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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의별 Aug 19. 2024

내가 네가 되고, 네가 내가 되는 순간

뮤지컬 <컴프롬어웨이>

2002년 9·11 테러 당시의 실화를 바탕으로 하<컴프롬어웨이>(*1)첫 넘버부터 나를 울려버린 작품이었다.


당시 테러 직후 미국이 영공을 폐쇄하면서, 수많은 여객기들은 미국 위 하늘을 지나지 못하고 바로 옆나라인 캐나다로 방향을 돌려 불시착해야 했다. 캐나다는 동서부 곳곳에서 갈 길 잃은 비행기들을 기꺼이 받아주었고, 캐나다 북서쪽에 위치한 뉴펀들랜드섬의 작은 마을 갠더는 당시의 따뜻한 일화들로 유명해졌다.(*2)


갑자기 계획에도 없던 캐나다의 낯선 마을에서 기약 없는 시간 동안 얽매어있어야 했던 사람들의 심정도 짐작이 안 가지만, 추가적인 폭탄이나 테러리스트가 실려있을지도 모를 비행기들을 기꺼이 받아준 캐나다와, 오갈 데 없는 승객들이 편안히 지낼 수 있도록 너도 나도 가족처럼 대해준 갠더 마을 사람들의 심정은 더더욱 짐작이 가지 않는다.


세상 끝나는 그날
여기 떠밀려 와도
우린 도와달라 하면
그냥 뭐든 도와줘

- 'Welcome to the Rock' 중


그래서인지 첫 넘버 'Welcome to the Rock'에서부터 벅찬 눈물이 흘렀다. 하루가 멀다 하고 비인간적인 사건사고들이 발생하는 세상에, 이렇게나 따뜻한 곳이 있었다니. '뭐든 도와준다'는 건 말이야 쉬울지 몰라도 누구도 실천하기 어려운 일인데, 이를 몸소 보여주었던 사람들과 시절이 있었다는 사실에 울컥했다. 작품이 웅장한 건 아니지만 작품이 전하는 메시지는 보는 사람의 마음을 웅장하게 했다.



지난해 연말 한국에서 드디어 초연된 이 작품은 특히 중견급 배우들이 대거 캐스팅되어 큰 관심을 끌었다. 그러나 유명 배우들이 다수 캐스팅된 것에 비해 작품 자체는 앙상블 없이 12명의 배우가 무대 위에 함께 서는 군상극(*3)인 만큼 각자의 분량은 크지 않았다. 주인공이 없는 작품, 아니, 굳이 따지자면 모두가 주인공인 작품이었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베테랑 배우들을 대거 캐스팅한 것인지도 모른다. 모두가 쉴 새 없이 무대를 채워야 하는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무대 장치와 소품 또한 단출한 편이었는데, 여러 소품을 사용하는 대신 심플하게 스크린과 의자 다양한 배경을 표현했다. 화려한 무대 변화보다는 사람들에 집중하는 방향을 택한 무대였다. 그 속에서도 특히 의자는 여러 가지 역할을 수행했는데, 비행기도 되었다가 관제탑도 되었다가 버스도 되었다가 바위도 되었다. 그건 배우들도 마찬가지였다.


<컴프롬어웨이>에서는 모든 배우가 1인 다역을 맡는다. 예를 들어 마을의 캐나다 재향군인회 갠더 지부 회장 '뷸라'의 역할을 맡 배우는 비행기에서도 승객 역할을 하고, 비행기의 기장 '비벌리'역을 맡은 배우는 마을에서 학교 선생님 '아네트' 역할 또한 맡는 식이다. 비행기 승객과 마을버스 기사와 부시 대통령 역 등을 다양하게 오가는 배우도 있었다.(*4) 그들은 다른 1인 다역 공연들처럼 무대를 벗어났다가 새로운 옷과 분장으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조끼를 벗는 등의 단순한 변화만을 준 채 무대 위를 거의 떠나지 않았다.


거의 모든 장면에 마을 사람들과 비행기 사람들이 함께 등장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다소 혼란스러울 수도 있는 연출이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스물몇 시간의 비행, 그리고 갑작스럽게 마을 인구보다 더 많은 방문자들이 들어선 그곳은 실제로 얼마나 더 혼란스러웠을까. 오히려 그 상황에 더 잘 맞는 연출이었다. 영화나 드라마가 아니라 공연이기 때문에 가능한 연출이라서 더 매력적이기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모두가 양쪽을 넘나들며 역할을 맡기 때문에 '내가 네가 되고, 네가 내가 되는' 풍경이 인상적으로 콕 박혔다. 마치 너와 나는 계속 연결되어 있다는 걸 보여주듯이. 내가 불시착한 사람이든 마을 사람이든 상관없다는 듯이.


물론 처음부터 서로 돈독해지지는 않는다. 테러의 여파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울감과 불안감을 느끼고, 집에 언제 돌아갈지 기약이 없는 사람들은 내내 예민하다. 죄 없는 무슬림 승객은 필요 이상으로 감시당하고 수색당한다. 자신과 조금이라도 다른 사람이 있으면 사람들은 곧장 서로를 의심하고 경계한다. 그런 장면들은 상황의 현실성을 더해주었고, 결국 그들이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이 더 설득력 있고 감동적으로 다가오게 했다.


누구도 양쪽의 입장을 모두 경험해 볼 수는 없다. 이전에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본 경험이 있을지라도, 현재 나의 상황이 그 반대되는 입장이라면 과거의 입장은 금세 잊히고 만다. 그렇기에 우리가 타인에게 베푸는 친절은, 오로지 상대방의 입장을 상상해 본 결과일 뿐이다. 친절과 다정함은 단 한 차례일지라도 자신의 마음보다는 상대의 마음을 먼저 생각해 보고 고민해 본 이들만이 전할 수 있는 것이므로, 새삼 대단한 일이다. 각자에게 더 이익이 될 만한 선택을 하고 계산을 했더라면 결코 있을 수 없었을 이야기.


당시 인연을 맺은 갠더 주민들과 불시착한 외지인들 중에는 지금까지도 인연을 이어오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도움을 받았던 사람들은 갠더에 보답하기 위해 장학금을 만들어 지원하기도 했고, 자신의 집으로 갠더의 주민을 초대해 대접해 준 사람도 있고, 함께 뮤지컬 <컴프롬어웨이>를 본 사람도 있다.


한 번의 베풂이 서로에게 잊지 못할 평생의 기억, 평생의 인연이 될 거라는 걸, 그들은 알고 있었을까. 적어도 갠더 사람들은 우리 모두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그래서 너와 내가 다르지 않다는 것만큼은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들의 이야기가 훗날 지금까지도 지구 반대편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게 될 줄은 몰랐겠지만.



[뮤지컬 컴프롬어웨이]

▷ 개요 : 2015년 샌디에고에서 공식적으로 첫 공연이 올라온 이후, 2017년 브로드웨이에 공연이 올라오고 2022년까지 이어갔다. 2017년 토니상에서 최우수 연출상을 수상했고, 이후 영국, 캐나다, 아일랜드, 호주, 아르헨티나 등 다양한 국가에서 라이선스 공연이 올라왔다.

▷ 극본·작사·작곡 : 아이린 샌코프, 데이비드 하인

▷ 국내 제작사 : 쇼노트

▷ 매우 주관적인 추천 넘버 : 'Welcome to the Rock', 'Me and the Sky', 'Somewhere in the Middle of Nowhere'

▷ 2023년 초연 캐스트 (광림아트센터 BBCH홀, 2023년 11월 28일~2024년 2월 18일)

닉 외 : 남경주, 이정열

클로드 외 : 서현철, 고창석

다이앤 외 : 최정원, 최현주

뷸라 외 : 정영주, 장예원

비벌리 외 : 신영숙, 차지연

케빈T 외 : 지현준, 주민진

오즈 외 : 심재현, 이정수

한나 외 : 김아영, 이현진

보니 외 : 정영아, 김지혜

밥 외 : 신창주, 김승용

케빈J 외 : 현석준, 김찬종

재니스 외 : 나하나, 홍서영

스윙 : 김주영, 김영광



1) 작품의 제목인 'Come from away'는 실제로 캐나다 대서양 지역 (이 작품의 무대인 뉴펀들랜드 포함)에서 흔히 사용되는 말로, '다른 지역에서 온 외지인'을 뜻한다.

2) 이 이야기는 책 <온 세계가 마을로 온 날> (짐 디피디, 2003)에서도 일부 살펴볼 수 있다. 책에는 실존 인물들의 실제 이야기들이 등장하고, 뮤지컬에는 실존 인물들과 그들을 바탕으로 창작한 가상의 인물들도 함께 등장한다. 뮤지컬에 등장하는 실존 인물들은 대부분 책에도 등장한다. 다만, 책과 뮤지컬에 등장하지 못한 영웅들이 훨씬 많다는 걸 함께 기억하자.

3) 군상극 : 하나의 이야기를 복수의 등장인물이 여러 시점으로 그려나가는 유형의 작품.

4) 각 배역이 맡은 복수의 역할은 브로드웨이 오리지널 버전과 한국 버전이 조금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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