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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든짱 Feb 07. 2020

차원의 틈에 끼여 살고 있다

서른둘과 서른넷, 독일과 한국 그 어디쯤의 감각

방한을 준비하면서, 그리고 한국에서 그리웠던 얼굴들을 마주하고서 어떻게 지내냐는 안부 물음에 나는 스스로를 "차원의 틈에 끼여 있다"라고 지칭했다. 또는 "시공간의 틈에 끼여 산다"라고도.


비행기 티켓을 끊었을 때의 나는 서른하나로서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고서 내가 고국의 친구들과 술잔을 기울일 풍경을 상상하는데 우리가 만나게 될 12월이 내포하는 연말정서가 떠올라 나는 나이를 헤집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나는 n살을 마무리하고 n+1살을 맞이하는 사람들과 함께, 곧 서른넷일 사람으로서 술을 들이부을 터였다. 이를 상상하는 사이에 내 생일이 지나 나는 서른두 살이 되었고, 환승 포함 열여섯 시간 정도의 비행을 마치고 인천공항에 발 디디니 서른셋이 되었다. 밀폐된 동체의 어둠 속에서 설은 잠을 까무룩 몇 번 자내면서 주는 식사를 욱여넣고 나니 서유럽의 한 도시에서 극동 반도 내 고향에 짠, 돌아와진 것이었다.
여행을 가기 위해서든 마중이나 배웅을 위해서든 뒤셀도르프의 공항에 가는 것은 매번 내게 어떠한 감정을 환기시키는데, 바로 독일어 기초 수업을 지지부진하게 몇 달을 듣고 갔음에도 Ausgang(출구) 말고는 어떤 문자열도 기표로서 인식할 수 없었던 입독 첫날의 감각에 비견했을 때 지하철 안내방송도 광고판도 표지판도 대강 다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는 뿌듯한 격세지감이 바로 그것이었다. 인천행 비행기에서 나눠받은 입국신고서에 여행일을 적으라는데 어림잡아 헤아려보고는 400이란 숫자를 적어넣었다. 그 격세지감을 자아낸 400일을 뛰어넘어 다다른, 밝고 쾌적하고 넓고 모든 것이 한글로 가장 크게 적혀 있는 인천공항에서는 그 어떤 색다른 감회도 마주할 수 없었다. 기대했던 반가움도 없이, 그냥 다시 또 여기였다. 내 거주지는 그 이방의 도시이되, 나의 최근을 제외한 모든 것은 서울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지난 연말 12일쯤 되는 일정으로 한국에 후다닥 다녀왔다. 본목적은 다녔던 회사들에서 경력 증명서를 받고(용처가 생길지는 전혀 모르겠다) 해외 IP와 유심으론 접근할 수 없는 어플로 들어놓은 CMA 계좌에서 돈을 뽑는 것. 그 김에 나의 친애하는 술친구들과 나를 잊지 않았으면 하는 사람들을 몰아서 만나기로 했고, 미용실과 치과예도 예약을 해두었다. 이를 준비하던 즈음 나는 다른 나라에서 지내고 있는 친구에게 "한국은 술집이자 미용실이자 치과지"라고 떠들어댔다.
간략히 적었지만 한국에 머무르는 동안 거의 매일 나는 점심 약속, 막간 티타임, 저녁 술자리 등 세 탕을 기본으로 뛰었는데, 그리할 수밖에 없었을 만큼 일정이 짧았던 것은 내가 미니잡(Minijob, 비과세 구간인 450유로까지로 제한되는 독일의 고용 형태)일지언정 외노자였기 때문이다. 시급제 일꾼으로서 한국에 다녀온다는 것은 비행기값에 더불어 체류비를 지출하는 와중에, 가지 않고 일했다면 벌었을 수익을 포기까지 하는 것이었으니까. 그러니까, 더블 마이너스랄까.

독일에서 알게 되어 연락처를 나누고 밥이나 차나 맥주를 나눈 사람들이 국적을 막론하고 열명 남짓 정도 될진대 방한 기간 동안에는 하루에 열댓 명도 더 만난 날도 있었다.
그렇게나 나는 두 공간에서 다른 삶을 살고 있(었)다.
독일에서 나는 알바나 스터디가 아니면 밖에 나갈 일 없는 집순이 아싸로 살고 있되, 한국에서는 30여 년간 축적한 다양한 자리를 가진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가장 좋았던 순간은 전 직장 동료들을 만난 때였다. 나와 비슷한 시기에 회사를 떠난 사람들을, 또 다른 날엔 아예 회사로 찾아가 아직 자리를 지키고 있는 사람들을 만났다. 먼 친척동생처럼 굴 수 있게 해주셨던 옛 사장님 자매도 만났다. 그러면서 나는 언젠가 함께 일했던 사람들, 그들과 일했어서 이름을 챙겨 듣던 사람들, 업계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미담이건 조야한 험담이건 가리지 않고 잔뜩 귀에 담을 수 있었다. 그런 때에 내가 결국에는 더 이상 이 일을 하고 싶지 않겠다고 생각했던 그 지긋지긋한 것들은 여전하거나 더하여서 선배들이 가십인 양 현상만 겉핥아줘도 그 밑에 얼버무려둔 그들의 황망함과 곤란함과 자조가 내 안에서 요동쳐 떠오르는 것이었다. 떠났으나 관성적으로 남아 있는 소속감 같은 것일까. 좋은 글을 기고하는 사람을 볼 때 그의 이력과 다른 글을 살피는 그런 습성 같은 것이었을까. 그러니까, 내가 몇 해를 일한 회사와 그 이상으로 몸담았던 업계가, 내가 꽤 많은 시간을 뿌리내렸던 자리가 있었던 것이다. 크지도 굵지도 억세지도 않았지만, 그래서 쉽게 들어내게 되었지만, 어쨌든 뿌리내렸던 자리.
독일에서 나는 한동안 집과 어학원을 맴돌며 살다가, 또 얼마간을 집과 알바하는 식당을 맴돌며 살았다. 누군가와는 이름과 일상을 나누고 살긴 했지만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과 음식 주문, 서빙, 결제에 필요한 암구호만 주고받는 존재, 그러니까 NPC에 다름아닌 존재였던 것이다. 나는 어느날에 불시착한 아무 기반도 없는 존재였고, 사실 그런 시간을 갖고 싶어서 올 결심을 했던 것이긴 했지만, 실제로 깊은 소속감을 가질 무엇이 없다는 것은 인간적으로 외로운 일이었다. 소속감의 좋은 면만을 누리기 위해 이를 필요에 따라 가졌다 버렸다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니까, 포스트잇처럼.

매일같이 카톡하던 친구들과야 뜸해졌으나마 지속적으로 연락을 주고받고 있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독일에 온 뒤로 먼저 연락하지 못하고 있었다. 시차 때문에 오랜만의 연락(최대한 감정과 텐션과 대화의 밀도를 끌어올려야 한다)을 해도 되는지를 고민했던 것이 가장 우선의 이유였고, 한국에서의 노동의 굴레를 벗어나 있다는 것이 어쩌면 호사로 느껴질 수도 있는데 실제로 번듯한 무언가도 없다는 초라함이 두 이유였다. 그래서 내게 그 '자리'를 만들어주고 있는 사람들에게 오랜만에 만나자며 연락했을 때 조마조마했고 또 기꺼이 받아줌에 고마운 마음이 배가 되었다.
한국에 가기 전 한 2-3주 정도, 사람들을 만날 생각을 하며 이런저런 기념품을 샀다. 사실 만나자고 연락도 안 해놓고 기념품을 먼저 사놓은 경우도 많았다. 여행이며 출장으로 독일에 다녀간 사람이 많아 누구나 한 번쯤 받아봤을 법한 발포비타민 따위로 1년의 체류를 기념할 수 없었기에 뭔가 독일스럽되 흔하지 않고 또 처치 곤란한 쓰레기가 되지 않을 것들을 꾸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제는 생활비를 아낀답시고 집 앞 마트에서 최저가 식료품들 위주로 생활해온 사람은 뭔가 독일스럽거나 독일에만 있을 법한 영특한 군것질거리나 차 같은 것을 스스로 시도해본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이런 차가, 이런 달다구리가 외관상은 센스 있는 선물인데 진짜 괜찮은지 알 수가 없으니 선물용 장바구니 사정이 곤궁했다.
시도해보지 않아도 경험적으로 그럴싸해보일 수 있는 것들을 고르려니 결국 발품을 파는 수밖에 없었다. 마침 크리스마스마켓(Weinachtsmarkt)이 열렸고, 마침 블랙프라이데이가 돌아왔다. 발품은 결국 노동이 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무료 회화 수업과 아르바이트 스케줄 사이, 스터디 하러 가는 길 따위를 쪼개어 여러 상점들을 일별했다. 적절한 것을 노획할 수 있는 확률은 극히 낮았다. 그렇게 시간과 에너지를 들여 여행가방 한켠에 선물들을 모았다.

나는 이 노동의 결과물들을 두고, 내가 전처럼 자주 만날 수 없지만 그래도 마음에 내 자리를 남겨달라는 일종의 뇌물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인천공항의 풍경에서 새삼스러울 것 없음을 느꼈지만, 관계는 꼭 그러지만은 않았다. 제일 첫 술자리에서 나는 오후 네 시에 도착했음에도 한 시간 반을 기다려야만 입장할 수 있었던 유명 횟집에서 나의 술도녀(술꾼 도시 처녀.. 단둘이 취할 수 있는 여성 친구를 내가 부르는 말)와 해후했고, 아무리 드물어도 분기에 한 번은 떨었던 수다를 몰아서 하느라 제한된 두 시간 안에 방어 한 접시를 해치우지 못한 채 퇴거당할 정도였다. 여느날처럼 할 얘기를 다 했는지 뭐는 또 남았는지 생각지도 못한 얘기를 했는지 어쨌는지 기억도 안 날 정도가 되어서야 헤어지는 마음이 너무 뿌듯하면서 또 아쉬웠다. 다시 언제가 될지 모르니. 다음날 또 다른 술도녀와는 1박2일로 시간을 보냈다. 처음 만난 이자카야에서 술 취해서 제대로 기억 못할 것이 무섭다며 정말 천천히 술을 마시면서 격하게 떠들고 토론했다. 결국 취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었지만 1박2일을 함께했다고 해서 그간 나누지 못한 대화를 온전히 충분히 나누었다는 것은 아니었다.
어떤 만남은 점심과 저녁 사이의 어중간한 시간이어서 두 시간 정도에 불과하기도 했고, 어떤 만남은 며칠간 거듭된 아침부터 이어진 일정들 때문에 내가 너무 피곤하여 결국에 귀가 권장을 당하기도 했다. 오랜만이었던 만큼 더 많은 시간을 함께하지 못함에 아쉬웠지만, 시간이 더 많다고 해서 그 아쉬움이 덜어질 것은 아니었다. 내가 인터넷 서점에서 신간 리스트나 베스트셀러 목록을 보며 방백하고 싶었던 순간에 떠올렸던 이들이 서로의 모니터 뒷면을 맞대고 '네이트온 속보' 따위에 한 마디씩 보태던 순간을 역시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은 감격스러운 일이었지만, 애초에 이 모든 것들은 결국 내 '등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개별적인 만남들에 대한 감상들을 갈무리하지 못한 채 나는 허겁지겁 독일에 돌아왔고, 돌아오는 길에 급작스럽게 혹사당한 몸이 뒤늦게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으며(막판에 피로회복제와 감기약을 먹으면서 다녔다) 돌아오자마자는 밀린 알바 스케줄을 소화하는 동시에 한국에서 받아온 외주 일을 쳐내느라 한국 시간도 독일 시간도 아닌 그 어느 시간대를 헤매며 혼몽한 상태로 연말을 보내고 말았다.
사실 한국에서 열몇 일을 보내면서 든 생각들을 모아 독일행 비행기에서 뭔가를 좀 써봐야겠다 한 바가 있었다. 독일에서 인종차별 당하다가 한국 갔더니 대뜸 성차별 당하게 되더라는 이야기 있었고, 교통량 한적한 도로에서 보행자 우선으로 다니다가 횡단보도를 건널 때의 암묵적인 수칙을 잊어버리는 바람에 차에 치일 뻔한 이야기도 있었고, 술집에서 종업원과 주눅들지 않고 시시때때로 의사소통할 수 있음이 얼마나 벅찬 일이었는지, 동시에 술집에서 말조심을 해야만 하는 게 얼마나 신선한 감각인지, 아무 걱정 없이 치과며 미용실이며 피어싱샵에 가서 세밀한 부분까지 상담하며 시술을 받을 수 있는 게 얼마나 편리한지, 은행 일과 휴대폰 관련 일을 처리하기 위해 다양한 콜센터 상담원들과 통화를 겁없이 할 수 있었음이 얼마나 낯설어진 기쁨인지, 엄마 집의 방문자로서 모든 가사를 잊고 지낼 수 있었던 것이 얼마나 안락했는지, 엄마 집의 욕조와 1분 만에 16층을 운행하는 엘레베이터가 얼마나 반가웠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다.
이 모든 감상은 독일 뒤셀도르프 변두리의 나와 남편이 임대한 1.5룸짜리 집에 다다라 엄마와 친구들에게 보내는 메시지에 '돌아왔다'라는 동사를 적어넣을 때 순간적으로 불어닥친 이질감에 다 스러지고야 말았다.


12월 31일, 독일인들이 질베스터(Sylvester)라 부르는 한 해의 마지막날에 남편과 단둘이 일하도록 스케줄이 잡혔다. 일곱 개의 예약이 있었고 예약한 이들 말고는 오지 않아 가게는 한산했다. 어학원을 같이 다녔던 F로부터 자기 집에서 하는 파티에 초대를 받아 일 마치고 가기로 한 참이었는데, 일찍 끝날 것 같아서 마트에 들를 시간이 있으니 뭐 필요한 것 더 있으면 이야기하라는 내 메시지에 F도, 이미 파티에 참석해 있는 G로부터도 이 오지 않아 분명 영어로 소통할 이 파티에 과연 가야 하는 것인지 거리낌이 들었다.
가게 문을 닫고 나올 때까지도 답이 없어, 우선 여느 다른 유럽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집중적으로 미세먼지 포화를 쏟아내기 위해 불꽃 장전한 이들이 몰려든다는 라인강변으로 우선 향해보았는데, 자정이 좀 남았음에도 벌써 불꽃을 터뜨리는 이들 때문에 나는 신경이 곤두서고 말았다. 서울에서 롯데타워나 여의도에서 해마다 선사하는 불꽃놀이부터 특별히 기껍게 느껴지지도 않는데, 바로 옆에서 내 존재를 이질적인 것으로 받아들일 확률이 높은 사람들이 화약을 터뜨리는 것이 공포스럽기 그지없었던 것이다. 몇 번 전화를 걸었지만 F나 G나 연락이 닿지 않기는 매한가지였다. 이 서운함에 공포가 버무려지자 나의 사회성은 0 수렴했고, 그래서 나는 내 바들거리는 모습으로써 남편이 귀갓길을 택하도록 만들었다.
트램을 타고 중앙역으로 가 야간버스로 갈아타야 하는 여정이었다. 그러는 사이에 자정이 지났고, 여기저기서 심지어 차도 한가운데서 터뜨리는 불꽃들 덕에 사위는 한층 희뿌얘졌다. 어디선가는 계속 폭죽이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고 어디선가는 건물 너머로 불꽃이 쏘여 올라갔다. 나는 트램 안에 있었고 또 버스 안에 있었는데, 그 어느 곳에서도 나는 안도할 수 없었다. 얼른 안전한 곳으로 가고싶었다. 이때 내가 그린 것은 도전해보면 환대받을 공산이 큰 F의 집도, 라인강변에서 가깝고 동료들과 술 마시며 여러 새벽을 맞이한 가게도 아니었다.
남편과 임대한 1.5룸짜리 집이 그러니까 이 도시에서, 내가 거주 허가를 받은 독일 전역에서 유일하게 내가 쉴 수 있는 곳이었다.

이 조막만한 안전에 비하면 내가 등진, 그래서 벌충해야 할 시간들은 도대체 얼마나 거대할까. 뇌물 따위로 수습되지 못할..


그 끼어 있음의 감각을 갈무리하지 못해 두 달간 글을 쓰지 못했다.
물론 아직 한국에서 가져온 외주 일감이 아직 마무리되지 못했고, 한국에 다녀온 공백을 채우느라 알바 스케줄이 몰려 있었기도 했으며, 짧아진 볕 덕분에 조금 무기력도 했던 것 같다(낮에 졸리지 않기 위한 나만의 적정 수면 시간이 최소 여덟 시간임을 독일에 오고서 깨달았는데, 요즘 유독 쉽게 잠 못 들고 훨씬 오래 잔다). 그러는 사이에 남편과 나는 비자를 한번 연장했고, 그 비자 연장을 준비하기 위해 법률공증인도 만나고 본에 있는 영사관에도 두 번쯤 다녀오느라 며칠간 스트레스를 받았다. 일하는 가게도 옮겨 적응하느라 마음이 고되어졌고 그사이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가 유행하기 시작해 인종 차별을 당할까 더욱 조마조마한 시절이 되었다(다행히 이로 인해서 당한 적 없는데 아시아 프렌들리 도시인 덕에 웬만해선 없을 것 같다).
그러는 사이 시간은 또박또박 흘러가 벌써 우리우리 설날도 지나고 2020년의 1부가 흘러갔다.
이 포스트를 맨 처음 쓰기 시작했을 때에 쓰려던 것들은 이것과 영 다른 것이었고 그래서 많은 것들을 들어내거나 적기를 포기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같은 이야기일 것이다. 어쨌든 이것은 친구들과 서른넷으로서 이뤘어야 할 것을 통탄하고 새로 알게 된 알바 동료들에게 서른둘이라 소개하는 내 이야기니까. 물론 서른넷으로 이뤘어야 하는 것따위는 정해져 있지 않다.
이 글을 빨리 마무리해야 다른 포스트를 진행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숙제하는 마음으로 업로드한다.


한국에 간 첫날은 작년 가을 다음 겨울 중 가장 추운 날이었고 나는 놓고 갔던 롱패딩을 교복 삼음으로써 한국인의 전통 복식에 발맞췄다.
오랜만에 마주한 문명들.. 뒤셀도르프엔 왕복 8차선 도로가 교차하는 곳이 아마 한군데밖에 없는데 내 고향은 주택단지인 엄마집 바로 앞부터가 그러하다.
구뷔구뷔 펴냈지만 그럼에도 모자랐던 술자리가 한가득이었다. 독일서 이렇게 맘놓고 잔뜩 주문하고 떠들 수 있는 바깥에서의 술자리가 아직 없었다.
한국 가서 커피는 무조건 아인슈패너였다. 문명의 맛..
뇌물을 말했을지언정 받아온 게 더 많았다. 마음은 훨씬 크고..
불꽃놀이가 한창 휩쓸고 지나간 연말연시의 집앞 도로. 밤에 보면 무서울 정도로 한적한 주택간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일 불꽃놀이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안개를 헤치고 집에 가는 기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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