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을 인스타로 만날 만큼 이 구역의 파 to the 워 인스타그래머였던 나는 독일에 오고서 킨포크와 스칸디나비안을 적절히 버무린 듯한 독일 힙 감성이나 구주의 이국 정서 가득한 풍경을 담은 사진들을 올리리라 스스로 기대했던 것과는 전혀 달리, 한국에 있을 때보다 훨씬 뜸하게 사진을 올리게 되었다. 나의 일상은 자랑할 것 없는 것들뿐이었고 과시할 마음이 안 난다는 것은 그 반작용을 일으킬 억하심정 따위가 없다는 것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다른 사람들의 인스타그램 활동 경향은 또 다르겠지만 적어도 나는 그렇다는 이야기다. 그렇게 뜸하게 사진을 올리면 올릴수록 언젠가 올리기로 마음먹은 사진을 날 잡아 보정하고는 그에 대해 공들이며 작성한 주석을 달아 올리게 되었으니, 자연스럽게 점점 더 뜸하게 무언가를 올리게 되었다. 올린 사진들이 모두 최소 며칠은 묵은 것들임은 당연하고. (그래도 달에 두어 번은 올리는 ㄴr,,,,,,,) 그러던 어느날 내가 별 마음에 들지도 않는 사진을 대충 급히 보정해 올린 날이 있었다. 집앞 마트 캐셔 직원이 말걸고 웃어준 날.
내가 사는 동네는 뒤셀도르프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일식당 중식당 한식당을 비롯하여 아시안계 식료품점과 카페, 잡화점 등등이 빼곡히 자리한 시내와 현격히 다르게도 동양인을 찾아보기 힘든 동네다. 나는 우리 동네를 삼송동쯤으로 표현하는데 상대적으로 최근에 조성된 듯한(실제로는 어떤지 모름) 주택단지들이 가까이에 있고 이 동네 산다고 하면 한인들이 좋은 동네 사신다고 하는데 정작 우리 집은 왠지 모르게 휑한 동네에 있어서 밤이면 인적이 한껏 드물어지는 느낌이기 때문이다. 한인 가족들이 상대적으로 많이 사는 동네도 아니고 유학생들이 선호할 법한 WG(Wohngemeinschaft, 각자 방을 쓰고 부대시설을 공유하는 하우스쉐어로서 독일 젊은 층들 사이에서 굉장히 흔한 주거 형태다)의 제일조건인 접근성도 좋지 않은 동네도인지라 우리 앞집 남자들을 빼고는 동양인을 동네서 본 것이 여지껏 한손에 꼽을 정도다. 내가 읍내로 표현하는 버스 네 정거장 거리 구청 근방 번화가쯤에 가면 정말로 동양인이 나 하나여서 백발 성성한 노인분들의 저건 뭔가 하는 듯한 시선을 느낄 수 있다. 이렇게 구구절절하게 내가 얼마나 희귀한 동양인인지를 쓴 것은 와중에 내가 매일같이 수퍼마켓에 출석체크하는 성실한 소비자로서 NPC와도 같은 존재감을 발휘했었을 것임을 말하고 싶어서이다. 어학원을 다니던 시절 나는 1시까지의 오전 수업을 들었고 남편은 6시까지의 오후반이었기에 장 보고 저녁 식사 준비를 하는 것은 나의 몫이 되었는데, 덕분에 상품 구경 자체를 좋아하는 나는 매일 하원하고서 동네에 와 수퍼마트서 장보는 최소 30분간을 일과에 포함하게 되었다. 사야 할 것이 달걀 한 줄이어도, 쿠키를 들었다 놨다 요거트를 들었다 놨다 100번을 한 끝에 세일하는 돼지고기 한 팩 정도나 장바구니에 추가할지라도 나는 수퍼를 오랫동안 맴돌았다. 집 앞 3분 거리(이 중 1분은 4층 지붕집서 내려가는 엘레베이터에서 소요된다)의 이 수퍼마켓 리들(Lidl)은 PB상품 위주로 상품 구색을 갖춘 만큼 낮은 가격대를 자랑하는지라 나 같은 근거리 거주자말고도 광범위한 지역에서 차 끌고 방문하는 방대한 고객층이 있기야 하겠지만, 어쨌든 동양인은 손에 꼽을 터였다. 그 와중에 일과에서 세 번째로 많은 시간을 보내는 리들이 내게는 각별한 공간인데 남다른 골상을 자랑하는 내가 리들에게는 미소 하나 얻지 못하는 존재라는 것은 그 겨울의 우울에 한 숟가락 더 보태는 애수로 작용하였다. 그로부터 반년도 더 지난 지금까지도 직원들이 뭔가 친절한 말을 보탠 일은 없다시피 하지만, 독일에 온 지 얼마 안 되어 여기서도 저기서도 언성 조심 시선 조심 표정 조심하던 나의 자기연민이 그때는 아무래도 심했었었더랬다. 아무튼 그날, 브리타 정수기를 장만하기 전의 어느 겨울날, 나는 신발에 발 욱여넣기를 너무나도 귀찮아하는 집사람 대신에 물을 사러 리들에 갔었다. 1.5리터짜리 페트병 여섯 개를 묶어서 파는 물을 살 때마다 다른 사람들은 제 카트에 그대로 둔 채 잘만 계산하는데 도대체 뭐라고 말을 만들어내야 바코드를 안 찍고도 계산서에 이 내역이 찍히게 할 것일까 고민하면서 묵묵히 도합 9키로의 물을 계산대에 올리던 시절이었다. 그날도 나는 6개들이 생수를 계산대에 올렸던 것인데, 내 앞 고객이 카드 결제하는 것을 기다리며 다음 계산할 거리를 살펴보던 처음 보는 캐셔가 직접 안 올리고 번호만 말해도 된다고 웃으면서 이야기해준 것이다. 8년 전, 관광객으로서 겪었던 영업용 친절을 기억하며 간 모노프리(Monoprix)에서 직원들의 무기질적인 응대에 현격한 온도차를 느꼈던 파리 살이 시절의 장보기까지 합치면 유럽 장보기 도합 7개월 경력만에 처음으로 현지인 직원이 내게 긍정적인 비언어적 메시지를 보내주신 것이었다! 지금까지 그녀의 얼굴이 어렴풋이 기억날 정도로 그날의 친절한 말 한마디는 '치명적'이었다. 아무래도 계산대에서 바코드 찍고 옮기는 것이 체력적으로 힘들어 꺼낸 말이었을 공산이 더 크며 다음에 그녀를 만날 때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수삼번 고민한 것이 무색하게도 그 이후로 그녀를 볼 수 없기도 하였지만, 어쨌든 그날 그 순간만큼은 너무나도 충족감이 차올랐었다. 그 충족감을 동네방네 자랑하고 싶어서 나는 카메라롤에 있는 최근 사진 아무거나 대충대충 보정해서 포스트를 작성했던 것이다.
현지인이 내게 무언가 친절을 선사하는 것은 다음 달이면 재독 만 12개월을 채우는 지금까지도 너무나도 큰 자극이다. '저 동양인'으로 지적받지 않기 위해 혹여라도 눈에 띌까 어디서나 늘 몸을 사리면서도 혹여 미진한 대우를 받으면 인종차별 당한 것은 아닌지 자동반사적으로 고민하게 될 정도로 피해의식에 절어 있으니까.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고서는 나를 동료로 받아들여준 독일인 젊은이들의 호의를 경험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그들이 아닌 사람들이 내비치는 호의에 대한 역치는 여전히 너무나도 낮다. 처음 가본 바틀샵의 주인 아저씨가 친절하게 대거리해주었을 때, 키오스크(편의점) 직원이 조롱조의 니하오 대신 너네 나라 말로 'Danke'가 뭐냐 묻고는 '감사합니다' 해주었을 때, 마트 계산대 줄에서 카트 한가득 물건을 담고 있는 선객이 먼저 가라고 비켜주었을 때, 우리 집 아랫층 병원의 직원들이 퇴근길에 마주친 내게 인사를 건넬 때... 아 그래, 여기에 온 게 아주 어처구니 없었던 일만은 아냐, 라며 안심할 수 있는 찰나들. 이런 순간들은 정말로 드문드문하지만 그럼에도 마음 지치는 일 없도록 타지 생활을 대하는 마음에 첫 단추를 잘 꿸 수 있었던 것은, 처음으로 내게 개인적인 관심을 건네준 독일어 선생님 덕분이었다.
학원에 다니기 시작하고서 나는 매일 아침 무거운 몸과 마음을 간신히 일으키느라 애를 먹었다. 첫째로 몸가짐을 검열하며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일이 스트레스였으며, 둘째로 그 무엇보다 학원에서 누구와도 소통하지 못하고 지내느라 교실에서조차 마음이 불편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학원에 가기가 싫었던 것이다. 한국에서 이래저래 수업을 몇 달간 들은 덕에 간신히 초보는 면한 A1.2반에 배정될 수 있었는데(물론 몇 달간 독일어만 열심히 공부하신 분들은 성취에 따라 A2도 B1도 가능하실 겁니다..), 각 레벨별로 한 개의 반만 있다 보니 진급 테스트 결과에 따라 급우들이 다함께 진급하는 학원 시스템상 지난달에 A1.1을 듣고 온 급우들이 절반 정도인 것이 첫째 이유였다. 그리고 내가 돈과 시간 그 무엇도 낭비하지 않기 위해 열심히 진급하는 이상 이 친구들과 앞으로도 계속 다같이 올라가리라는 예정된 비참이 두 번째 이유였다. 그 비참이 예정인 것은 모두의 독일어 실력이 과거형을 이제 갓 배우기 시작한 수준이며 끽해야 '3형식' 문장을 고심 끝에 빚어낼 정도에 불과했기 때문에 영어가 학생들 사이의 공용어로서 기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때 회화학원서 짱먹던 과거가 무색하게도 내가 지지리도 못하는 그 영어 말이다. 지난 달부터 수업을 들어온 영어 잘하는 친구들이 역시 지난 달부터 그들을 가르쳐온 선생님들과 함께 수업의 '인싸'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던 것으로, 이번에야 처음으로 합류했는데 영어도 못하는 나는 따돌리는 이도 없는데 스스로 왕따가 된 기분이었다. 나 같은 느낌을 받을 이가 나 말고도 너댓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매일 4시간씩 주5일 동안 진행되는 인텐시브 코스는 학생들에게 최대한의 '말할 기회'를 보장했다. 때문에 파트너와의 회화 연습을 할 수 있는 시간이 매일같이 있었는데, 이 시간이 내게 가장 큰 괴로움이었다. 시키는 것만 한다면 모르겠지만 과제가 끝나고도 수업이 재개될 때까지 사담을 나눠야 하는 그 시간이 상상만으로도 어색했고, 문법 최강 한국인 특성상 수업을 채 이해하지 못한 파트너의 실수를 교정해주자니 잰체하는 것 같고 넘어가자니 그러면 의미가 없는 것인 그 번민들이 너무나도 스트레스였다. 사실 사담을 시작하면 어찌저찌 대화가 이뤄졌고(너 여기 언제 왔어? 누구랑 살아? 집 어디야?) 한국인에게도 한물 간 겸양의 미덕은 여기에서는 더더욱 알 바가 아닌데도 말이다. 아무튼 이런 젼차로 왠지 모르는 왕따 정서에 물든 나는 매일의 파트너를 마치 랜덤으로 배정당하기를 바라듯이 수업이 시작하고서 교실에 들어가곤 했다. 선택의 여지 없이 남은 자리에 앉으면 수동적으로 파트너가 정해졌으니. 마음이 쪼그라든 시절에 선생님 S는 너무나도 부담스러운 존재였다. 내가 다닌 학원은 교사들이 각 반에 두 명씩 월화수/목금으로 나뉘어 배치되었는데, 네 번째 수업일부터 합류한 목금의 선생님 S는 이미 한 달을 함께한 학생들과 서로에 대한 배경지식을 활용한 농담을 건네는 식으로 분위기를 돋우어 나를 셀프 왕따의 수렁으로 더더욱 침잠하게 만들었었다. 다시금 말하지만 나와 같은 처지의 외따로 떨어진 급우들이 전체의 반이 됨에도 어쨌든 내 마음은 그랬다. 예전에 프랑스에서 어학연수를 할 때 유럽 대륙 출신 급우들에게만 친근하게 굴던 음성학 선생님이 떠오르기도 했다. 마침 머리 색이 같기까지... 그날 내내 S가 두 달차의 급우들과만 이야기한 것도 아닌데도 나는 급기야 마음속으로 학원을 옮기기까지 했었다. 뭔가 깐깐한 인상의 이 선생님은 새로운 학생들에게 관심도 없어 보이는 데다 이 불편한 분위기를 벗어날 방법은 유급말곤 없으니 학원을 옮기는 수밖에 없다며. 사실 S는 학생들 하나하나에게 개인적인 관심을 살뜰히 보이는 것뿐이었고 새로 온 학생들에 대해서는 아직 데이터베이스가 축적되지 않은 탓에 관심을 드러낼 방법이 없어서 그런 것이었는데, 그때의 내 피해의식이 이를 짐작할 리가 있었나. 그런 쭈구리 같은 마음으로 주말을 보내고 그다음 목요일에 나는 한번 더 S로 인해 엄청난 혼란에 빠지고야 말았다. 그날 입고 간 후드티에는 미국 애니메이션 시리즈 <위 베어 베어스>의 캐릭터 아이스베어 아플리케가 가슴팍과 소맷자락에 수놓여 있었는데, 그걸 보고 S가 "Das ist lustig."라고 말한 것이다. 그렇다, 그러니까 또 내 피해의식이 다한 것이다. 당시 나는 가장 뭉뚱그린 번역으로서 '재미있다'로 옮겨지는 이 극초급의 단어 'lustig'를 못 알아들어서 나보다 독일어를 오래 익혀온 남편에게 카톡으로 "선생님이 이거 보고는 루스피? 뭐래 ㅠ"라고 물어서야 남편이 짐작해준 주제에, 영독사전을 검색한 끝에 나타난 funny를 보고도 또 다른 번역어들의 부정적인 뉘앙스들과 연관시켜 굳이 굳이 선생님이 "이거 유치하네요"라고 말한 것은 아닌지 잠시간 파들거렸다. 오, 나의 이거야말로 유치한 심보. S는 그저 옷에 대해 언급하기를 좋아할 뿐이었어서 정말로 아이스베어를 귀엽게 여긴 것이었는데 말이다. 하지만 이 오해가 풀리기까지는 한참이 걸릴 일이었다. 내가 다른 어느 날 S의 관심을 살 루돌프 니트를 입고서야 새로운 반응 표본이 생겼으니 말이다.
이 글을 읽는 누구나 짐작할 법하게도, S에 대한 내 마음의 벽은 결국에는 허물어질 것이었다. 새로운 급우가 중도에 합류한 어느날이었다. 고등학교 갓 마치고 대학을 독일에서 가기 위해 왔다는 이 스페인 소년의 적응을 위해 문법 에이스인 내가 파트너로 점지되어 어색한 사담 타임을 이어가던 차였다. 다행히도 소년의 영어가 (나와 마찬가지로) 유창하지 않아서 우리는 짧은 독일어로 뉴비인 소년의 신변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과제만 끝나면 영어로 떠들기 바쁜 다른 애들과 달리 독일어로 뭔가 꼼지락댄 우리의 대화는 과제가 아님에도 S에게 꼼꼼히 도움을 받았다. 그 시간이 끝나고 쉬는시간이 지난 뒤 교실로 돌아온 S는 별다른 말 없이 "9,19 Euro"라고 판서했다. 그러고는 당시 수업 레벨에 가당찮게도 무진장 긴 단어 "Mindestlohn"을 덧붙였다. '최저임금'. 독일어 실력이 필요하지 않은 주방보조로서 스페인 음식점에서 일하고 있다는 소년의 눈을 마주치면서, 이 이하의 시급을 받고서는 절대로 일하면 안된다고 S는 힘주어 이야기하였다. 그 어조와 눈빛에는 단순히 독일 사회의 규칙을 안내해주는 이상의 '걱정'이랄 것이 담겨 있어서, 괜시리 그 옆자리의 내 마음이 조금 움직이고야 말았다. 그때까지도 왠지 모르게 학생들에게 선을 긋는다고 생각하고 있던 S에 대한 선입견이 허물어지기 시작한 순간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내가 S와 함께한 7개월 중 첫달을 채우던 날, 나는 S에게 긁어달라는 양 배를 까게 되었다. 그날은 전날 본 수료 시험 결과를 확인하는 날이어서 수업에 꼭 오지 않아도 되는 날이었으며(사실 선생님들은 수업에 오고 오지 않고는 늘 성인인 여러분의 자유라고 말해왔으니 덕분에 '수업에 오지 않아도 되는 날'이라는 말은 너무 어색하다) 게다가 마침 12월 중순이었던 그날은 크리스마스 방학 직전이기까지 했던 탓에 많은 학우들이 고향 또는 휴가지로 떠나 출석률이 굉장히 낮았다. 그래서 그날 가장 마지막까지 교실에 남았던 사람은 나와, 나와 같이 스스로 왕따였던 일본인 급우였다. 그러니까 (방학이 3주였으니 그들 기준으로) 짧은 연휴간 다녀올 만큼 고향이 가까워보이지도, 독일에 갓 왔을 텐데 여행을 즐기는 모양새도 잘 그려지지 않는 애들이었다. 그 급우는 석사를 위해 왔고 나는 서구인들에게 나이 가늠이 안 되는 동양인이니, 곧 걔든 나든 S의 눈에 혼자 살 법한 나이대의 여자아이들이었다. 그래서 나온 질문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시험 결과와 틀린 문제들에 대한 피드백을 모두 마친 후 그해의 마지막 인사를 나누며 S는 우리에게 물었다.
"너희 누구와 같이 사니? 혹시 혼자?"
아니라고, 급우는 친구와, 나는 남편과 같이 산다고 답했다. 연말에 뭐할 거냐는 답에 수업시간에 가장 많이 지껄인 단어들 몇 가지로 '집에 머물러' '파티해' '술마셔' 따위의 조악한 답변을 늘어놓았다. 어찌됐든 S는 다행이라며, 그러고는 덧붙였다.
"이곳의 겨울은 너무 힘들어..나는 63년생인데도 매해 그래. 외국인들에게는 더 그럴 거야."
수업과 무관하게 건네져온 그 말은 초급 단계의 독일어 지식으로 짜인 성근 거름망에 몇몇 단어들만 걸러져 귀에 남았지만, 그래도 꼬박 한 세대를 건너뛰는 나이차의 판이한 골상을 가진 외국인들에 대해 어떠한 걱정을 담은 말이었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내가 학원에 매달 기십만 원어치의 수업료를 납부한 덕에 생성된 관계와 그에서 파생된 마음씀이라고 애써 과히 감동받지 않으려 해도, 어쨌든 자신의 눈에 보이지 않는 내 생활을 걱정해주는 사람이 이 도시 어디엔가 있다는 사실은 퍽이나 위안이 되었다. 같은 국적을 가져서도, 오래 알았어서도 아니고, 그저 어떤 식으로든 알게 된 '사람'이어서. 시간이 흘러 나는 셀프 왕따의 길에서 벗어나 선생님들과의 교분을 과시하는 얄미운 '인싸'가 되었지만, 내 어학원 생활의 변화와 별개로 그 시절 불민한 독어 실력으로 꿰어맞춘 S의 말들은 느낌으로서 여즉 마음에 남아 있다. 엄마가 처음으로 나의 사는 모냥새를 보러 왔을 때 엄마를 보내고 수업에 복귀한 내가 눈물을 그렁거릴 때에도, 내가 말하기 과제로서 더듬대는 한국 이야기가 북한도 삼성도 아닌 이야기라 흥미롭다면서도, 내가 비자 갱신을 위해 신새벽부터 줄을 서느라 수업에 늦었을 때에도, 앞으로 뭘 해먹고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고 너스레떨 때에도 S는 어떤 식으로든 걱정해주었고 그래서 공감하거나 위로하거나 화내주었다. 그것은 언어의 장벽 때문에 정교하거나 충만하거나 깊이있는 것들은 못 되었지만, 적어도 그 마음씀 자체가 내가 '어떤 동양인'이어서가 아니라 '수업을 듣는 Eden'이기 때문에 발현된 것임은 늘 고마운 것이었다. 밋밋한 골상, 창백한 피부, 검은 머리칼과 눈동자가 아니라, 어떤 억양으로 말하는지 글쓰기 과제를 어떻게 수행하는지 옷에 어떤 취향이 있는지 무엇보다 여기에 왜 오고 어떻게 생활하고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알고 있어서, 그러니까 어떤 NPC가 아니라 이성을 갖고 사고하는 한 인간 존재임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니까 내가 여기서 친절과 호의를 경험했을 때 느끼는 충족감은, 그 상대만큼은 외관상 판이한 나를 인간으로 봐주고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차오른 것이다.
내가 S에 대해 이야기했기 때문에 다른 선생님이 별로였다는 것은 아니다. 다른 선생님, K는 7개월의 수업들을 마치고 마지막 수업 시간에 눈물 글썽거려주어 나만 주책이지 않을 수 있었으며, 학원이 끝날 무렵 얻게 된 일자리에서도 지나가는 말로 한 일정을 기억하고는 안부를 물어주는 동료나 문자에마다 '우리 이든~'이라고 꼬박꼬박 적어주는 동료들을 만났다. 독일 국적자들만 그러하랴, 엄마를 보내고 한참 우는 나를 안아준 친구도, 달라진 생활에 자주는 못 봐도 '주말 어떻게 보냈어?'라고 물어봐주는 친구도 있다. 물론 여기서 말한 정도가 내 비한국인 교분의 전부라 해도 무색하지만, 그래도 니하오나 무례한 질문들의 공격에 마음 바스라질 때 이 도시의 다른 누군가들은 나를 인간으로 생각한다는 기억은 큰 완충재가 된다. 무엇보다 '이곳 사람'들의 호의는 내가 독일어를 연습하는 데에도 도움이 되었다. 내가 엉망진창 말할지라도 상대방이 이해하려 노력해줄 거라는 믿음은 내가 수업시간에건 친구들에게건 한마디라도 더 꺼낼 수 있게 해주었다. 나부터도 내가 꺼내는 말이 바스라진 것을 알겠는데 상대방도 '뭐라는 거야'라며 짜증낼 공산이 크다치면 아무래도 말하지 않는 쪽을 택하게 될 테니까....
날 걱정해준 만큼 귀기울여준 그녀의 호의에 경애를 보내며, 독작이 생각만으로도 힘들어서 한달 넘게 보내지 않고 있는 S의 이메일에 대한 답장을 이제는 써야겠다.(...)
크리스마스 방학 직전 진급테스트날 학원에서 나눠준 초콜릿.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S의 호의를 이 초콜릿 정도로 생각했었다. 등록금을 낸 데 대한 부차적인 것.
문제의 '위 베어 베어스' 후드티..
(제목 영역 배경의 사진은 문제의 학원 첫날 오그라드는 마음으로 자조하며 찍은 학원 화장실 밖 간만에 화창한 풍경이다. 11월인데, 독일 지금 우기 시작해서 맨날 비온다. 그니까 간만의 화창한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