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줄거리 스포일러가 많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뮤지컬을 보기로 결정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요소가 반영된다. 출연 배우, 극장, 넘버, 다른 관람객들의 평가. 하지만 보통 새로운 뮤지컬에 대한 첫인상은 시놉시스, 즉 작품의 의도와 대략의 줄거리에서 결정되곤 한다.
뮤지컬 <호프>는 프란츠 카프카의 미발표 원고에 대한 재판 실화(*1)를 모티브로 제작된 우리나라 창작 뮤지컬이다. 작품 속에서는 작가를 요제프 클라인이라는 가상의 인물로 설정했고, 그 외 등장하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새롭게 창작했으며, 원고를 의인화한 K라는 캐릭터도 더했다.
전체적인 줄거리는 이렇다. 호프가 8살이던 해, 엄마 마리에게 연인 베르트가 나타나 친구 요제프의 미발표 원고를 맡기고 간다. 요제프는 베르트에게 자신의 원고를 태워달라고 했지만 친구의 재능을 동경하던 베르트는 차마 없애지 못했다. 그러다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고, 지식인인 자신이 원고를 지니고 있으면 독일군에 빼앗길 것을 염려해 연인인 마리에게 맡긴 것이다. 마리는 베르트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피난길에서도, 나치의 수용소에서도, 딸인 에바 호프보다 그 원고를 소중히 여기며 집착한다. 엄마는 딸을 돌보는 것도 잊어간다.
이쯤 되면 에바 호프는 원고에 대해 넌더리가 날 법도 한데, 이야기는 어쩌다 국가에 원고를 반환하지 않겠다고 버티는 30년 간의 재판이 되었을까. 원고 때문에 망가진 엄마와 그 현실을 벗어나고자 했던 호프는, 이제는 자신이 원고에 집착하며 '이 동네 미친년'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괴팍한 노인이 되었다. 작품의 시놉시스는 "호프에게 과연 원고는 무엇이었을까" 리는 질문을 던진다.
사실 뮤지컬 <호프>의 줄거리를 미리 접했을 때는, 호프라는 캐릭터가 내게 그다지 와닿지 않았다. 원고를 없애고 싶었을 호프가, 원고를 놓지 못하고 집착하게 되는 흐름이 머릿속으로 연결 지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호프의 인생은 그런 대략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한 장 한 장 넘겨가며 한 구절 한 구절 살펴볼 때 비로소 가슴 아프게 이해되었다.
에바 호프는 스스로 원고보다 중요했던 적이 없었다. 엄마 마리는 급정거한 버스 안에서도 넘어진 딸은 안중에도 없이 떨어진 원고를 줍기 바쁜 인물이었다. 마리는 자신이 원고를 잘 챙기고 있어야 사랑하는 베르트가 다시 찾아올 거라 믿는다. 하지만 마리는 끝내 베르트로부터 버림받고, 그렇게 마리는 스스로를 버리기에 이른다. 그 속에서 에바는 자신을 지켜내기 위해 처절하게 버틴다. 엄마처럼 살지 않으려고 엄마를 버리고, 옥죄는 삶에서 벗어나보려고 원고의 일부를 경매에 넘긴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의 꼬임에 넘어가 돈도 받지 못하고 사랑도 잃는다. 게다가 원고는 에바와 마리를 끔찍하게 괴롭혔던, 그리고 베르트가 그토록 방어하려고 애썼던 독일인들의 손에 넘어가버리고 만다. 호프는 그렇게 철저히 망가진다.
사랑에, 그리고 사람에 버림받은 에바 호프는 잘못된 깨달음을 얻는다. 원고조차 없으면 그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주변에 아무도 남지 않은 호프에게 원고는 더 이상 버릴 수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호프는 평생 족쇄처럼 자신을 붙잡았던 과거가 없으면 자신의 미래 또한 없을 거라고 생각하며 그 종이쪼가리를 붙든다. 그건 스스로의 인생을 붙잡는 행위이기도 했고, 동시에 혼자 잘 살아보겠다고 했던 잘못된 선택들에 대해 스스로를 벌하는 행위이기도 했다.
뮤지컬 <호프>에는 부제가 붙는다. '읽히지 않은 책과 읽히지 않은 인생'. 원고는 불태워지는 신세는 면했지만 그저 보관되기만 할 뿐 독자들에게 제대로 읽히지 못했고, 호프의 인생 역시 그 누구로부터도 이해받지 못하며 엄마와 타인과 스스로에게서도 외면당하고 말았다. 호프는 다른 사람의 원고는 평생 붙들고 있으면서 정작 본인의 이야기는 들여다보지 못했다. 자신의 이야기가 중요하다는 것조차 호프는 아마 너무 오래 잊고 지냈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가진 유일한 인생은 일상이다
- 프란츠 카프카
작품 속 호프는 완전히 혼자가 된 후 환청처럼 K, 즉 원고의 목소리를 듣기 시작한다. 어느 날 K는 호프에게 프란츠 카프카의 말을 건네준다. 호프의 일상을 지켜주고 싶은 마음에서였을 것이다. 재판이 막바지에 이를수록 K의 목소리는 점점 단호해진다. 왜 과거에 얽매이냐고, 왜 스스로를 불행하게 만드냐고 다그치기도 한다. 그리고 호프 역시 행복해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일러주기도 한다.
하지만 원고지는 살아있는 존재가 아니다. 원고지가 건네는 말들은 사실 모두 호프가 마음속 깊은 곳에 숨겨두었던 생각들일 거라고 나는 믿는다. 알 수 없는 외부의 환청을 듣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내내 외면하고 있었던 자신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되는 것이라고.
당신이란 책을 제대로 읽어봐
그 속엔 네가 잊었던 문장이 많아
넌 수고했다 넌 충분했다 넌 살아냈다 늦지 않았다
앞으로 써나갈 이야기가 더 많아
시작이 아냐 잠시 멈췄던 거야
반전은 항상 마지막에 있어
내가 아닌 너의 이야기로 채워
누구보다 빛나는 결말을 맺어
- '빛날 거야 에바 호프' 중
그러니까 호프는, 자신의 행복을 향해가는 방법을 늘 알고 있었다. 겁이 나서 외면하고 있었을 뿐.
그런 호프에게 행복을 찾아가는 여정은 새로운 시작이 아니라, '잠시 멈췄다가 다시 시작하는 일'이다. 거창한 시작을 해야 할 것 같으면 막막하게 느껴지지만, 이미 시작했던 걸 중단했다 이어나가는 것일 뿐이라고 생각하면 조금 낫다. 이미 백발이 된 호프이지만, 여든이 되었을 때 후회하지 않기 위해 한 발자국 앞으로 내딛는다. 다시 시작하는 시점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결국 해내는 것이 중요하니까.
시놉시스는 대강의 짜임만을 보여줄 뿐이다. 책을 표지와 홍보용 띠지로 다 알 수는 없듯이, 누군가의 겉모습과 그의 인생 굵직한 순간들 단 몇 개를 보고서 그의 인생 전부를 이해할 수는 없다. 시놉시스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었던 호프의 인생은 그렇게 차곡차곡 나에게 와닿았다.
그리고 내 인생도 차근차근 다시 읽어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답도, 이미 우리 이야기 속에 담겨 있는지도 모른다. 그동안 써왔던 이야기들을 다시 읽고 나면, 원래 쓰고자 싶었던 이야기를 다시 이어갈 수 있지 않을까. 남의 인생이 아닌 내 인생을 정독하며, 남들이 아닌 내가 가치 있다고 믿는 것들을 선택하며.
온전히 스스로에게 집중할 수 있는 딱 한 발자국의 용기만 있다면, 가다가 잠시 멈추더라도 우리는 언제나 앞으로 나아가는 길 위에 있을 것이다. 원하는 이야기의 마지막 줄을 써 내려가기까지, 스스로에게 다정한 걸음으로 걷고 싶다.
[뮤지컬 호프: 읽히지 않은 책과 읽히지 않은 인생]
▷ 개요 : 프란츠 카프카의 미발표 원고를 둘러싼 이스라엘 국립 도서관과 '호프'의 실제 소송을 모티브로 그린 작품이다. 초연이 올라온 2019년, 예그린 뮤지컬 어워즈에서 올해의 뮤지컬상, 극본상 포함 3개 부문에서 수상했고, 한국뮤지컬어워즈에서는 대상과 여우주연상, 여우조연상을 포함하여 총 7개 부문에서 수상했다.
▷ 제작사 : R&Dworks
▷ 작·작사 : 강남 / 작곡 : 김효은 / 연출 : 오루피나
▷ 매우 주관적인 추천 넘버 : '길 위의 나그네', '호프', '빛날 거야 에바 호프'
▷ 2023년 삼연 캐스트 (유니플렉스 1관, 2023년 3월 16일~6월 11일)
에바 호프 역 : 이혜경, 김지현, 김선영
K 역 : 김경수, 조형균, 백형훈
마리 역 : 홍륜희, 김보경
과거 호프 역 : 최서연, 이예은, 김수연
베르트 역 : 송용진, 지혜근
카델 역 : 이기현, 반정모
앙상블(책갈피): 김정민, 이지현, 김성재, 김성현, 황성재(스윙)
1) 실제로 카프카의 원고를 지니며 소송에 나선 인물의 이름은 Hoffe이지만, 뮤지컬에서는 동음이면서 희망을 뜻하는 Hope로 바뀌었다. 실제로는 카프카의 원고를 숨겨둔 친구 브로트가 자신의 비서인 에스터 호프에게 원고를 넘기고, 이후 에스터의 딸 에바와 루스 호프에게로 원고가 전달되었다. 브로트와 에스터가 결혼생활 바깥으로 연인 관계였다는 말도 있지만, 사실이 공식적으로 확인된 바는 없다고 한다.
* 다음 주에는 <뮤지컬의 뮤> 1편 마지막 화가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