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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휴레스트 Aug 19. 2022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22.08.19 - 매일매일 부지런히 프로젝트 - 글쓰기 part 1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내가 좋아하는 한 교수가 한 말이었다. 처음에는 이 말의 뜻을 잘 몰랐다. 무소의 뿔? 사실 요즘에 자주 사용하는 말은 아니다. 그러다 보니 뭔가 자꾸 이상하다. 하지만 계속 쓰다가 보면 조금씩 입에 붙기도 하고, 클래식한 느낌이 말이기도 하다. 그래서 쉬는 시간에 남몰래 노트 한 구석에 적어 두었다. 


문창과의 수업은 사실 별거 없다. 별거 없다는 말에 화를 낼 사람도 있겠지만 어디까지나 내 입장에서는 그렇다. 우선 시험이 없다. 그래서 시험기간에만 허겁지겁 공부할 필요가 없다. 두 번째, 수업에서 좋은 점수를 맞는다고 꼭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흔히 아는 여러 시인이나 작가들 중에서 문창과를 안 나온 사람도 있고, 중퇴한 사람도 몇몇 있다. 그러다 보니 학점 그것 친구가 잘 받았다고 분하거나 하지 않는다. 그냥 담당 교수랑 잘 맞았구나 하면 된다. 그러면서 되뇐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문창과 수업은 시험이 없는 대신에 과제가 많다. 시험에 쓸 에너지를 학기 중 과제를 하는데 사시사철 다 보낸다고 보면 된다. 그중에 소설을 써서 내는 소설 쓰기 수업은 실전 같은 연습 같은 느낌이다. 오히려 실전보다 더 살 떨린다고 하는 게 맞다. 신춘문예 등에 낼 때는 내 글에 대해서 누가 대놓고 까지는 않지만, 수업에서는 그게 가능하다. 어투 하나, 문장 하나 그리고 마침표를 찍었나 안 찍었나 하나에도 한 시간을 갈굼 당할 수 있다. 그런데 어떤 아이는 오히려 문자 부호를 하나도 사용 안 했는데도 칭찬을 받을 때가 있는데, 그럴 때는 속에서 열불이 치민다. 


교수의 말에 따르면 그건 의도한 것이고, 그 의도가 잘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라 하는데 하나도 공감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몇 번이나 수업 도중에 뛰쳐 나간 적도 있다. 그리고는 시원하게 D 학점으로 말아먹기도 했다. 


문창과를 다니면서 가장 이해가 안 되었던 것은 교수님을 교수님이라 안 부르고 선생님이라 부르는 관습이다. 관습이라고 부르는 게 맞나? 하여튼 교수님도 그렇고 학생들도 그렇고 ‘교수님’이라는 직함보다는 ‘선생님’이라고 불리는 것을 더 좋아한다. 하지만 이럴 때 발휘되는 게 청개구리 심보가 아닌가. 나는 꼭 ‘교. 수. 님’이라는 호칭을 붙인다. 나에게 마침표를 안 찍었다고 2시간 수업 중 1시간을 지랄한 교수님한테는 친히 한 자. 한 자. 콕콕 집어가면서 불러 드린다. 그렇게 마침표 하나하나를 중요시 여기시니까. 나의 호칭에도 아주 만족스러워하셨을 거다. 마침표가 아주 많이, 정말 많이 들어가도록 불러 드리니까. 


어쩌면 우리 학과의 괴짜라고도 불리는 내가 학교의 일학 스타가 된 것은 어떤 한 글 때문이다. 사실 오랫동안 판타지 소설을 많이 읽어왔고, 여러 팬픽을 작성하며 발전한 나의 글솜씨가 맞아 떠어져. 방학기간 동안 한 웹소설 플랫폼에 자유 게시 형태로 소설을 하나 올렸었다. 그런데 그게 대박을 터트리고야 말았다. 조회수가 폭죽 터지듯이 올라가고 결국에는 영화화한다는 소식까지 듣게 된다. 어디서? 유튜브에서. 그 뉴스를 유튜브에서 보면서 저 소설이 내 소설이 아닌 다른 사람 소설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하지만 3일 뒤, 정말 영화사에서 연락이 오는 것을 보면서 처음 든 생각은 ‘ 내 소설이 맞네 ‘였다. 


영화사 아저씨의 말로는 실제 원작자를 찾는데 무척 오래 걸렸다고 한다. 그렇게 한 두세 명의 가짜 원작자를 거쳐 나에게로 겨우 겨우 찾아왔다는 거다. 그렇게 내 앞에서 고생했다며 자기의 한 풀이를 하는 아저씨 앞에서 나는 웃으며 말했다. 


‘ 영화 안 만들어요’ 

아저씨는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안 그래도 작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내가 다시 싱긋이 웃으며 마침표가 한창 박힌 말로 다시 말해줬다. 


‘영. 화. 안. 만. 든. 다. 고. 요.’

그때 아저씨의 표정을 꼭 사진으로 남기고 싶었는데, 때마침 내 폰은 지난밤 열띤 게임 노가다로 인해 방전 상태였다. 아저씨는 왜 냐고 물었고. 나는 처음 유튜브에서 내 작품이 영화화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의 어이없음과 빡침을 아주 자세히 그리고 마치 교수님이 내 글을 하나하나 까발리듯이 한 문장 한 문장 설명해줬다. 


아저씨는 낮 시간쯤에 우리 집에 왔었는데, 나의 거절 소식을 듣고 집에 갔을 때는 거의 막차가 끊길 때쯤으로 기억난다. 아직도 간혹 그 아저씨랑 만나는데 그때 그렇게 거절의 메시지를 길고 장황하고  섬세하게 이야기하는 아이는 내가 처음이었다고 했다. 


나의 소설 거절 소식은 다시 유튜브를 타고, 신문을 타고 뉴스를 타 급기아 글로벌하게 외신에도 나오게 되었다. 내 소설이 그렇게 인기가 있었는지는 전혀 생각도 하지 못했다. 아무리 봐도, 그리고 지금 다시 한 자 한 자 천천히 거꾸로 읽어봐도 그렇게 찬양할 정도는 아닌데 왜 그렇게 내 소설을 영화로 못 만들어서 안달인지 모르겠다. 


결국 학과장을 거처, 학교 총장실에까지 가서 한 시간 정도를 설명을 들은 다음에야 영화로 만드는데 동의를 구했다. 물론, 그러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혹시 내가 앞서 만나봤던 가짜 원작자일 거라고는 생각도 안 해봤나 하는 생각. 그러면서 어떻게 그 가짜 원작자를 구별해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나의 영화화 찬성의 조건으로 내가 직접 영화 촬영 현장에 참석해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누구는 그렇게 일일이 영화 현장에 가야 하나 하고 물어볼 수도 있는데. 사실 난 단순한 이유였다. 바로 수업에 빠지기 위해서. 그리고 좋아하는 배우를 꼭 보기 위해서. 하지만 그게 외부 사람들에게는 작품을 사랑하는 헌신적인 원작자로 비쳤나 보다. 호평을 하며 영화의 기대를 높이는 사람과, 너무 마이크로 매니징을 해서 감독의 재량권을 침해한다는 혹평까지 당시 유튜브를 틀면 나에 대한 기사가 안 나온 적이 없었다. 


그렇게 1년 정도의 촬영 시간이 끝나고 편집 등의 시간으로 한 3년쯤이 지난 다음 드디어 내 소설이 영화로 개봉하게 되었다. 나는 그러면서 다시 한번 생각했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영화 시사회 날 나는 당당하게 블로그에 글을 썼다. 

- 이 영화는 내 인생 최악의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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