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바다의별 Oct 14. 2024

천천히, 그러다 갑자기 빠져든

뮤지컬, 내 일상

소설 <잘못은 우리 별에 있어> 속 주인공 헤이즐은, 사랑에 빠지는 걸 잠에 드는 것에 비유했다. 천천히, 그러다 갑자기 빠져드는 것이라고. 나는 매번 무언가에 애정을 쏟을 때마다 그 말을 떠올린다. 뮤지컬에 대한 내 사랑도 그랬다.


처음에는 그저 궁금했던 배우를 한 번쯤 보러 간다는 마음으로 어느 겨울날 <하데스타운>을 보러 갔고, 몇 달 뒤 이른 봄에는 또 다른 배우를 찾아 <젠틀맨스 가이드>를 봤다. 뮤지컬의 매력이 나에게 은은하게 다가오고 있음을 느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적극적으로 보러 다닐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다 1년 가까이 지난 그해 겨울, <이프덴>을 보러 갔다. 주인공이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인생의 모습이 완전히 달라지는 걸 양쪽으로 번갈아가며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배우들도 멋있었고, 작품이 주는 메시지도 마음에 콕 박혔다. 극장을 나섰을 때, 나는 난생처음으로 이 작품을 당장 다시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한 달 뒤, 같은 작품을 다시 보러 갔다. 한 뮤지컬을 두 번 보는 일은 인생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 후부터는 뮤지컬을 보는 주기가 점점 짧아졌다. 봄이 되자 <영웅>과 <호프>를 봤고, 여름이 되자 <맘마미아>와 <식스>를 봤다. 그때부터는 걷잡을 수 없이 뮤지컬을 사랑하게 되었다. 한 달에 한 편, 그러다 두 편,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는 매주 한 편 이상 본 적도 있었다.


뮤지컬을 자주 즐기게 되면서 내 일상에는 많은 변화가 생겼다. 우선 뮤지컬 덕분에 2, 3개월 전부터 미리 계획하는 삶을 살고 있다. 여행이 아니고서야 그렇게 미리 계획을 세우는 일은 없었는데, 뮤지컬은 대부분의 티켓팅이 공연일로부터 그 정도 앞서 진행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당장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는데 2, 3개월 후를 예측해야 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지만, 부디 다른 일이 생기지 않기를 바라며 도박하는 마음으로 예매를 할 뿐이다. 그러다 혹시라도 운 나쁘게 출장이라도 갑자기 잡힐 때면 눈물을 머금고 취소해야 한다. 지금까지 그런 경우는 세 번 정도 있었다.


또 다른 변화로는 내 플레이리스트를 남들에게 공개하기가 다소 부끄러워졌다는 점이다. 내가 듣는 음악이 창피한 것이 아니라, 제목들이 워낙 비장해서 나를 잘 모르는 이가 보면 나를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예를 들면 <드라큘라>의 'Fresh Blood'라든가, <몬테크리스토>의 '너희에게 선사하는 지옥'이라든가. 내 월요일 출근길 잠 깨우기용 플레이리스트에는 <영웅>의 '누가 죄인인가'도 있다. 물론 'Underground' (<멤피스>)나 'Me and the Sky' (<컴프롬어웨이>)처럼 담백한 팝송 같은 제목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널 죽이고 싶어' (<아가사>) 또는 '피와 살' (<더 데빌: 파우스트>)처럼 매우 극단적인 편이다.


그렇지만 반대로, 내가 읽는 책들의 리스트는 자랑스럽게 공개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고 그전에 읽던 책들을 당당하게 공개하지 않았다는 건 아니지만, 뮤지컬을 즐기기 시작한 이후로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을 만한 소설들을 더 많이 읽게 되었다. 평소 SF나 미스터리 현대소설 위주로 읽던 내가, 고전 명작 소설들을 읽기 시작한 건 오로지 뮤지컬의 영향이다. 뮤지컬 <프랑켄슈타인>을 보기 전에 읽은 메리 셸리의 소설 <프랑켄슈타인>, 뮤지컬 <아가사>에 반해 읽기 시작한 아가사 크리스티의 여러 작품들, 뮤지컬 <스모크>를 보기 전에 미리 읽었던 이상의 작품들, 그리고 올해 연말에 뮤지컬 <시라노>를 보기 전에 최근 읽은 희곡 <시라노>까지. 내 독서 편식이 뮤지컬 덕분에 해소되리라는 걸, 예전의 나는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새로운 취미는 일상으로 '스며든다'. 블록처럼 채워지거나 책갈피처럼 잠시 끼워지는 것이 아닌, 색이 선명한 잉크처럼 스며든다. 그리고 한 번 스며든 건 빠져나가기 어렵다. 그러니 나에게 스며든 이 취미가 계속해서 내 곁에 머무는 한, 이 글은 결코 마지막 글이 되지 않을 것이다.


또 다른 누군가의 일상에도 뮤지컬이 스며들기를 바라며, 그래서 우리 언젠가 함께 이야기를 나누기를 바라며, 늘 적어왔던 그 마음 그대로 나는 앞으로도 적어 내려갈 것이다.



* 그동안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몇 달 뒤, <뮤지컬의 뮤> 2편으로 돌아오겠습니다. :)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