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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의별 Aug 12. 2024

보이는 것을 모두 믿지 말 것

뮤지컬 <시카고>

'일단 유명해져라, 그러면 사람들은 당신이 똥을 싸도 박수를 칠 것이다.'


앤디 워홀이 한 말이라고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이 문장은, 사실 출처가 없다. 그저 '앤디 워홀이 한 말이라더라'라고 하니 계속해서 회자되고, 인용된 것 같다. 유명함에 대해 비꼰 이 말 역시, 아이러니하게도 누가 한 말인지 알 수 없는 채로 유명하게 포장된 것이다. 이러니, 세상의 모든 것들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가 없다.


1975년도에 처음 제작된 뮤지컬 <시카고>는 1920년대를 배경으로 한다. 다소 어두운 주제가 재즈풍의 끈적끈적한 넘버들과 배우들의 춤과 퍼포먼스를 만난 블랙코미디로, 사법 시스템의 부패와 범죄자들이 언론과 사회의 관심을 듬뿍 받는 현상을 풍자한다. 오래전을 배경으로 하고 있음에도, 그 속에 담긴 이야기와 메시지는 현대에도 여전히 적용되었다. 만약 제작자가 요즘 시대를 살았다면, 범죄자들 대신 정치인들이나 인플루언서들을 주인공으로 비슷한 작품을 만들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작품 속 두 주인공은 교도소에 수감된 벨마 켈리와 록시 하트이다. 유명 보드빌(*1) 스타였던 벨마는 남편과 여동생을 죽인 혐의로, 정비공의 아내 록시는 내연남을 죽인 혐의로 수감되었다. 벨마는 남편과 여동생이 바람을 피웠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죽였고 (죽인 것으로 암시되고), 록시는 내연남에게 차여서 홧김에 그를 총으로 죽이는 장면이 극 중에 나타난다. 록시는 교도소에서도 신문 1면을 장식하며 유명세를 이어가는 벨마를 보고는, 자신 또한 벨마를 변호해 주는 스타 변호사 빌리 플린을 고용해 마찬가지로 유명세를 노린다.


뮤지컬 <시카고>에서 오케스트라는 무대 위 정중앙에 위치해 있다. 보통은 무대 안쪽에 숨겨져 있거나 한 구석에 배치되지만, 시카고는 아예 떡하니 '모든 것이 쇼'라고 강조하는 것이다. 배우들은 지휘자에게 말을 걸기도 하고, 지휘자 역시 배우들에게 적당히 호응해 준다. 배우들은 심지어 퇴장할 때 '내 퇴장 음악 부탁해요!'라고 대놓고 지휘자에게 요청하기도 했다.


인물들은 쇼를 위해 자신의 진짜 모습을 숨기고 남들에게 보이고 싶은 모습을 만들어낸다. 벨마는 두 사람을 죽인 잔혹하지만 매력적인 스타로, 록시는 정당방위로 어쩔 수 없이 남자를 죽인 가녀린 여성으로. 두 사람은 돈만 있다면, 적절한 사람들로부터 도움만 잘 받을 수 있다면, 이미지는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


변호사 빌리 플린 역시 돈과 명예를 가장 중요시하는 사람이지만 정의로운 변호사로 포장하고, 교도관 마마 모튼은 수감자들을 도와준다는 명목으로 돈을 갈취하는 인물이지만 그들을 진심으로 대하고 걱정하는 것처럼 포장한다. 사실 둘 다 실제 수감자들의 유무죄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그저 자신에게 돈을 지불할 수 있거나, 명예를 가져다줄 수 있는 사람인지만이 중요하다. 정작 정말로 결백하고 아무 잘못 없는 사람은, 돈도 없고 후원자도 없어서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하고 사형당하고 만다.


결국 인물들이 이야기하는 내용 하나하나 속 진실 함유량은 크지 않다. 진실은 이미 저 너머에 숨겨졌고, 서로가 서로를 대할 때는 거짓과 포장만이 남아있다. 변호사가 의뢰인의 입을 빌려 대신 말하는 복화술 연기 역시 이러한 메시지를 극대화한다. 사실 작품의 첫 넘버의 제목인 'All that jazz'부터 '기타 등등'이라는 뜻으로, 현란한 댄스로 눈속임을 하고 있지만 가사는 중요치 않은 말들만 반복하는 데다 문장마다 '그리고 기타 등등'으로 대강 마무리한다. 재판 역시 변호사가 의도한 연출로 이루어진 한 편의 공연일 뿐, 내용의 진실 유무는 중요하지 않다.



작품은 그렇게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고 내내 강조한다. 허구의 이야기를 몰입해 믿게 해야 하는 뮤지컬인데, 겉모습만 보고 믿지 말라니. 하지만 그 아이러니함을 극대화해 보여주는 화려함이, 가장 속기 좋은 그 무대가, 오히려 이 메시지를 전하는 데에는 가장 효과적인 장치였던 것 같다.


눈앞에 보이는 걸 믿지 못하는 세상이라면, 우리는 뭘 믿을 수 있을까. 우리가 진실로 믿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우리 자신뿐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내 모습이 아니라, 그 속에 담긴 나의 꾸준함과 나의 진심과 나의 힘.


<시카고> 무대 위에는, 딱 한 가지 진실만이 있었다. 멋진 무대를 완성해 낸 배우들과 연주자들의 어마어마한 연습. 화려한 쇼와 음악을 표현하기 위 끊임없이 노력했을 그 수백, 수천 시간. 진심을 꾹꾹 담아 이루어낸 것들만이,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다.



[뮤지컬 시카고]

▷ 개요 : 1926년 선보인 동명의 연극을 원작으로 하여, 1975년 브로드웨이에서 초연되었다. 이후 1996년 리바이벌 공연(*2)이 개막했고, 2002년에는 영화화도 되었다. 브로드웨이 공연 역사상 가장 오래 공연하고 가장 성공한 리바이벌 뮤지컬로 여겨진다. 한국에서는 2000년 초연이 올라온 이후 꾸준히 사랑받고 있는 작품이다.

▷ 작곡 : 존 캔더 / 작사 : 프레드 에브 / 극본·연출 : 프레드 에브, 밥 포시

▷ 국내 제작사 : 신시컴퍼니 

▷ 매우 주관적인 추천 넘버 : 'All That Jazz', 'Roxie', 'Class'

▷ 2024년 재연 캐스트 (디큐브 링크아트센터, 2024년 6월 7일~9월 29일)

벨마 켈리 역 : 최정원, 윤공주, 정선아

록시 하트 역 : 아이비, 티파니 영, 민경아

빌리 플린 역 : 박건형, 최재림

마마 모튼 역 : 김영주, 김경선

에이모스 하트 역 : 차정현

메리 선샤인 역 : S.J.Kim (*3)



1) 보드빌(Vaudeville) : 1880년대부터 1930년대 초까지 미국에서 인기를 끌었던 쇼의 일종이다. 하나의 쇼로 묶이지만, 가수와 무용수, 코미디언, 마술사, 복화술사, 곡예사 등이 출연해 각각 별개의 공연을 진행하는 형태다.

2) 리바이벌 공연 : 오래전에 종료되었던 공연을 다시 새로 올리는 것. 넘버나 연출 등 다양한 부분에서 변화가 일어나곤 한다.

3) 메리 선샤인 역은 전 세계 공통으로 이름이 이니셜로 표시된다. 성별을 모호하게 하기 위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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