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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할 수 없어도 괜찮아

뮤지컬 <레드북>

by 바다의별

처녀가 아니라는 이유로 파혼당하고, 같은 이유로 가족들로부터도 쫓겨나 혼자가 된 여자. 뮤지컬 <레드북>의 주인공 안나는, "나는 슬플 때마다 야한 상상을 해"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인물이다.


안나가 사는 곳은 19세기 영국 런던이다. 당시 여성들은 재산도 소유할 수 없었을 정도로 제약이 많았고, 기본적인 인권조차 보장받기 어려웠다. 남편은 아내의 외도만으로도 이혼을 할 수 있지만 아내는 이혼하기 위해 훨씬 더 많은 증거를 제시해야 겨우 신청이라도 가능했다. 여자들은 자신의 신체를 언급하는 것은 물론 글을 쓰는 것 또한 금기시되었다.


그런 시대이니, 안나는 당연히 그 어디서도 이해받지 못하고 배척을 당한다. 부당한 현실에 목소리를 내면 정숙하지 못한 여자라고 손가락질당하고, 자신의 사랑 이야기를 솔직하게 털어놓으면 부끄러움을 모르는 여자라고 비난당한다.


그렇지만 안나는 여전히 긍정적으로 세상을 대하며, 주체적이고 자유롭게 살아가려 노력한다. 자신의 생각과 믿음을 지켜내면서, 결코 자신을 잃지 않는다. 아무도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고 아무도 자신을 받아주지 않더라도, 세상을 떠난 첫사랑과의 추억을 곱씹으며 힘을 낸다.


그리고 그런 안나의 태도는, 안나가 진정한 친구들을 찾을 수 있도록 이끌어준다. 처음에 차가워 보였던 노부인 바이올렛과는 솔직한 이야기를 터놓으면서 상대의 마음을 열었고, 여장 남장 로렐라이와의 첫 만남에서도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거나 놀라지 않고 다가감으로써 '로렐라이 언덕'이라는 새로운 세상을 발견하게 된다.


로렐라이가 이끄는 '로렐라이 언덕'의 사람들은, 각자의 억압된 현실을 벗어나고자 함께 글을 쓰는 여성들이다. 그들은 모두 안나를 공감하고 존중한다. 그곳에 모인 이들은 서로의 사연을 듣고 아무런 평가도 하지 않으니까. 편견 없는 이들만이 그곳을 찾아가 자신만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는 연습을 함께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평화를 찾은 것도 잠시, 안나가 자신의 사랑 이야기에 대해 쓴 소설 '레드북'이 인기를 얻으면서 안나는 다시 공격의 대상이 된다. 좋은 평론을 써주겠다며 다가와 성추행하려 들고, 감히 여자가 소설을, 그것도 야한 소설을 썼다고 다짜고짜 안나를 기소하기에 이른다. 그저 자신의 이야기를 썼을 뿐인데, 안나의 책이 사회적 악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작품의 배경은 19세기이지만, 어쩌면 21세기도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는 여전히 서로의 옷차림, 취향, 선택들에 대해 자신이 이해할 수 없으면 근거 없는 비난을 늘어놓기도 한다. 하지만 자신을 표현하는 대부분의 일들은,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 안나가 야한 상상을 하든, 바이올렛 부인이 정원사에 반하든, 로렐라이가 여성의 옷을 입든, 타인이 딱히 상관할 일이 아니지 않은가.


우리는 서로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그렇다면, 때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그냥 그대로 놔두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억지로 이해해 보려 애쓰다 불필요한 상처를 주고받기보다는, '그래, 그렇구나' 정도에서 고개를 끄덕이는 게 필요할 때도 있는 것 같다.


이 작품의 남자주인공 브라운은 안나를 만나기 전까지 여성에게 매우 불리한 사회에 대해 딱히 의문을 품은 적 없던 인물인데, 안나를 만나고부터 자신이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들에 조금씩 질문을 던진다. 그렇다고 그가 안나를 완전히 이해하게 된 건 아니다. 그는 아마 영영 헤매게 될 테고, 여전히 때때로 안나가 이상한 여자라고 생각할 테지만, 그럼에도 안나를 사랑한다. 자신과 다른 누군가를 받아들이고 공감하기 위해, 마음만 있으면 된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


서로가 서로를 사람으로 존중하기 위해, 반드시 그 사람의 모든 걸 알고 이해할 필요는 없다. 그저 우리가 다를 수 있다는 생각, 달라도 괜찮다는 생각이면 충분하다. 조금 더 느슨하고 너그럽게 서로를 대할 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 자신으로서 살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을 숨길 필요 없이, 한껏 드러내면서.


누군가에게 이해받지 못해도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나는 나로서 충분해 괜찮아

'나는 나를 말하는 사람'


안나의 '레드북'이 잘 되면서 제2의 안나가 되고 싶다고 로렐라이 언덕을 찾아온 사람들에게, 로렐라이와 다른 친구들은 돌아가라고 말한다. 제2의 누군가가 아니라, 제1의 자기 자신이 되라고.


똑같은 책이 여러 권 있을 필요는 없다. 안나처럼, 우리도 이미 각자 자신만의 레드북을 써 내려가고 있다. 눈치 보며 다른 삶을 흉내내기보다, 진솔한 자신만의 이야기들을 꺼내보기를. 다양한 이야기들이 존재할수록, 더 다양한 사람들이 자신만의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된다. 그러면 세상은 더 아름다워질 것이다.



[뮤지컬 레드북]

▷ 개요 : <여신님이 보고 계셔>, <라이카> 등의 창작자 한정석과 이선영이 함께 만든 작품. 2017년 트라이아웃, 2018년 초연 이후 이번에 네 번째 공연을 올렸다.

▷ 제작사 : 아떼오드 / 작·작사 : 한정석 / 작곡 : 이선영 / 음악감독 : 양주인 / 연출 : 박소영

▷ 매우 주관적인 추천 넘버 : '난 뭐지', '사랑은 마치', '당신도 그래요', '뮤즈', '나는 나를 하는 사람'

▷ 2025년 사연 캐스트 (유니버설아트센터, 2025년 9월 23일~12월 7일)

안나 : 옥주현, 아이비, 민경아

브라운 : 송원근, 지현우, 김성식

로렐라이 : 지현준, 조풍래, 홍우진

바이올렛/도로시 : 한세라, 한보라

존슨/앤디 : 원종환, 김대종

헨리/잭 : 김승용, 장재웅

줄리아 : 이지윤, 윤데보라

코렐 : 김연진, 노지연

메리 : 김혜미, 서은지

앙상블: 김대식, 김성현, 김초하, 임수준, 윤다연, 한창훈, 이종찬 (스윙), 서은혜 (스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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