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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더 나은 정의가 있을 수 있다

뮤지컬 <설공찬>

by 바다의별

뮤지컬 <설공찬>에 처음 흥미가 생겼던 건 다름 아닌 염라 역 캐스팅 때문이었다. 여성 배우 두 명과 아동 배우 한 명의 트리플 캐스트라니. '그래, 염라가 꼭 성인 남자여야 할 필요는 없지!' 또 하나의 고정관념이 깨진 듯해 짜릿함을 느꼈다.


이 작품은 조선시대에 지어진 <설공찬전>을 모티프로 한다. 안타깝게도 원작은 당시 금서로 지정되어 모두 불태워졌다. 그래서 오늘날의 우리가 알 수 있는 건 조금 남은 앞부분의 내용과 대략적인 흐름뿐, 정확한 결말을 아는 사람은 더 이상 없다고 한다.


설공찬전은 조선시대의 다른 문학작품들에 비하면 낯설게 느껴지지만, 그 안의 내용은 그리 낯설지 않다. 그 당시 부조리했던 세상에 대한 비판, 사람들이 꿈꾸는 평등한 세상에 대한 염원, 그리고 죄를 심판받는 사후세계가 적절히 어우러져 있다.


뮤지컬 <설공찬>은 설공찬전을 집필한 대제학 '채수'가 실제로 '설공찬'이라는 귀신을 만나 저승을 구경하고, 그 이야기를 설공찬전으로 풀어쓰게 되는 내용을 주요 줄거리로 한다. 당시 혼란스러웠던 채수의 마음과 정치적 배경, 그리고 억울하게 죽음을 맞게 된 설공찬과 설공찬의 누나 설초희의 사연에 더해 저승에서 만난 여러 망자들과 염라의 이야기까지 소개된다.


설공찬전이 금서로 지정되었던 이유는 신분이나 성별에 대한 차별이 불필요하고 무의미하다는 파격적인 이야기를 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한자로만 쓰이지 않고 한글로도 옮겨졌던 최초의 책이었다고 하는데, 그러다 보니 한자를 모르는 이들 사이에서도 빠르게 퍼져나갔다. 실제 원작 속에서도 염라가 여성으로 그려졌는지는 모르겠으나, 저승에서는 여성들도 관직을 맡을 수 있다는 설정은 있었다고 한다. 그러니 당시 기득권층이 보기에는 자신들의 질서가 부정당하는, 망측한 발상으로 여겨졌으리라.


그런데 설공찬전이 금서로 지정된 이유에는 사실 한 가지가 더 있었다. 바로 중종반정을 부정하는 채수의 시선이 담겨있었기 때문. 세종 때 태어나 무려 여덟 임금을 목격한 채수는, 연산군을 몰아낸 중종반정 때 회의감을 느껴 40여 년의 관직생활을 마무리하고 낙향했다. 설공찬전은 그 후에 집필되었다.


사실 이 부분이 나로서는 이해가 잘 가지 않았다. 신분제도에 의문을 품었던 사람이라면 왕권에도 비판적이었을 것 같은데, 그는 왜 연산군을 굳이 옹호했던 것일까. 게다가 연산군은 정치적인 이유들을 떠나서도, 꾸준히 폭군으로 평가받는 조선시대 최악의 왕이 아닌가.


하지만 공연을 보며 그의 선택을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다. 채수는 연산군 자체를 옹호한 것이 아니라, 왕을 신하들의 주도로 바꾼다는 것 자체를 그른 일이라고 여겼는지도 모른다. 그게 진정 백성을 위한 선택이었는지, 그들 각자의 권력을 위해서였는지, 그에게는 혼란스럽게 느껴졌던 것 같다. 당시 채수는 현실의 질서를 최대한 지키면서 백성을 진심으로 위하는 것이, 진정한 정의라고 믿었는지도 모르겠다.



어떤 사람은 그런 채수의 생각이 정의롭다고 느낄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당시에도, 그리고 과거를 되돌아보는 지금도, 그에 대한 평가는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갈릴 수 있다.


정의는 시대에 따라 그리고 상황에 따라 달라지고, 각자의 생각과 신념에 따라 달라진다. 그럴 수밖에 없고 그래야만 한다. 지금 우리가 과거의 신분제도 등을 보면 '뭐 그런 게 다 있어' 하겠지만, 당시 사람들은 그게 옳은 일이라 믿었다. 지금 우리가 정의롭다 여기는 것들 또한 수백 년 뒤의 사람들이 바라보면 얼토당토않게 느낄지도 모른다.


웹툰 <신과 함께>가 처음 연재되었을 때는 '저승에서 심판당하지 않으려면 착하게 살아야겠다'와 같은 댓글이 많았지만, 이후 영화화되었을 때쯤에는 '힘들게 살았는데 저승에서도 또 판결받고 벌 받아야 해?'와 같은 댓글들이 더 많아졌다고 한다. 그만큼 세상이 바뀌면서, 당연하게 여겨졌던 것들에 의문을 품게 된 것이다. 나 또한 요즘 생각해 보면, 죄목이 같다고 모두가 똑같은 형벌을 받게 되는 건 어쩐지 좀 억울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면 먼 미래에는 우리가 상상하는 사후세계의 모습도 조금 달라지지 않을까.


저승에서의 심판도 수많은 정의 중 하나일 뿐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알 수 없는 사후세계를 두려워하면서 살아야 할까, 아니면 누군가가 믿는 기준을 참고해 따라야 할까.


정의에 대한 고민은 언제나 ‘선’으로 귀결된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채수가 쓴 <설공찬전>도, 뮤지컬 <설공찬>도, 올바른 삶과 사후세계를 다룬 수많은 이야기들도, 모두 단 하나의 진실된 정의에 동의하지는 못하겠지만, 그럼에도 옳고 그름에 대한 고민은 늘 우리를 조금씩 더 나은 삶으로 이끌어준다는 공통점이 있다.


정답은 없기에 그 누구도 정답을 발견하지는 못하겠지만, 결국 각자의 진심과 내면이 향하는 방향이 가장 중요할 것이다. 자신만의 정의를 소신 있게 지켜나갈 신념과 타인의 정의를 이해하려 노력하는 용기를 늘 함께 지녀야 하지 않을까.


지금의 정의를 지키면서도, 언제나 더 나은 정의가 존재할 수 있다는 열린 마음. 내가 생각하는 정의란 그런 것이다.



[뮤지컬 설공찬]

▷ 개요 : 2023년 리딩 쇼케이스 이후 2024년 KT&G 상상마당 뮤지컬 지원 프로그램에 선정되었고, 2025년 7월 제19회 대구국제뮤지컬 페스티벌에 공식 초청작으로 공연된 뒤 9월부터 정식 초연되고 있다.

▷ 제작사 : 이비컴퍼니 / 극작·연출 : 추정화 / 작곡·음악감독 : 허수현

▷ 매우 주관적인 추천 넘버 : '천붕', '괴력난신', '심판'

▷ 2025년 초연 캐스트 (KT&G 상상마당 대치아트홀, 2025년 9월 9일~10월 26일)

설공찬 : 송유택, 유권, 원찬, 임세준

채수 : 박영수, 백인태

석산 : 윤석원, 유슬기

설초희 : 박시인, 박선영

설충란 : 강인대

염라 : 김아영, 여은, 윤도영

설공침 & 연산 : 지원선, 원찬

앙상블 : 강민석, 황인욱, 윤건웅, 최지홍, 홍기범, 이고은, 강한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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