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과 뮤지컬에 대한 스포일러가 상당 부분 등장합니다.
올해 뮤지컬 <프랑켄슈타인>을 보러 가겠다는 마음을 먹자마자, 도서관에서 원작인 메리 셸리의 책을 빌려왔다. 지난 연말 뮤지컬 <드라큘라>를 보러 갔을 때 책을 미리 읽지 않았던 것이 아쉬움으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이미 뮤지컬로 접한 <드라큘라>를 이제 와서 책으로 읽자니 생각보다 긴 분량에 엄두가 나지 않아 아직까지도 못 읽고 있다. 그에 비하면 <프랑켄슈타인>은 300페이지 남짓이었으므로, 망설임 없이 골라 들 수 있었다.
소설 <프랑켄슈타인>은 생각보다 철학적인 고민을 담은 책이어서 매력적이었다. 책을 접하기 전 내가 '프랑켄슈타인'에 대해 아는 거라고는 머리에 못이 박힌 만화 속 초록 생명체 외에는 없었기에 막연하게 그로테스크하면서도 오락적인 이야기일 거라고만 생각했는데, 훨씬 더 복합적이고 심오한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곱씹어보고 싶은 문장들도 많아서 꽤 많은 부분을 기록해 두고는 종종 들춰보았다.
과학에 관심이 많은 청년 빅터 프랑켄슈타인은 호기심에 생명체, 즉 괴물을 만들지만, 막상 괴물이 깨어나자 두려움에 도망쳐버리고 만다. 그렇게 태어나자마자 창조자로부터 버림받은 괴물은 외로움과 혼란스러움을 견뎌내며 홀로 인간들의 생활상을 배우고, 돌고 돌아 자신의 창조자인 빅터를 다시 마주한다. 빅터가 괴물을 만들게 된 계기도, 괴물이 혼자 겪은 시간도, 굉장한 에피소드가 있다기보다는 대단히 평범하고 일상적으로 표현되어 오히려 그 뒤의 결말이 더 강렬하게 느껴졌다.
반면에 뮤지컬화된 버전은 시놉시스와 등장인물에서부터 대단한 변화가 느껴졌다. 굳이 따지자면 책은 오히려 소극장에 더 어울릴 듯한 작품이었는데, 대극장에 올라온 창작뮤지컬은 극장의 규모에 맞게 줄거리도 배경도 스케일이 커지면서 사뭇 다른 에너지가 느껴졌다.
비교적 소소했던 빅터의 어린 시절에는 마녀로 몰릴 정도의 엄청난 사건이 추가되었고, 괴물이 조심스레 자신의 존재의 의미를 찾아가던 시간은 격투장에서 겪는 격렬한 고통으로 표현되었다. 소설 속 빅터는 그저 탐구적 호기심으로 괴물을 창조해 냈지만, 뮤지컬 속 빅터에게는 어릴 적 흑사병으로 죽은 엄마를 살려내고 싶었던 트라우마가 강력한 계기이자 동기가 되었다. 소설 속 괴물은 탄생하자마자 아무것도 하지도 않았는데도 빅터가 지레 겁먹고 도망치는 바람에 버려진 반면, 뮤지컬 속 괴물은 악의적 의도는 없었을지 몰라도 탄생하자마자 사람을 죽이는 바람에 빅터가 내쫓아버린다.
그런 줄거리와 강세의 변화는, 독자와 관객의 감상에도 다른 영향을 주었다. '인간의 손으로 생명을 창조해도 되는가'라는 공통의 주제 및 질문 외에, 그밖에 부가적인 화두는 각기 다른 부분들이 도드라진 것이다.
책은 내게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이유'와 '인간의 존재 의미' 등에 대해서 생각해 보도록 하였는데, 뮤지컬은 그보다는 '악의 탄생'에 대해 생각해 보게 만들었다. 태어나는 악이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대부분의 악은 빅터와 괴물처럼 서서히 만들어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빅터의 어린 시절이 조금이라도 더 평범했더라면, 괴물이 탄생하자마자 빅터가 따뜻하게 어루만져주었더라면, 이야기는 전혀 다르게 흘러갔을지도 모르니까.
사실 원작 책을 인상 깊게 읽은 사람으로서, 뮤지컬은 다소 아쉬운 지점들도 있었다. 소설 속의 성찰적이고 철학적인 면이 뮤지컬에서는 충분히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금 지나고 생각해 보니, 원작에 집착하는 건 나의 오류였다.
원작이 있다 해도, 이를 재해석한 작품은 별개의 새로운 창작물로 봐야 했다. 고전을 '재해석'하는 일은, 기존 작품을 온전히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관점을 더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특히 전달하는 매체가 달라질 경우, 새로운 매체와 새로운 소비자, 즉 독자 또는 관객에 맞게 작품의 진행 방식이 달라지는 것이 당연하다.
그리고 거기에는 늘, 재해석한 사람의 의도가 분명하게 반영되어야 한다. 새로운 시각, 새로운 문제제기, 새로운 상상력이 더해지지 않는다면 원작의 반복밖에는 되지 못한다. 1800년대 영국에서 쓰인 소설과 2014년도 한국에서 초연된 뮤지컬은, 담고 있는 의미가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뮤지컬 <프랑켄슈타인>은 화려한 연출과 속도감 있는 줄거리, 그리고 한국인의 입맛에 맞는 시원시원한 넘버들로 잘 채워진 작품이었다. 소설에서 인상적이었던 부분들을 뮤지컬에서 모두 볼 수는 없었지만, 반대로 뮤지컬에서는 소설에 없던 새로운 상상력을 느낄 수 있었다.
매콤한 에피소드들이 촘촘하게 채워졌을 뿐 아니라, 공연이기 때문에 가능한 요소들까지도 잘 버무려진 작품이었다. 예를 들어 모든 주연 배우들이 1인 2역을 맡았는데, 그중 빅터의 절친한 친구 앙리 뒤프레 역을 맡은 배우는 괴물 역까지 함께 맡았다. 앙리와 괴물이 같은 얼굴이라는 사실은 줄거리에도 상당한 변화를 주면서, 제작자가 의도한 새로운 이야기와 분위기의 흐름을 잘 만들어주었다. 뮤지컬은 뮤지컬만의 매력을 충분히 담아냈다.
창작물은 탄생하자마자 수많은 관객, 독자, 소비자를 만난다. 그 만남이 특별한 의미 있기 위해서는, 창작물에 창작자의 의도가 잘 담겨있어야 한다. 나는 그게 바로 창작자가 지녀야 할 책임이라고 생각한다.
세상에 무언가를 탄생시키는 일은 그게 무엇이든 간에 위대한 일이고, 위대한 일에는 언제나 책임이 따른다. 창작자조차도 자신의 작품에 책임을 지지 못한다면 그 작품의 존재 의미는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그것이야말로 빅터 프랑켄슈타인이 만든 괴물처럼 어정쩡한 무언가가 되어버릴지도 모른다.
[뮤지컬 프랑켄슈타인]
▷ 개요 : 국내 대극장 창작 뮤지컬로, 2014년 초연되어 올해 10주년을 맞았다. 초연되었던 해에 더뮤지컬어워즈 9개 부문을 수상했으며, 초연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2017년 일본에 라이선스를 수출하여 공연되기도 했다.
▷ 제작사 : EMK(*1) / 연출 : 왕용범 / 작·작사 : 왕용범 / 작곡 : 이성준
▷ 원작 : 메리 셸리
▷ 매우 주관적인 추천 넘버 : '단 하나의 생명', '너의 꿈속에서', '난 왜'
▷ 2024년 10주년(오연) 캐스트 (블루스퀘어 신한카드홀, 2024년 6월 5일~8월 25일)
빅터 프랑켄슈타인/쟈크 역 : 유준상, 신성록, 규현, 전동석
앙리 뒤프레/괴물 역 : 박은태, 카이, 이해준, 고은성
줄리아/까뜨린느 역 : 선민, 이지혜, 최지혜
엘렌/에바 역 : 전수미, 장은아, 김지우
슈테판/페르난도 역 : 이희정, 문성혁
룽게/이고르 역 : 김대종, 신재희
어린 빅터 역 : 조민규, 김승후, 김승주
어린 줄리아 역 : 장세린, 이시아, 다니엘라
1) 초연과 재연은 중구문화재단, 삼연과 사연은 뉴컨텐츠컴퍼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