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까운 관계의 풀 수 없는 갈등들
중년의 나이까지 섹스에 대한 환상을 가진 적이 있다. 한 번도 궁금한 적 없던 질문이 나이 들어 완경이 다가오자 스멀스멀 올라왔다. "이 나이까지 아직 덜 자랐나 봐?" 분명 환상적인 오르가슴이 있다고 들었는데 나만 경험하지 못하고 있다. 실재하는데 못 느끼고 있다면 한 번뿐인 인생 잘못 살고 있는 게 분명하다.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꿈의 목록 버켓리스트에 넣어야 할까 고민했다. 영화 속 주인공들의 섹스는 환상적이고 충분해 보이던데 어찌 된 일인지 현실의 섹스는 별루이니 이유를 알고 싶어졌다. 과연 오르가슴이 있긴 한 건지 정말 궁금해서 지인에게 물었다. 댁(너는)은 영화 속 장면 같은 환상적인 오르가슴을 느끼고 있는지 물었다. 난데없는 질문에 지인은 폭소를 터뜨리며 "어머! 아주머니 어쩜 이렇게 깜찍하세요? 아직도 그런 게 궁금하세요? 알고 싶으면 얼른 가서 어른이 돼서 오세요."
깔깔거리며 오르가슴은 무슨 오르가슴이냐고 웃으며 잠자리하는 상대가 오르가슴을 느끼게 해 주는 게 어딨냐 오르가슴은 자신이 느끼는 '자기 느낌'이라고 말한다. "자신이 느끼는 '자기 느낌'이라니? 그런 게 황당해했더니 오르가슴을 느끼려고 자신이 자기 몸을 통해 적극적인 노력을 해야 한다고 알려준다. 처음 듣는 이야기이다. '우 씨, 그런 노력을 해야 얻을 수 있는 오르가슴이라면 관심이 없어'. 오르가슴의 실체를 지인에게 들은 이후부터는 거짓말처럼 섹스에 대한 환상과 집착이 사라졌다.
라캉의 유명한 말 중에 "성관계는 없다"라는 말이 있다. 흔히 성관계는 남성과 여성이 만나 성관계를 맺는다고 생각하지만, 라캉에 의하면 남, 녀가 아니라 실제로는 '나는 나 자신'과, '상대는 그 자신'과 관계를 맺는 것일지 모른다는 말이다. 실제로 남녀가 서로 사랑에 빠져 강렬하게 서로를 열망한다면 그럴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녀를 통해 당신이 어릴 적 어머니의 사랑을 떠올리기 때문일 수 있다. 어릴 적 경제적 안정이 필요한 당신이 마침 그 결핍을 메우는 존재일 수 있다. 나는 나대로 나 자신의 이유가 있고 상대는 상대대로 그 자신의 이유가 있다. 그 이유로 인해 서로 사랑하고 관계를 맺는다. 상대를 사랑하고 강렬하게 욕망하는 이유는 '내 안'에 있는 셈이다.
남편은 결혼 이후 사기결혼을 했다고 농담한 적이 있다. 대학시절 내가 꽤 능력 있어 보였다. 나중에 자신을 먹여 살릴 수 있겠구나 싶어 사귀기 시작했는데 결혼하고 보니 뽑기 게임에서 꽝을 뽑았다는 주장이다. 피차 마찬가지다. 여자 말 잘 듣고 성실하고 헌신적일 거라 생각해서 결혼했는데 겉으로 드러나지 않던 강한 자존심 때문에 자주 투닥거리며 산다. 따뜻함과 부드러운 사랑에 대한 결핍 때문에 함께 시간을 보내며 결핍을 채워줄 사람이라고 결혼했는데 혼자 있길 즐기는 사람이었다. 무엇이 되었든 욕망의 이유는 각자 '내 안'에 있다. 라캉에 의하면 가까운 사이란 내 욕망과 관계를 맺는 사이이며, 그곳에 우연히 당신이 있었을 뿐이다. 그러니 '성관계'란 없다. 모든 관계는 각자가 겉으로는 상대와 관계를 맺고 있지만 자신과 맺는 관계일 뿐이다. 정지우 작가는 자신의 페이스북 글을 통해 이렇게 쓰고 있다. '신체적 의미의 성관계도 마찬가지로 각자가 서로를 놓고 하는 마스터베이션과 비슷하다. 나는 내 안의 결핍을 채워줄 것만 같은 환상을 당신이라 믿고, 바로 그 환상과 관계를 맺는다. 만약 당신이 그 환상과 같은 존재가 아니라면 관계는 쉽게 깨질 것이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갈등이 더 많은 이유는 각자 자신의 결핍을 채워줄 거라는 환상 때문에 생긴다. 그러니까 상대는 자신의 결핍을 채우는 '자기 관계' 안에 살고 있다. 자신의 결핍이 채워지면 욕망이 충족돼 행복하다. 채워지지 않으면 결핍감에 사랑이 식고 관계가 삐걱거린다. 우리가 사랑하는 건 상대가 아니라 자신의 욕망이라고 라캉은 주장한다. 가까운 사이에 자주 갈등이 있다면 자신의 결핍을 채워줄 거라 믿었던 환상이 자주 깨지기 때문이다. 상대가 문제라기보다 '내 안'에 관계 맺고 있는 '자기 관계'를 살펴야 한다. 현실적으로 상대가 나의 결핍된 욕망을 채워줄 거라는 환상에서 먼저 깨어나야 한다.
진정한 사랑은 '자기 관계'안에서 벗어나 상대를 만나야 한다. 자신의 욕망을 충족하기 위한 '자기 관계'를 넘어서 ‘상대’에게 도달할 수 있어야 한다. 정지우 작가는 자신의 페이스북에서 '자기 관계'를 넘어선 관계란, 일종의 끊임없는 배반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아이를 사랑하는 과정과 비슷하다. 아이는 성장하면서 부모의 기대대로 자라지 않는다. 상처와 좌절을 안겨주기도 한다. 아이는 성장하면서 날마다 새로워진다. 부모가 ‘자기 관계’ 안에서 아이를 키운다면 반항할 것이다. 아이는 자기 욕망대로 살아야하는데 부모 욕망을 충족시키려 한다면 결사적으로 배반할 것이다. 아이를 사랑한다면 부모의 기대와 다르다 하더라도 자기 관계를 넘어서, 아이를 받아들이고 있는 그대로 보려는 연습을 통해 진정한 관계가 맺어진다.
상대를 ‘내 안'의 욕망을 채우는 구조 안에 가둔 채로 사랑한다면, 사실 그를 사랑하는 게 아니다. 자신의 욕망을 사랑하는 것이다. ‘진짜 당신'을 만나기 위해서는 나의 욕망, 결핍, 이상의 구조를 넘어서야 한다. 근데 말처럼 이 욕망의 구조를 넘기 쉽지 않다. ‘자기 관계’를 넘어선다는 건 끊임없는 좌절, 실망, 갈등의 연속이다. 타인을 통해서 자신의 욕망을 채울수 없다고 명백히 깨달을 때 ‘내 안’의 욕망을 채우는 구조에서 벗어날 수 있다. 상대와의 관계가 결국 자신의 욕망을 충족하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이었다는 걸 알아차리고 인정해야만 ‘자기 관계’를 넘을수 있다. 결국 가까운 사이에 풀지 못하는 갈등이 있다면 누가 누구 탓을 하고 변하라고 다그칠 수 있겠는가?