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시작하면 절박해서 준비하게 된다
늘 정답을 맞혀야 했던 학창 시절에 생긴 사고방식일까, 과거의 나는 세상 모든 일에 나름대로의 불변의 진리나 법칙 같은 것이 있다고 어렴풋이 생각했었다. '준비된 자가 기회를 얻는다.'는 말 또한 그렇게 부정하기 어려운, 진리에 가까운 이야기였다. 그런데 회사 생활을 하고 하루하루 나이가 먹어갈수록 배우는 것이 있다면, 세상에 항상 통하는 법칙 같은 것은 없고, 모든 것은 그때그때 다르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이 언제부터였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나름의 계기가 있다면 어떤 기사에서 현대 창업자인 정주영 회장의 일화를 본 것이었다. 조선소도 없이 일단 배를 먼저 수주하고, 그 증명서를 가지고 돈을 빌려 조선소를 짓고 배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그 시절 나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충격이었다. 준비된 자가 기회를 얻는 것이 세상의 진리라면, 조선소도 없이 배를 주문받는다는 것은 애당초 말이 안 되는 것 아닌가? 세상은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것과는 조금 다르게 돌아간다는 것을 그때부터 어렴풋이 느꼈던 것 같다. 그리고 조선소만큼 스펙터클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나에게도 내 삶의 많은 것을 바꾼 작은 일화가 있었다.
그 시절 나는 내 회사생활 중 가장 답이 없던 암흑기를 보내고 있었다. 제대로 된 역할과 권한도 주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마치 군대 행정병처럼 끊임없이 보고자료를 만들어야 했고, 야근과 주말근무, 그리고 개인의 삶이 없는 팀 문화에 힘들어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문제의 메일을 받게 된 것이었다.
메일의 내용인즉슨, 중국 파견 프로그램에 사업부별로 1명을 추천할 예정인데, 원하는 사람은 그날 당일까지 지원을 하라는 내용이었다. 중국 파견이라는 것 외에는 어떤 지역인지, 가서 어떤 일을 하게 될지 아무런 정보가 없었고, 분위기상 이게 어떤 내용인지 물어보는 것도 쉽지 않았다. 또한 지원하는 것 자체도 지금 이 조직에서 도망치려 한다는 비난을 받기 딱 좋은 상황이었다. 뿐만 아니라 나는 태어나서 중국을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고, 중국에 대한 이해도도 처참한 수준이었다. 삼국지 이야기나 좀 알고 있는 수준이랄까. 현대 중국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당시 내가 할 줄 아는 중국어는 '니하오'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메일을 받은 지 약 10분 만에 지원하고 싶다는 내용을 담은 메일을 팀장/상무님께 회신했다. 어차피 잃을 것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사업부 내에 중국어를 잘하는 사람들도 많고 당시 나는 이제 신입사원을 막 벗어난 막내 레벨이었기 때문에, 어차피 안될 텐데 질러나 보자고 던진 것도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이게 웬걸, 덜컥 사업부 추천인원으로 선발되었고 다음 절차를 진행한다는 메일을 받게 되었다.
나중에 돌아보면 그때 내가 선발된 것은 정말 신기하고 신기한 우연의 연속이었다. 원래 해당 파견 프로그램은 글로벌 00 프로그램이라는 이름으로, 매해 말에 특정 연차 이상을 대상으로 지원을 받고 서류와 면접심사를 거쳐서 선발한다. 그리고 그다음 해 초 사전교육을 받은 후 전 세계 나라로 파견을 나갔다가 연말에 복귀하게 된다. 내가 최초 메일을 받았던 4월에 이 글로벌 00 프로그램 대상자들은 이미 각자의 파견국으로 떠난 후였다. 그런데 그 당시 중국 시장이 엄청나게 떠오르던 상황에 아이디어가 떠올랐던 것인지, 당시 부사장님이 글로벌 00 프로그램 외에 중국 00 프로그램도 만들자고 제안을 하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급작스럽게 파견자들을 선발하는 것이 쉽지 않았던 탓이었는지, 담당 부서에서는 기존의 선발 방식이 아닌 사업부별 추천을 받는 방식으로 진행을 했던 것이었다.
여기에 더해서 우리 사업부 내에 있던 중국어 능력자 분들은 다들 이런저런 상황과 이유로 인해 지원을 하지 않았던 관계로, 나와 다른 선배 한 명이 최종 후보로 좁혀졌던 것이었다. 그리고 주니어 레벨을 보내야 사업부에 공백이 없겠다고 생각했던 것인지, 아니면 나를 좋게 봐서 키울 생각이었던 것인지, 결혼한 선배보다는 싱글이었던 내가 회사 입장에서 부담이 덜했던 것인지 정확한 연유는 알 수 없지만 어찌 되었든 그 2명 중 내가 최종 후보가 되었고, 이런 여러 가지 우연들이 하나로 모여 결국 햇병아리 파견자가 탄생하게 된 것이었다.
처음에는 선발 결과에 대한 믿음 내지는 실감도 크게 없던 상태였던 데다가, 하루하루 업무도 바쁘다 보니 크게 신경을 쓰지 않고 지냈었다. 그러다 5월이 되고 파견 일정에 대한 내용들이 구체화되기 시작하자, 갑자기 엄청난 긴장과 걱정들이 몰려왔다. 특히 가장 큰 문제는 중국어였다. 이 파견 프로그램의 목적 중 하나가 현지 문화를 직접 느끼는 것이다 보니, 집을 구하는 등 현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파견자가 하나하나 직접 해결해야 했다. 그리고 여전히 나는 "안녕 너의 이름은 뭐니?" 수준의 중국어 입문 책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사실 그 근래는 한국 화장품 업계가 모두 중국에서 폭발적인 성장을 하고 있던 시절이었고, 우리 회사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래서 사내에서 중국어 학습 열풍이 불었었고 나도 학원을 다니기도 하고 사내 과정을 듣기도 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나도 학원에 수업료만 기부했을 뿐, 제대로 된 공부는 거의 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당장 몇 개월 뒤에 중국에 혼자 갈 생각을 하니 상황이 달라졌다. 잘못하면 정말 회사일은 물론이고 살아남는 것조차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일주일에 10시간씩 1:1 개인과외를 하면서 중국어를 공부했다. 당시 야근은 물론 업무 자체도 많던 시절이라 정말 피곤했지만 살아남기 위해서 공부해야만 했다. 실제 파견을 가서도 정말 많은 시간을 투자해서 중국어를 공부했었는데,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외국어 공부를 그렇게 열심히 해본 적은 없는 것 같다.
그렇게 공부를 했다 해도 절대적인 시간 자체가 부족했기에 파견 시점에 나의 중국어 실력은 이제 막 기본 과정을 이수한 정도였고, 당연히 실제적인 현실 문제를 중국어로 해결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리고 그런 상황 속에 사전 출장 날짜가 다가왔다. 사전 출장은 본 파견 전에 미리 파견 도시에 가서 집을 구하고 은행 계좌를 만드는 등 생활 인프라를 미리 확보하러 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중국어가 안 되는 상황에서 이러한 미션들, 특히 가장 큰 문제였던 집 구하기를 어떻게 해결할지 고민해야 했다. 당시 출장을 가는 도시가 과거와 달리 한국인들이 많이 빠져나간 상황이라, 다른 도시들처럼 한국인(주로 조선족)이 운영하는 부동산이 없었다. 그래서 다른 방식으로 나를 도와줄 사람들을 찾아야 했다.
우선 숙소를 호텔이 아닌 에어비앤비를 활용하기로 했다. 당시 나는 에어비앤비를 한 번도 써본 적은 없었으나, 대충 어떤 개념의 서비스인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영어를 사용할 줄 아는 호스트를 만나 그를 통해 정보를 얻고 도움을 받을 생각이었는데, 실제로 이 계획은 기가 막힐 정도로 맞아떨어졌다. 당시 내가 찾아갔던 에어비앤비는 중국계 캐나다인, 중국계 미국인인 두 부부가 운영하는 곳이었는데, 사전 출장 당시 은행계좌를 만들고 핸드폰을 만드는 모든 과정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또한 이후 본격적으로 집을 구할 때도 이 부부가 소개해준 사람을 만나 보증금 없이 셰어하우스에서 지낼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 둘 중 남편분은 과거 미국에서 MBA 교수였던 터라, 우리 회사와 내가 하는 일들에도 관심이 많아서 가끔 저녁을 먹으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는 했다. 그리고 나는 이 모든 대화를 영어로 진땀 빼면서 하느라 뜬금없지만 중국에서 영어 실력도 늘어나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이외에도 타국의 낯선 도시에서 나를 도와줄 사람들을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 찾아냈다. 코트라는 물론 회사 선배의 유학시절 친구, 과외 선생님, 인터넷 카페 뒤지기, 한인 유학생회, 현지 한인 교회, 별도로 통역 고용하기 등등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사용했다. 때로는 인정에 호소하고 때로는 내 사비로 아르바이트를 고용해가며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회사 생활을 몇 년 한 지금도 사실 누군가에게 부탁하고 뜬금없이 연락하는 것이 쉽지 않은데, 그 시절에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역시 살아남아야 한다는 절박함 때문이었던 것 같다.
유학이나 해외근무를 해본 사람은 모두가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해외에 도착한 첫날 방에 혼자 남았을 때의 그 기분을. 나 또한 너무나 막막하고 걱정 투성이었지만, 하루 이틀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다 보니 어느새 한국으로 돌아갈 날이 다가왔다. 그리고 불과 몇 개월에 불과한 파견이었지만 정말 많은 것을 배우고 돌아올 수 있었다. 입사 전 대학생활에서 가장 아쉬운 점이 어학연수나 교환학생을 못 가본 것이었는데, 파견을 통해 월급과 생활비 지원을 받으면서 비슷한 생활을 해본 것이 너무나 큰 혜택이었다. 또한 한국에만 있었다면 몰랐을 중국사람들의 생활과 인식, 그들의 경제구조를 지켜보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를 키울 수 있었다.
만일 내가 중국을 모른다고 주저했거나, 조금 더 준비가 된 후에 지원해야지라고 생각하고 그 메일을 회신하지 않았다면, 나는 비슷한 기회를 잡을 수 있었을까? 그렇게 집중력 있게 중국어를 배우고 세상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었을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가 선발된 이유는 억세게 운이 좋아서였지만, 그 운을 잡을 수 있었던 이유는 일단 시도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걱정되고 겁이 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전했기에 삶을 바꾸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닥친 상황에 맞게 대응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공부를 하고 준비를 할 수 있었다. 준비된 자가 기회를 얻는 것은 맞지만, 때로는 기회를 얻은 자가 준비를 하게 되는 것도 맞다고 본다. 이 경험 이후 나는 항상 무언가를 해야 할 때 그것을 해야만 하는 상황에 나를 던져 넣으려고 노력한다. 작게는 스터디 그룹을 만들거나 돈을 내고 학원을 등록하는 것, 크게는 일부러 새로운 스킬을 써야만 하는 업무를 맡으려고 하는 것이다. 지금도 늘 새로운 것을 시도할 때마다 걱정되고 익숙하지 않아 자신감이 떨어지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도전하려고 한다. 그러면 또 다른 준비와 성장의 시간이 올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글을 쓰고 생각을 담는 모임, #쓰담 의 멤버로 함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