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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뮤지컬 <프리다>

by 바다의별

6살 때 소아마비로 인해 9개월간 입원, 18살에 버스에서 교통사고를 당해 35번의 수술, 그 사고로 인해 다리, 허리, 쇄골은 물론 자궁까지 다친 탓에 이후 아이를 가지고 싶었음에도 3번의 유산. 멕시코의 화가이자 혁명가인 프리다 칼로, 한 사람의 인생은 이렇게나 가혹했다.


뮤지컬은 프리다 칼로가 '더 라스트 나잇 쇼'라는 토크쇼에 나가 자신의 인생을 회상하는 내용이다. 파란만장했던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선명했던 순간들을 이야기하면서, 끊이지 않던 고통 속에서도 그를 버티게 했던 순간들을 보여준다.


무대 위에는 단 네 명의 배우가 선다. 프리다, 레플레하, 데스티노, 메모리아는 각각의 역할들을 연기하며 무대를 가득 채운다.


레플레하는 스페인어로 '반영하다(reflejar)'는 뜻으로, 더 라스트 나잇 쇼의 사회자이자 프리다의 남편인 디에고 리베라를 연기한다. 디에고 리베라는 유명한 민중 화가로 프리다와 결혼했지만 내내 바람을 피워 프리다를 힘들게 만든 인물이기도 하다. 두 사람은 디에고의 여성편력으로 인해 결국 이혼했다가 이후 재결합했다고 한다.


데스티노는 '운명 (destino)'이라는 뜻이다. 프리다의 첫사랑이었던 알렉스를 연기하는 동시에, 프리다를 평생 쫓아다니는 죽음을 연기한다. 프리다가 사고로 병원 침대대에 누워서 상실감에 빠져있을 때, 데스티노는 지금 자신과 함께 가면 고통이 없을 거라며 프리다를 유혹한다.


마지막으로 메모리아는 '기억 (memoria)'이라는 뜻이다. 어릴 적 남들처럼 밖에서 뛰어놀지 못하고 침대에 누워있어야만 했던 프리다는, 또 다른 세계에도 프리다가 있다고 상상하며 그 '또 다른 프리다'가 자신이 하고 싶은 일들을 대신하고 있다고 상상한다. 메모리아는 프리다 대신 자유롭게 뛰어놀고 나중에 프리다의 원래 꿈이었던 의사가 되기도 하는, 프리다가 그리는 가장 이상적인 자신의 모습을 표현한다.


결과적으로 4명 모두 프리다였다.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는 프리다, 사랑하는 프리다, 때로는 포기하고 싶던 프리다, 프리다가 원했던 프리다.


프리다의 절규도, 프리다에 구애하는 레플레하의 기막힌 춤도, 프리다를 위로하는 메모리아의 다정함도 모두 인상적이었지만, 공연이 끝나고도 계속 곱씹게 되는 건 데스티노가 표현하는 죽음이었다. 프리다가 고통스러운 순간을 겪을 때마다 찾아와 유혹하던 죽음. 하지만 프리다는 끝까지 삶을 택한다.


절대자에게 절대적으로 순응할 수 없는 것은
절대자가 절대적으로 날 위하지 않기 때문
그러니 물러서지 마 모든 게 부서져도

- '코르셋'



프리다의 불행에 집중하면 그의 인생은 너무나 힘겹게만 보인다. 하지만 잘 들여다보면 프리다에게도 행복의 순간들이 있었다. 첫사랑 알렉스와 들뜬 마음으로 함께 걸어가던 기억, 수술 후 병실 침대에 누워있는 프리다를 위해 거울을 가져다주신 아버지의 세심함, 디에고 리베라와의 만남과 사랑(그게 동시에 그녀를 괴롭게 했을지라도), 그리고 그림을 그릴 때마다 느꼈을 해방감.


나는 어느 순간 운세를 잘 보지 않게 되었다. 운세는 수수께끼 같은 문구 한 마디로 나의 하루를 미리 요약해 준다. 긍정적이면 기분이 좋아지지만, 부정적이면 못내 신경이 쓰인다. 하루동안 다양한 일들이 일어나는 데에도 불구하고 오늘 아침에 본 운세가 부정적이었다면 그 부분에 초점을 맞추어 하루를 기억하게 된다. 분명 사이사이 웃고 안도하며 즐거웠던 순간들 또한 있었음에도.


프리다의 인생도 어디에 중점을 두느냐에 따라 다르게 읽힌다. 그러니 나는 프리다의 삶이 수도 없이 넘어진 삶이 아니라, 지치지 않고 끊임없이 다시 일어선 삶이라고 기억하고 싶다. 인생은 그를 여러 차례 사이렌 소리가 울리는 절벽 끝으로 몰아냈지만, 그럴 때마다 매번 떨어지지 않고 다시 힘을 주어 일어났으니까. 35번의 수술 끝에 병실 침대에 누워있을 때, 아버지가 달아주신 거울을 보며 삶의 의지를 되찾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유산과 이혼으로 몸과 마음이 망가졌을 때도 다시 한번 사랑과 꿈으로 자신을 일으켜 세웠으니까.


인생은 나를 무너뜨리려 하는 동시에, 계속 나아가게 하는 힘 또한 함께 주는 모순으로 가득 차 있다. 좌절들 사이에는 언제나 사랑이 있고, 어둠 사이에는 언제나 찰나의 빛이 있다. 프리다는 언제나 그 틈 사이를 바라보는 사람이었으리라.


살아가며 좋은 것만 만날 수는 없다. 우리는 필연적으로 좌절을 맞게 된다. 그 좌절의 종류나 크기나 빈도는 저마다 다를지라도, 그걸 극복하고 일어나는 계기는 결국 사랑으로 귀결되는 것 같다. 인생에 대한, 사람에 대한, 꿈에 대한. 프리다의 인생에는 남들보다 더 감내하기 어려운 좌절들이 있었던 것 같지만, 어쩌면 그랬기에 더 많은 사랑으로 가득찬 삶이 살았는지도 모른다.


프리다 칼로가 죽기 8일 전 남긴 마지막 작품은, 콜드플레이의 명곡으로도 잘 알려진 <Viva La Vida>이다. 잘 자른 수박의 빨간 단면에 적힌 Viva La Vida (인생이여 만세)는, 죽음을 앞두고도 끝내 무너지지 않았던 그의 근사한 삶을 요약해 주는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생은 참 멋졌다고.



[뮤지컬 프리다]

▷ 개요 : 멕시코의 화가이자 혁명가인 프리다 칼로에 대한 국내 창작 뮤지컬로, 2020년 대구국제뮤지컬페스티벌에서 처음 선보인 후 2022년 공식적으로 초연되었다.

▷ 제작사 : EMK뮤지컬컴퍼니 / 작·작사·연출 : 추정화 / 작곡 : 허수현

▷ 매우 주관적인 추천 넘버 : '라비다', '칭가뚜마드레 라비다', '코르셋'

▷ 2025년 삼연 캐스트 (NOL 유니플렉스 1관, 2025년 6월 17일~9월 7일)

프리다 : 김소향, 김지우, 김히어라, 정유지

레플레하 : 전수미, 장은아, 아이키

데스티노 : 이아름솔, 이지연, 박선영

메모리아 : 박시인, 허윤슬, 유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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