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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의별 Sep 30. 2024

내일은 알 수 없지만, 어쩌면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

* 조금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의 제목을 처음 봤을 때, 나는 '해피엔딩'에 좀 더 집중을 했다. 두 로봇이 만나 사랑을 알게 되는 이야기라는 후기들을 보면 그럴듯한 제목이었다. 그런데 다 보고 나니, 사실 이 제목의 강세는 '어쩌면'에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쩌면 해피엔딩>은 가정용 로봇들이 상용화된 근미래, 버려진 '헬퍼봇'들이 모여 사는 오래된 아파트를 배경으로 한다. 이곳에 홀로 사는 올리버 헬퍼봇 5 모델로, 매일 좋아하는 재즈 음악을 틀어놓고 오래도록 자신을 찾아오지 않는 주인 제임스를 기다린다. 그러던 어느 날, 헬퍼봇 6 모델인 이웃 클레어가 자신의 충전기가 고장 났다면서 올리버의 문을 두드리며 도움을 요청한다.


올리버는 매달 같은 날 같은 시간에 재즈 잡지를 배달하러 오는 우체부 외에는 별다른 방문자 없이, 늘 규칙적이고 계획적인 생활을 한다. 예정에 없던 일에 놀라는 걸 가장 싫어하는 올리버이기에, 난데없이 문을 두드리는 클레어를 처음에는 멀리한다. 이후 마음이 동해 클레어를 도와주기로 하지만, 매일 1시에 빌려간 뒤 5시에 반납하러 오라는 규칙을 정해준다. 올리버의 규칙을 따라 매일 문을 두드리는 클레어는 어느새 올리버의 일상에 스며들고, 올리버는 클레어가 시간 맞춰 오지 않으면 걱정할 정도로 클레어를 기다리게 된다.


올리버는 계획적이고, 또 희망적이다. 올리버에게 제임스는 전 주인이 아니라 친구인데, 제주도에 살고 있는 그를 찾아가겠다는 목표로 돈을 차곡차곡 모은다. 하지만 클레어는 이미 인간들에 대해, 세상에 대해 너무 잘 안다. 인간들의 사랑이 얼마나 한시적이고, 세상 일들이 얼마나 뜻대로 안 되는지 알고 있다. 너무 다른 두 인물이 만나 가까워질 때면 늘 그렇듯, 클레어는 알게 모르게 올리버의 정돈된 생활을 조금씩 깨고, 올리버는 자신의 규칙적인 울타리를 조금씩 벗어나기 시작한다.


사랑이란 어쩌면 불확실함에 희망을 거는 일일지도 모른다. 나와는 다른, 예측이 어려운 사람과 함께 하기를 택하는 길. 언제까지 함께 할 수 있는지 몰라도, 서로에 대한 마음이 언제까지 유지될지 몰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시간과 내 계획을 양보하며 함께 하기를 택하는 일. 비록 올리버와 클레어가 서로에 대한 마음이 사랑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리지만, 클레어가 올리버의 규칙을 존중해 주고 올리버가 클레어의 다소 무모한 제안을 받아들이는 건 모두 알 수 없는 서로를 조금씩 받아들이는 모습이었다.


아무리 계획하고 예측한다 해도, 내일은 우리가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모습으로 우리를 반길 것이다. 올리버가 내내 기다린 건 제임스였지만 그를 찾아온 건 클레어였던 것처럼, 제주도에 가는 여정을 위해 천천히 돈을 모을 계획을 세웠지만 클레어를 만나 갑작스레 가게 된 것처럼. 바라고 계획하는 미래가 실제로 어떻게 실현될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올리버와 클레어의 이야기가 어떻게 끝날지도.


괜한 걱정 따윈 말아
어차피 똑같은 결말
그저 지금에 집중해
끝까지 끝은 아니야

- '끝까지 끝은 아니야' 중



<어쩌면 해피엔딩>은 세심함이 느껴지는 완성도 높은 작품이었다. 화려하지는 않아도 소소하게 채워진 무대와 은은하게 반짝이는 조명이 처음 시작하는 순간부터 나를 몰입하게 했다. 공연이 끝날 때쯤엔 마치 둥글게 그려지던 선의 끝이 하나의 원을 완성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부드럽고 섬세하게, 그리고 완전하게.


그런데 그렇게 완성도 높은 공연 속에서도 조금 의문들었던 부분이 있었다. 공연에서 그려진 미래는 제주도까지 해저터널이 뚫려 있었고 말만 하면 스크린에서 뉴스 켜졌지만, 그 안에는 여전히 우체부라는 직업이 남아있었고 손님에게 열쇠를 건네는 모텔 카운터의 주인 또한 존재했다. 둘 모두 명확히 인간으로 표현되었는데, 이렇게나 헬퍼봇들이 발달한 미래에 여전히 우체부와 모텔 카운터를 보는 사람이 남아있을지, 그 부분은 옥에 티가 아닌가 했다.


하지만 공연이 끝나고, 그것 또한 정교한 상상력의 일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미래는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되지는 않을 테니까. 지금 사라질 거라고 여겨지는 것들이, 의외로 아날로그적으남아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우린, 우린 왜 사랑했을까
우린 왜 그냥 스쳐가지 않고
서롤 바라봤을까
우린 왜 끝이 분명한 그 길을
함께 걷기 시작했을까

- '우린 왜 사랑했을까' 중


세상 많은 것들에서 명확한 이유를 찾기는 어렵다. 누군가를 만나 사랑하게 되는 것도, 누군가를 내내 그리워하는 것도, 우리가 서로를 만나게 되는 작은 확률의 우연도. 대부분의 것들은 그 누구의 의지나 분명한 인과 없이, 아주 사소한 순간들이 알게 모르게 연결되어 결과로 나타날 뿐이다.


그러아직 오지 않은 내일을 걱정하고 기다리는 건 큰 의미가 없다. 가끔은 너무 걱정하는 대신 그저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며, 불확실한 미래가 자연스레 흘러오기를 기다리는 마음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그런 마음을 지닌 사람만이, 그 불확실한 미래에 희망을 걸 수 있을 것이다. 내일을 알 수는 없어도, 지금 나를 웃음 짓게 하는 것에 집중할 수 있는 사람. 그런 이들만이 어쩌면 해피엔딩을 맞이할지도 모른다.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

▷ 개요 : 2014년 우린문화재단의 기획으로 개발되었고, 2016년 국내 초연이 올라왔다. 초연 반응이 좋아서 이듬해 바로 앵콜 공연까지 올라왔다. 2024년에는 한국에서 오연이 올라오는 한편, 미국 브로드웨이에 진출하기도 했다. 10월부터 대형 극장에서 오픈런으로 공연될 예정이다.

▷ 제작사 : CJ ENM (*1)

▷ 작·작사 : 박천휴 / 작·작곡·편곡 : 윌 애런슨 / 연출 : 김동연

▷ 매우 주관적인 추천 넘버 : '끝까지 끝은 아니야', '사랑이란', '그럼에도 불구하고'

▷ 2024년 오연 캐스트 (예스24 스테이지 1관, 2024년 6월 18일~9월 8일)

올리버 역 : 정욱진, 윤은오, 신재범

클레어 역 : 홍지희, 박진주, 장민제

제임스 역 : 이시안, 최호중



1) 초연부터 앵콜, 재연까지의 제작사는 대명문화공장이었으며, 초연은 네오 프로덕션과, 재연은 더웨이브와 공동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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