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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든짱 Nov 21. 2019

집 못 구한 나는 이 도시의 유령이었다

남의 집 전전하며 깨끔발로 살던 시절들

나와 남편은 결혼할 때까지 줄곧 원가족과 함께 살았다. 부모님이 말뚝 박은 곳과 다닌 대학, 직장이 모두 어떻게든 1일 생활권 안에 들어 있었던 행운과 동시에 그것이 모두 서울 안이어서 감히 독립할 생각 못했던 어쩔 수 없음이 겹쳐진 일이었다. 결혼을 하고서 독일로 나갈 것이라 결혼 준비에서 가장 결정적인 파트이자 주된 갈등의 소재가 될 수 있는 '집 장만'이 빠졌던 것은 그래서 천만 다행이었다. 그 대신에 우리는 고국에서조차 해본 적 없던 세입자 역할을 문화 차이와 언어 장벽 콤보를 쳐맞은 채로 떠맡게 되었다.

생애 처음으로 하게 된 남의 집 살이는 곤란함의 연속으로 시작되었다.
한국의 경우에 대해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없지만, 독일의 경우 세입자들이 집을 비우게 되어 친구에게 잠깐 맡긴다 칠 수 있는 2차 세입자를 들일 경우에도 집주인에게 반드시 언질을 해놔야 하는 경우가 있다 했다. 여러 명의 세입자가 한 집의 방들을 갈라 쓰는 WG의 경우에는 다른 세입자들에게도 양해를 구해야 한다고도 말이다. 사실 현관문을 비롯하여 가장 민감한 영역인 화장실과 부엌을 같이 쓰는 입장이니 후자쪽이야 일리가 있어 보이긴 한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 대신 몇 달을 살든 친구 재워준답시고 하루이틀 데려오는 정도든 다룬 세입자들이 얼마든지 그러마고 하더라도, 막상 집주인이 문제를 삼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 계약서상 그런 2차 임대를 금지하는 경우까지도 있었다. 집의 임대가 부동산을 경유하는 선착순 개념이 큰 한국에서와 달리, 독일에서는 집주인의 수락이 계약의 성사를 좌우하는 만큼(집 아무나 보여주지도 않는다고) 허락한 사람만 집에 거주할 자격을 주는 느낌인가 싶기도 하고, 공과금과 관련하여 실리적인 문제가 얽히기 때문인 듯도 했다. 독일에서는 순수 집세인 칼트미테(Kaltmiete)에 공과금의 예상액을 더한 밤미테(Warmmiete)를 실질적인 월세로서 집주인에게 지불하는데, 분기별로 난방비와 전기세, 수도세 등을 실제 사용한 만큼 정산하여 더 걷거나 환급해주는 나흐짤룽(Nachzahlung) 제도가 있어서, 돈 문제 연관하여 실거주자가 누구인지가 예민한 사안이 되는 듯도 했다. 실제로 WG로 사는 애인의 방에서 며칠 지냈더니 그 집의 주인이 현관문 CCTV로 출입 내역을 확인했다며 더부살이한 날수만큼 돈을 더 내라더란 경험담도 들었다.

우리가 처음에 독일에 발 딛고서 남의 방을 얻어 지낸 방식이 바로 이런 방식이었다. 총 네 달. 운터미테(Untermiete, 재임차)이되 집주인에게 고지되지 않은.

첫 두 달 지낸 집은 건너건너 아는 사람이 집을 쯔비셴미테(Zwieschenmiete, 한 임차인이 거주하지 않는 기간 동안 자신의 계약을 유지한 채로 세를 놓거나, 임차인과 그다음 임차인 사이의 비는 기간을 임대하는 형태. 그래서 영어의 between에 해당하는 zwieschen이 접사로 붙었다.)로 구했는데 다른 도시로 발령이 나면서 대신 그 기간을 채워줄 사람을 구하던 것에 응한 것이었다. 말하자면 운터-운터미테 정도였을까. 두 번째는 우리가 넘겨받기로 한 집에 전(前)세입자가 계약을 해지하지 않은 상태에서 미리 들어가서 산 것이었으니 심정상 나흐미터(Nachmieter, 다음 세입자)로서 들어간 것이었으나 이 역시 우리가 집주인과 직접 계약을 한 게 아니었던 만큼 운터미테는 운터미테였다. 다른 도시에 집을 아직 구하지 못한 전 세입자가 아직 짐을 빼지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인데, 무엇이 됐든 집주인과의 직접 계약이 아닌지라 당당한 일이 아니었기는 매한가지였다.

에어비앤비 파투와 호텔 전전 생활의 끝에 일주일 정도 춘희 씨네서 지내다가, 첫 번째 운터미테 제안을 받았을 때 우리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역시 시한부 살이가 될 것이었지만 에어비앤비가 아무리 저렴해도 하루에 4만 원보다는 한 달에 70만 원이 훨씬 저렴해서, 그리고 계속 옮겨다녀야 한다는 스트레스와 가상의 물리적인 노력을 배제할 수 있어서 당연히 우리는 기꺼이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래서 우리는 집주인으로부터 월세 임차한 사람이 몇 달 동안 세 놓은 집을 빌려 살던 사람으로부터 또 빌린 꼴이었다.

동네는 지금 생각해도 위치가 굉장히 좋은 곳이었다. 일단 우리는 그 집이 자리한 구역 펨펠포트(Pemfelfort)를 아현동 쯤이라 불렀는데 근처에 웨딩드레스 샵들이 많았고 시내로부터 버스 및 트램 10분 안짝으로 멀지도 않은 데다 동네 근처에 오밀조밀 예쁜 가게들이 있었기 때문으로, 우리가 서울 서편향적인 인간들만 아니었다면 논현동이나 역삼동이라고 해도 됐었을 법하다. 그런 만큼 월세도 좀 되는 편이었다. 정확한 평수는 모르지만 그래도 한 8평에서 10평쯤은 되는 방은 거슬리지 않는 구조로 구성되어서 작은 부엌과 화장실도 제대로 붙어 있고 심지어 다른 집들의 정원들을 면한 발코니도 있었다. 이것이 580유로, 그러니까 70만 원. 내가 독립을 시도했었을 때 1000/70에 작은 창문 열면 옆 건물 벽이 시야를 메우던 4.5평짜리 원룸에 모든 의지를 내려놓았던 걸 생각하면, 서울의 부동산 시장에 비했을 때 굉장히 호사스런 임대였던 것이다. 그 집에 살 때를 떠올려 보면 인덕션이 없어서 낡은 헤어트(Herd, 무쇠 전도체로 조리기구에 직접 열을 가하는 전열기구. 독일에선 가정집에서 가스가 안 쓰인다)에 요리하느라 불이 늦게 올라왔던 것이나, 원래 살던 사람이 북유럽계 남성이랬어서 그랬는지 화장실 거울에 내 눈밖에 안 보였던 것 빼고는 아쉬웠던 기억이 없다. 아, 샤워부스가 작아서 샤워할 때면 샤워커튼에 몸이 부딪었던 도.
원 임차인이 완전히 집을 비운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집의 대부분은 원 임차인의 물건들로 가득차 있었다. 서로의 편의를 위해, 그리고 서로가 의심할 상황을 만들지 않기 위해 되도록 비워주는 것이 낫겠지만, 1년도 아니고 두어 달인데 어쩔 수 없는 일. 그 집의 수납 공간은 대부분 원 임차인의 것들로 채워져 있었으므로 옷들을 캐리어에 넣었다가 뺐다가 혹은 몇 개 남은 옷걸이에 거느라 낑낑매거나 하는 것은 엄연히 수고로운 것이었음에도, 누군가가 삶을 채워두었던 공간이었어서 얻는 장점도 분명히 있었다. 우선 부엌에 식기며 조리도구가 다 갖춰져 있어서 당장에 이를 장만할 노력을 덜었다. 그리고 원 임차인으로부터 임차했던 우리의 직접 임대인이 그곳에 지내며 쓰고자 사놓았던 한국식 조미료들도 남아 있어서 우리의 조리 질을 높여줄 수 있었다. 원 임차인이 갖춰놓았던 유럽식 조미료들 덕분에 뭔가 실험을 해볼 수도 있었고. 집의 분위기도 유럽에 왔다는 감각을 한껏 충족해주었다. 당시 지내던 집의 원 임차인이 미술 전공자였던 덕분에 한 벽면 채우며 낮게 깔린 책장은 화집들로 가득차 있었다. 커텐 대신 맥락이 이어지지 않는 다양한 무늬의 스카프들로 창이 꾸며져 있었고, 역시 제각각인 화분들과 무심한 듯 어울리는 오브제들이 있었다. 얇은 스카프의 색을 머금은 햇살이 스미는 그 창가의 목재 테이블에서 화집들을 뒤적이거나 외국어 숙제를 하는 시간은 내가 어딘가 다른 곳에 정말로 당도했다는 감성을 돋우기에 충분했다.

이런 편의와 멋짐에도 불구하고 그 샤워 커튼이나 화장실 거울의 위치는 실질적인 생활에서 소소한 스트레스를 주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림의 존재에 어떠한 불만이나 대안을 제기하지 못한 채 최대한 흔적을 남기지 않고 생활하는 것이 쯔비셴미테로 지내는 기간의 과제였다. 화집을 마음껏 뒤적였어도 가름끈을 원래 쪽수에 맞춰두는 것처럼.

임차인으로부터 임차한 사람에게 또 임차했다는 것은, 그리고 그것이 비공식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은, 그러니까 여러모로 조심스러운 것이었다. 원 임차인과 임대인 사이에서 이런 상황이 어떻게 관리될지 모르는 우리의 상황에선 더더욱. 그러니까 계약서상 운터미테가 불가능하게 되어 있을 수도 있다는 불안한 마음에 일단 지레 겁을 먹고, 또 본 적도 없는 원 세입자의 낯을 걱정해준다는 마음으로, 있는 듯 없는 듯 살도록 노력해야만 했다. 총 5층짜리 건물에 열 집 안 되는 집들이 살고 있었고 우리가 빌린 집이 있던 4층에는 우리 말고도 두 집이 더 있었으니, 우리는 이웃들에게 어떤 감각으로도 특이하게 인지되지 못하도록 노력하였다. 들키기라도 한다면 우리를 뭐라 설명할 것인가. 쯔비셴미테가 흔한 방식이지만 우리는 집주인도, 원 임차인도 허락하지 않은 형태의 거주자였다. 심지어 한 명이 살겠다고 빌린 집을 다른 한 명이 빌렸는데 우리는 둘이기까지 했으니. 그래서 우리는 옆집 목소리가 창문을 타고 벽을 타고 계단을 타고 울려오던 것을 기억하며 목소리를 낮췄고, 어느 집이 무슨 요리를 하는지 계단참에 음식 냄새가 가득할 때면 서양인이 예민하게 인식한다는 냄새를 풍겨서는 안 되겠다고 기억해두는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이 건물을 관리하는 하우스마이스터린(Hausmeisterin, 건물 관리인)으로 추측되는 중년의 여인이 내게 말을 거는 상황이 발생했다. 어학원 갓 다니기 시작한 내게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었는데, 나는 그녀가 하는 말을 알아듣지도 못하면서 "나는 그의 친구다. 나는 잠깐만 머무른다." 따위의 말을 지껄여댔던 듯하고 결국 내가 손짓발짓눈치로 간신히 짐작한 것이라곤 현관 밖의 이름표(Namenschield)를 바꾸라는 것이었다. 동호수 또는 층수로 실거주자가 지칭되는 한국에서와 달리 이곳에서는 현관 인터폰과 우편함에 거주자 이름을 적어놓기 때문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냥 오지랖 넓은 이웃이었을 수도 있고 건물의 청소만 책임지는 사람일 수도 있는 등 그녀의 정체가 어느 모로도 여전히 짐작 안 가지만, 어쨌든 '들켰다'라는 마음에 혹시라도 별일 없기를 바라며 조마조마하게 며칠을 났던 기억이 난다.

앞서 말한 나흐짤룽도 걱정이었다. 우리가 펨펠포트의 집에 머물렀던 두 달은 바야흐로 연말. 한국보다 해가 짧아져 다섯 시면 해가 지고 아침 여덟 시가 되도록 해가 뜨지 않던 11월과 12월. 한국보다 기온은 높지만 습한 날씨에 옷가지로 뼛속으로 서늘한 습기가 스며들던 그때에, 한국인으로서 무엇이 되었건 '탕'을 땡겨하기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마침 나는 마트에서 우족 자른 것을 발견하였고, 그래서 곰탕인지 뭔지 아무튼 탕을 끓이겠답시고 네이버와 유학생 커뮤니티를 오가며 레시피를 공수하였다. 식재료의 명칭도 다르고 식재료가 가공된 방법도 달라 현지식 레시피가 필요했던지라.
그러던 차에 발견한 것이 '나흐짤룽 폭탄'을 피하기 위해 부루스타를 쓴다는 이야기였다. 뭔가를 오래 끓이면 전기세가 많이 나오니 가중돼 나올지 모를 전기세를 피하고자 전기를 쓰는 전열기구를 안 쓴다는 것.
원 임차인이 집주인과 운터미테에 대해 합의한 바도 모르는데 처음 접하는 나흐짤룽이란 개념까지 맞딱뜨리니 새로운 공포가 발현하였다. 본인이 사모은 가구며 집기들을 지금 누가 쓰고 사는지도 모르는 임차인에게 투척될지도 모르는 나흐짤룽은, 미지인 만큼 크나큰 두려움이 된 것이었다. 본인이 거주하지 아니한 때의 전기세가 월등히 높게 나온 것을 본 원 임차인이 우리를 찾아내어 '나흐짤룽 폭탄'을 돌리는 상황이 너무나도 생생하게 상상되면서 말이다. 그 나흐짤룽이 십만 원일지 백만 원일지 알 수 없었지만, 이해하지 못한 사회 시스템을 통해서 완전히 낯선 종류의 벌금을 상납한다는 것이 상상만으로도 이미 스트레스였다.
그래서 나는 우리에게 청구되든 않든 상당한 액수의 나흐짤룽이 나올 상황을 만들지 않기 위해 전기를 최대한 아껴주기로 했다. 무엇이 전기세를 높이는 데 더 기여하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탕은 먹어야만 했고 부루스타를 살 생각은 없었으니까 우족을 몇 시간이고 고되 전깃불은 끄고 있었던 것이다. 뭐 하나라도 절약해얀다는 마음으로. 그래서 당시 나의 일과는 이랬다. 학원 마치고 1시 반쯤에 집에 와 대강 점심을 먹는다. 그러고 나면 어쨌든 졸음이 쏟아졌지만 꾸역꾸역 참아가며 그날의 숙제를 마친다. 볕이 드는 그때에. 그러는 사이 남향의 집에서 조금씩 볕이 빠져나가게 되고, 그러면 나는 혼자만의 여유를 즐긴답시고 전자책 기기나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거나 노트북으로 애니를 보다가, 해가 져 어둑해진 사위에 눈이 피로해질 때면 비로소 낮잠을 한숨 자둔다. 여섯 시쯤 오후반 수업을 마친 남편이 올 때가 되면 그때에 맞춰 집에서 나가 장을 보고, 남편이 돌아오고서야 불을 켜고 저녁 식사를 준비한다. 그러니까, 나 혼자서는 전깃불을 쓰지 않는다.
이러한 노력들이 나흐짤룽에 실제로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는 지금도 알 수가 없다. 그쪽으로부터 연락이 오는 일은 없었으니까. 결국 그 폭탄이 떨어지지 않았는지도, 떨어졌음에도 그가 감내했는지도 알 수 없다. 어쩌면 애초에 나흐짤룽을 걱정할 상황이 아니었는지도. 지금 우리가 사는 집의 경우 주상복합 건물이어서 공과금을 정확히 산정하기 어려운 것인지 나흐짤룽이 없기 때문이다. 덕분에 아직도 '폭탄' 경험지 못했다.

가상의 공포인 나흐짤룽이 없다고 해도 어쨌든 몰래 산다는 것은 매한가지여서, 지금 살고 있는 집에 미리 들어와 살던 때에도 뭔가 숨죽여 살기는 그대로였다. 이 집의 임차를 넘겨받기로 전(前)세입자와 이야기를 마친 것은 펨펠포트의 집에 들어가고 얼마 안 돼서였다. 에어비앤비 파투로 인해 갑작스레 불안정해진 주거에 스트레스를 받던 남편이 재독한인 커뮤니티 곳곳에 구'집' 글을 올린 덕분이었다. 쯔비셴미테로 살기로 해놓고 갑자기 집이 구해져서 자칫하면 우리 대신 기간을 채워줄 또 다른 사람을 찾아야 할 상황이었지만, 전세입자가 당장에 집을 못 빼는 상황이라 어차피 우리도 들어갈 수가 없어서 생긴 여유가 당시로선 다행이었다. 두 달 뒤 쯔비셴미테 기간이 끝날 무렵에 그 집으로 들어가는 것이 이상적이었는데, 하필이면 전세입자가 이사가려고 하는 동네가 집 구하기 힘들고 집값 상승률이 세계적인 수준이어서 우리가 발걸음을 돌렸던 바로 그 베를린이었다. 그는 10월부터 시작하는 겨울학기부터 대학엘 다니기 위해 일단 몸만 옮겨 살고 있었지만 거주 등록(Anmeldung)을 할 수 있는 집을 마땅히 구하지 못했던 이다. 독일인들이야, 아니 EU 시민들이야 하다못해 부모님 댁에라도 거주 등록을 해놓으면 상관이 없지만 뿌리 없는 외지인들에게는 서류상의 거주지가 매번 명확해야 하는 일. 그래야만 거주 허가로서의 비자를 받을 수 있는 일. 전세입자는 자신이 원래 집을 넘겨받을 사람(우리)을 구했기에 집주인들이 다음 세입자를 구하기 위한 유예 기간을 보장하는 '계약 해지 3개월 전 고지' 조항을 가뿐히 제꼈지만, 막상 해지할 상황에 다다르지 못한 것이다. 거주 등록을 통해 신고되는 해당 집에 사는 인원 수만큼 집주인들이 세금을 내기 때문에 무작정 우리가 덧붙여 등록할 수만도 없는 일이었다. 결국 우리가 펨펠포트의 집에서 머물 수 있었던 두 달이 끝나도록 전세입자는 끝내 베를린에 거주 등록을 하지 못했고, 때문에 우리는 넘겨받기로 한 집에 떳떳이 계약을 하고 들어갈 수 없었다. 베를린에서 사는 그는 여전히 행정상 뒤셀도르프를 떠나지 못했고, 그가 떠나려는 집을 대신 점유한 우리는 행정상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다.
우리는 워킹홀리데이 비자로 간 것이었기 때문에 거주 등록이 의무가 아니었던지라 전세입자의 행정상 거소 이전을 기다릴 수야 있었다. 하지만 거주 등록을 하고 안 하고를 떠나 집주인과 직접 계약을 하지 못했다는 것은 우리 스스로 이 건물의 유령으로 자처하게끔 만들기에 충분했다. 막상 지금 계약서 보면 운터미테 금지 조항이 없어서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지만, 어쨌든 그때도 펨펠포트에서처럼 건물에 거주하는 사람인 것을 들키지 않기를 바라며 살았다. 다행히 세가 놓인 세 층 중 아래 두 층이 모두 병원이어서 낮마다 드나드는 사람이 많은 덕에 녹아들기 좋았고, 우리 층 다른 집은 한국인 둘만 살아서 뭔가 묵인을 기대할 수 있었다. 집주인의 사위로 추정되는 하우스마이스터가 낮이면 건물 안팎에서 특히 정원에서 자주 발견되었기에 괜시리 들킬까 조심스러웠지만 그때는 병원 방문객들 틈에 대충 얼버무려지면 그만이었다. 들켜도 상관은 없을 것이었다. 하지만 괜시리 문제를 만들고 싶지 않은 마음이 지대했다. 어쨌거나 펨펠포트의 집에서 그 부인을 맞딱뜨렸을 때의 곤란이 한두 달이 지났다고 해서 덜해질 것은 없었으니까. 도대체 나를 뭐라고 설명할 것인가, 이전에 설명이 가능이나 할 것인가? 

전세입자가 나흐짤룽이 없다고 귀띔해준 덕분에 그때처럼 전깃불 다 꺼놓고 산다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이는 또 이런 대로 추가 공과금을 다 낼 집주인이 직접 허락하지 않은 사람의 체류를 마뜩찮아할 수도 있다는 걱정으로 흘러가기도 했다.

그리고 당시 운터미테에서의 가장 큰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어쨌든 몰래 산다는 것은 결국 세입자의 권리를 보장받지 못한다는 것이어서.
집의 가장 큰 문제는 온수였다.
이 집을 처음으로 보러 갔을 때 나와 남편의 학원 시간이 맞지 않아 남편만 따로 보러 갔었는데, 당시 내가 그에게 당부했던 것은 단 하나였다. 아니, 당부라기엔 내가 말한 바가 충족되지 않았다고 해서 우리가 이 집을 선택하지 않을 것은 아니었으니 소망성 발언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샤워부스가 넓었으면 좋겠다는 것. 북유럽 아티스트의 집의 경우 나보다 종으로 큰 만큼 비례상 횡으로도 클 그라면 더더욱 걸리적거렸겠다 싶을 정도로, 샤워를 할 때면 좁은 부스 안으로 걸린 샤워커튼이 자꾸만 살갗에 와닿아 불쾌함을 자아냈다. 독일에서 내가 사용한 샤워기들 중 수압이 가장 좋았음에도, 좁은 샤워부스와 그를 더 좁게 만드는 샤워커튼 덕에 이를 넉넉히 누리지 못할 정도였다. 그래서 내가 새 집에 바라는 것은 보다 넓은 샤워부스 단 하나였다.
집을 둘러보고 돌아온 남편은 샤워부스가 널찍하다며 다행이라고 말했고, 그가 찍어온 사진들을 보며 집주인이 구비해둔 빛이 바랜 꽃무늬 자가드천에 해졌는지 일부 다른 천으로 덧대어져 있기까지 한 소파의 존재만 거슬렸을 뿐, 집을 잘 구했다고 자평했다. 하지만 막상 (몰래) 입주하고 나니 널찍한 샤워부스에 그렇지 못한 온수가 문제였다. 화장실에 달린 보일러로 물을 덥혀서 온수가 공급되는 시스템인데 샤워기를 틀어서는 보일러가 작동하지 않았다. 세면대의 온수를 틀어야만 보일러가 작동하는 것이었다. 그마저도 세면대 수도꼭지를 반 이상 잠그면 꺼져버리고 말아서, 혀지는 온수의 반은 무조건 세면대로 향해야만 했다. 그러니까 샤워기로는 그 나머지 반정도만이 나왔다는 것이다. 나로 말하자면 한여름에도 온수로 샤워를 하는 사람인지라 반드시 온수가 필요했는데, 반절밖에 나오지 않는 온수를 두피로 어깨로 등으로 노나 흘리자니, 힘 없는 물줄기는 내 몸을 적시자마자 증발하며 체열을 앗아가곤 했다.
매일 아침이 도전이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다가 7시 반에 일어나, 이불 속 온기를 떨치고는 세면대 수도꼭지를 조절해서 보일러가 돌아가는 소리를 확인하고, 세면대서 나오는 온수를 혹시라도 쓸까 대야를 받혀두고 또 샤워기 수도꼭지와 사투를 벌였다. 다행히 온수와 냉수가 한번에 조절되는 레버식이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이쪽 저쪽 다이얼을 돌려가며 더 큰 괴로움에 처할 뻔했다. 물이 내 몸에 닿는 면적이 적은 만큼 물은 더 따뜻해야 했는데, 또 온도를 높이자니 이 샤워기에 공급될 수 있는 따뜻한 물은 한정된 반면 섞을 찬물만 줄이는 꼴이라, 결국 더 따뜻한 물은 더 가늘어지는 물줄기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리저리 몸을 누비는 물줄기는 진작에 날아간 이불 속 온기의 뿌리마저 앗아갈 뿐이고..
그 짓을 매일 학원에 가기 위해 하자니 나는 매일 학원에서 돌아와 마요르카며 그랑카나리아며 하는 이름들을 꿈꾸다가 혹시 특가가 나올지도 모를 항공권을 찾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학원에서 '~하고 싶다'라는 의미의 보조동사 'möchten'을 배웠을 때 내가 만든 문장은 '나는 따뜻한 나라로 가고 싶다'였다. 볕 짧은 독일 겨울의 계절병인 우울감을, 매일마다의 뼈 시린 샤워가 부채질하고 있었다. 나가기 전에는 피부서 온기를 앗아가는 미진한 축축함이, 길을 나서면 새벽내 비가 쏟아진 거리의 축축한 한기가 하루종일 마음을 괴롭혔다.
더 괴로운 것은 이 고통이 이 샤워기를 쓰는 두 사람 중 내게만 극렬했다는 것이다. 남편은 나보다 추위를 덜 탔고 덜 따뜻한 물로도 샤워를 잘했으며, 학원도 이불을 떨친 지 한참이 되어서야 오후에 가는 것이었으니까.
이를 해결하자면 사람을 불러 보일러를 고치는 수밖에 없었는데, 정식 계약자인 우리에게는 그럴 방도가 없었다. 유학생 커뮤니티에서 수도든 난방이든 무언가가 고장나 주거의 질이 침해당했을 경우 월세를 감면받을 수 있다는 등 세입자의 권리에 대한 경험담들을 종종 만나볼 수 있었지만, 우리는 정식 세입자가 아니어서 그 어떤 권리도 주장할 수 없었다. 전세입자에게 상황을 설명하여 혹 집주인에게 연락해줄 수 있는지 떠보기도 했지만, 막상 사람이 왔을 때 맞이하는 사람이 집주인과 면식도 없고 직접 연락할 수도 없는 우리인 것은 막상 우리에게도 꺼림칙한 일이어서 그의 곤란한 외면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침의 사투가 끝난 것은 우리가 이 집에 들어와 살고 두 달이 지나고서였다. 두 달이 다 차가던 때쯤 전세입자로부터 드디어 베를린에 방을 구했다는 연락을 받은 것이다. 그는 곧이어 이 집에 남기고 갔던 당장 필요하지 않았던 짐들과 세간살이 등을 챙겨갔고(그의 짐이 남아있는 것은 첫 집에서와 마찬가지였지만 지금 사는 집에는 작은 방이 딸려 있어서 그 방에 그의 모든 짐을 다 모아둘 수 있었으므로 우리의 생활에 무리가 없었다) 얼마 뒤, 드디어 우리는 집주인과 떳떳하게! 직접! 계약을 할 수 있었다.
집주인이 우리 집으로 온다는 말에 손님을 맞는 심정으로 귤도 쿠키도 챙겨놨는데 그런 겉치레 하등 필요 없는 순식간의 미팅이었다. 몇 번은 똑같은 것을 복사한 것 같은 계약서에 월세 금액만 고치고(전세입자는 혼자 거주 등록을 했지만 우리는 두 명이 등록할 것이며, 공과금도 더 나갈 것이니) 서명을 했다. 도둑 살림이나마 두 달은 살았던 덕에 집에 대해 살뜰히 살펴볼 수 있었어서 집주인에게 몇 가지 수리를 막힘없이 요구할 수 있었다. 전세를 살아도 못 하나 제대로 못 박는 한국과 달리 대충 원상복구인 척할 수 있게만 해놓으면 상관 없고 세월에 따라 낡을 수밖에 없는 바에 대한 수리들을 대부분 집주인이 부담하기 때문에 그 요구는 기탄없기까지 했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작은 방 형광등, 우리가 쓸 줄은 몰라도 뭔가 낡아서 고장난 게 느껴지는 개수대 온수기, 그리고 대망의 욕실 보일러!
독일에서 방문 수리의 경우 처음 와서 고장을 진단하고, 다음에 다시 와서 고친다는 말에 고쳐주마는 집주인의 말을 듣고서 보름은 더 찔끔대는 물로 샤워할 각오를 하고 있었는데, 이게 웬 일. 정말 다행히도 일주일도 안 되어 내방한 수리공이 그날 바로 보일러를 교체해주어서 그때 이후로 지금까지 여름에도 겨울에도 콸콸 온수 샤워를 즐기고 있다. 정말 다행히도, 마침 그 수리공이 온 날이 엄마가 딸내미 부부 어찌 해놓고 사는지 사찰하러 온 바로 이튿날이기도 했다. 정말 다행히도.

곧이어 해를 넘기면 우리가 이 집에 들어온 지 1년이 된다. 인터넷비까지 합쳐 한달에 75만원 정도를 내는 15평짜리 이 집이 만족스럽지 않을 리가 없다. 굳이 내가 봤던 1000/70의 4.5평짜리 양평동 원룸을 떠올리지 않아도.. 작은 방이 딸려 있어서 친구들에게 자고 가라고 큰소리칠 수도 있고, 베란다에서는 여름내 바질과 깻잎을 대대적으로 키웠다. 지금껏 우리가 전전한 독일 집들이 그랬듯 개수대가 한국의 반뿐이 안 되고 찬장이라곤 그 바로 위에 달랑 한 칸 붙어 있을 뿐이어서 나 혼자서는 윗칸에 모아둔 머그잔도 잘 못 꺼내지만, 그래서 다음에는 부엌 큰 집으로 가고 싶다고 이야기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집이 미운 것은 아니다. 불안한 기간이었지만 어쨌든 두 달을 버티길 잘했을 만큼 이 집은 뒤셀도르프에서도 가성비가 좋은 편이고, 집주인이 구비해둔 가구 이외에 전세입자가 놓고 가는 가구들도 냉장고와 세탁기를 포함했는데도 정말 저렴한 가격에 인수할 수 있었다. 한국인이 대대로 문제 없이 살고 있는 건물이어서 집주인의 '쿨한' 신뢰도 느껴지는 듯하다. 그 쿨함에 비례하여 살뜰한 관리가 부재하는 덕에 집 내부의 가구들이 대부분 낡았지만, 그래도 눈치 덜 보고 지내고 있다. '지붕 집'을 뜻하는 Dachwohnung, 그러니까 맨 꼭대기층이어서 한쪽 천장이 비스듬한 터라 우리가 이삼 일에 한 번씩 머리를 찧는 것만 빼면, 정말 아직까지는 잘 살고 있다. 아 내가 그래서 요즘 자꾸 뭘 까먹나...

펨펠포트의 북유럽 아티스트 집에 커튼 대신 걸려 있던 스카프들.
지금 사는 우리집 지붕을 면한 천장. 동향의 창 덕에 아침마다 갬성 돋는다. 얼마전 집에 혼자 있는데 지붕 수리공들이 창문 앞으로 다녀서 벽 밑에 숨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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