넋 나간 좀비처럼 돌아다녔다
뉴스에 대문짝만하게 나서 몹시 기쁜 이슈다. 부산의 구포 개시장이 전업했다. 구구절절 설명하자니 A4 3p 분량이라서 그냥 기사를 첨부한다.
구포 개시장 구조 작업에는 우리도 들어갔다. 구조가 확정되었던 6월, 나는 여하튼 홍보 타임라인을 잡아야 해서 담당 팀에게 '상황이 어떻게 되어 가느냐'고 종종 물어보았는데, 그 때마다 담당 활동가는 넋 나간 얼굴로 '아직...' '모든 게 변하고 있어서...' '확정된 건 아니지만...' 이라는 말을 서두에 달고 답변을 해줬다.
어느 날은 누가 개 한 마리를 개시장에 버리고 갔다고 했다가, 어느 날은 개들이 홍역에 걸려서 병원에 보냈다고 했다가, 어느 날은 또 누가 개를 떼로 개시장에 버리고 갔다고 했다. 파티션 너머에서 들리는 구포 개시장의 소식은 시시각각 어이가 없었고 침통하기 그지 없었다. 이따금 담당자는 내게 한숨 섞인 상황 브리핑을 해주곤 했다.
여하튼 정신 차리니까 구조 날이 다가왔고, 우리는 전날 부산으로 내려갔다. 시장을 한 바퀴 쭉 둘러보는데 뜬장의 개들이 거의 없었다. 동물단체와 조기 폐업을 약속한 업소 7개 말고는 다들 개를 도살하고 뜬장을 비워놓은 듯 했다. 정말 많이 속상했다.
사실, 나는 구조 전날 말고 그 몇일 전에도 부산에 내려갔었다. 그 때 하루 정도 얼굴 익혀놓았던 개들이 있었는다. 구조 전날에 다시 만나니까 알아보는지 더 반가워하는 눈치였다. 어, 너 또 왔어? 너 나 좋아했었잖아! 같은.
개시장이나 개농장에서 구조를 할 때는 사실 서로 몇 일 얼굴 익혀놓는 게 좋긴 하다. 낯선 사람이 갑자기 뜬장에서 꺼내는 거랑 그래도 몇일 얼굴 보면서 다정한 말을 건네고 간식이라도 몇 개 집어넣어 주던 사람이 뜬장에거 나오라고 하는 거랑은 온도가 많이 다르니까.
시장 둘러보고 장화를 사러 갔다. 구조 때 여러 업소를 다니는 과정에서 혹시 모를 전염병을 옮기지 않기 위해서였다. 우리 단체에서는 열댓 명이 부산으로 내려왔는데 장화는 네 켤레만 샀다. 장화 하나에 2만원이나 해서였다. 개를 다루는 활동가들을 대충 '핸들러'라고 부르는데, 이 사람들에게만 신기고 나머지는 일회용 덧신을 신으면 되겠다고 싶었다.
구조 당일, 이사님은 장화 더 사오라고 해서 나는 다시 시장으로 뛰어야 했다. "앞으로 두고두고 잘 쓰면 후원금 아까운 거 아니야!" 더워 죽겠지만 가게를 뒤지고 뒤져서 만 팔천원짜리 장화를 찾아냈다. 전날보다 이천원쯤 쌌다. 기어코 우리에게 장화를 다 신긴 이사님은 우리가 불쌍하다고 말했다. 이후 회의 때 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대표님은 몹시 뿌듯한 얼굴이셨다...
구조 당일은 정말 습하고 더웠다. 이틀 전에는 폭우가 쏟아지더라니 당일은 구름이 잔뜩 끼고 정말 가끔, 가-끔 비가 한 방울씩 뚝뚝 떨어지는 정도였다. 장화에 방진복에 가방 메고 뛰는데 힘들다는 생각도 못 했다. 정신이 없었다.
우리가 구조작업 하는 것은 유튜브를 통해 라이브를 했는데, 우리 유튜브로 라이브하는 것이다 보니 우리 활동가들의 모습을 위주로 촬영이 됐다. 사무실에 있던 동료들은 라이브를 보면서 '00님 왜 넋나간 사람처럼 돌아다녀...' '지금 괜찮은 거 맞지?' 등의 메시지를 보냈다. 지금 생각하니 나는 생각을 아주 많이 하면서 아무 생각 없이 시장을 배회했던 것 같다. 나는 미친 사람처럼 사진 찍고 영상 찍고 SNS를 촬영하면서 개들을 옮기고 가끔은 상인들에게 욕을 한바가지로 먹기도 했다.
구조 막바지에 이르러서 개들 위탁처로 보내려고 할 때는 기자들이랑 지나가는 시민들이랑 동물단체 활동가 등등으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동료 홍보담당 활동가는 아주 야무지게도 mbc 보도국 국장님 명함을 챙겨서는 우리 이사님을 끌고 가 인터뷰를 시키기도 했는데, 나중에 뉴스를 보니 그 시각 나는 좀비처럼 배회하고 있더라. 뉴스에 나온 나와 동료들을 보는 재미가 아주 쏠쏠했다.
개들은 위탁보호에 왔다. 온 개들 중에는 꾸벅꾸벅 조는 애들이 많았다. 개들도 긴장이 풀렸구나, 싶었다. 사람 좋아하는 애들은 눈만 마주쳐도 꼬리를 흔들어주고는 했다.
개들은 혹시 모를 전염병 잠복 기간으로, 약 2주 정도는 격리된 시설에서 지내다가 그 후 운동장에도 나오고 훈련도 받게 된다. 6개월 후에는 해외로 입양을 가게 된다. 그 때까지는 나도 일정 내서 종종 찾아가서 얼굴 볼까 싶다.
위탁보호소에서 개들을 놓고 다시 서울로 올라오는 길, 나는 다른 단체 활동가와 함께 KTX를 탔다. 밥 먹고 커피 마시고 한 숨 돌리고 나니 그제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내 다음 주 일정을 이야기하다가 대구 칠성시장에 집회를 하러 간다고 이야기했다. 그 곳에서 만났던 개에 대해 말하다가 울고 말았다.
대구 칠성시장에도 개를 전시하고 도살하는 거리가 있다. 나는 6월 중순쯤 그 거리를 모니터링하러 갔었다. 뜬장에 힘없이 앉아 있던 개를 만났었다. 주둥이가 까만 누런 개였다. 그 애에게 손을 내밀자 걔는 킁킁거리다가 내 손을 열심히 핥았다. 영상을 촬영하고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떼냈었다. 한 시간 뒤에 다시 돌아왔을 때, 걔는 멀리서부터 나를 알아보고 벌떡 일어서서 꼬리를 흔들었다.
그 개를 매입해서 데려갈까 말까 고민을 했었다. 그러다 포기했다. 어차피 얘를 내가 사더라도 이 자리에는 다른 개가 들어올 거고, 그 개의 인생을 내가 책임 질 수는 없었다. 우리 집엔 고양이 두 마리가 있고 나는 개를 책임질만한 경제적인 능력도 되지 않았으니까. 그런 이유로 두고 뒤돌아 섰는데, 지금은 그 애가 세상에 없다는 걸 알고 있다. 그리고 나는 이제 걔 얘기를 꺼낼 때마다 울고, 집에서 혼자 걔 생각을 하면서 운다. 정말 거지깽깽이같다.
서울로 돌아와서는 미친 사람처럼 구포 건 원고를 썼다. A4 3장 분량이 나왔다. 마지막 두 단락을 쓸 때는 정신이 혼미해서 내가 쓰는 게 문장인지 웅앵문인지 자신이 없었다. 새벽 3시 30분, 담당 팀에 원고 피드백을 맡기고 기절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에 다시 일어나서 돌아온 피드백(정신 차리고 다시 읽어보니, 역시 마지막 두 단락은 엉망진창이었다) 을 수정한 원고를 언론사에 송고하고 다시 기절했다.
일어나보니 오후 6시. 그제서야 내 오른쪽 손바닥부터 팔꿈치까지 통증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아침나절부터 저녁까지 핸드폰과 카메라를 쥐었기 때문일까. 팔에 계속 힘주며 돌아다녔기 때문일까. 아니면 평소에 핸드폰을 너무 붙잡고 있었기 때문일까.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내 오른쪽 손목은 건강하지 못한 상태다. 이걸로 내일 또 시민대집회에 가서 사진도 찍고 영상도 찍고 SNS도 해야 하니 무척 속상하다.
정말 저세상 복날 시즌이다. 초복 끝나면 몇 일 휴가 내고 잠수탈 것이라 선포했다. 아무도 나를 막지 못한다. 개들의 생명을 위해 일한다는 정의감이나 식품위생법이나 동물보호법 등 개식용이 종식되어야 할 법률적 근거는 차치하고서라도, 내가 이 몸고생 마음고생 다시 하지 않고 싶다는 불순한 목적을 위해서 개식용은 꼭 종식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