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춤추는 소리, 노래하는 모양

뮤지컬 <브로드웨이 42번가>

by 바다의별

내게 뮤지컬은 언제나 '듣는' 일이다. 물론 화려한 무대나 조명, 또는 소소한 소품들이 언제나 시각적 즐거움도 함께 채워주지만, 그래도 내가 뮤지컬을 볼 때 늘 1순위로 꼽는 가장 중요한 부분은 결국 음악을 듣는 일이다. 악기들의 선율에 얹어지는 배우들의 엄청난 성량, 그 끝내주는 현장감을 느끼려고 가는 것이다.


그런데 처음으로 '보고' 싶은 뮤지컬이 생겼다. 들을 거리가 생각보다 많지 않다고 해도, 볼거리만으로도 충분할 것 같은 작품. 나를 사로잡은 건 대단한 시놉시스도 넘버도 아니고, 탭댄스 군무 영상이었다.


뮤지컬 <브로드웨이 42번가>는 브로드웨이 대표 뮤지컬 중 하나로, 1933년 개봉된 동명의 영화를 원작으로 제작되었다. 뮤지컬 버전은 1980년에 브로드웨이에서 초연되었으니 아주 오래된 역사를 자랑하고 있는 작품이다.


중심 줄거리는 브로드웨이의 전설적인 연출가 '줄리안 마쉬'가 ‘프리티 레이디’라는 새로운 작품을 준비하는 여정이다. 여주인공에 낙점된 디바 '도로시 브록'과 남주인공 '빌리 로러'를 중심으로, 수많은 코러스 배우들(앙상블 배우들)과 함께 열심히 연습하는 장면들에서 시작된다. 공연은 성공적으로 막을 올리는데, 어느 날 도로시가 갑자기 부상을 당하면서 쇼 자체를 중단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부딪힌다. 그때 도로시를 대신할 수 있는 건 오로지 신참 코러스 걸 '페기 소여'라는 걸 깨달은 줄리안과 제작진 그리고 배우들은, 페기를 중심으로 다시 공연을 서둘러 준비한다. 다음 공연까지 남은 시간은 단 36시간뿐.


공연 속에 공연이 있는 쇼뮤지컬이다. 공연을 제작하고 준비하는 내용인 만큼 이 작품의 줄거리 자체는 그리 대단하지 않을 수 있지만, 그들이 완성시켜 보여주는 쇼의 무대는 매번 굉장히 화려했다. 193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만큼, 뮤지컬 <시카고> (1920년대를 배경으로 한다)의 무대들이 언뜻언뜻 떠오르기도 했다. 절도 있는 화려함.


공연의 시작과 동시에, 내가 보고 싶었던 탭댄스가 시작되었다. 객석의 조명이 꺼지고 무대의 막이 오를 때, 서서히 올라가는 막 아래로 수많은 배우들의 발이 보였다. 탁탁탁, 탭댄스 소리와 함께 저마다 다른 발들이 똑같은 박자에 맞추어 움직였다. 배우들의 얼굴을 보기도 전에 나는 이미 사랑에 빠졌던 것 같다.


들으러 간 게 아니라 보러 간 거라고 생각했지만, 춤추는 소리도 음악이라는 걸 처음 느꼈다. 배우들의 발목에 마이크가 달려 있는 덕분에 소리는 더욱 시원하고 청량하게 귀를 울렸다. 오차 없이 정확하게 맞아떨어지는 소리의 쾌감. 30명 넘는 배우들이 이렇게 기계적으로 착착 맞추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노력과 연습이 필요했을까.


줄리안)
넌 내가 무대 위에 세워놓은
다른 40개의 먼지 중 하나에 불과해.

페기)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그 먼지들이 한데 모여
생동감 넘치고 아름다운 무대로
관객들에게 감동을 주잖아요?



페기가 도로시의 역할을 하기 전에, 줄리안은 페기에게 너는 그저 코러스 중 하나라며, 먼지 하나에 불과하고 차갑게 말한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페기는 동의하면서도, 그 먼지들이 모여서 아름다운 무대를 만들어가는 거라고 대답한다.


뮤지컬은 배우 한 명 한 명의 노래와 연기와 춤도 중요하지만, 각 배우들 간의 합과 오케스트라, 그리고 스텝들까지 모두의 조화와 시너지가 중요한 장르다. 혼자서는 결코 무대 전체가 빛이 날 수 없다. 자기 역할에 충실하면서도 상대를 존중하며 같이 맞추어나가야만 아름다운 균형을 이룰 수 있다.


<브로드웨이 42번가>는 무대를 만들어가는 이들의 노력을 조명하는 만큼, 한 명 한 명에 대한 스포트라이트보다 그 전체의 힘을 집중해서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배우 한 명이 내는 빛은 그리 크지 않을 수 있지만, 그 빛들이 서로 더해지고 모이면 무대는 대낮처럼 환해질 수 있다는 것을.


오래된 작품이라 일부 설정이나 장면들이 혹여 낡게 느껴지면 어쩌나 걱정했지만, '빌런'이 없어 오히려 트렌디하게 느껴졌다. 서로가 시기질투하기보다 열심히 응원해 주는 분위기. 유명 디바인 도로시가 무대에 설 수 없게 되었을 때 모두가 한 마음으로 아무 경력도 없는 페기를 추천할 수 있는 마음이 멋지게 다가왔다. 페기의 동료들은 페기가 ‘우리 코러스들’을 대표할 테니 잘해주기를 바란다며 진심 어린 응원을 보내고, 도로시 역시 페기에게 보란 듯이 잘 해내라고 격려해 주는 모습이.


우리는 각자 먼지 한 톨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당장은 눈에 띄지 않을지 모르지만, 함께 모여있으면 좀 더 대단한 걸 이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있기에 다른 누군가가 빛나고, 다른 누군가가 있기에 나도 빛날 수 있을 것이다.


그동안 내가 노래를 들으러 갔던 수많은 작품들 역시, 배우들이 혼신을 다한 연기가 있고 몸을 사리지 않은 춤이 있었기에 그 노래들이 더욱 빛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좋아하는 배우들도 주변 배우들과 스텝들, 연주자들의 노력과 역할이 있었기 때문에 빛날 수 있었을 것이다.


앞으로 만날 여러 공연들 안에서 먼지 티끌까지 발견해내고 싶어졌다. 작은 것들이 만나 큰 걸 이루는 멋진 일들이 매일 무대 위에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늘 기억할 것이다.



[뮤지컬 브로드웨이 42번가]

▷ 개요 : 브로드웨이 대표적인 고전 뮤지컬이자 쇼 뮤지컬로, 1933년 개봉한 동명의 영화를 원작으로 하며, 1980년 브로드웨이에서 초연되어 지금까지 전 세계에서 수도 없이 많이 올라왔다. 한국에서는 1996년 초연되었고, 국내 첫 정식 라이선스 뮤지컬로 공연된 작품이기도 하다. 참고로 원제는 '42nd Sreet (42번가)'이다. 브로드웨이가 곧 뉴욕 42번가이기 때문이다.

▷ 작곡 : 해리 워렌 / 작사 : 앨 더빈 / 극본 : 마이클 스튜어트, 마크 브램블

▷ 연출 : 오루피나 / 음악감독 : 최재광 / 안무감독 : 권오환

▷ 국내 제작사 : CJ ENM

▷ 매우 주관적인 추천 넘버 : 'Overture & Opening', 'We're in the Money', '42nd Street'

▷ 2025년 19연 캐스트 (샤롯데시어터, 2025년 7월 10일~9월 14일)

줄리안 마쉬 역 : 박칼린, 박건형, 양준모

도로시 브록 역 : 정영주, 최현주, 윤공주

페기 소여 역 : 유낙원, 최유정

빌리 로러 역 : 장지후, 기세중

메기 존스 역 : 전수경, 백주희

버트 베리 역 : 김호, 임기홍

애브너 딜런 역 : 김민수, 권홍석

팻 대닝 역 : 윤석원

앤디 역 : 김성수

애니 역 : 전성혜

필리스 역 : 김재희

로레인 역 : 김채아

맥 역 : 임정진

앙상블 : 박래찬, 이소윤, 주현우, 이서호, 김나영, 김봄나리, 오성식, 최재석, 손호재, 이현주, 강산, 박준병, 이상원, 박지원, 이현지, 엄도하, 남유진, 김다예, 김지호, 유민혜, 강한나래, 최경희, 이동주, 박비주, 나건주, 신은규, 이여준, 임유연, 최태언, 김찬후 (스윙), 노아름 (스윙)

keyword
이전 17화인생은 그럼에도 불구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