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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 위 배우가 악기를 드는 순간

액터뮤지션

by 바다의별

뮤지컬 무대 위에 오르는 배우들은 연기와 노래와 춤을 잘해야 한다. 셋 중 하나도 못하는 나는 그들을 볼 때면 언제나 감탄이 나온다. 한 가지만 잘하기도 쉽지 않은데, 고르게 모두 다 잘해야 하다니. 타고나는 부분도 있겠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실제 프로 무대에 서기까지는 정말 어마어마한 노력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간혹 여기에 한 가지가 더 필요해질 때가 있다. 바로 악기 연주. 그게 더해지면 뮤지컬 배우를 넘어 '액터뮤지션(Actor-Musician)'이라는 이름이 붙는다. 노래와 춤을 하면서 악기까지 안정적으로 다룰 수 있는 배우들은 물론 많지 않다. 그럼에도 간혹 그런 고난도의 능력을 필요로 하는 건, 배우들이 직접 악기를 연주할 때 무대에 더해지는 특별한 매력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액터뮤지션을 처음 접한 건 뮤지컬 <그레이트 코멧>에서였다. <그레이트 코멧>은 배우들이 공연 내내 공연장 안을 돌아다니며 무대와 객석의 경계를 허문 몰입형 뮤지컬 (이머시브 뮤지컬)이다. 톨스토이의 소설 <전쟁과 평화> 중 일부분을 뮤지컬화한 이 작품은, 전쟁을 배경으로 각 인물들의 혼란스러운 내면을 표현한다.

뮤지컬 그레이트 코멧 초연 사진 (뉴스핌/쇼노트)

앙상블뿐 아니라 주연 배우들이 직접 악기까지 연주함으로써, 무대와 객석의 경계를 넘어 배우와 연주자, 배우와 스텝의 경계까지도 허무는 듯했다. 어떤 배우들은 직접 뛰어다니며 바이올린을 켜고 기타를 쳤고, 어떤 배우는 무대감독과 번갈아가며 무대 가운데에 있는 피아노를 연주하기도 했다. 극의 정형화된 틀을 깨버림으로써 허물어진 경계는, 혼돈을 표현한 작품의 특성을 더욱 강렬하게 극대화하는 요소가 되었다.


뮤지컬 <조로: 액터뮤지션>은 제목에서부터 배우들이 직접 악기를 연주할 것을 분명히 드러낸다. 주연 배우들을 제외한 모든 앙상블 배우들이 곧 액터뮤지션으로, 바이올린, 트럼펫, 기타, 아코디언, 탬버린 등 정말 다양한 악기들로 무대를 가득 채운다.

뮤지컬 조로: 액터뮤지션 공연 사진 (국민일보/모먼트메이커)

미 서부를 지배하는 스페인을 배경으로 하고 있어 라틴음악이 주를 이루는데, 플라멩고와 탭댄스가 함께 어우러져 흥을 더한다. 배우들이 신나게 춤을 출 때 주변에서 악기를 직접 연주해 주니, 정말로 그 캐릭터들이 한데 모여 파티를 즐기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악기 연주는 연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니 보다 표현에 진실성이 더해지는 듯했다.


노래와 연기를 하면서 악기까지 자연스럽게 연주할 수 있는 배우는 흔하지 않기에, 이러한 액터뮤지션은 캐스팅을 할 때도 어려움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뮤지컬 <파가니니>는 이른바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라 불리는 니콜로 파가니니의 고난도 곡들을 소화해야 하다 보니 좀 다른 선택을 했다. 바이올린을 켤 줄 아는 뮤지컬 배우를 캐스팅하기보다, 아예 연기와 노래를 어느 정도 할 수 있는 바이올리니스트를 캐스팅한 것이다.

뮤지컬 파가니니 공연 사진 (브릿지경제/HJ컬쳐)

파가니니 역을 맡은 배우 겸 연주자는 무대 위에서 실시간으로 파가니니의 음악을 연주해야 한다. 공연 말미에는 작품의 클라이맥스라고 할 수 있는 7분 간의 연주도 있다. 바이올리니스트들은 노래나 대사처리에 있어서는 기존 뮤지컬 배우들에 비해 조금 어색할 수 있지만, 압도적인 연주로 모든 개연성을 되찾는다. 그들의 연주로 관객들은 황홀한 감동을 맛보게 되니 제작사에서 다소 위험을 감수할 만도 했다.


최근에는 뮤지컬 <스트라빈스키>를 보고 왔다. 지금껏 내가 봤던 작품들과 또 다른 면에서 특별했다. 작은 소극장 무대 양쪽 끝에는 피아노가 한 대씩 있었고, 반주자 두 명이 함께 또는 번갈아가며 연주했다. 무대 위 두 배우가 노래할 때뿐 아니라, 대사나 내용상 필요로 할 때마다 피아노가 연주되었다. 두 배우와 두 연주자 간의 상호작용도 작품 내 중요한 포인트였다.

뮤지컬 스트라빈스키 티저 영상 캡처 (쇼플레이 유튜브)

이 작품의 하이라이트는 공연 마지막에, 무대 위 두 대의 피아노와 무대 밖 두 대의 피아노, 총 네 대의 피아노가 함께 연주되는 순간이다. 뮤지컬 배우 두 명과 피아니스트 두 명이, 말없이 함께 연주하는 순간. 물론 배우들의 연주는 피아니스트들의 연주에 비해 부족할 수 있지만, 작곡가 '스트라빈스키' 역을 맡은 배우와 그 친구 역을 맡은 배우 두 사람이 직접 연주까지 보여줌으로써 관객들로 하여금 극에 더 몰입하게 만들어 짜릿한 피날레를 선사한다.


dolo-iglesias-z9z6u1rn7sY-unsplash.jpg Photo by Dolo Iglesias on Unsplash

춤이 중요하게 작용하는 뮤지컬에서는 고난도의 춤 실력을 요하고, 다이내믹한 무대 구성이 필요한 뮤지컬에서는 아크로바틱 댄서를 필요로 하기도 한다. 액터뮤지션을 필요로 하는 것도 마찬가지의 일이다. 각 캐릭터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가장 잘 전달하면서, 작품의 매력을 극대화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인 것이다.


배우가 무대 위에서 직접 악기를 드는 순간, 무대는 조금 더 생기 있게 살아난다.



[글 속에서 언급된 작품들]


뮤지컬 그레이트 코멧


뮤지컬 조로 : 액터뮤지션

▷ 원작 : 이사벨 아옌데 소설 <조로> / 음악 : Gipsy Kings, John Cameron / 대본 : Stephen Clark, Helen Edmundson / 국내 제작사 : 모먼트메이커 / 국내 프로듀서 : 송민선선

▷ 2024년 캐스트 (인터파크 유니플렉스 1관, 2024년 9월 11일~11월 17일)

조로/디에고: 최민우, MJ, 민규

이네즈: 홍륜희, 배수정

루이자: 전나영, 서채이

라몬: 김승대, 최세용

가르시아: 김효성, 조성린

스토리텔러/돈 알레한드로: 심건우

액터뮤지션/앙상블: 고예일, 정우림, 허진홍, 장지민, 이상정, 강대운, 한희도, 권혁준, 김준, 전민혁, 김태린, 선주연, 최성혜, 조수빈, 김명지, 손석현, 최지은


뮤지컬 파가니니

▷ 제작사 : HJ컬쳐 / 작·작사 : 김은혜, 김선미 / 작곡 : 김은영, 임세영 / 연출 : 김은영

▷ 2024년 재연 캐스트 (국립중앙박물관 극장 용, 2024년 4월 6일~6월 2일)

파가니니 : KoN, 홍석기, 홍주찬

루치오 아모스 : 김경수, 윤형렬, 백인태

콜랭 보네르 : 이준혁, 김준영, 기세중

아킬레 : 박좌헌, 이준우, 박준형

샬롯 드 베르니에 : 성민재, 유소리

앙상블: 이성진, 이소윤, 배혜진, 장현동, 이여진, 곽준민, 이지우, 김단아, 이지혁, 이경민, 최이안, 김지호


뮤지컬 스트라빈스키

▷ 제작사 : 쇼플레이 / 작·작사 : 김정민 / 작곡 : 성찬경

▷ 2025년 초연 캐스트 (대학로TOM 2관, 2025년 7월 28일~10월 12일)

스트라빈스키: 성태준, 문경초, 임준혁

슘: 황민수, 정재환, 서영택

피아니스트 : 성찬경, 강홍준, 양찬영, 김동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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