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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의별 Sep 23. 2024

나조차 잊고 있던 내 이야기를 되찾아

식스 더 뮤지컬

* 결말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국의 역사는 잘 몰라도, 앤 불린이라는 이름은 아마 한 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앤 불린은 여성 편력이 심했던 것으로 유명한 영국의 국왕 헨리 8세의 두 번째 아내다. 헨리 8세는 앤 불린과 결혼하기 위해 국교까지 바꿔가면서 전처인 아라곤의 캐서린과 이혼했고, 그 이야기는 영화나 드라마의 소재로 종종 활용되었다.


<식스 더 뮤지컬>에는 앤 불린과 아라곤의 캐서린을 포함해, 헨리 8세의 아내 6명이 모두 등장한다. 사실 나는 아무리 뮤지컬이라고 해도 남의 나라의 역사가 과연 재밌을까 하는 의문을 가지고 보러 갔다. 현대적으로 재해석을 했다지만 우리나라 사극을 다른 나라 사람이 보면서 같은 감정을 느끼기 어렵듯, 내가 과연 영국의 관객들처럼 환호할 수 있을까 싶었다. 그런데 이건 역사 이야기가 아니라, 그저 이 여섯 인물에 대한 이야기였다.


이야기 속에서 여섯 왕비들이 한데 모인 건 함께 밴드를 결성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누가 리드 싱어를 맡아야 할지 정하지 못하다, 결국 헨리 때문에 가장 고통스러웠던 사람이 맡기로 한다. 그렇게 서로의 '불행 배틀'이 시작된다.


이혼-참수-죽음!
이혼-참수-생존!

- 'Ex-Wives' 중 (6명의 왕비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요약하는 첫 넘버)


여섯 명의 운명이 어쩜 이렇게 입에 착착 달라붙게 정해졌는지. 아래 더 이야기하겠지만, 헨리 8세를 만나서 삶이 더 좋아졌던 이는 없었던 것 같다. 아, 한 명 정도 있겠다. 그 또한 헨리와의 만남이 썩 유쾌하지는 않았을 테지만.


헨리 8세라는 남자와의 연결고리로 만난 이들을 주인공으로 한 <식스 더 뮤지컬>의 무대는, 드물게 배우부터 밴드까지 모두 여성으로만 구성되었다. 무대 위에 함께 올라와 있는 밴드 멤버들의 이름 역시 실제 왕비들의 시녀 이름들로 지어졌다. 배우들의 엄청난 성량과 밴드의 열띤 연주가 별다른 무대장치나 소품 없이도 무대를 가득 채운다. 핸드마이크를 쓰는 배우들과 밴드의 라이브 음악은 뮤지컬보다는 콘서트를 연상시킨다.


각 왕비들은 차례차례 솔로 넘버를 통해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전한다. 정확히는 '어떻게 헨리 때문에 꼬이게 되었는지'를 이야기한다. 제각각 선명한 색의 갑옷을 입고 무대에 선 여섯 왕비들은 각기 다른 스타일로 노래한다. 실제로 제작 단계에서 다양한 여성 팝스타들(*1)로부터 영감을 얻어 각 왕비의 모습을 그려냈다고 한다. 각자의 넘버는 각자가 겪은 내용에 잘 어울리는 스타일로 만들어졌다. 노래의 가사는 실제 역사에 기반한 것이기도 하고, 일부 상상이 더해진 것이기도 하다.



왕비가 된 순서대로, 제일 먼저 아라곤(*2)이 나선다. 헨리와 가장 오래 결혼생활을 했지만, 어느 날 헨리로부터 이혼 통보를 받은 인물이다. 헨리는 아들이 없다는 이유로(*3), 그리고 불린을 원했기에 아라곤을 수녀원으로 쫓아내려 했다.


가장 유명한 두 번째 아내 불린은 헨리가 성공회까지 세우면서 아내로 맞이한 왕비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헨리는 결혼 후에 바람을 폈다. 결국 불린도 함께 눈을 다른 데로 돌리기 시작했고, 간통죄를 이유로 결국 참수를 당했다.


이어서 세 번째 아내 시모어도 이 배틀에 참여하지만, 다른 아내들은 야유한다. 시모어는 헨리가 유일하게 사랑했던 아내였고, 시모어 역시 헨리를 사랑했던 것 같다. 다만 시모어는 아들을 낳자마자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죽었다는 아픔이 있다.


네 번째 아내 클레베는, 사실 제대로 결혼생활조차 한 적 없는 아내다. 마치 데이트앱 보듯, 초상화를 보고 클레베를 다음 아내로 점찍은 헨리 8세였지만, 그는 곧 결혼을 무효처리하려 한다. 이유는 클레베가 초상화와 대신들의 증언과 달리 '못생겨서'.(*4) 자존심이 상할 법도 하지만, 클레베는 이혼하면서 성과 막대한 재산을 받아 편하고 호화롭게 살았다며 자랑한다. 그는 유일하게 자진해서 불행배틀에서 빠진다.


다섯 번째 아내 하워드는 17세에 결혼해, 여섯 왕비들 중 나이가 가장 어리다. 문란한 생활로 결국 결혼 1년 여만에 왕비의 자리에서 쫓겨나고 이후 참수되고 마는데, 하워드는 수많은 남자들이 친구가 되어주겠다고 하면서 결국에는 자신의 몸만을 원했다고 가슴 아프게 이야기한다. 하워드에 대해서는 역사적으로도 자세하게 알려진 바가 없다고 한다. 결국 남성들의 시각에서 쓰인 역사였다면, 그의 실제 모습은 알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등장한 . 파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음에도, 헨리의 청혼으로 어쩔 수 없이 왕비가 되었다. 왕의 청혼을 거절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왕과 결혼해 헨리의 마지막 모습까지 본, 여섯 명 중 유일한 생존자다. 헨리의 죽음 후에는 비로소 그가 정말 사랑했던 토마스 시모어와 결혼했다. 그와의 결혼생활도 그리 순탄하지만은 않았지만.


파는 헨리로 인해 고통받은 이야기를 하는 대신, '필요 없어, 너의 사랑'이라고 정리한다. 그러면서 대체 우리는 왜 이 대결을 하고 있는 거냐고, 의문을 제기한다.


"우리는 왜 계속 그 사람에게 묶여있어야 하지?"


우리 콘서트인데 왜 우리 이야기를 하지 않고, '헨리'가 여전히 중심에 있느냐고 말이다. 파는 자신의 인생에는 헨리 외에도 많은 중요한 것들이 있었다고 말한다. 자신은 작가였고, 여성운동가였다고. 그런데 왜 '헨리의 아내'라는 이름 속에 갇혀야 하냐고 외친다. 나머지 아내들은 파의 깨달음에 모두 함께 숙연해지고는 수긍한다.


각자의 이야기에선 각자가 주인공이 될 수 있었는데, 여전히 그들은 스스로 헨리의 주변 인물을 자처하고 있었다.


우릴 하나로 묶을 순 없어
잊혀졌던 우리의 역사, 내 삶, 영광, 이제 되찾아

- 'Six' 중


'그저 나'일 수만은 없었던 시대에 태어나 자신을 충분히 드러내지 못하고, 누군가의 왕비로만 기록되었던 이들. 아마 왕과 결혼한 이후 그들의 삶에는 단 한 번도 자기 자신의 이야기가 있었던 적이 없었을 것이다. 세상 사람들에게 그들은 모두 헨리 8세의 전부인으로 기억되었을 뿐이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까지도 그들 자신의 이야기를 잊어서는 안 되었다. 헨리를 지우고도 여전히 다채롭게 남은 그들의 이야기를, 누군가 귀 기울여주는 사람이 없더라도 스스로는 늘 듣고 발견해야 했다. 헨리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다른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분명 역사에 더 멋진 한 획을 그었을지도 모를, 그들 각자만의 진실된 이야기를.


우리는 스스로를 주인공으로 두는 연습을 꾸준히 해보아야 한다. 타인이 바라보는 내 모습과 타인의 이야기 속에 투영된 내 모습에서 벗어나, 내가 주도적으로 그려낸 진짜 '나'의 모습에 집중해 볼 필요가 있다. 오로지 나만이 써 내려갈 수 있는 나의 이야기는, 주변 다른 이야기들을 지워냈을 때 비로소 시작된다.


<식스>의 마지막 넘버에는 헨리가 등장하지 않는다. 각자 기억되고 싶은 모습, 이루고 싶었던 모습을 부른다. 아라곤은 헨리의 청혼을 거절하고 수녀원으로 가서 가스펠 콰이어로 성공하고, 불린 역시 헨리와 결혼하지 않고 셰익스피어와 함께 일하며 가사를 쓴다. 제인은 자식들을 많이 낳고서는 본트랩 가족처럼 합창단을 꾸리고, 클레페는 파티를 실컷 연다. 하워드는 자신을 추행했던 음악선생님을 피해 혼자 노래를 독학하고, 파는 이들의 노래를 듣고 반해서 함께 앨범을 발매한다.


여섯 왕비들이 드레스가 아닌 화려한 갑옷을 입고 전한 이야기는 결국 헨리가 아니었다. 자신의 이야기, 자신의 역사를 써 내려가라는 외침이었다.



[식스 더 뮤지컬]

▷ 개요 : 영국의 국왕 헨리 8세의 아내들 여섯 명의 이야기로, 팝 콘서트 형태를 하는 뮤지컬이다. 2017년 에든버러에서 초연이 올라온 후, 이후 보완하여 2019년에 영국 웨스트엔드, 2021년에 미국 브로드웨이에 올라왔다. 우리나라에는 2023년, 첫 내한 공연과 한국어 공연 초연이 연달아 올라왔다.

▷ 음악·작사·극본 : 루시 모스, 토비 말로우

▷ 국내 제작사 : 아이엠컬처

▷ 매우 주관적인 추천 넘버 : 'Ex-Wives', 'No Way', 'All You Wanna Do', 'Six'

▷ 2023년 초연 캐스트 (코엑스 신한카드 아티움, 2023년 3월 31일~6월 25일)

아라곤 역 : 이아름솔, 손승연

불린 역 : 김지우, 배수정

시모어 역 : 박혜나, 박가람

클레베 역 : 김지선, 최현선

하워드 역 : 김려원, 솔지

파 역 : 유주혜, 홍지희



1) 왕비들이 각각 부르는 솔로곡의 스타일과, 배우들의 스타일링을 모두 팝스타들로부터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아라곤('No Way')은 비욘세/제니퍼 로페즈/제니퍼 허드슨, 불린('Don’t Lose Ur Head')은 마일리 사이러스/에이브릴 라빈/릴리 알렌, 시모어('Heart of Stone')는 아델/시아/셀린 디옹, 클레베 ('Get Down')는 니키 미나즈/리아나, 하워드('All You Wanna Do')는 브리트니 스피어스/아리아나 그란데, 파('I Don’t Need Your Love')는 알리샤 키스/에밀리 산데로부터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2) 왕비들 이름이 죄다 캐서린 아니면 앤이기에(제인 시모어 외에 캐서린 3명, 앤 2명) 성 또는 출신지가 캐릭터 이름이 되었다.

3) 사실 아라곤의 캐서린은 3남 3녀를 낳았다. 메리 공주 하나 빼고 모두 어린 나이에 죽었을 뿐.

4) 헨리 8세는 클레베와의 결혼을 추천한 대신을 죽였다고 한다.(...) 그것만이 이유는 아니었지만 헨리의 화를 돋우기 충분했고, 결국 헨리는 충직한 대신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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