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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연 May 18. 2021

장기근속 휴가, 3주를 쉬는 중

쓰고 보니 거의 의식의흐름기법 20210518일기

문득 내가 스물아홉 살이라는 사실이 낯설다. 어쩌면 어제 잠들기 전, 남자친구가 '서른이 되기 너무 싫다'고 말해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런가. 나도 서른이 되기 너무 싫나? 많이 생각보진 않았다. 내가 내년에 서른이 된다는 게, 드디어 이십 대 끝자락에 섰다는 사실이 그저 새삼스러울 뿐.


대윤이는 작년 여름에 취직했다. 그 뒤로 하루하루 24시간이 모자라도록 산다. 하루 6시간 잠들면 선방하는 삶. 그에게는 시간이 야속하도록 빠를 것 같다. 나는 어땠나. 대충 얼렁뚱땅 얼레벌레 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 열심히 살지 않았던 건 아니다. 내가 뭘 하고 살고 싶은지, 뭘 해야만 하는지, 가치판단의 기준은 어디에 둬야 하는지, 쉴 때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정리하지 못했다. 생각할 시간도 여유도 없었다. 성실했지만 나태했고 동시에 무책임했던 나날이었다.




그러던 내가 어쩌다 3주 장기근속 휴가에 돌입했다. 우리 단체는 3년동안 근속하면 3주의 유급휴가를 준다. 꿀같이 단 휴가. 생각해보면 한국의 어떤 조직이 이런 휴가를 주나 싶다. 처음 내가 여기 입사했을 때는 이 제도가 신기했고 쓴 사람도 몇 없었는데, 애초에 취지가 활동가의 근속을 장려하기 위해 도입한 제도라고 하니 비영리 생태에서의 지속가능한 삶이 얼마나 어려웠나 싶다.


나는 작년 8월 말에 3년을 꽉 채워 일한 활동가가 됐다. 장기근속휴가가 지난 해 8월에 발생한 셈이다. 작년 하반기에는 이리저리 현안 이슈에 치여서 더군다나 코로나19 때문에 여행을 가기도 어려운 시점이라 장기근속휴가를 사용할 생각도 못 했었다. 올해가 되면서 팀원들에게 저 2월에 휴가 갈거예요, 앗 너무 바쁘네요 안되겠어요 3월에 갈게요, 앗 4월에 가야겠어요, 하다가 드디어 5월 둘째 주부터 쉬게 됐다.


더 늦으면 결국 휴가를 쓰지 못하고 고스란히 반납해야 할 것 같아 쫓기는 마음으로 쓴 휴가다. 마무리하려 했던 장기 프로젝트들은 미처 다 마무리하지 못했다. 때마침 어이없는 홍보 이슈도 터졌다. 덕분에 틈틈히 메신저를 확인하고 처리해야 할 업무를 조금씩 처리하고 있는 휴가 아닌 휴가… 여하튼 그래도 내 업무를 대행해 주는 팀원도 있고, 팀원들은 내 도움 없이도 일을 잘 하는 사람들이여서 마음이 좀 낫다.




쫓기듯이 쓴 휴가라 그런지, 처음엔 내가 장기근속휴가라는 것이 실감나지도 않았다. 하지만 일단 첫날엔 쌍커풀 수술을 했고(ㅋㅋ) 그 길로 고향집으로 내려가 매일매일 우리 집 개와 산책을 했다. 마당에 사는 길고양이들에게 캣타워도 사줬다. 쿠키런 킹덤을 깔고 왕덤 꾸미기를 했다. 거실 소파가 한 몸이 되어 생활했으며, 하루 세 끼를 시간에 맞춰 챙겨먹고 시간이 나는대로 차가운 안대로 눈 찜질을 했다. 


쉬는 동안 생각이나 판단, 사색이나 고민은 거의 없었는데, 그만큼 스트레스도 없었던 것 같다. 날마다 봐야 했던 고양이 사체 사진이나 학대 현장 영상으로부터 멀어져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우리 집 개 좀 처리해 주세요, 여기 길고양이 좀 치워주세요, 여기 개농장 개 좀 구해주세요, 도대체 너네가 하는 일이 뭐냐, 이런 전화를 받지 않아도 되서 그런지도 모르겠고.


마당에 사는 고양이(우리집 고양이 아님)과 내 털동생 1호 몽이. 사람동생 1호가 고앵이들 TNR을 꼭 해주기로 했다.


여하튼 스트레스를 입을 일이 거의 없었고, 규칙적으로 식사를 하고 산책을 할 수 있어서 마음이 많이 편했던 것 같다. 양지 바른 마당에서 별 문제 없이 늘어진 고양이들을 보니, 그리고 나이 들고 살쪄서 천천히 걷는 내 개를 보니 마음이 많이 이완된 것도 있는 것 같고. 그러고보면 내겐 사색이나 생각의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 아니라 그냥 규칙적인 식습관과 사랑하는 것들과의 산책이 필요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


고향에서 닷새를 보내고 서울로 돌아와서 대윤이와 옆동네에 텐동을 먹으러 갔다. 대윤이는 나를 두고 '니 기저가 달라진 것에 비하면 쌍수는 아무것도 아니다'고 했다. 계속 메신저에 매달리지 않고 스트레스 받지 않는 게 좋아 보인다고 했다. 나도 지금이 행복하다고 했다.




휴가 2주차에 들어섰다. 어제는 대윤이 출근 시간에 함께 일어나서 도림천을 걸었다. 아침 여섯시 반에도 도림천에서 조깅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나도 설렁설렁 걸었다. 남은 근속휴가에도 매일매일 산책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화요일인 오늘은 아침에 늦잠을 잤지만, 이따가는 꼭 산책할 테니 뭐.


대윤이와는 11시에는 꼭 침대에 눕기 챌린지를 시작했다. 미션을 다섯 번 어기면 대윤이는 내게 유형의 서비스를 사주고 나는 일 주일치 집안일을 내가 맡기로 했다. 둘 다 규칙적인 수면습관이 필요한 터라 잘 됐다. 나는 매일매일 대윤이를 독촉하는 맛으로 저녁을 맞는다. 사실 대윤이 출근 때 한 번 일어나고 한두시간 더 자고 일어나는 게 더 어려워서, 아예 대윤이랑 같이 6시에 기상해 버리는 게 내 생활패턴엔 더 좋을 것 같기도 하고.


여하튼 그냥 잘 쉴 수 있는 것이 좋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초조하지 않은 삶도 좋다. 사실 뭐 얼렁뚱땅 대충충 살아도 괜찮은 것 같다. 게으를지언정 여유만 잃지 않을 수 있다면. 잘 쉬고, 잘 복귀해야지. 내 고양이들도 잘 보살피고 집안일도 부지런히 하면서. 자주는 아니더라도, 문장이 근사하지 않아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투박하게나마 일기를 남기는 것도 잊지 말아야겠다. 활동가로서의 지속가능한 삶과, 시민으로서의 삶, 개인 김나연의 균형있는 삶을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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