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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과 그림자 - 김민영

농담의 거리, 다정의 기술

by 세잇
농담은 우리를 다치지 않게 가까워지게 하고, 또 다치지 않게 멀어지게 하는 거리의 기술이다.


김민영의 ‘농담과 그림자’를 읽으며 내가 가장 먼저 붙잡은 말은 이것이다.

'농담의 본질은 거리에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 사람과 상황 사이를 미세하게 재단하는 촘촘한 간격. 농담이란 결국 그 간격을 손끝으로 더듬으며 서로의 모서리에 긁히지 않도록 매만지는 일이다. 적당히 웃기고, 적당히 가볍고, 적당히 비켜간다. 그 ‘적당히’의 감각이야말로 이 책이 말하는 세계의 윤리다. 너와 나 사이에 다리 대신 가느다란 줄을 걸고 건너는 법. 한 발 헛디디면 떨어질 수 있으니 농담은 사실 꽤 진지한 균형 감각이다.


저자는 공장에서, 길에서, 교실에서, 오가는 길의 창가에서 세계를 본다. '오가는 길 위에서 떠오른 몇 개의 장면들로 이 책을 썼다'는 고백처럼, 그의 시선은 새로운 장소를 만들기보다 이미 있는 자리의 기척을 오래 듣는다. 긍정도 부정도 아닌 태도. 냉소 바로 전의 유머. 그러니까 그는 현실을 변호하지도 고발하지도 않은 채 그것을 견딜 수 있게 만드는 아주 얇은 농담을 건넨다. 한밤중에 전화를 걸어도 '괜찮아'라고 말해줄 사람 같은 문장들. 이 책이 지침서가 아니라 술친구에 가깝다는 소개는 정확하다. 해답 대신 체온, 처방 대신 체류.



나는 일상에 대한 그 기술에 오래 머물렀다.

'일상은 단단한 것이다. 같은 시간을 살아가는 타인의 아침이 막연하고 낯설 만큼, 각자의 일상이란 견고한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어느 날 불쑥 나타난 작은 균열 하나에 쉽게 무너지는 것이기도 하다. 별다른 일 없이 반복되는 오늘이 내일로 이어지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너무나 단단해서 연약할 수밖에 없는 일상을 흔들림 없이 지키는 일은 그래서 필사적이고 절박한 일이다. 일단 쳇바퀴에 올라탄 이상 쉬지 않고 달려야만 하고 그것이 쳇바퀴를 유지하는 유일한 방법일 뿐이다.'


너무 단단해서 연약할 수밖에 없는 것, 그게 우리의 하루다. 단단함과 연약함이 한 몸인 모순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어쩌면 쳇바퀴처럼 도는 내 인생을 그저 비난할게 아니라, 그 속도를 ‘나의 보폭’으로 조정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내가 줄곧 실패했던 건 쳇바퀴가 싫어서가 아니라 내 발의 호흡을 잊고 달렸기 때문이었다. ‘달리면 유지된다’는 말은 곧 ‘멈추면 무너진다’는 협박이지만, 작가의 문장은 균열을 무서워하지 말자고 속삭인다. 무너질 수 있다는 사실이 우리를 더 조심스럽게, 서로에게 더 다정하게 만든다고.



이 책에서 가장 섬세한 도구는 말하지 않은 말이다.

'입 밖으로 꺼낸 말보다 속으로 감춘 말이 언제나 더 많다. 늘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당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보다는 무슨 말을 하지 않았는지가 항상 더 중요하다. 말하지 않음으로써 말해지는 수많은 의미들. 누군가의 말을 듣는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저 말들이 교묘하게 피해 가고 있는 어떤 지점들을 찬찬히 들여다보는 것. 말의 빈자리, 도넛의 구멍을 찾는 것. 곳곳에 감춰져 있는 말의 여백에 따라 우리가 뱉은 말은 진실이 되기도, 진실처럼 보이려 애쓰는 거짓이 되기도, 허울에 감춰진 욕망이 되기도 한다.'


농담은 대체로 그 구멍을 향해 던져진다. 정답을 비껴가며 생기는 여백, 웃음이 새어 나오는 틈. 생각해 보면 관계란, 결국 서로의 말하지 않음 들을 보호하는 계약이다. 내가 침묵으로 지킨 것이 너에게 상처가 되지 않도록, 네가 삼킨 말이 내게 무심한 칼이 되지 않도록. 이 책은 그 여백을 돋보기로 들여다본다. 그래서 그의 농담은 누군가를 이기려는 재치가 아니라, 다치지 않게 하려는 주의다. 재치가 아니라 주의. 이 감각은 문장과 문장 사이에도 번진다. 마침표를 찍을 때조차 그는 독자에게 숨을 쉬라고, 너무 빨리 결론으로 달려가지 말라고 괄호를 열어 둔다.


결핍에 관해서도 단단히 말한다. '결핍을 대하는 태도는 결국 삶을 대하는 태도'라고. 결핍을 흉터로만 대할 것인지, 수납공간으로 대할 것인지, 그 차이가 우리의 시간을 만든다. 나는 이 문장을 읽다 말고, 오랫동안 비어 있던 책장 한 칸을 떠올렸다. 채워야지, 채워야지 하면서도 비워둔 칸. 왜 그랬을까. 아마 그 빈칸 덕분에 방 안의 공기가 돌았기 때문이겠지. 결핍을 대하는 우리의 습관—허기를 몰아 채우거나, 빈자리를 제 자리에 두거나. 김민영은 후자를 조용히 편든다. 비어 있음 덕분에 들어오는 것들, 늦은 오후의 그림자, 초여름의 바람, 낯선 웃음. 결핍을 통로로 대하는 태도는 삶을 급조된 완성의 전시장으로 만들지 않는다. 아직, 다, 아닌 채로 살아도 되는 허락.


저자가 사랑을 부를 때도 마찬가지다. '연애는 몇 개의 장면들을 주섬주섬 그러모아 놓는' 일이라고, 그는 무심히 말한다. 우리는 흔히 정의를 먼저 원하지만, 사랑은 정의를 비웃는다. 장면들의 다발. 창틀에 걸린 젖은 수건, 문턱에서 멈춘 미안함, 다투고 난 뒤 같은 방향으로 걷는 두 사람의 발끝. 정의보다 장면이 정확하다는 걸, 우리는 뒤늦게 안다. 그래서 '낮의 바다는 살아 있는 것 같았고, 밤의 바다는 삶을 삼킬 것 같았다'는 그 짧은 문장이, 연애의 전 생애를 한 번에 건드린다. 빛과 어둠의 심장 박동, 두려움과 생동의 교차. 사랑을 구한다는 건 어느 쪽 바다를 볼지 고르는 일이 아니라 그 변화를 견디는 일에 가깝다는 것을.


희망과 절망에 대한 그의 태도는 잔혹할 만큼 소박하다. '절망은 허망이다. 희망이 그런 것처럼.' 냉소인가. 아니다. 나에게 이 문장은 방향을 잃지 않기 위해 지도에만 집착하지 말자는 충고처럼 들렸다. 희망과 절망은 거대한 표지판이고, 우리는 그 사이에서 밥을 먹고 설거지를 하고, 믿을만한 타인을 사랑하고, 서로에게 농담을 건넨다. 표지판을 신성화하면 길을 놓친다. 그러니 표지판은 이따금 보되, 내딛는 내 발의 감각을 믿자. 오늘의 소소한 웃음이 내일의 삶을 지탱하는 데 더 유효할 수 있다. 거창한 약속들이 실패했을 때도 작은 농담은 남는다. 산 자의 유머. 살아내려는 사람의 미세한 기술.



내가 웃음 뒤로 오래 생각한 문장은, 펑크에 대한 빌리 조 암스트롱의 대답이었다.

“누군가 펑크가 뭐냐고 물으면 나는 쓰레기통을 걷어차며 ˝바로 이런 거야˝라고 말할 거야. 그럼 그 사람이 다시 쓰레기통을 발로 차며 이게 펑크냐고 물으면 ˝아니 그건 유행을 따라 하는 거야˝라고 말할 거야.”


농담도 그렇다. 살아 있는 농담은 쓰레기통을 걷어차는 발의 온도를 가진다. 흉내 내는 농담은 유행의 표정을 갖는다. 이 책의 농담은 후자가 아니다. 저자는 무엇을 깨부수는 제스처보다, 왜 걷어차고 싶은지의 정황을 오래 보여준다. 억울함, 고단함, 지루함, 우스움—그 감정들의 뒤엉킴이 농담의 연료임을, 그는 그대로 보여준다. 그래서 그의 유머에는 품이 있고, 어둠에는 윤리가 있다.


저자는 ‘말들의 흐름’이라는 이름에 어울리게 말의 물살을 믿는 사람이다. 문장을 세게 밀어붙이지 않고, 흐르게 둔다. 공장 노동자의 몸, 교실의 공기, 밤 버스의 창—그 틈으로 스며드는 말들. 그래서 이 책은 펼칠 때마다 다른 장소가 열린다. 어느 날은 퇴근길 담장의 회색이 진하게 보이고, 어느 날은 빈 교실의 흰빛이 날카롭다. 농담과 그림자 사이를 오가는 그의 걸음은 빠르지 않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아마도 그 느림일 것이다. 감정이 잦아들 때까지 기다릴 줄 아는, 말이 스스로 말이 되게 두는 속도.


농담이 생활화되어 고착된 나 이기에, 핀잔도 꾸지람도 헛헛함도 잘 삼키지만. 이 책 덕분에 삶의 기술을 하나 더 배웠다. 누군가와 가까워지고 싶다면 농담을 하자. 그 농담의 목적을 웃기기가 아니라 다치지 않기에 두자. 누군가와 멀어지고 싶다면 침묵하되 그 침묵의 모양을 무시가 아니라 여백으로 만들자. 단단한 일상을 사랑하되 그 단단함이 부서질 때 나를 탓하기 전에, 부서짐이 나를 더 유연하게 만드는지를 보자. 결핍을 채우려 하기 전에 그 빈칸을 통해 무엇이 드나드는지를 먼저 듣자. 그리고 무엇보다, 제때의 농담을 잃지 말자.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서로를 잃지 않는 방식이니까.


첫 문장을 다시 불러와 끝을 맺는다. 농담은 거리의 기술이다. 그리고 그림자는 그 거리를 걷는 우리의 모양을 비춘다. 가까워질 때의 굴곡. 멀어질 때의 음영. 저자의 문장들 덕분에 나는 오늘도 조금은 더 조심스럽고, 조금은 더 다정하게, 당신과 나 사이의 줄을 건넌다. 웃음은 가볍지만, 건너는 일은 언제나 숙연하다. 이 숙연함을 알고 웃는 사람들 사이에, 우리의 작은 공동체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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