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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든짱 Jun 10. 2020

서유럽 한 귀퉁이에서 생존신고

*아래의 글은 한국녹색당 유럽당원 모임 소식지 <똑똑똑, 녹유> 제16호에 기고된 글입니다.



일하는 식당에서 마지막 근무를 한 날. 15시 이후에는 모든 업장이 닫도록 행정 명령이 떨어진 날이었고, 사장들의 결정이 늦었던 덕에 내가 일하는 식당은 그날 그 저녁 그 플라츠에서 유일하게 연 업장이었다.

월요일, 화요일 내가 일한 그 마지막 이틀간 가게에는 그 시간에 정말로 갈 곳이 필요한 사람들이 와서 시간을 때웠다. 사람 많은 선술집에 가서 단골손님들끼리 대화를 나누어야 할 노인들이, 학교에 의탁시키지 못한 아이들의 에너지를 하루 종일 감당해야 했을 가족이, 퇴근길에 들러 맥주 한잔에 신문을 보는 루틴을 수행해야 했을 중년인이, 반드시 어딘가에서는 매식을 했어야만 할 지적장애인이. 동시에, 그 시간에 늘 오곤 하는 몇몇 단골들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평소의 절반뿐이 안 되는 팁을 받아 들고 매니저와 ‘건강히 지내(bleib gesund)’라고 인사를 주고받은 뒤 돌아오는 우반 안에서, 나는 굳이 말하자면 분노에 차 있었다. 식당에서의 미니잡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으니, 역병의 확산을 사회활동의 표백으로써 지연시키겠다는 독일 정부의 안일한 조치에 명백히 피해를 입은 것이라면서. 역병의 창궐이 전해진 때로부터 그때까지 나는 한 달 반 정도 동안 우반에서며 트람에서며 몸 둘 바를 모른 채 웅크리고 다녔으며, 아무도 내 근처에 오지 않을 법한 구석 자리에서 고개를 휴대폰 액정에 처박고 있었으며, (어차피 구할 수도 없었지만) 마스크를 쓰면 더 비난당한다는 소리에 숨도 조심해서 쉬고 다녔으니까. 그 유난이 무색하게도 코로나는 결국 오고야 말았다.


며칠간 나는 정말 분개하고 있었다. 뉴스를 보고 오는 주한 친구들의 괜찮느냐는 연락에는 구주 지성에 대한 한탄으로 답했다.

분류하자면 나는 나의 생계와 무관한 때의 코로나에는 태평한 소리를 하던 인간이었다. 나는 한식당에서, 뒤이어 아시안 식당에서 일을 했지만, 글쎄. ‘이 음식에 코로나 없니?’ 하는 질문이 없었던 건 아니었지만, 그래서 매출상의 작은 변화가 있기야 했지만 아시아식을 소비하는 현지인들의 양상에 크게 바뀐 것이 없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물론 내가 일한 가게들이 일반적인 아시아 식당 밀집 지역에 있지 않아서 피해를 덜 입은 것도 있었겠지만. 그래서 한국에 있는 내 가족과 친구들의 일상이 바뀌고 있을 때에도 나는 이것을 내 문제로 받아들이지를 못하고 있었고, 같이 사는 사람이 매일같이 코로나 확진자 관련 뉴스를 주워섬길 때에 다소간의 염증마저 느끼고 있었다.


그러다 나의 벌이며 생계며가 직접적으로 위협받은 그때에야 역병을 인지한 것이었다. 군색하게도. 이 나라에서 벌이하던 사람들의 경우에 지원을 받을 수 있었고 그것이 긴급 지원금이 긴급하게 지급되지 못한 한국보다 복지와 기본 소득에 관한 논의가 진전된 나라다워서 보기 좋기도 했지만, 어쨌든 나와 무관한 일이어서 화날 일이었다.


그 알량한 분노에 대해 돌아볼 겨를도 없이 코로나 시대와, 통행금지 비슷한 것을 말하는 시대가 도래하고야 말았다. 그래, 그 분노는 한편으로 피해의식에 기인한 것이기도 했다. 나는 코로나의 본격적인 독일 상륙에 신호탄이 된 하인스베르크 출신 감염자들이 이송된 뒤셀도르프에 살고 있었고, 동양인 커뮤니티가 발달한 이 도시에서조차 중앙역을 홀로 걸어갈 때에 누군가 귓가에 ‘코로나’라 속삭이는 걸 경험함으로써 나를 이방인으로 범주화하게 되었으니까. 그즈음의 나는 실제로 그런 라벨링을 매일같이 겪고 있었다. 손님들은 내게 코로나에 대해 물었고, 내가 왜 독일에 있는지 물었고, 어떤 동료는 나를 무시했고, 나는 늘 더듬거렸으니까.

밖에 나가지 않게 되자 한편으로 나를 무엇인가로 분류하지 않아도 되어서 평온한 나날이 찾아왔다. 집에만 있는 나는 더듬거리지 않았고, 생계를 위해 그 부족한 말재간을 웃음으로 얼버무리며 자백할 필요도 없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같이 사는 사람은 집 안에 있음으로써 평온을 찾는 사람이었고, 밖에 나감으로써 얻는 자조와 우울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나는 더욱 적극적으로 집에 머무르게 되었다.


그러니까, 밖에 나가지 못하게 된 것을 원망했으나 의외로 적성에 맞았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 나가는 것과 못 나가는 것은 명백히 다른 것이어서 원할 때 나가지 못하는 생활이 불편하기는 했다. 집에서 바로 1분 거리에 마트가 있지만 지근거리에서 날아오는 날카로운 눈빛을 피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서, 그리고 무엇보다 그 과정에서 내가 전염될까 봐서 장보기조차 최대한으로 자제했다. 나는 나의 독일어에 자신이 없었고 같이 사는 사람은 그나마 사정이 나았지만, 어쨌든 우리가 병원에 갈 일이 없기를 바랐다. 우리는 공보험의 혜택을 못 누렸으니까. 그러던 어느 날에 나는 살면서 겪은 중에 가장 지독한 생리통을 맞닥뜨려서는 자다 깨서 속을 다 게워내고 잠도 못 들어 한참을 울었지만 와중에 혹여라도 응급실에 간다면 옮을지도 모를 코로나가 무서워서 생으로 참았다.

왜 남의 나라에 머무르면서 대비되지 않은 역병에 걸릴까 봐 두려워하는 삶을 살게 되었을까.

그래서 나는 왜 생계를 걱정하게 되었을까. 그렇게 누구에게랄지 분노가 중첩될 무렵에 나는 내 정신건강을 위해 최대한 긍정적인 구석들을 찾기 위해 애썼다. 이 전대미문의 상황에서 내가 무엇을 깨치게 되었는지라도 짜내야만 했다.


코로나가 독일에 상륙할 때쯤, 가짜뉴스나마 인간의 사회 활동이 줄어들어 어드메에 돌고래나 백조가 돌아왔다거나 하는 기사들을 보며 마음을 진정했다. 연말연시에 기후 위기에 대한 기사들을 한껏 머릿속에 담아두고서 맞이한 2020년이었어서 더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한편으로 그 기사가 페이스북에 잘 들어가지 않는 내게도 노출되도록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가졌었다는 것은, 기후 변화에 대한 위기의식으로까지는 연결되지 않아도 사람들이 생태 문제에 관심을 가질 수 있다는 방증으로도 보였다. 물론 그것이 동물들을 ‘모에화’하는 데서 시작한 것이라 아쉬움은 남지만, 그렇게라도 문명이 멈춘 자리에 대해 한 번이라도 생각해볼 수 있게 해준 게 어디인가.

한국에 있는 한 동지는 네가 돌아올 수가 없는 게 탄소 배출을 줄이는 것이라 생각하라 했고, 실제로 올해 예정했던 내가 사는 곳으로의 여행을 취소하게 된 엄마를 위로한다며 나는 똑같은 말을 내뱉었다. 그때 나는 마침 그레타 툰베리의 태양광 요트에 대해 오래간 생각하고 있었다. 한국에서 오는 소포는 평소보다 두 배는 걸려서 도착했고, 보내는 것은 한국행 비행기를 타지 못하고 되돌아왔다. 그리고 나는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을 상상할 때에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떠올리기에 이르렀다. 어쩌면 우리는 다른 어느 세기를 살게 된 것이었을까.


외출할 용무가 사라진 자리에는 집에서의 여유가 돌아왔다. 초반 한두 주 정도는 정말 매일 열몇 시간은 잔 것 같다. 한국에서 노동하며 살 때에 다섯 시간을 간신히 자며 살다가 바로 입독해서는 어학원에 다닌다고 또 일곱 시에 일어났고, 어학원 시절이 지나 미니잡으로 연명하게 되고서는 가게 스케줄에 생체 리듬을 맞추던 때였다. 한국에서처럼 오래 자지 못할 이유는 없었지만 어쨌든 내가 수면시간을 맞춰야 할 기준이 나 자신이 아닌 어딘가에 따로 존재했다. 그러다가 코로나와 함께 아무 일정도 없어진 때가 왔다. 내가 내킬 때 잠들고 자고 싶은 만큼 자고 나서야 깨어났다. 늦게 자니 수면의 질이 떨어져서 더 오래 잔다나 뭐라나 하는 변명을, 내 연락을 기다리고 있는 엄마에게 하게도 되었지만, 어쨌건 내가 회사를 그만두고 입독할 때에 바랐던 어떤 단절의 시간이 바로 이것이었던 것만도 같았다. 외주 일을 구한 지금에는 잠깐의 추억이 되었지만, 글쎄. 앞으로 다시 이런 때가 있을까.

내가 활용할 수 있는 시간이 늘어난 것은 비록 수면에서뿐만이 아니었다. 가장 게으른 변명인 ‘시간이 없다’라는 핑계조차 씌울 수 없게 된 덕분이었다. 그래서 나는 코로나가 모든 것을 앗아간 이 시간을 모종의 기회로 여기기에 이르렀다. 불규칙한 스케줄에 신체리듬을 맞추지 않아도 될 기회, 겨우내 추위와 미니잡과 외주 일에 미뤄두었던 발코니 청소를 할 기회, 그래서 다시금 발코니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기회, 그리고 시간이 오래 걸려서 할 엄두를 못 냈던 저장 음식을 만들 기회. 당장의 끼니를 때우기에 급급하던 때가 지나니 몇 시간을, 며칠을 기다려서 만들어야 하는 음식들에 도전할 수 있었다. 수제비 반죽을 만들었고, 동치미를 담갔고, 당근 샐러드를 만들었고, 명이나물 장아찌를 담갔다. 이런 것들을 만들게 된 데에는 결국 사재기가 한몫했다. 일주일에 두 번 이상 쇼핑하러 가기가 부담스러우니 한 번 장보러 갈 때에 30, 40유로씩 썼고, 그러다 보니 냉장고에는 매일같이 식재료가 가득 찼다. 혼자 짜는 식단이 아니라 영 힘들었던 육류 줄이기도 그래서 가능했다. 비건식에 대한 대중적인 거부감이 있던 같이 사는 사람에게 잔뜩 사놓은 채소들을 활용해 음식을 만들고서 이렇게 맛있어도 채식이나 비건식이라고 으쓱댈 수 있었다. 그러는 과정에서 매 끼에 관심을 기울인다는 것에 대해 오래간만에 생각하게 되었다. 식당에서 일하는 두 사람이 끼니를 때운다는 것은 식당에서 먹고 오거나 식당에서 먹다 남은 것들을 가져와서 먹는다는 것이었기에. 

그리고, 독일에서 코로나로 인한 사재기를 말할 때에 화장지에 대해서 말하지 않을 수 있을까. 정말 운 좋게 직전에 한 패키지를 사둘 수 있었지만, 언제 우리 집 앞 마트에 화장지가 입고될지 모르는 상태에서 나는 같이 사는 사람과 서로 휴지를 적게 쓰라 다그치고 있었다. 신경 써서 화장지를 한두 칸씩 줄여 나가면서, 나는 금전적으로 보다 풍족하게 살던 한국에서 제로웨이스트에 한 발 걸치려던 것이 떠올랐다. 어플리케이터가 쓰레기로 나오는 게 싫어서 디지털 탐폰을 쓰고, 흡수체가 소비되는 게 싫어서 생리컵을 사던 시절이랄까. 그러다가 입독하고서 이렇다 할 벌이 없이 독일에서 최저가로 장보는 덕에 어쩔 수 없이 소비하게 되는 비닐 포장지들에 얼마나 죄책감을 느껴왔던가. 정말로 어쩔 수 없는 것은 없지만, 근래의 우선순위가 절약에 있었으니. 쓰레기 생산을 아주 피할 순 없지만 사재기 덕분에 소용량으로 여러 번 살 걸 대용량으로 사니 조금이라도 포장지 사용을 줄였다는 알량한 자기합리화를 그래서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는 화장지 XXL 패키지를 노획할 수 있었다. 이튿날 집 앞 마트에서도 화장지를 발견함으로써 일련의 엄중한 규제 상황이 어느 정도 종료되고 있음이 느껴지던 때였다. 실질적으로 역병의 확산세가 잡힌 것인지와는 별개의 문제였지만. 그 화장지 XXL 패키지를 발견한 마트에서 집까지, 한번 마트 계산대 줄 선 김에 그 주치 장을 다 보자고 함께 산 와인 몇 병에 이런 저런 식재료들을 이고 지고 30분 거리를 걸어 왔다. 교통비를 아끼고 밀폐된 곳에 들어가지 않기 위해서. 걸어서 한 시간은 넘게 걸리는 시내까지 다녀오는 길에도 우리는 같은 이유로 걸었다. 그리고 매번의 그 길목에서 우리 외에 마스크를 낀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다른 방식으로 역병을 다루는 나라를 모국으로 둔 덕에 유색인종만이 입과 코를 가린 그 거리의 풍경들이 걱정스럽기만 했지만, 그 풍경이 자아내는 감정이 더 이상 분노만은 아니었다. 미니잡 한두 달치 벌이보다도 본의 아니게 맞이한 사회활동의 공백이 정신건강에 더 좋았던 것일까.


적극적인 ‘집콕’ 시기를 지나 구청 부근으로며 시내 부근으로며 볼일을 보러 다닐 때에, 월 정기권을 끊지 않아서 발생할 교통비를 절약하기 위해 오랜만에 걸어 다니면서 서울에서 데이트하던 시절을 떠올렸다. 연남동에서 경의선 철길을 따라 걷고 걷고 또 걸어 공덕동에까지 다다르던 때, 망원유수지와 양화대교 북단을 오가던 때, 사직단에서 세종로를 가로질러 시청 앞 광장까지 가던 때. 그래서 그 장소들을 우리의 장소로 새길 수 있었던 때. 

일 년 반을 살면서 버스를 타고 수백 번을 오간 길을 내 발로 밟아 나가니, 그래서 느낌이 또 새로웠을 것이다. 그럴 때마다 밟고, 딛고, 조사한다는 의미를 가진 ‘밟을 답(踏)’자가 떠올랐다. 경로를 내 발로 익힌다는 것은 그 경로의 끝에 있는 내 집에 맥락을 만들어주는 것만 같았다. 내 집을 그냥 내 집이 아닌, ‘뒤셀도르프에 위치한 내 집’으로 만드는 것. 구글맵상 중앙역으로부터 20분 거리에 있다고 계측하는 것이 아니라, 내 발로 걸으며 어떤 플라츠에서 어떤 방향으로 가서 어떤 슈트라쎄를 지나 어떤 지구 너머에야 다다른다는 그 정경을 체득하는 것이니까. 월 정기권과 버스 역시 문명이어서 그 문명을 절약할 때가 오지 않았다면 이를 알 수 있었을까. 한창 봄이 낮을 밝히던 때에는 나가지 않아도 되는 생활에 심취해 있어서 즐기지 못했지만, 녹음이 깊어진 때에야 알게 되었어도 나쁠 것 없었다. 코로나가 내게 보여준 것은 많았고, 그중 하나는 내가 이국의 생활에 발맞추지 못했던 나 자신과 화해할 수 있는 여유였다. 이런 깨달음은 한두 달 늦어도 늦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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