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무와 전문성의 관계에 대한 지극히 개인적인 고찰
군대 시절 자투리 시간을 쪼개어 영어공부를 정말 열심히 하던 동기가 있었다. 왜 그렇게 공부를 열심히 하느냐 물으니 그 동기의 말인즉슨, "가뜩이나 군생활 00 같은데, 그 시간 동안 공부조차 안 하면 정말 나한테 남는 게 아무것도 없을 것 같아서 한다" 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나도 괜히 자극이 되어 최대한 공부를 하려고 노력했던 기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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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글에 나오는 2년 차 시절 회사 생활의 암흑기를 내 손으로 멋지게, 엄청난 도전을 해서 해결했으면 참 좋았겠지만 나에게 그런 초월적인 능력은 없었고 운 좋게도 지원했던 해외파견 대상자로 선정되면서 힘들었던 시간을 끝내게 되었다. 시작과 끝에 나라는 사람의 의지는 많이 개입하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절 동안 열심히 버티면서 군생활 때처럼 작게나마 무언가를 남기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그 모든 노력들은 (정말 다행히도) 나를 배신하지 않고 그 이후의 회사생활에 많은 도움이 돼주었다.
모든 업무를 수동적으로 손발이 되어 진행해야 했고, 개인의 의견과 생활은 전혀 인정되지 않던 시기였지만 그럼에도 그 안에서 할 수 있는 부분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하나는 일단 조금이라도 일을 줄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어 당시 경영진 보고자료를 거의 '양산' 수준으로 만들어야 했는데, PPT에 그래프를 몇 번씩이나 그리고 고치고 지우고 다시 그리고를 반복해야 했다. 그리고 그 안에 들어가는 숫자도 '그럴듯하게' 보이기 위해 위의 지시에 따라 계속해서 바꿔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기존의 일반 PPT그래프 툴로 작업하면 너무 시간을 많이 뺏겼기 때문에, 따로 시각화 전용 유틸리티를 배워서 조금이라도 업무 시간을 단축시키려고 했다.
두 번째 이유는, 어차피 일이 많다면 뭐라도 나중을 위해 남겨야 하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군대 시절 했던 생각과 거의 비슷하게, 지금 현실이 너무 힘들고 고된데 남는 것조차 없다면 나중이 너무 슬플 것 같았다.
당시 전체 회사의 ERP 시스템을 완전히 리뉴얼하는 프로젝트가 진행 중이었는데, 각 현업 부서에서 리뉴얼과 관련하여 협업할 담당자가 필요했다. 당시 팀장님은 다른 선배를 정담당으로 지정했었는데, 당시 팀 분위기와 돌아가는 판을 보았을 때 조만간 이 일이 흘러 흘러 나에게 올 것 같은 느낌이 있었다. 어차피 똑같이 일을 해야 한다면 명분이라도 챙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또 당시 나는 신입사원 때 CRM 업무만 해서 다른 영업 관련 분야에 돌아가는 사정을 잘 몰랐었는데, ERP 시스템을 보면서 간접적으로 해당 영역을 공부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내가 먼저 해당 업무를 맡아서 해보겠다는 이야기를 했고, 당시 팀원 모두가 많은 업무에 지쳐 허덕이고 있던 상황이었으니 당연히 해당 업무는 지원자인 내가 맡게 되었다.
사실 내가 해당 프로젝트의 책임자인 것도 아니고, 단지 커뮤니케이션 담당자 중 하나일 뿐이니 당연히 공수가 많이 들어가는 업무는 아니었다. 하지만 일단 뭐라도 하나 내가 담당자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으니, 그 외 잡다한 다른 일들을 조금 미뤄내는데 도움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해당 프로젝트가 전사적인 회계 시스템을 다루는 것이다 보니 다른 사업부에서 온 사람들의 이야기, IT시스템 담당자들의 이야기, 회계 법인 컨설턴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판매, 생산, 물류, 회계 등 전체 비즈니스가 어떻게 굴러가는지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해당 업무 자체는 매우 사소한 역할이었지만, 당시 내 연차에, 제조업을 기반으로 한 소비재 회사에서 ERP 시스템을 이해하는 것은 생각보다 이후 회사생활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ERP 전문가가 된 것도 아니고, 남들보다 조금 더 안다는 것이 회사 밖을 나가면 전혀 쓸모가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회사 내에서는 어떤 식으로든 활용이 될 영역이었고, 실제로 차후 회사생활이 조금 편해지기도 했다. 소소한 영역이라도 내가 아는 것이 많아질 때 그것이 결국 전문성이 되고 회사 내에서 나의 자유를 넓혀가는 것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정말 웃기게도 그 시절 엄청난 양의 자료를 만들었던 경험 덕분에 이후 회사 생활 동안 보고서를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양과 질은 다르지만 어쨌든 회사 생활 동안 계속해서 보고서는 써야 했고, 그 시간과 노력을 조금이라도 단축시킬 수 있게 된 것도 나름 얻었다면 얻은 것이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고생하면서 실력을 쌓는 시간이 있고, 그 배운 걸 써먹은 시간이 있다고 하는데 그 시즌은 전자에 속했던 것 같다. (그렇다고 똑같은 생활을 또 하라고 하면 별로 하고 싶지는 않다.)
잡무를 많이 했다고 전문성을 얻었다고는 할 수 없다. ERP를 배웠다고 ERP 전문가가 된 것도 아니고, 자료를 많이 만들었다고 컨설턴트라고 말할 수는 없다. 아무리 타이틀을 갖다 붙이려고 해도 안 되는 건 안된다. 하지만 전문성이라는 것은 굉장히 다양한 측면들을 포함하는 것이며, 어느 순간 갑자기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축적된 시간과 노력의 산물이다. 그렇기에 잡무도 전문성을 만들어가는 하나의 발걸음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몇 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는 할 수 있게 되었다.
글을 쓰고 나니 왠지 이 글이 불합리한 업무지시와 야근을 옹호하는 듯한 느낌이 드는데, 그것은 절대 아니다. 또는 회사생활이 힘들어도 무조건 버티라는 메시지를 주고자 함은 결단코 아니다. 정말 이상한 회사라면 과감하게 그만두고 다른 일을 찾아야 한다. 하지만 때로는 이런저런 이유들로 그만두는 것이 어려울 수 있다. 그럴 때 힘든 현실을 이겨내고 버티는 것 또한 하나의 과감한 선택일 것이다. 누군가 이러한 선택을 한 사람이 있다면, 그 시간을 보다 의미 있게 보냈으면 하는 것이 나의 작은 바람이고, 힘들어도 버텨낸 그 경험이 언젠가 도움이 될 것이라는 말을 하고 싶어 이 글을 썼다. (물론 거의 범죄의 레벨에 들어가는 이상한 회사에서는 괜히 버티면 안 되고 빨리 나와야 한다) 지금도 자율성 없이 고생하고 있는 모든 직장인들(특히 주니어들)의 건투를 빈다.
*글을 쓰고 생각을 담는 모임, #쓰담 의 멤버로 함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