피엔딩> 국내 공연 사진 (중앙일보/CJ ENM)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 브로드웨이 공연 사진 (maybehappyending.com)


최근 국내 창작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이 토니상 6관왕을 거머쥐었다. 나 또한 지난해 국내에서 큰 기대 없이 보러 갔다가 엄청난 감동을 받고 왔던 터라, 수상에 큰 역할을 했을 브로드웨이 버전도 언젠가 꼭 보고 싶다. 브로드웨이 버전은 주인공들의 이름과 전반적인 스토리, 서울과 제주도를 오가는 배경을 바꾸지 않았고, 작품 속 중요한 소품으로 등장하는 화분 역시 '화분'이라는 이름으로 한국어 발음을 그대로 유지했다.


그렇지만 미국 관객들을 타게팅하면서, 무대가 더 화려해지고 캐릭터가 늘어났으며, 재즈풍의 음악이 늘어났고 눈물샘을 자극하는 넘버들이 줄어들었다. 그 과정에서 내가 굉장히 좋아했던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넘버 또한 삭제되었다고 해서 괜한 서운함을 느꼈다. 하지만 미국 현지의 정서에 맞춘 변화는 불가피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과감한 변화가 대성공을 이끌었는지도 모른다. 브로드웨이 관객들을 사로잡은 <어쩌면 해피엔딩>은, 또 다른 모습으로 멋지리라 믿는다.



뮤지컬은 복제되는 것이 아니라, 재창조되는 것이다. 초연과 재연이 조금씩 달라지듯, 같은 작품의 오리지널 공연과 라이선스 공연 또한 공연 장소와 시기에 따라 변화할 수밖에 없다. 캐스트도 언어도, 그에 따른 메시지 전달 방식이나 일부 스토리도, 완전히 동일한 건 불가능하다.

뮤지컬은 한 곳에서가 아니라 존재하는 여러 곳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바뀌고 자라난다. 오늘 이 순간 진행되는 공연은 오늘 마무리되고, 내일 공연은 또다시 새롭게 시작될 것이다. 한 번 무대 위에 오른 뮤지컬은 결코 박제되지 않고, 늘 살아있을 테니까.



[위에 언급된 작품들]


하데스타운 https://brunch.co.kr/@felizerin/462

디어 에반 핸슨 https://brunch.co.kr/@felizerin/438

컴프롬어웨이 https://brunch.co.kr/@felizerin/458

드라큘라 (향후 추가)


어쩌면 해피엔딩 https://brunch.co.kr/@felizerin/468


* 커버 사진 출처 : Photo by Camille Roux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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