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적 허용, 소설적 허용처럼 연극/뮤지컬적 허용이 있다면, 바로 '멀티맨'의 존재가 아닐까. 멀티맨은 말 그대로 멀티플레이어처럼, 다양한 여러 배역을 한 번에 맡는 배우를 뜻한다. 주로 대학로 소극장 공연에서 찾아볼 수 있고, 배역 이름이 정해지지 않은 채 '멀티맨'으로 불리는 경우가 많다.
물론 1인 2역이나 1인 다역과 같은 방식이 공연에만 쓰이는 건 아니다. 영화 <월요일이 사라졌다>에서는 배우 누미 라파스가 혼자서 개성이 다양한 일곱 쌍둥이 역할을 연기했고, 우리나라 영화 <암살>에서도 배우 전지현이 쌍둥이 역할을 맡은 적이 있으며, 영화 <클래식>에서는 배우 손예진이 엄마와 딸을 번갈아가며 연기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좀 더 쉽고 흔하게 활용되는 건 아무래도 공연계인 것 같다. 뮤지컬 <컴프롬어웨이>(*1)에서는 12명의 배우들이 30명이 훌쩍 넘는 캐릭터들을 특별한 변장도 없이 번갈아가며 연기하고, 뮤지컬 <프랑켄슈타인>(*2)에서는 모든 주·조연 배우들이 각각 서로 상반되는 1인 2역을 맡아 완벽한 연기 변신을 선보인다. 뮤지컬 <몬테크리스토>(*3)에서는 파리아 신부를 맡은 배우가 주인공 에드몬드의 아버지 역할 또한 겸하는데, 에드몬드를 진심으로 생각해 주는 사람이 그 두 사람 외에 거의 없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설정이다.
뮤지컬 <젠틀맨스 가이드>(*4)의 경우에는 '다이스퀴스'라는 역할이 있다. 다이스퀴스 가문의 인물들을 통째로 맡는 것이다. <젠틀맨스 가이드>는 로이 호니먼의 소설 <이스라엘 랭크: 범죄의 자서전>을 원작으로 하는데, 이 책은 뮤지컬이 되기 전에 먼저 영화화가 되었고, 영화에서도 한 명의 배우가 가문 전체를 다 연기했다고 한다. 가문의 인물들은 백작, 성직자, 은행장 등 8명이 넘고, 남성 배우가 맡는 역할임에도 여성 캐릭터 또한 있다. 줄거리는 다이스퀴스 가의 여덟 번째 후계자인 젊은 청년 몬티 나바로가 빠른 서열 상승을 위해 다이스퀴스 가문을 한 명 한 명 없애는 것인데, 죽더라도 곧 다른 사람으로 다시 분장해 살아나는 배우들의 모습은 관객들을 깔깔 웃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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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로의 멀티맨은, 여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간다. 앞서 소개한 작품들 속 배우들이 맡는 캐릭터들은 줄거리 진행에 필수적이지만, 멀티맨은 그렇지 않다. 멀티맨이 연기하는 캐릭터들은 대단한 서사가 부여되지 않는다. 대부분 한 장면만을 위해 만들어졌다가 그 장면이 끝나면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 어떤 배우들보다도 관객의 열렬한 호응을 받는 역할이고, 이제는대학로 소극장 공연을 대표하는 아이콘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최근 보고 온 대학로 창작뮤지컬 <썸데이>(*5)도 마찬가지였다. 멀티'맨'이라고는 하지만 남녀 배우 구분 없이 맡는 역할인데, 내가 본 공연에서도 여성 배우가 멀티맨(이런 경우 '멀티걸'이라고도 부른다) 역할을 맡았다. 배우는 공연 시작 직후부터 적극적으로 박수와 환호를 유도했고, 무대와 객석 사이 아무런 벽이 없는 것처럼 관객들에게 농담을 던지고 말을 걸었다. 사람들은 금세 그의 매력에 빠졌고, 이후에는 그 배우가 등장할 때마다 곳곳에서 웃음소리부터 났다. 그는 그날 출연한 배우들 중 가장 여러 차례 의상을 바꿔 입으며, 실연당해 벌컥벌컥 술을 마시는 바의 손님도 되었다가, 주인공을 진찰해 주는 의사도 되었다가, 길거리에서 사기를 치는 사기꾼도 되었다. 제각각의 캐릭터를 때로는 발랄하게 때로는 진지하게 소화해 냈고 관객들은 그때마다 반갑게 맞이했다.
멀티맨이 어디서부터, 왜 시작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아마 제작사의 비용 절감이라는 현실적인 효과가 크게 작용하지 않았을까 한다. 여러 명의 앙상블 배우들을 캐스팅하는 것보다는 한 명의 멀티맨을 이용하는 것이 경제적으로 덜 부담이 될 테니까. 하지만 최초의 시작은 그랬을지라도, 이제는 재미를 위해 적극적으로 활용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멀티맨은 등장만으로도 코믹 릴리프(*6)를 제공한다. 공연의 내용이 다소 진지하거나 무겁게 흘러가도, 멀티맨만 무대에 서면 분위기가 전환되는 마법을 경험할 수 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주인공의 소개팅 상대 역할이었던 사람이 갑자기 집으로 돌아가는 주인공에게 행패를 부리는 취객으로 등장할 때, 조금 전까지만 해도 주인공의 자전거를 훔쳐가는 사람이었는데 갑자기 그 사람을 검거한 경찰로 다시 등장할 때. 어이없는 설정에 관객들은 편하게 웃음을 터뜨린다.그의등장은 사람들에게 '조금 편한 마음으로 봐도 된다'는 눈짓을 주는 동시에, 새로운 캐릭터와 새로운 연기를 예고함으로써 기대감을 심어준다.
멀티맨들의 변신은 대개 10초, 20초 안에 빠르게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변신을 한다고 해도 꼼꼼한 분장까지 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멀티맨의 재미가 소극장에서 극대화될 수 있는 건 그 변신이 약간은 허술하기 때문이고, 관객들이 가까이에서 그 가벼운 변신을 직접 목격할 수 있어서일 것이다. 변신이 너무나 완벽하다면, 또는극장이 너무 커서 무대가 객석과 멀리 떨어져 있다면, 관객들은 같은 배우가 수도 없이 많은 역할을 소화하고 있음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할 것이고, 그러면 멀티맨의 의미는 사라질 것이다.어쩌면 그래서 다른 매체에서는 쉽게 활용되기 어려운 개념인지도 모른다.
멀티맨은 혼자서도무대를 가득 채울 수 있는, 공연만의 특별한 역할이다.그가 맡는 각각의 캐릭터들은 두고두고 회자될 만큼 대단한 의미를 갖지는 않지만, 그 어떤 관객이 와도 웃음 짓게 할 수 있는 엄청난 힘을 지닌다.
그건 곧, 성공적인 공연에 반드시 거창하고 대단한 의미가 필요하지는 않다는 뜻이기도 하다. 공연을 찾는 관객들은 매번 다른 의미를 찾아가겠지만, 대부분은 공통적으로 '좋은 기분'을 느끼기 위해 간다. 사람들로 하여금 걱정 없이 즐길 수 있게 해주는 멀티맨만으로도, 그날 관객들의 하루는 충분히 변하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성공적인 공연이리라.
1) 뮤지컬 <컴프롬어웨이> : 17화 <내가 네가 되고, 네가 내가 되는 순간> 참조. 2002년 9·11 테러 당시 캐나다에 불시착한 여객기 승객들과 현지인들의 감동적인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으로, 모든 배우가 비행기 승객과 마을 사람들을 동시에 맡는다는 특징이 있다.
2) 뮤지컬 <프랑켄슈타인> : 18화 <위대한 걸 창조하는 마음> 참조. 모든 주·조연 배우들이 1인 2역을 맡는 국내 창작 뮤지컬이다. 작품의 설정상 빅터 프랑켄슈타인은 친구 앙리의 머리를 이용해 괴물을 창조하므로, 괴물과 앙리를 같은 배우가 연기한다. 그 외 다른 배우들의 경우에는 대부분 완전히 상반되는 캐릭터들을 연기한다. 다만 괴물이 혼자 있었던 일들을 후에 빅터에게 이야기하는 장면이라는 점에서, 빅터를 포함하여 모두 빅터가 아는 이들의 얼굴로 그 이야기들이 재구성되었다고 생각하면 나름의 개연성이 느껴지는 부분이기도 하다.
3) 뮤지컬 <몬테크리스토> : 2009년 스위스에서 초연된 후 2010년 한국에서 초연되었고, 지난해 육연을 맞았다. 육연은 충무아트센터 대극장에서 2023년 11월 21일부터 2024년 2월 25일까지 공연되었다. 알렉상드르 뒤마의 소설 <몬테크리스토 백작>을 영화화한 버전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주인공 에드몬드 단테스는 주변 인물들의 모함과 배신으로 감옥에 갇히게 되는데, 거기서 이웃 죄수 파리아 신부를 만나게 된다. 파리아 신부라는 인물은 에드몬드가 훗날 복수를 위해 몬테크리스토 백작으로 다시 태어나는 데에 큰 도움을 준다.
4) 뮤지컬 <젠틀맨스 가이드> : 2013년 브로드웨이에서 초연되고, 2018년 한국에서 초연된 작품이다. 올해 사연을 맞이했고, 광림아트센터 BBCH홀에서 현재 공연 중(2024년 7월 6일~10월 20일)이다. 어느 날 자신이 고귀한 다이스퀴스 가문의 여덟 번째 후계자임을 알게 된 가난한 청년 몬티가, 자신의 후계 순위를 올리기 위해 차례차례 살인을 실행하는 이야기이다.
5) 뮤지컬 <썸데이> : 2024년 3월부터 대학로에서 오픈런으로 진행 중인 소극장 공연이다. 음악을 하고 싶지만 아빠의 반대에 부딪혀 괴로워하는 주인공 연수가, 아빠가 스무 살이던 시절로 타임슬립을 하게 되며 벌어지는 이야기다.
6) 코믹 릴리프 (comic relief) : 극의상황이나분위기를전환하기 위해 활용되는 장면으로, 진지한 장면들 사이에 가벼운 캐릭터나 재치 있는 대화 등이 삽입되는 것을 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