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어 더 뮤지컬
(스포 있음)
지금까지 본 뮤지컬 작품 중 가장 충격적인 것을 골라 보자면 단연 <베어 더 뮤지컬> 일 것이다. 보수적인 가톨릭계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한 이 작품은 동성애, 마약, 청소년 임신 등 파격적인 소재를 다룬다.
제목의 'bare'는 '헐벗은, 드러난' 등을 뜻하며, 동음이의어인 'bear' (견디다)의 의미도 함께 내포하고 있다. 어려움을 견뎌야 하는, 유쾌하지 않은 방황의 시간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다.
뮤지컬은 여러 명의 주인공들 중 피터의 시선을 주로 따라간다. 피터는 룸메이트인 제이슨과 비밀리에 교제 중이다. 솔직하게 살기 위해 커밍아웃을 원하는 피터와, 타인의 시선이 두려워 이를 거부하는 제이슨의 마음이 긴장감을 만들어낸다. 어느 날 학교에서는 '로미오와 줄리엣' 연극 오디션이 열리고 로미오 역은 제이슨이, 줄리엣 역은 아이비가 맡게 된다. 아이비도 제이슨도 학교에서 인기가 많은데, 아이비를 한결같이 좋아하는 맷과 그런 맷을 좋아하는 제이슨의 쌍둥이 남매 나디아 사이에도 얽히고 얽힌 복잡한 감정들이 있다. 맷은 우연히 제이슨과 피터가 키스하는 모습을 보고,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비는 제이슨을 유혹한다.
미국 드라마들에서 볼 법한 마약과 문란함으로 가득한 파티들이 열리고, 적나라한 대사들과 소품들이 등장한다. 청소년기 마주할 수 있는 가장 심각한 문제들과 가장 절망적인 시행착오들을 엮어낸 듯했다. 보수적이고 억압적인 학교 안에서도, 여전히 상상 초월의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 역설적이었다.
공연은 빠른 박자와 함께 화려하게 진행되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쓸쓸함을 자아냈다. 그리고 약간의 공허함도. 서로에게 끌리는 피터와 제이슨도 결국 다른 생각으로 서로 갈등하고, 학교에서 너도 나도 좋아하는 아이비나 쌍둥이와 같이 학교에 다니는 나디아 역시 외로운 존재인 것을 보면, 결국 타인은 영원한 타인이라는 생각이 든다. 기댈 곳은 없고, 당장 나를 도와줄 수 있는 존재는 나 외에는 아무도 없다고.
사실 <베어 더 뮤지컬>은 주제부터 이미 내 취향이 아니었다. 방황하는 청소년들을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는 소설로 읽을 때도, 영화로 볼 때도, 나는 크게 공감한 적이 없었다. 사소한 일탈은 공감할 수 있지만, 이토록 '평범'에서 과하게 벗어난 사건과 생각들은 언제나 공감하기 어렵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위대한 개츠비>의 첫 문장을 떠올리려 노력한다. '누군가를 비판하고 싶을 때면, 남들이 모두 너처럼 좋은 조건을 누리고 산 건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하라'는 그 명언을 말이다.
우리는 저마다 각자의 이야기 속에서 홀로 방황하며 자신만의 전쟁을 치를 뿐이다. 타인의 전쟁을 내가 온전히 이해하기는 어렵다. 반대로 그들도 나의 전쟁을 이해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서로가 전쟁을 치르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만큼은 공감할 수 있지 않을까.
작품 후반부에서 피터와 제이슨이 각각 수녀님과 신부님과 대화하는 장면들이 인상적이었다. 수녀님도 신부님도, 이미 피터와 제이슨의 성정체성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피터 넌 틀린 게 아니야
그냥 다른 것뿐이야
하느님은 쓰레기를 만들지 않아
...
다른 이를 위해
자신으로부터 숨는다면
그건 엄청난 실수야
- 'God Don't Make No Trash'
수녀님은 고뇌하는 피터에게, 너는 잘못된 존재가 아니라고 말해준다. 틀린 게 아니라 다른 것뿐이라고, 너 역시 소중한 존재라고. 그러니까 네가 느끼는 걸 부정할 필요 없이, 너 스스로에게 진실된 삶을 살아도 괜찮다고 일러준다.
침묵을 지켜 비밀로 해주마
너와 나의 비밀이야
넌 아직 변할 수 있단다 믿어라
시간이 있단다
- 'Cross'
반대로 신부님은 고해하러 온 제이슨에게 동성애는 용서받아야 할 잘못이고, 바뀔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물론 신부님에게 악의는 없었고, 그저 자신의 신념을 솔직하게 말했을 뿐이다. 그러나 그가 건넨 말들은 결국 제이슨을 비극적인 결말로 몰고 갔다. 만약 제이슨도 수녀님께 갔더라면, 결말이 조금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베어 더 뮤지컬>은 결코 삶의 바람직한 태도를 제시하거나, 어려움을 극복할 방법을 일러주는 작품은 아니다. 그저 적나라하게 있는 그대로를 보여줄 뿐이다. 하지만 타인의 이야기, 타인의 삶을 대할 때의 내 마음과 시선에는 굉장히 큰 영향을 주었다.
결국 내 문제를 해결하고 나를 나만의 전쟁에서 꺼내줄 이는 나 자신뿐일지 모른다. 하지만 자신의 어려움을 꺼내어 보일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에게, 극 속 신부님보다는 수녀님처럼 대답할 수 있는 사람들이 더 많았으면 좋겠다. 나 역시 그렇고.
세상에 한 가지 답은 없다. 내가 믿는 것, 내가 생각하는 것들이 나에게는 정답일 수 있어도 나와 다른 삶을 살아온 타인에게는 오답일지 모른다. 그러니 서로에게 답을 주려고 애쓰기보다는, 각자의 답을 찾아갈 수 있는 용기를 주는 세상이기를 바란다.
거기에 있나요 보이나요 내 눈물
날 구원한다면서 왜 날 지켜만 봐요
주 뜻대로 살았죠 날 좀 쳐다봐줘요
...
거기에 있나요 시간 좀 내주세요
거기 계신다면서요 보고 있다면서요
나도 할 만큼 했어 당신도 알잖아
길을 찾을 수가 없어 이제 어떡하나요
- 'Are You There'
[베어 더 뮤지컬]
▷ 개요 : 원제는 Bare: A Pop Opera이다. 이후 제작된 Bare: The Musical 버전도 있으나, 우리나라에서 공연되는 작품은 전자다. 2000년 로스앤젤레스에서 처음 공연된 뒤 2004년 오프브로드웨이에서 공연되었고, 한국에서는 2015년 초연되었다.
▷ 작곡 : Damon Intrabartolo / 작사 : Jon Hartmere / 극본 : Damon Intrabartolo, Jon Hartmere
▷ 각색 : 김윤영 / 음악감동 : 원미솔
▷ 국내 제작사 : 쇼플레이
▷ 매우 주관적인 추천 넘버 : 'You & I', 'Best Kept Secret', '911! Emergency!'
▷ 2025년 칠연 캐스트 (두산아트센터 연강홀, 2025년 6월 3일~9월 14일)
피터 : 진호, 강병훈, 홍기범
제이슨 : 윤승우, 김재한, 김수호
아이비 : 성민재, 남가현
맷 : 장현동, 황건우
나디아 : 정예주, 김이진
루카스 : 송창근
카이라 : 윤나영
타냐 : 정서인
다이앤 : 박연지
로리 : 김지연
잭 : 이정민
앨런 : 송한빈
신부 : 김주호, 유세선
샨텔수녀/클레어/마리아 : 문진아, 배수정
스윙 : 김은찬, 박도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