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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두름의 지혜

노년을 꾸려가는 삶의 기예

by luckyjodi

"오늘 꼭 제출해야겠는데, 도와주실 수 있겠습니까?"


서류 작성을 도와 드리다 보면 자주 마주하게 되는 상황이 있다. 기한이 두 달도 넘게 남았는데, 당일 처리를 부탁하시는 것이다. 시니어 리빙의 모든 주민이 다 그러시진 않지만, 상당수가 그런 편이다. 메디 캘 (Medi-Cal) 갱신 서류이든, 교통 할인 카드 갱신이든, 기한이 두어 달 남아도 모든 처리는

지금 당장. 롸잇 나우. Right now. 나는 내 손님들의 리듬에 맞춰 일이 몰리는 날만 제외하고는 당일 처리를 해드렸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에는 이러한 행동 패턴에 대한 의구심이 남아 있었다. 대체 왜 이렇게 서두른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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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5월, 조카가 한국에 다니러 갔다. 모처럼 인편이 생겼다며 신이 나신 엄마는 조카의 한국행이 정해진 직후, 필요한 물건 리스트를 보내라고 하시더니 바로 쇼핑에 돌입하셨다. 엄마에게 조카가 미국 돌아올 날까지 두 달도 더 남았으니 천천히 다니시라고 했다. 그러나 엄마는 이미 마음을 굳히신 상태다. "얘, 내가 한 달 뒤에 눈이 또 안 좋아질지, 무릎이 아파서 못 나가게 될지 어떻게 아니. 나이 먹으면 내일 일을 더 모르는 거란다. 그래서 뭐든지 미리미리 해둬야 해. 너도 내 나이 돼봐. 그때는 알 거다."



나는 엄마의 말씀에 무릎을 '탁' 쳤다. 손님들도 어쩌면 '우리 엄마처럼 몸의 컨디션을 장담하기 어려워 그동안 급행 처리를 원하셨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모르고 보면, 일찌감치 일을 처리하는 것을 안달 부린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속내를 알고 나면 매사를 차질 없이 처리하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다.



한두 가지 이상의 지병 관리를 하면서 살아가는 노년층에겐 건강 상태를 장담할 수 없기에, 일 처리에 있어서 기한보다 앞서 나가는 삶의 지혜가 필요했으리라. 학교에서 노년의 건강과 심리, 복지 프로그램 등 많은 이론을 배웠지만, 나는 결코 노년의 삶을 잘 안다고 말할 수 없다. 그 나이를 살아보지 않으면 절대 알 수 없는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내 손님들은 연약한 몸을 이끌고 살아가며, 때로는 예측불허의 응급 상황을 겪기도 했을 것이다. 그런 과정을 통해 몇 발짝 앞서가야, 만사에 차질이 없다는 것을 노년의 삶을 통해 깨달으셨을 것이다.


학교에서 이론은 배웠으되 실전 경험이 없는 나는, 엄마 말씀처럼 그 나이가 되어 보지 않아서 서두름의 이유를 전혀 몰랐다. 이 깨달음의 순간 이후 나는 손님들의 급행 신청에 대해 단순한 이해를 넘어, 존경심마저 들기 시작했다. 원숙한 노년의 삶의 기예에 감탄하면서. 삶에는 이렇듯 변주의 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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