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로미오와 줄리엣>
내 인생 첫 뮤지컬이 언제인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내 기억 속에 있는 가장 오래된 뮤지컬 경험은 2010년, 프랑스 파리에서 본 <로미오와 줄리엣>이다.
고등학교 때 학교 프랑스어 수업 때마다 다양한 프랑스 뮤지컬을 접했기에, 프랑스에서 교환학생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을 때 꼭 한 번쯤은 실제 공연을 보겠노라 다짐했다. 하지만 공연 일정이 맞지 않거나 가격이 너무 비싸서 고민만 하다 1년이 훌쩍 지나가버렸고… 프랑스를 떠나기 직전에야 운 좋게도 <로미오와 줄리엣>을 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생겨, 용돈을 아끼고 아껴 다녀왔다.
<십계>, <돈 주앙> 등 수많은 유명 프랑스 뮤지컬들 중에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인기 있는 건 <노트르담 드 파리>인 것 같지만, 그래도 나는 언제나 <로미오와 줄리엣>을 아주 근소한 차이로 조금 더 좋아했다. 달달하고 부드러운 넘버들과 슬픔이 담긴 넘버들의 아름다운 조화는 언제 들어도 마음을 울린다.
이미 너무 잘 아는 내용, 아는 넘버들이라, 다행히 프랑스어 한 마디 한 마디를 전부 다 이해할 순 없어도 큰 어려움 없이 공연을 볼 수 있었다. 마르고 닳도록 보던 영상 속 배우들도 있었고 새로운 배우들도 있었다. 춤을 추며 흔들림 없이 노래를 하는 모습은 실제로 보니 더 놀랍고 감탄이 나왔다.
사랑 이야기인지라 때로 유치하다고 치부되기도 하는 고전적인 이야기지만, 뮤지컬 <로미오와 줄리엣>은 사랑 이야기를 넘어 삶과 죽음, 혐오와 이해, 용서와 같은 다양한 인간 감정들을 깊이 다룬다.
공연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죽음'이라는 캐릭터다. '죽음'은 대사나 노래를 하지는 않지만, 내내 무대 위 곳곳에서 죽음의 춤을 춘다. 몬태규 가와 캐플릿 가 두 가문이 서로 혐오하고 그 아이들은 사랑을 하는 동안, 도시 베로나에는 내내 죽음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어린 연인들의 비극을 암시하는 '죽음'의 존재는, 가장 허구적인 동시에 사실적이었다. 우리의 삶에는 언제나 죽음과 위험이 그토록 태연하게 도사리고 있으니까. 눈에 보이지 않을 뿐, 우리 주변에는 언제나 유쾌하지 않은 순간들이 잠재하고 있다.
이날 공연을 보면서도 느꼈다. 무대 위에도 언제나, 아슬아슬한 변수들이 도사리고 있다는 걸. 공연이 한창 진행 중이던 때, 갑자기 줄리엣 캐플릿의 사촌 오빠 티볼트 역할을 맡은 배우의 마이크가 나오지 않은 것이다.
로미오의 친구인 머큐시오와 싸우는 중요한 순간이었다. 그런데 배우는 전혀 당황한 기색 없이, 마이크 없이도 큰 소리로 목청껏 노래를 불렀다. 내 자리가 그리 앞도 아니었는데 너무 잘 들려서 처음에는 그저 마이크 음량이 살짝 줄어들었나 정도로만 생각될 정도였다. 배우는 그 정도로 크게 부르더니, 어느 순간 무대 가장자리에 서 있던 배우로부터 핸드 마이크를 자연스럽게 넘겨받았다.
더욱 놀라웠던 것은, 마이크를 손에 쥔 채로도 어색함 없이 춤을 추며 넘버를 마무리했다는 것이었다. 손이 비어있어야 할 때에는 눈 깜짝할 새에 마이크가 어디론가 사라지고, 노래할 때는 또다시 마이크를 잡고 노래하고. 마치 처음부터 계획된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자연스러웠다.
넘버가 끝난 뒤, 박수소리는 그전보다 더 크게 들렸다. 나는 저렇게 할 수 있을까, 그 한 장면이 너무나 멋있어서 나도 함께 힘차게 박수를 보냈다. 당황하거나 머뭇거리는 모습 한 번 없이, 너무나도 당연한 듯 자연스럽게 공연을 이어가던 모습. 수없이 많은 무대에 오른 배우이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It doesn't get better, but you get better.
어디서 처음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좋아하는 말 중 하나다. 삶이 결코 쉬워지지는 않지만, 우리는 점점 나아진다고.
뮤지컬 공연을 보다 보면 다양한 실수를 목격하게 된다. 배우들도 스텝들도 사람이기 때문에, 실수가 나오는 게 당연한 일이다. 장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거나 배우들의 동선에 갑자기 소품이 떨어지기도 하고, 간혹 대사나 가사를 실수하는 배우들도 있으며, 대사나 노래의 박자가 늦어져 오케스트라와 타이밍이 어긋나는 경우도 있다.
그걸 실시간으로 목격할 수 있는 것이 라이브의 묘미이다. 그들이 순식간에 실수를 넘기는 모습을 보게 되는 것도. 그들은 작동하지 않는 장비를 애드립으로 무마하거나, 쓰러진 소품을 원래 자신의 일인 듯 자연스럽게 주워 치우거나, 상대방이 놓친 대사를 자연스럽게 받아친다. 마치 원래 대본이 그런 것처럼.
하지만 그들도 처음부터 그런 노련함을 지니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들 역시, 신인 배우 시절에는 어쩔 줄 몰라할 때도 있었을 것이다. 수백 번 수천번 반복해서 연습하고 공연하고, 수많은 돌발상황을 겪고 실수를 저지른 후에야, 비로소 저마다의 재치가 늘어났을 것이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삶은, 그렇게 이른 죽음을 맞이하지 않았더라면, 조금 수월해졌을까? 그들에게 시간이 조금 더 주어졌다고 해도 그들 주위를 맴돌던 '죽음'의 존재가 사라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수많은 아슬아슬한 돌발상황들은 언제나 비슷한 확률로 우리 주변에 존재하고 있다. 그저 그들과 맞닥뜨리는 경험이 쌓이고 쌓이다 보면, 어제 걸렸던 돌부리를 오늘은 피해 갈 가능성이 아주 조금은 높아지는 것일 뿐. 그러니까 로미오와 줄리엣에게도 시행착오가 허용되었다면, 전혀 다른 결말을 맞이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는 모두 매일 무대 위에 오른다. 매일 아침에 일어나 출근하고 퇴근하고 잠에 드는 반복적인 일상 속에서, 예상치 못한 다양한 변수들을 마주한다. 매일 새로운 문제를 겪고, 견디고, 해결해야 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반복적이지 않은 반복 속에서, 우리는 언제나 조금 더 나아질 거라는 것. 내일이 있는 한, 우리는 하루를 더 보낸 만큼 성장하게 될 것이다.
[뮤지컬 로미오와 줄리엣]
▷ 개요 :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을 바탕으로 제작된 프랑스 뮤지컬로, 2001년 파리에서 초연되었고 전 세계 18개국 이상에서 공연되었다. 우리나라에도 세 차례 내한공연이 되었던 바 있고, 2009년에는 한국 캐스트로 공연되기도 했다.
▷ 작곡, 작사 : 제라르 프레스귀르빅 (Gérard Presgurvic)
▷ 매우 주관적인 추천 넘버 : Un Jour (언젠가), Les Rois du Monde (세상의 왕들), Et Voila Qu'elle Aime (그녀가 사랑에 빠졌네), Aimer (사랑한다는 것), On Dis Dans La Rue (거리의 소문들)
▷ 오리지널 캐스트
로미오 : Damien Sargue, Vincent Niclo
줄리엣 : Cécilia Cara, Frédérica Sorel
벤볼리오 : Grégori Baquet, Pino Santoro
머큐시오 : Philippe d'Avilla, Nuno Resende
티볼트 : Tom Ross, Nuno Resende
죽음 La Mort : Anne Man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