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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의별 Sep 02. 2024

그럼에도 우리, 기꺼이 다시

뮤지컬 <하데스타운>

* 결말을 비롯하여 매우 상세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는 무엇이든 결말을 미리 아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이미 좋아하게 된 영화나 뮤지컬을 반복해서 보기는 하지만, 적어도 맨 처음 볼 때는 결말에 이르는 과정을 직접 보고 싶기 때문이다. 어떻게 될지 궁금하면서 긴장되는 그 기분을 좋아한다.


뮤지컬 <하데스타운>을 처음 볼 때도 마찬가지였다. 원작 신화가 비극적 결말을 맞는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뮤지컬은 조금 다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약간의 희망을 가지고 객석에 앉았다.


신화에서는 음유시인 오르페우스의 아내 에우리디케가 독사에 물려 죽은 뒤 지하세계로 가게 되는데, 오르페우스는 그런 에우리디케를 되찾기 위해 직접 지하세계까지 찾아간다. 저승의 신 하데스는 오르페우스의 음악에 감동하여 둘을 보내주지만, 조건을 하나 내건다. 오르페우스는 에우리디케보다 앞서 걸어야 하며 밖으로 나가기 전까지 절대, 뒤를 돌아봐서는 안 된다고. 그러나 오르페우스는 지상이 가까워진 순간 뒤를 돌아보고 말고, 에우리디케는 그렇게 다시 지하세계로 끌려가버린다.


뮤지컬은 이야기의 내레이터 역할을 맡은 헤르메스의 경쾌한 외침으로 시작했고, 그 여정은 내가 아직 본 적 없는 결말을 향해 나아갔다. 신화를 원작으로 하지만 배경이 1920년대 대공황을 겪는 미국을 연상시키는 만큼, 무대는 새롭고도 독특한 분위기가 풍겼다.


각각의 캐릭터들 역시 조금씩 변모했다. 에우리디케는 뱀에 물려 죽는 대신 배고픔을 참지 못하고 직접 하데스타운(광산이자 지하세계)으로 찾아가고, 계약서에 서명함으로써 그곳을 떠날 수 없게 된다. 에우리디케가 배고픔을 견딜 수 없게 된 건 지상에 오래도록 계속되는 겨울 때문이다. 페르세포네(*1)가 지상에서 반년을 머물러야 봄과 여름이 정상적으로 오지만, 하데스가 계속해서 페르세포네를 의심하면서 일찍 데려가버려서 세상의 질서가 망가졌기 때문이다. 이렇게 엉망이 된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오르페우스는 노래를 쓴다. 그리고 그 노래는 하데스를 감동시키는 것은 물론, 그가 잊고 있던 사랑의 감정까지 되찾아준다.


그러나, 이 새로운 이야기가 결말까지 바꾸지못했다.


오르페우스는 에우리디케와 함께 하데스타운을 벗어날 기회를 얻어지만, 에우리디케가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는 어두운 길을 걸으며 '하데스가 정말로 에우리디케를 보내줬을까?', '에우리디케가 정말 배고픈 현실로 돌아가기를 원할까?' 등의 의심과 고뇌 끝에 결국 뒤를 돌아보고 만다. 그리고 에우리디케는 그렇게 영원히, 하데스타운에 갇혀버린다.


순간 무대와 객석에는 시간이 멈춘 듯한 정적이 감돈다. 그리고 잠시 후 헤르메스는 씁쓸한 투로, "오래된 사랑 이야기"라고, "슬픈 이야기"라고 천천히 노래한다.


그런데 사실 우리는 이미, 공연이 처음 시작을 때 이 가사를 들었다. 처음부터 헤르메스는 결말을 숨기지 않고 있었다. 그는 다시 이야기의 끝에 당도했을 때, 오래전에 이미 결말이 정해 이야기였음을 다시금 강조할 뿐이었다.


사랑 노래
아주 오래된 사랑 이야기
슬픈 노래
그럼에도 부르리
오랜 노래
오래전 옛날이야기
...
우리 다시 부르리

- 첫 넘버, 이야기를 시작하는 'Road to Hell'


오래전 쓰여진 노래
이렇게 흘러가는 거죠
슬픈 노래
슬픈 얘기
...
우리 다시 또다시
부르리라

- 커튼콜 전 마지막 넘버, 이야기를 마무리하는 'Road to Hell (reprise)'


공연이 처음 시작될 때는 신나는 멜로디에 감춰졌던 가사가, 공연 말미에 차분해진 멜로디 속에서 비로소 선명하게 들린다. 뮤지컬 리프라이즈(*2)의 힘이다.



리프라이즈는 단순한 곡의 반복이 아니라, 앞서 등장한 넘버에 멜로디나 가사, 분위기에 변주를 거나 화자를 바꾸어 후반부에 다른 의미로 반복하는 것을 말한다. 특정 장면을 극적으로 강조하거나 를 표현할 때 사용되는 방식이다. 'Road to Hell'의 경우 원래 경쾌하고 힘찼던 멜로디가 리프라이즈 버전에서는 다소 차분해지면 가사 또한 일부 바다.


<하데스타운>은 해당 넘버 외에도 다양하고 매력적인 리프라이즈 넘버들이 많은 작품이다. 그리고 동시에, <하데스타운>은 극 전체가 리프라이즈이기도 했다.


공연은 오르페우스가 뒤를 돌아보고 에우리디케가 지하로 돌아가는 데에서 끝나지 않는다. 극장 전체에 정적을 불러일으키는 비극적인 순간이 있은 후에, 공연은 다시 시작점으로 되돌아간다. 맨 첫 장면으로 돌아가서, 오르페우스는 에우리디케를 다시 처음으로 만나고, 헤르메스는 다시 노래를 시작한다. 이 같은 회귀는 헤르메스의 한 마디로 시작다.


중요한 것은, 결말을 다 알면서도 다시 노래를 시작하는 것.
이번엔 다를지도 모른다고 믿으면서.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결과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선택할 수 있는 마음인지도 모른다. 또다시 좌절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기꺼이 다시 시도하고 노력하는 마음.


삶은 반복의 연속이다. 우리가 살아가며 겪는 일들은 매번 새로워 보여도, 사실은 이전에 겪었던 일들이 변형되어 유사하게 반복되는 형태가 대부분이다. 만남과 이별, 도전과 좌절, 실수와 반성, 걱정과 후회. 지나간 이야기들을 곱씹어보되 그 안에 매여있지만 않는다면, 비슷한 일이 반복되었을 때 다음 결과는 달라질 수도 있다.


오늘 당장 성공하지 못해도, 그저 다시 새로운 마음으로 시도해 본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삶에서 마주하는 것들이 대개 이전의 반복이라고 해도, 그럼에도 완전히 동일한 반복은 없으니까.  겨울은 어김없이 돌아오지만, 지난해 보낸 겨울과 올해 맞이할 겨울은 결코 같지 않다. 비슷한 듯 다른 순간들이 새로운 도전들을 만나, 새로운 결과에 이르게 될지도 모른다.


<하데스타운>은 공연이 끝나고 배우들이 무대를 떠난 뒤, 밴드(*3)만이 남아 음악을 연주한다. 밴드의 마지막 연주는, 언제나 하나의 악기의 솔로 연주로 끝이 난다. 하지만 같은 악기가 아니다. 오늘은 트롬본, 내일은 바이올린이 그 역할을 맡는다. 그 약간의 변화가 일말의 희망을 남겨준다. 오늘 무대 위에 올라온 이야기가, 반드시 과거의 동일한 반복은 아니라고.


그러니까, 우리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시도를 멈추지만 않는다면.


"더 나은 세상을 위한 투쟁에는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우리가 아직 그 결과를 볼 수 없다고 하더라도요. <하데스타운>의 주요 주제 중 하나는 우리가 실패하더라도 노력하는 것에도 가치가 있다는 것입니다. 오르페우스가 영웅인 이유는 그가 성공해서가 아니라 시도했기 때문이니까요!"

(There’s beauty in the struggle for a better a world even if we can’t yet see the result of that struggle. One of the main themes in Hadestown is that there’s value in trying, even if we fail. Orpheus is a hero not because he succeeds—but because he tries!)

- 작곡가 아나이스 미첼 (Anaïs Mitchell)의 인터뷰 중



[뮤지컬 하데스타운]

▷ 개요 : 그리스 신화 중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하데스와 페르세포네의 이야기까지 엮어 현대석으로 재해석한 작품이다. 대사가 거의 없는 성스루 뮤지컬로, 재즈, 포크, 블루스 등 다채로운 음악이 담겼다. 2006년 처음 공연했지만, 현재 버전은 2016년 오프브로드웨이에서 초연되었다. 브로드웨이에서 개막한 건 2019년이며, 같은 해 토니상 14개 부문에 노미네이트 되고 최우수작품상 음악상 포함 총 8개 부문에서 수상했다. 한국어 공연은 2021년에 초연되었다.

▷ 극본·작사·작곡 : 아나이스 미첼(Anaïs Mitchell) / 연출 : 레이첼 챠브킨(Rachel Chavkin)

▷ 국내 제작사 : 에스앤코

▷ 매우 주관적인 추천 넘버 : 'Road to Hell', 'Way Down Hadestown', 'Chant', 'Wait for Me', 'Epic Ⅲ'

▷ 2024년 재연 캐스트 (샤롯데씨어터, 2024년 7월 12일~10월 6일, 이후 부산공연 예정)

오르페우스 역 : 조형균, 박강현, 김민석

헤르메스(*4) 역 : 최정원, 최재림, 강홍석

페르세포네 역 : 김선영, 린아

에우리디케 역 : 김환희, 김수하

하데스 역 : 지현준, 양준모, 김우형

운명의 여신 1~3 역 : 이지숙, 한보라, 도율희, 이다정, 박가람, 김연진

앙상블(일꾼) : 이지원, 남궁혜인, 양병철, 최원섭, 권상석

스윙 : 백두산, 최지혜, 김하람



1) 페르세포네 : 봄의 여신으로, 저승의 신 하데스가 반해 지하로 데려갔다. (신화에서는 거의 납치) 1년 중 절반은 지상에 머물고, 나머지는 지하에서 하데스의 아내로 지낸다. 지상에서는 페르세포네가 없으면 꽃이 피지 않고 봄이 오지 않는다. 그래서 페르세포네가 있을 때는 계절이 봄과 여름이고, 페르세포네가 떠나고 나면 가을과 겨울이 된다. 뮤지컬에서는 하데스가 '페르세포네가 과연 지하세계로 돌아올까' 의심하고 걱정하느라 자꾸만 일찍 데리러 와서 배경 속 겨울이 길어진 것으로 묘사되었다.

2) 리프라이즈 (reprise) : 음악의 반복을 뜻하며, 뮤지컬에서는 보통 그대로 반복하기보다는 곡조나 가사 등에 변주를 주어 새로운 의미를 담는다. 부르는 사람이 달라지거나, 가사나 멜로디의 분위기 등이 바뀌면서, 극적인 효과를 주어 관객의 감정을 극대화할 수 있다.

3) <하데스타운>은 밴드가 무대 위에 함께 자리한다.

4) 헤르메스 역은 본래 남성 배우들이 맡았지만, 최근 브로드웨이를 포함해 여성 배우들이 젠더프리(성별 구분 없이 캐스팅하는 것)로 맡는 경우가 많아졌다. 극 중 헤르메스 역할 자체가 내레이터어서 성별이 크게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어색함이 없다. 한국 재연에는 아시아 최초 젠더프리 헤르메스로 최정원 배우가 캐스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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